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지의 세계 민음의 시 214
황인찬 지음 / 민음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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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시가 좋은 시일까. 쉽게 읽히고 공감할 수 있는 시, 이해할 수 없어 다시 읽게 만드는 시. 좋고 나쁨을 구분 짓는 건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시에 끌리는가. 이렇게 물어야 했다. 황인찬의 시집 『희지의 세계』를 읽고 난 느낌이다. 세대가 다르니 공감할 부분을 찾지 못했고 그 점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와 관심을 갖게 만든다.

 

 

 희지의 세계

 

 

 저녁에는 양들을 이끌고 돌아가야 한다

 

 희지는 목양견 미주를 부르고

 목양견 미주는 양들을 이끌고 목장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생활도 오래되었다

 

 무사히 양들이 돌아온 것을 보면

 희지는 만족스럽다

 

 기도를 올리고

 짧게 사랑을 나눈 뒤

 

 희지는 저녁을 먹는다

 

 초원의 고요가 어둠을 두드릴 때마다

 양들은 아무 일 없어도 메메메 운다

 

 풍경이 흔들리는 밤이 올 때

 목양견 미주는 희지의 하얀 배 위에 머리를 누인다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익힌 콩과 말린 고기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것이 희지의 세계다

 

 희지는 혼자 산다  (18~19쪽)

 

 

  희지는 특별한 대상이 아닐까 생각하다가 결국엔 저마다의 희지가 아닐까 결론을 맺었다. 낯선 듯하면서도 낯익은 풍경을 상상하게 만든다. 외롭고 고요하면서도 풍요로운 희지의 공간이 문득 부러워지기도 했다. 그곳은 황인찬이 만든 공간이며 황인찬만이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더욱 그러했다. 황인찬의 시는 일상의 한 장면을 포착해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느낌을 준다. 나는 이런 시가 특히 좋았다.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것 같은 저녁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익숙한 풍경을 유일무이한 풍경으로 만드는 능력. 저녁을 말하는 그는 세상의 모든 저녁을 알고 있는 듯, 저녁이 품어낼 수 있는 말들을 들려준다.

 

 

 

 저녁의 게임

 

 

 코트에 저녁이 내리고 있었다

 

 저녁이 내린 코트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서지는 것은

코트가 아니라 저녁이었고 난반사하는 조명이 저녁을 은폐

하였다

 

 우산을 쓰고 너와 걸었다

 빗속의 코트를 가로지르는 학생들을 가로지르며

 

 코트는 눈과 비에 훼손되지 않는 훌륭한 것이지만 흙탕

물이 이리저리 자꾸만 튀는 것이고, 너는 이미 진흙투성이

인 것이 되어서 걷고 있었다

 

 이런 곳으로 데려와 미안해

 미안한 얼굴로 네가 말해서 나이야 기쁜걸 내가 답했다

 

 우산을 쓰고 너와 걸었다 빗속의 코트를 가로지르며

 진흙투성이의 어떤 인생을 생각하며

 

 이 저녁에 부서지는 저녁을 보고 있었다

 

 꺼지기 직전의 연약한 빛들이 코트 위에 고인 채 명멸하

는 것이 보였다

 저 멀리 빗속을 달리는 학생들이 보였다

 

 저녁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48~49쪽)

 

 

  은유

 

 

 저녁과 겨울이 서로를 만진다 초등학교 구령대 아래에서

누가 볼까 두려워하며

 

 겨울이 저녁을 움켜쥐고, 저녁이 약간 떨고, 그 장면은

 기억에 있다

 

 어두운 운동장이 보인다 기울어진 시소와 빈 그네도 보

인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인다

 

 누가 우릴 본 것 같아, 저녁이 말했고

 겨울이 저녁을 깨물었다 그러자 저녁이 검게 물들고

 

 그 장면은 기억과 다르다

 장면이 모이면 저녁이 되고, 기억이 모이면 겨울이 되는,

 

 그런 세계에서

 

 너무 어린 나는 늙어간다

 늙어 버릴 때까지 늙는다

 

 이 학교는 나의 모교이며, 나는 여기서 따돌려지고 내쫓

겼다 말하고 보니 정말로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저녁의 기억

 겨울이 저녁을 핥았는데 그것은 기억 속에서의 일이었다

 

 저 멀리서 손전등의 불빛이 다가올 때는

 구원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누구의 기억인가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78~79쪽)

 

 

 많은 이들이 이 시집을 언급할 때는 과장된 감탄이라고 단정 지었다. 막상 읽어보니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다. 시인에게 일상은 모두 시가 될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확인한다. 황인찬의 시는 한 번 읽었을 때가 아니라 두 번 읽었을 때 더욱 와 닿는 시였다. 젊은 황인찬이 아닌 시인 황인찬이 만들어낼 시의 세계가 궁금하다. 그의 시를 계속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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