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축제가 시작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꽃대궐이 시작될 모양이다. 봄은 매년 오는데 왜 이리 설레는 걸까. 그런데도 어떤 감정은 해가 바뀌어도 살아나지 않고 메마르다. 연애 세포를 깨워야 한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연애 감각을 깨워야 한다. 직접적으로 누굴 사랑하거나 연애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딱딱하게 굳어 끝내 바스러질지도 모를 감정에 노크하는 시를 만났다. 국내 최초의 시(詩) 큐레이션 앱 ‘시요일’에서 기획한 다섯 번째 시선집 『이 연애에 이름을 붙인다면』에 수록된 시들이다.



목차를 살피며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이름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아, 그래 그 시집에 그런 시가 있었지.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이 시를 처음으로 읽었다. 사랑에 전부를 걸어도 후회하지 않을 당당한 자신감, 끝이 어떨지라도 누가 뭐래도 나는 지금 사랑을 선택하겠다는 당찬 기백이 느껴진다고 할까. 그러다 이 사랑이 혼자만의 사랑이라면 얼마나 처절한가 생각하니 가시를 삼킨 것만 같다.






내 사랑에는 파국이 없으니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과육을 파먹다

그 속에서 죽은 애벌레처럼

순진한 포만으로


돌이킬 수 없으니

계속 사랑일 수밖에요 (신미나 「복숭아가 있는 정물」)


그리고 이런 시를 읽고 울컥한다. 연애가 시작되고 이어지는 날들, 모든 날 모든 것이 행복하다가도 어느 순간 연인의 표정에 시시각각 연애가 흔들린다. 아, 나도 연인의 얼굴과 말투 하나에 온 신경을 쓰고 살피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서로에게 스며들기를 바랐던 날들이다. 그게 진정 연애의 모습일 것이다.


너는 내 표정을 읽고

나는 네 얼굴을 본다


너는 쾌활하고 행복하게 마시고 떠든다

그래서

나도 쾌활하고 행복하게 마시고 떠든다


그러다 너는 취해 운다

그래서 나는 취하지 않고 운다


눈물을 닦으며 너는 나를 사랑한다

눈물을 닦으며,

나는 네 사랑을 사랑한다


너는 나를 두고 집으로 갈 것이다

나는 너를 두고, 오래 밤길을 잃을 것이다


내 얼굴엔 무수한 표정들이 돛처럼 피어나고

내 얼굴은 무수한 표정들에 닻처럼 잠겨 있다 (이영광 「얼굴」)







어떤 시는 내 마음 같고 내 연애의 기억 같다. 어떤 시는 시인의 사랑 같고 어떤 시는 시인의 고백 같다. 그게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랴. 시를 읽고 시에 취하고 시를 품고 시를 흠모하고 시를 만지면 그만인 것을. 그래도 『이 연애에 이름을 붙인다면』 란 시집의 제목처럼 모든 사랑은 저마다 다른 이름이 있을 것이다. 사랑이 끝난 후에도 그 사랑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고 환한 봄날에도 시리게 추울지도 모른다.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삶을 송두리째 무너지게 하거나 삶을 환희로 가득 차게 만드는지.


내 팔을 가져다가 머리를 베고 잠들었던 아이는

자다가 내 팔을 내동댕이친다

아이가 휘두른 내 팔이 얼굴을 때린다

사랑은 곧잘 내 얼굴에 던져지는 모욕 받은 내 팔이다

줄을 타고 작두를 타고 공중그네를 타는

힘겨운 재주 부리다가, 내가 하는 사랑은

네가 나를 가져다 놓았다 하기에 (이선영 「사랑, 그것」 )


- 열차가 끽, 서는 소리

- 소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가장 아름다운 꿈은,

그 애와 함께 있는 꿈이에요. (한정원 「25」 )


모호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세계로 이끄는 시들이다. 67편의 시에는 차마 말하지 못한, 표현하지 못한 사랑의 형태가 가득하다. 모든 사랑의 이름을 겹겹이 쌓아 올린 무너지지 않을 탑이라 해도 좋을 시선집. 당신을 붙잡는 시가 있다면 그것이 당신 사랑의 이름이 될 것이다.


오랜만에 시집을 꺼내는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모아두기만 해서 미안했던 시집, 그 안에서 마음을 두드리는 시를 만나는 일. 봄을 핑계로 시로 안부를 전해도 좋을 것 같다. 쑥스럽고 이상할지라도 봄이니까. 봄이라서 그랬다고 말을 덧붙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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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3-11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매화축제를 한다고요??? 벌써 꽃이??
헐...... 자목련 님 연애하신다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연애에 이름을 붙인다면> 진짜 연애 시만 가득한 거 같네요?! ㅎㅎㅎ

자목련 2024-03-11 10:16   좋아요 0 | URL
남쪽은 매화가 한창이라고~~
남은 생애 연애는 없을 듯 합니다. ㅋㅋㅋ
전략적으로 기획한 시집인 것 같아요.

blanca 2024-03-11 13:06   좋아요 1 | URL
저도 자목련님의 연애 대목에 눈이 커졌어요. ^^ 남쪽 벌써 매화가 폈다고요? 봄이 가는 게 왜 이리 아깝나요.

레삭매냐 2024-03-1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드디어 꽃대궐이 시작되려나 봅니다.
저희 집에 네그리다 튤립이도 꽃대를
올리고 있더라구요. 드디어 !

저도 어제 <패터슨> 시집을 도서관에
서 보려고 가져 왔으나 아직 펴보진
못했네요.

시집을 잘 읽지 않지만 그래도 봄이니깐요.

자목련 2024-03-12 16:43   좋아요 0 | URL
아, 기대돼요!
네그리다 튤립 얼마나 예쁠까요!

네, 봄이니까요~~

blanca 2024-03-11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새 시집 읽기 시작했어요. 한정원 시집 참 좋죠. 옮겨 주신 시도 참 좋네요. 봄 꽃망울 보면 마음이 싱숭생숭합니다. 시인들은 천재 같아요. 시인들 대표작 모은 문학동네 시인선 050도 살짝 추천하고 갑니다.

자목련 2024-03-12 16:45   좋아요 0 | URL
한 시인의 시집도 좋지만 이렇게 엮은 시들도 좋더라고요.
풀판사가 50, 100 특집으로 시선집을 내주지 고맙죠^^

새파랑 2024-03-11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 책탑이 너무 멋집니다. 봄이 오긴 왔나 봅니다~!!

인용된 시들이 다 좋네요~!!

자목련 2024-03-12 16:46   좋아요 1 | URL
아직 춥지만 봄이에요. 날도 길어지고 한낮에는 겉옷이 무겁게 느껴지는...

망고 2024-03-11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화가 벌써요? 저희집 매화는 이제 조금 움 틀까말까 하는데요 사실 이것도 올해는 빨라요 유독 봄이 빨리 온거 같아요^^

자목련 2024-03-12 16:47   좋아요 0 | URL
제가 사는 이곳도 아직은 꽃이 귀하지만 남쪽은 이미 환한 꽃들이 가득한 것 같더라고요.
망고 님의 마당에서 피어날 꽃들도 곧 만나겠지요?

구단씨 2024-03-1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요즘 읽고 있는데, 좋네요.
소개해 주신 시 중에서 <얼굴> 인상적이구요.
올해에는 다른 지자체에서도 봄꽃 행사를 조금 일찍 시작하더라고요.
시골 동네의 매화 나무에 벌써 꽃이 피었어요.
봄이네요...

자목련 2024-03-12 16:47   좋아요 0 | URL
봄이 점점 빨라지는 걸 실감하는 날들이에요.
작년하고 또 다른 것 같아요.
시와 꽃이 있는 봄!!

그레이스 2024-03-13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육을 파먹다
그 속에서 죽은 애벌레처럼
순진한 포만으로˝
너무 좋아요
이래서 시를 읽지 싶네요.^^♡

자목련 2024-04-15 14:24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 답글이 늦었습니다.
시는 정말 놀랍고 대단해요!
그래서 시인이 더 궁금해지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