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열렬하게 좋아하게 되면 그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진다. 유명 연예인의 팬이 그러하듯 기사를 사진을 찾아보고 기사나 인터뷰 내용을 읽고 그를 알아간다. 독자에게 소설가도 다르지 않다. 특히 나에게 황정은이라는 작가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사적이면서 내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일기를 읽으면서 한 편으로는 모든 걸 다 기록해 주기를 바라면서도 한 편으로는 비밀스러운 뭔가를 감추기를 바랐다. 이상한 마음이지만 그랬다.
그의 글에서는 단조로우면서도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출퇴근을 하는 동거인과 사는 작가에게 파주의 공간은 뭐랄까 어떤 경계처럼 다가왔다.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로 나눠진 것 같았다. 산책을 하는 일상, 눈이 오면 베란다에 눈사람을 만드는 일, 화단에 식물을 가꾸는 일, 그것은 보편적인 일상이지만 그 안에 담긴 그만의 시간과 그만의 사유는 우리의 그것과 달랐다. 차분하면서도 담담하게 자신의 내부를 보여주다가 한 발짝 다시 뒤로 물러나는 그 모습이 나는 좋았다. 물론 이 모든 건 나의 기분이며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뭐 어쩌겠는가. 나는 그녀가 좋고 그녀를 읽고 그녀를 기대하는 게 전부인 것을.
책을 좋아하고 책을 많이 읽고 책을 쓰는 사람이기에게 책갈피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면서도 이런 한 문장에서 나는 괜히 고마웠다. 그 역시 내게는 다른 사람이고 그가 만들어 낸 것으로 나는 위로받았고 무기력했던 어떤 시간을 구했으니까. 그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게 새삼 고맙다고 할까. 우리에게는 우리를 구원할 누군가의 글, 누군가의 음악, 누군가의 영상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다른 사람이 애써 만들어낸 것으로 내 삶을 구한다. (19쪽)
사실 황정은의 글에 대해 더 많은 걸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더 안다고 말하고 싶은 욕망, 그의 소설에서 내가 발견한 작은 기쁨 같은 것들에 대해 그게 맞냐고 질문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글은 때로 아무 말도 필요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저 거기 있어 읽고 읽은 후 가만히 후련해지고 뻐근해지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만으로도 충분하다. 황정은의 하루하루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글들이 그러하다. 세월호 사건 이후 거리에 나가 집회를 참여하고 목포항에서 바다에서 건져올린 처참하고 녹슨 세월호를 보는 시간이 그러하다. 우리는 그의 글에서 함께 그 순간을 떠올리고 그 기억을 붙잡고 간직하려 애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사람들은 온갖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억은 망각과 연결되어 있지만 누군가가 잊은 기억은 차마 그것을 잊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 뼈들은 역사라는 지층에 사로잡혀 드러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퇴적되는 것들의 무게에 눌려 삭아버릴 테지만 기억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기억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기록으로, 질문으로. (76쪽)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같은 걸 보고 같은 걸 듣고 같은 걸 겪는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전혀 같지 않다. 나와는 다른 환경에 놓인 사람들과 나를 같게 둘 수는 없다. 코로나를 경험하면서도 우리는 서로 다른 기억을 갖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지내온 시간은 곧 삶에서 지워질 수도 있다. 그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것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피할 수 없는 천둥과 번개처럼 다가오는 무언가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황정은이 추천사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소설이나 동생들의 동의를 얻고 꺼내놓은 상처의 기억들. 나는 그가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 소설이 무언인지 알 수 있었고 그가 언급한 책들의 목록을 잊기 않기로 했다. 어쩌면 그는 삭제하고 싶었을 말들이 저 깊은 곳에서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있도록 독려한 그것이 바로 그런 책이니까. 글이 힘이니까. 내가 황정은의 글에서 얻는 그것처럼.
그래도 나는 자주 바란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한다. 예컨대 당신의 건강을 바라고 사람의 선의를 믿고 굳이 희망하는 마음을 나는 믿는다. 믿어 의심치 않겠다는 믿음 말고, 희구하며 그쪽으로 움직이려는 믿음이 내게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내게 있으니, 사는 동안엔 내가 그것을 잃지 않기를. (160쪽)
알 수 없는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을 지켜보는 일은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거기다 여전한 혐오와 차별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정치를 행한 기대일 수도 있고 예술을 향한 마음일 수도 있고 한 줄의 문장을 붙잡는 일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루를 견디며 하루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버팀목이 되면 좋겠다. 황정은의 글은 아마도 그 버팀목 가운데 든든한 하나가 될 것이다. 앞으로 계속 그의 글을 읽고 살아갈 것이다. 함께 이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기의 중요한 부분으로 기록될 수 있으니 얼마나 반갑고 좋은 일인가.
더 많은 이들이 그의 글을 읽기를 바라면서도 어떤 글은 나만 읽고 싶은 욕심을 부린다. 이런 우습고 보잘것없는 서툰 마음이 사랑이라는 걸 수줍게 고백해 본다. 고백이 닿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