생활이라는 생각 창비시선 392
이현승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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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이 주는 기억은 잔혹하다. 잊고 있었다고 믿었던 기억까지 소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신이 아닌 몸의 기억인지도 모른다. 모든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 나를 증명한다고 해야 할까. 근처에 사시는 고모와 고모부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차는 폐차를 할 정도였는데 큰 부상은 없으셔서 긴 시간 병원 신세를 지녔다. 병원을 떠올리면 사흘에 한 번 바뀌던 주사 바늘과 함께, 끔찍했던 중환자실의 풍경이 떠오른다. 반복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불현듯 찾아오는 공포는 막강한 힘을 지녔다. 설명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통증의 모양과 형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삶을 지배하는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잠으로의 도피뿐이다. 환상통과는 다른 진짜 통증, 이겼다고 여겼지만 이기지 못했나 보다. 병실 번호와 불친절하면서도 자신의 할 일을 다했던 간호사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 생활이다. 멈춰지고 고여있는 생각이 아니라 나아가는 생활, 살아지고 살아내야 하는 생활이다. 

 

 

 생활이라는 생각

 

 

 꿈이 현실이 되려면 상상은 얼마나 아파야 하는가.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정말은 얼마나 깊어야 하는가.

 

 참으로 이기지 못할 것은 생활이라는 생각이다.

 그럭저럭 살아지고 그럭저럭 살아가면서

 우리는 도피 중이고, 유배 중이고, 망명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뭘 해야 한다면

 

 이런 질문,

 한날한시에 한 친구가 결혼을 하고

 다른 친구의 혈육이 돌아가셨다면,

 나는 슬픔의 손을 먼저 잡고 나중

 사과의 말로 축하를 전하는 입이 될 것이다.

 

 회복실의 얇은 잠 사이로 들치는 통증처럼

 그렇게 잠깐 현실이 보이고

 거기서 기도까지 가려면 또

 얼마나 깊이 절망해야 하는가.

 

 고독이 수면유도제밖에 안되는 이 삶에서

 정말 필요한 건 잠이겠지만

 술도 안 마셨는데 해장국이 필요한 아침처럼 다들

 그래서 버스에서 전철에서 방에서 의자에서 자고 있지만

 참으로 모자란 것은 생활이다.  (36~37쪽)

 

 

 일상으로의 복귀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주어진 하루를 온전히 소비하는 일로 시작된다. 잠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제대로 된 생활의소비가 필요하다. 겨울을 잊고 살았던 우리에게 잔인할 정도로 가혹한 추위를 몰고 오는 날들, 아이스크림과 냉면으로 더위를 달래는 여름의 시간,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하다. 쏟아지는 햇살을 부여잡고 울고 싶기도 하다. 겨울이라서 그런가 보다. 한강을 얼게 한 추위 때문에 그런가 보다. 친한 동생이 어느 시절 들려준 이런 말이 생각난다. 태어난 게 죄라는... 우리는 살면서 그 죄 값을 치루는 게 아닐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써 내려가는 글과 쏟아내는 말들에 대한 값도 지불해야 한다. 삶이라서 그렇다. 생활이라서 그렇다.

 

 

 인정도 사정도 없이

 

 

 누가 나를 좀 때려주었으면 좋겠다.

 누가 여기서 좀 꺼내주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재난이 이웃사촌 회갑처럼 잦은 조국이지만

 나 치매 걸리면 조용히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배우자처럼

 죄송의 말이 재앙보다 더 잔인하게 들린다.

 

 끔찍한 악몽을 꾸는 사람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빨래처럼 쥐가 나고 몸이 꼬이듯

 맞은 뺨을 어루만지면서 우리가 깨어날 때

 결국 불안을 일깨우는 것도 안도이다.

 

 왜 나빴던 기억은 영원한 걸까.

 우리는 언제라도 극복 가능하지만

 거기서 영원히 나갈 수는 없다.

 터널과 터널 사이 구간의 운전자처럼

 백일에 눈이 아프다.

 

 겉은 젖고 속은 타들어가는 이곳에서

 지금 살아 있다는 것보다 끔찍한 재앙은 없다.

 차라리 누가 나를 좀 때려주었으면 좋겠다.

 누가 용서라는 말을 없애버리면 좋겠다. (84~85쪽)

 

 

  기억해야 할 기억들이 있다. 망각을 이겨내야 할 기억들이 있다. 생활을 생활로 만들어내는 힘이 되는 기억들이 있다. 그것들이 삶을 지탱한다. 그것들이 삶을 살게 만든다. 울고 싶은 날도, 화를 내고 싶은 날도 생활의 연속이다. 내게 부족한 건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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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소파
조영주 지음 / 해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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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파노라마 사진이야. 파노라마 사진은 360도의 시각을 한 번에 보여줘. 그 사진을 보면 자신이라는 인간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지.’ (232쪽)

 

 사진은 시간을 저장한다. 사진을 기억을 저장한다. 사진은 미래가 아닌 과거를 말한다. 순간을 저장하게 위해 셔터를 누르고 가장 최고의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셔터를 누른다. 때문에 누군가는 일기가 아닌 사진으로 생을 기록하기도 한다. 때로 사진은 인간의 눈이 놓친 무언가를 찾아내는 눈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매혹적인 사진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조영주의 『붉은 소파』에서 사진은 과연 무엇일까?

 

 소설은 붉은 소파에서 잉태되었다. 붉은 소파에 앉는 누군가를 찾기 위해 셔터를 누르는 한 남자 석주. 그는 유명한 사진작가로 15년 전 딸 은혜를 살해한 범인을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 직접 찾기로 결심한다. 딸은 붉은 소파에서 살해되었기에 범인이라면 붉은 소파를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석주도 범인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에게 사진은 예술적 의미가 아닌 범인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런 석주가 제자이자 사위인 재혁은 안타까울 뿐이다. 어떻게든 스승을 돕고 싶은 재혁은 살인 사간의 현장 사진을 부탁한다. 그곳에서 석주는 죽은 은혜를 닮은 형사 나영을 만나고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나영과 석주는 살인 사건의 단서인 카메라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 진범을 찾아낸다. 그 뒤로 나영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석주를 찾아 도움을 요청한다. 몇 번 나영을 도와주다 석주는 과거 은혜가 당한 303 연쇄살인사건에 나영도 피해자라는 사실과 사위 재혁은 옛 연인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사건의 중심에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만다. 나영과 석주는 점점 사건의 진실에 다가서고 둘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나영은 죽은 은혜를 향한 석주의 사랑을 자신의 아버지의 그것과 비교한다. 딸의 상처를 단 한 번도 만져주지 않은 아버지. 오직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정치인. 그는 언제나 미래를 살고 있었고 석주는 과거를 살고 있었다. 모두 현재를 외면하고 살고 있다. 그와 석주의 만남은 운명이었을까. 소설의 처음과 끝은 하나였던 것처럼 이야기는 모두 붉은 소파로 통한다. 붉은 소파를 알아보는 사람들, 그 안에 담긴 상처.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과 사진에 담긴 사연이 퍼즐처럼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독특한 소설이다. 붉은 소파에 대한 궁금증과 과연 범인이 누구일까, 독자를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범인을 잡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사진. 사진 본연의 기능을 통해 위안과 치유를 얻는 이야기. 작가가 무척 공을 들였다는 걸 곳곳에서 알 수 있다. 누구나 쉽게 카메라로 찍지만 대부분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카메라와 사진에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할까. 한 장의 사진은 미래가 아닌 과거를 담았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그 사진이 때로 현재를 살게 하는 강력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음을 잊고 있었다. 추억을 저장하고 간직하여 삶을 보여주는 사진의 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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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6-06-2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너무 섹시해요~

자목련 2016-06-29 17:54   좋아요 0 | URL
매력적인 표지에 반하고 말았지요, ㅎ
 
희지의 세계 민음의 시 214
황인찬 지음 / 민음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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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시가 좋은 시일까. 쉽게 읽히고 공감할 수 있는 시, 이해할 수 없어 다시 읽게 만드는 시. 좋고 나쁨을 구분 짓는 건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시에 끌리는가. 이렇게 물어야 했다. 황인찬의 시집 『희지의 세계』를 읽고 난 느낌이다. 세대가 다르니 공감할 부분을 찾지 못했고 그 점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와 관심을 갖게 만든다.

 

 

 희지의 세계

 

 

 저녁에는 양들을 이끌고 돌아가야 한다

 

 희지는 목양견 미주를 부르고

 목양견 미주는 양들을 이끌고 목장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생활도 오래되었다

 

 무사히 양들이 돌아온 것을 보면

 희지는 만족스럽다

 

 기도를 올리고

 짧게 사랑을 나눈 뒤

 

 희지는 저녁을 먹는다

 

 초원의 고요가 어둠을 두드릴 때마다

 양들은 아무 일 없어도 메메메 운다

 

 풍경이 흔들리는 밤이 올 때

 목양견 미주는 희지의 하얀 배 위에 머리를 누인다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익힌 콩과 말린 고기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것이 희지의 세계다

 

 희지는 혼자 산다  (18~19쪽)

 

 

  희지는 특별한 대상이 아닐까 생각하다가 결국엔 저마다의 희지가 아닐까 결론을 맺었다. 낯선 듯하면서도 낯익은 풍경을 상상하게 만든다. 외롭고 고요하면서도 풍요로운 희지의 공간이 문득 부러워지기도 했다. 그곳은 황인찬이 만든 공간이며 황인찬만이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더욱 그러했다. 황인찬의 시는 일상의 한 장면을 포착해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느낌을 준다. 나는 이런 시가 특히 좋았다.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것 같은 저녁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익숙한 풍경을 유일무이한 풍경으로 만드는 능력. 저녁을 말하는 그는 세상의 모든 저녁을 알고 있는 듯, 저녁이 품어낼 수 있는 말들을 들려준다.

 

 

 

 저녁의 게임

 

 

 코트에 저녁이 내리고 있었다

 

 저녁이 내린 코트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서지는 것은

코트가 아니라 저녁이었고 난반사하는 조명이 저녁을 은폐

하였다

 

 우산을 쓰고 너와 걸었다

 빗속의 코트를 가로지르는 학생들을 가로지르며

 

 코트는 눈과 비에 훼손되지 않는 훌륭한 것이지만 흙탕

물이 이리저리 자꾸만 튀는 것이고, 너는 이미 진흙투성이

인 것이 되어서 걷고 있었다

 

 이런 곳으로 데려와 미안해

 미안한 얼굴로 네가 말해서 나이야 기쁜걸 내가 답했다

 

 우산을 쓰고 너와 걸었다 빗속의 코트를 가로지르며

 진흙투성이의 어떤 인생을 생각하며

 

 이 저녁에 부서지는 저녁을 보고 있었다

 

 꺼지기 직전의 연약한 빛들이 코트 위에 고인 채 명멸하

는 것이 보였다

 저 멀리 빗속을 달리는 학생들이 보였다

 

 저녁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48~49쪽)

 

 

  은유

 

 

 저녁과 겨울이 서로를 만진다 초등학교 구령대 아래에서

누가 볼까 두려워하며

 

 겨울이 저녁을 움켜쥐고, 저녁이 약간 떨고, 그 장면은

 기억에 있다

 

 어두운 운동장이 보인다 기울어진 시소와 빈 그네도 보

인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인다

 

 누가 우릴 본 것 같아, 저녁이 말했고

 겨울이 저녁을 깨물었다 그러자 저녁이 검게 물들고

 

 그 장면은 기억과 다르다

 장면이 모이면 저녁이 되고, 기억이 모이면 겨울이 되는,

 

 그런 세계에서

 

 너무 어린 나는 늙어간다

 늙어 버릴 때까지 늙는다

 

 이 학교는 나의 모교이며, 나는 여기서 따돌려지고 내쫓

겼다 말하고 보니 정말로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저녁의 기억

 겨울이 저녁을 핥았는데 그것은 기억 속에서의 일이었다

 

 저 멀리서 손전등의 불빛이 다가올 때는

 구원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누구의 기억인가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78~79쪽)

 

 

 많은 이들이 이 시집을 언급할 때는 과장된 감탄이라고 단정 지었다. 막상 읽어보니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다. 시인에게 일상은 모두 시가 될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확인한다. 황인찬의 시는 한 번 읽었을 때가 아니라 두 번 읽었을 때 더욱 와 닿는 시였다. 젊은 황인찬이 아닌 시인 황인찬이 만들어낼 시의 세계가 궁금하다. 그의 시를 계속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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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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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의 방식과 목적은 다양하다. 궁극적으로는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함이다. 소중한 것을 간직하기 위한 기록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누군가는 사진으로, 누군가는 그림으로, 누군가는 글로 기록한다. 남겨진 기록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고 확인하며 상상한다. 그것은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솔직한 삶의 기록일 때 가능하다. 때로 개인의 기록이 역사의 기록이 되기도 하는데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나는 그렇게 분류한다. 소설가 위화가 아니라 격동하는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를 지켜본 개인 위화가 들려주는 중국 이야기 정도라고 하면 맞을까. 어린 소년부터 청년을 지나 치과의사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가식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중국.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나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무엇이 현재의 중국을 만들었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인민, 영수(領水),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山寨), 홀유(忽悠), 10 개의 키워드를 통해 위화가 살아온 시대를 들려준다. 도저히 경험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과거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즐거움과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위화를 통해 중국의 정치를 마주하면서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는 점(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고 비판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다니), 현재로는 상상할 수 없는 체제(국가에서 직업을 지정해주었다는 사실)로 사람들을 통제했다는 점에 소름이 돋으면서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중국의 역사와 발전이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어느 순간 과연 이 글이 중국에 대한 이야기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민주화 운동 텐안문 사건를 소재로 한 「인민」은 자연스레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떠올린다.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의 열정, 그들이 바랐던 자유, 수많은 인민의 희생과 거대한 역사의 기둥으로 존재하는 인민의 모습을 말이다. 「영수」는 예상했듯 마오쩌둥에 대한 기억이다. 그를 추억하면서 마오쩌둥 이후 중국 정치를 향한 열망은 다시 그 시대를 언급하게 된다니 뭔가 아이러니하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속담이 생각난다. 책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기에 독자로써 「독서」와「글쓰기」에 대한 부분은 특히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친구들과 한 권의 소설을 필사하며 함께 읽었다는 부분은 과연 그게 가능한가 싶다가도 그 열정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로 결론을 맺었다. 글쓰기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대자보 쓰기부터 작가가 되기까지 수많은 원고를 투고한 이야기. 그 시작이 좋을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는 소망이 아니라 치과의사(단순 발치사)에서 벗어나 좀 더 편안한 직장생활로 이어지기를 바랐다는 단순한 이유라서 살짝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위화의 글쓰기 철학은 진솔한 여운으로 남는다.

 

 글쓰기는 경험과 같다. 혼자서 뭔가 경험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직접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글쓰기」, 137쪽)

 

 글쓰기가 사람들에게 두 갈래의 인생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도 있다. 하나는 현실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허구의 길이다. 이 두 가지 길은 건강과 질병의 관계와 같아서 하나가 강대해지면 다른 하나가 필연적으로 쇠약해진다. 내 현실에서의 삶의 길이 갈수록 평범해지는 것은 허구에서의 내 삶이 갈수록 풍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글쓰기」, 147쪽)

 

 위화의 말대로 자신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면 타인의 인생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써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말은 최고의 진리가 아닐까 싶다. 「루쉰」과「혁명」은 앞서 들려준 「인민」과「영수」에서 확장된 듯한 글이다. 그러니 반드시 차례대로 읽지 않다도 괜찮다. 마음에 끌리는 단어를 먼저 읽어도 끊어지지 않고 맥은 이어진다. 나머지 「차이」,「풀뿌리」,「산채」,「홀유」는 현재의 중국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중국 경제의 고속성장은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바꾸어버렸다. 우리는 멀리뛰기 경기라도 하듯 물질이 극단적으로 결핍된 시대에서 낭비가 넘치는 시대로, 정치 지상의 시대에서 금전 제일의 시대로, 본능이 억압된 시대에서 욕망이 넘쳐나는 시대로 건너뛰었다. 이 30년이란 세월이 몸을 한 번 웅크렸다가 도약하는 시간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차이」, 194쪽)

 

 우리는 현실과 역사의 거대한 차이 속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커다란 꿈의 차이 속에서 살고 있다. (「차이」, 216쪽)

 

 놀랍도록 빠른 성장의 이면, 갈수록 커지는 빈부 격차, 진짜와 똑같이 모방을 하는 능력으로 가짜가 주류가 된 세상,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중국 사회의 고발, 그 안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똑바로 보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고 위화는 말한다. 분명한 건 이 책은 위화 한 사람, 개인의 목소리로 전하는 기록이다. 하지만 그것은 곧 사회의 거울이자 자화상이 된다. 그가 쓴 것은 삶이기 때문이다. 위화 개인의 삶이자 현재를 살아가는 중국의 삶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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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문장 - 책 속의 한 문장이 여자의 삶을 일으켜 세운다
한귀은 지음 / 홍익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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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책과 하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소설이라면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의 일부가 내가 지나온 삶과 닮았다고 느껴질 때 소설이 아닌 다른 책의 경우는 반복해서 읽게 만드는 문장을 지녔을 때가 그러하다. 공감을 부르는 문장과 내용이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따져보지 않았지만 그런 경우 저자는 대체로 여자다. 독자층을 여자로 겨냥하고 쓴 글도 있지만 다른 글에서도 묘한 끌림이 있다. 한귀은이라는 작가도 그러하다. 작가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그녀의 글에는 부드러운 강함이 있다.

 

 『여자의 문장』은 제목이 암시하듯 문장이 주는 울림을 만날 수 있다. 여자에게 더 많은 답을 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문장은 한귀은이 읽고 선택한 문장에서 그녀의 문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나 같은 독자는 한귀은의 문장에서 힘과 위안을 받는다. 인문학을 가르치는 교수, 한 아들의 엄마,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 한귀은의 삶을 공감하는 것이다. 분명 타인의 삶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이야기는 문장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다 알고 있는 소설의 줄거리, 영화 속 주인공의 대사, 일정 부분 겹지는 감정을 나누는 시간을 통해 여전히 성장을 원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한귀은은 자신의 경험을 조금씩 내보이고 지인의 이야기를 통해 지난 삶을 어떻게 이겨왔는지 들려준다. 현재가 아닌 과거, 성숙한 사람이 아닌 불완전한 자아, 강요만 했던 아이와의 관계, 분노하지 않았기에 힘들었던 시절, 편안해진 일상까지. 행복한 삶을 원하지만 타인을 의식한 삶은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어떤 감정을 지나기 위해, 나를 견디기 위해 달렸다는 부분을 읽노라면 그녀와 함께 달리는 내가 보이기도 한다. 달리기의 다른 이름으로 채워졌던 시간들 말이다. 스스로에게 고통을 부여해야만 잊을 수 있었던 시간들.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안아주고 싶은 모습이다.

 

 ‘달리기나 걷기는 삶의 메타포이며, 내가 이겨야 할 것은 과거의 나 자신이다. 뛰기나 걷기는 온전히 자기 몸에 집중하게 해준다. 눈에 풍경이 들어오더라도 그 풍경은 자기 내면이 투과된 풍경이다. 바람 또한 내 몸과 부딪혀서 나의 체온이 된다. 내 몸에서 맺힌 땀은 쾌적한 공기와 만나 나의 체취가 된다.’ (66쪽)

 

 ‘모두들 자신만의 역사, 상흔을 안고 살아간다. 인생에 완전한 실패란 것은 없다. 단지 피득백을 받을 수 있는 경험이 있을 뿐이다. 실패에 내재한 의미를 찾으면 그것을 훌륭한 피드백이 된다. 자신의 아픈 역사와 상흔이 어느 시점에 결정화되는 것이다.’ (85쪽)

 

 그러나 한귀은의 말처럼 그렇게 달렸기에 피드백을 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진심을 전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자신의 몫이라 여기는 삶을 살아내려 혼자 고통을 짊어지고 이겨냈다면 이제는 조금은 비우고 조금은 내려놓음으로 채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아픔이 있는 이가 아픔을 볼 수 있고 상처가 있는 이가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고 실패한 이가 실패의 원인을 분석할 수 있으니까. 지나간 사랑, 서툰 이별에 대해서도 정리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된다. 그리하여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이를테면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젊음에 대한 열망, 늙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한귀은이 제시한 계획은 이렇다.

 

 ‘우리도 한때는 더 아름다웠다. 젊음의 아름다움을 가진 적이 있었다는 거다. 나이 들어 아름다운 사람은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간직해서가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잘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른 아름다움을 계발해야 한다.’ (170쪽)

 

 아름다움과의 이별과 다른 아름다움의 계발이라. 그것은 육체적인 의미만을 뜻하는 게 아닐 것이다. 아름다운 삶에 대한 의미는 저마다 다를 터. 현재 자신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간직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계발한다는 건 성장하는 게 아닐까. 늦은 나이에 새롭게 도전하는 아름다움, 관계에 있어 주도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환대하기, 나를 더 사랑하고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 것.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 건 더욱 중요하다. 그러므로 한귀은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만 한다.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나만의 여유를 찾기 위해, 나와 대화하기 위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것은 여전히 유요하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자기만의 삶, 충만한 자아를 갖기 위해서 필요하다. ‘방’이 아니라면 ‘틈’이라도 가져야 한다. 온전히 자신에게 올인할 수 있는 틈,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틈. 그 틈이 개성이 되고 자유와 자존감이 되고 품위가 된다.’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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