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전은 엄중하게 다가온다. 한 사람의 일생을 압축해 놓은 기록이라서 그럴까. 사만다 로즈 힐의 『한나 아렌트 평전』 을 읽기 전 조금 주저했다. 한나 아렌트란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기에 어려운 책이 아닐까 걱정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려운 책은 아니라고 하겠다. 나 같은 독자도 읽었으니 누구라도 한나 아렌트에 대해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 줄 책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이미 한나 아렌트에 대해 말하는 책들은 많지만 처음 접하는 이에게는 친절한 입문서다. 그의 저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조건』만 알고 있던 내게 이 책은 그녀의 다른 책들도 궁금하게 만들었으니까.
저자 사만다 로즈 힐은 한나 아렌트 선임 연구원으로 『한나 아렌트 평전』에서 한나 아렌트의 일생과 함께 그의 저작과 그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인간관계를 다룬다. 한나 아렌트의 사상이나 철학에 치우치지 않고 삶과 작품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으로 1906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는 좀 남다른 내면을 지닌 소녀였다. 한나가 일곱 살에 아빠 파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엄마, 모든 여자가 겪는 일이잖아요”라며 엄마 마르타를 위로했다고 한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당할 때 마르타는 유대인으로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한나는 열네 살부터 철학을 공부할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의 서재를 통해 발견한 세계, 삶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고 싶어서 철학을 택한 것이다. 그 공간이 한나의 철학을 향한 열정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열여덟 살 즈음에 하이데거의 제자가 되고 연인으로 발전한 건 운명의 일부였는지도 모른다. 에드문트 후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야스퍼스를 만나 철학적 사유를 배우게 되었다. 귄터 안더스와 결혼 후 한나는 안더스의 글을 교정하고 안더스는 한나의 논문 출간을 도왔다. 그러나 한나의 정치적 활동으로 균열이 시작되어 안더스는 파리로 떠나자 한나는 공산주의자들의 탈출을 돕는 지하 조직체를 도왔다. 그 과정에서 당국에 체포를 당했으나 다행히 풀려나자마자 독일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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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는 파리에서 난민 신세가 되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독일이 아닌 프랑스에서 당한 일이라는 게 놀라웠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런 부당함을 당해야 하다니. 강제수용소를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을 신청했다. 그 후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하며 공부와 연구를 했다. 한나는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으로 특별한 유대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대인을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항상 생각했다. ‘한나에게 유대인 문제는 언제나 정치적 문제였다.’(157쪽) 최초의 여성 교수 임용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자 제안을 거절했다. “저는 여성이라는 데 그다지 특별함을 느끼지 않아요. 언제나 여성이었거든요.” (203쪽) 언제나 여성이었다는 한나 아렌트, 정말 멋지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경험과 독일을 비롯한 전체주의와 그 안의 유대인 문제를 연구하고 논문의 주제로 삼았다. 그리하여 『전체주의의 기원』이 나왔고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에서 열린 전범재판을 직접 보기 위해 다른 일정을 다 취소했다. 한나는 아이히만의 재판 참석이 과거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재판은 한나에게 유대인의 슬픔에 대한 일종의 역사적 실태 조사에 가까웠다. 그 기록을 담은 보고서 『예루살렘이 아이히만』은 논란과 비판을 받았다.
한나는 타인의 잘못에 내가 책임을 질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즉 내가 하지 않은 일에 죄책감을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잘못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고, 아이히만처럼 모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한나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가담한 자들과 저항을 선택한 자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대답은 ‘사유’였다. 가담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스스로 사유라는 것을 했다. (240~241쪽)
한나 아렌트에게 철학과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유였다. ‘한나는 낙관과 절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으로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를 바라보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131쪽) ‘한나에게는 개인의 책임이 집단 경험보다 훨씬 중요했다. 결코 가벼운 고민이 아니었음에도 ‘가볍게’ 결론을 내렸다는 건 한나가 그만큼 개인의 책임에 더 큰 무게를 두었음을 의미한다.’ (133쪽) 현재를 직시하는 힘, “그러므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212쪽) 그는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우리에게 사상가로 알려진 한나가 시를 썼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땅은 곳곳에서 시를 쓴다.
가지런히 나무를 땋아놓고
우리더러 나아가라고 한다.
이 세상 곳곳을.
활짝 핀 꽃은 바람을 맞으며 기쁨을 누리고
풀은 연하고 나긋한 바닥에 싹을 틔우며
하늘은 파란색으로 물들어 밝게 인사하고
태양은 부드러운 체인처럼 회전한다.
한껏 취한 사람들…
땅, 하늘, 햇살, 나무…
봄마다 새로 태어나
전지전능한 놀이 속에서 즐거워한다. (〈프랑스 드라이브〉,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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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더 안서스와 이혼 후 하인리히 블뤼허와의 결혼 생활은 균형 있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면서도 간섭하지 않는 어려운 관계를 둘은 지속했다. 노년에 친구들을 만나고 여행을 다니며 보낸 시기에서 사상가가 아닌 한나는 자유로웠다. 생이 끝날 때까지 집필을 놓지 않았던 한나. 그로 인해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관심과 연구가 끊이지 않는다. 사만다 로즈 힐가의 『한나 아렌트 평전』 은 어렵지 않은 평전으로 철학이나 사상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훌륭한 안내서다. 이 책을 시작으로 한나 아렌트의 저작을 차례로 만나도 좋을 것이다.
한나는 사유를 ‘난간 없는 사유’라고 표현했다. 사유란 붙잡을 곳 없는 계단을 하염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다. 한나의 따르면 붙잡을 곳 하나 없을지 몰라도 계단이라는 서 있을 곳은 주어진다. 자유롭게 밟고 디딜 이 계단이야말로 한나에게 유서 없이 남겨진 유산이었다. (3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