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동생아, 너는 늘 꿈꾸는 아이였어.
나쁜 꿈, 무서운 꿈. 악몽이 너의 긴 밤을 채웠지. 기억나니? 내가 언제나 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지. 너의 등을 다독여 주며 작은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 주었어. 너는 옆 침대에서 작은 제비꽃 무늬가 수놓인 베개를 베고 자주 훌쩍훌쩍 울었어. 너는 언제나 슬픈 꿈을 꾸었어. 그래서 그 꿈이 현실과 뒤죽박죽되어 버렸나 봐.
나는 너를 악몽에서 빠져나오게 하느라 애를 썼지. 매일 아침 네가 꿈 이야기를 하면 나는 그 꿈을 밝은 결말로 이끌어서 너를 안심시켜 주었어.
맞아, 지금 생각하면 그 습관이 우리의 글 쓰는 힘을 키웠는지도 몰라. 매일 아침저녁으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지. 우리는 그렇게 지금까지 이야기를 만들어 왔어. 우리들의 성공은 우리 둘만이 가졌던 시간의 산물일지도 몰라.
검은 개라고? 그런 개는 없었어. 할머니가 개를 싫어하셨는걸. 개를 집 안에 들여놓겠다고 하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셨을 거야. 네가 착각한 거지. 나는 개를 쏘지 않았어. 총 같은 건 만진 적도 없고.
너는 늘 꿈꾸는 아이였어. 그 개도 아마 네가 꿈속에서 보았을 거야.
하지만 까만 머리의 어린 여자아이는 있었어. 언제나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설탕이 묻은 끈적끈적하고 뜨뜻한 손으로 우리를 만지려고 했던 그 어린 여자아이.
그 여자아이는 사촌 오빠를 성가시게 쫓아다니며 시끄러운 매미처럼 그의 주변을 붕붕 날아다녔어. 다들 그 아이를 귀찮아했지.
그 여름에 폭발사고가 있었던 건 사실이야. 작고 검은 머리의 그 여자아이는 나무상자 속에 넣어두었던 불꽃놀이용 화약을 만졌어. 설탕이 묻은 끈적끈적한 손으로.
밝은 총성 따위는 들리지 않았어. 다만 둔중한 폭발음이 먼 곳에서 들리고 땅이 울렸을 뿐이지. 다들 무슨 일인가 천장을 올려다보았어. 샹들리에의 유리알이 마치 싫다고 도리질치는 것처럼 짤랑짤랑 흔들렸어.
작고 검은 머리의 그 여자아이는 머리가 타 버렸대. 타다 만 성냥개비처럼 머리가 버석버석하고 검게 타 버렸다지.
그러니까 총성 따위는 들리지 않았어. 검은 개가 바닥에 누워 있지도 않았고.
그렇지 않니, 사랑스러운 아이야?
네가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불안해져. 네 눈을 통해 네가 본 악몽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올 것만 같아. 그러면 멀리서 검은 현이 울리며 머릿속이 안개로 자욱해져. 가슴 밑바닥의 늪 속으로 검은 돌이 질퍽거리며 빠져드는 기분이 들어.

아아, 언니, 세상이 온통 핏빛으로 불타고 있어.
이런 빛깔을 도대체 어디서 보았더라?
안타까워. 너무 답답해.
하지만 나는 확실하게 기억해. 바로 이 창가에서 저 빛깔을 본 적이 있어.
훤칠한 남자와 가냘픈 여자가 이 창가에 서 있는 정경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
세상에 단 두 사람밖에 없다는 듯 그림처럼 아름다운 두 사람. 고풍스러운 커다란 액자 속에 넣어서 장식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정경이었어.
신기하지? 그 두 사람을 떠올리면 무릎 위로 뱀이 기어다녀.
가느다란 뱀이야. 붉은 무늬의 작은 뱀. 언제나 왼발에서 무릎 쪽으로 기어올라와서 무릎 위를 고물고물 기어다녀. 조금 무섭지만 간질간질해. 아주 똑똑한 뱀이야. 아무래도 아주 옛날부터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아.
독은 없어. 절대로 물지도 않아. 왠지는 모르겠지만 내 무릎 위를 기어다니다가 어느 결엔가 시선 밖으로 사라져 버릴 뿐이야.
잠깐만. 잘 생각해 보니까 무릎 위뿐만이 아냐. 뱀은 사방에서 기어다녔어.
그런 풍경이 생각나네. 바닥 전체에 꽃잎이 깔려 있고 뱀이 그 위를 기어다니는 풍경. 벨벳처럼 곱게 깔린 꽃잎 위로 뱀의 반짝이는 비늘이 꿈틀거리는 게 마치 신기한 마술을 보는 기분이었어.
바닥에 깔아 놓은 엄청난 양의 꽃잎에서 꽃향기가 숨막힐 정도로 피어올라와 우리들의 옷과 머리에 스며들었어.
꽃잎이 정말 많았어. 옛날 정물화처럼 흩뿌려 놓은 여러 종류의 꽃잎과 줄기와 잎에서 생생한 냄새가 났어. 분명히 식물인데 마치 짐승의 냄새 같았어.
잠깐만. 꽃잎 위에 누군가 누워 있어.
저건 언니인데? 이상하네, 언니를 닮은 사람인가? 어떤 사람하고 꼭 끌어안고 있어. 갈색 머리의 젊은 남자와 서로 끌어안은 채 누워 있어. 손가락 끝이 갈색으로 물들었는데 왜일까?
방이 빙글빙글 돌고 있어. 누워 있는 두 사람을 중심으로 속도를 높이며 크게 돌고 있어.
이상하네. 뱀들이 온 방 안을 기어다녀. 붉은 뱀들이 저렇게나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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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반쪽 2009-03-17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왠지 유령이 된 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동생이 혹시....

온다리쿠팬 2009-03-17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제나 봐도 멋진 글이네요

현지 2009-03-18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안의 장면이 마구마구 상상이 되어지는-
묘한 분위기의 확실하게 정의내려지지않는 그림이-
더 호기심을 부추겨요 'ㅁ'

아이아띠 2009-03-19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화홍련이 떠오르는건 저만의 생각인가요?

포마녀 2009-04-03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역시 온다리쿠
 


아아, 언니. 핏빛 같은 석양이 잠기고 있어.
우리는 저런 빛깔을 태어나서 지금까지 두 번밖에 보지 못했어.
세상이 멸망해 버릴 것 같은 황혼. 바람도 숨죽이고 나무들과 대지는 불길한 빛깔로 물들었어.
이런 날은 누구든 조용히 망가지고 말아. 요리하던 여자는 남편을 찌를 식칼을 장바구니 속에 몰래 숨기고, 성직자는 혼자 기도하는 고아를 범하려고 슬그머니 커튼을 들추지. 평소에는 닫혀 있던 서랍이나 작은 상자도 오늘 같은 날에는 말이 많아져. 깊이 숨겨 두었던 편지나 잊고 지냈던 비밀 연애담도 잔기침을 하면서 속살거리기 시작할 거야.
아아, 언니. 저 빛깔을 봐 주겠어?
저런 빛깔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두 번밖에 보지 못했어.
이렇게 해질 무렵에 우리들은 조용히 멸망하겠지. 핏빛 풍경 속에서 색채와 점액을 잃고 우리들은 완전히 썩어 버릴 거야. 그러니까 부탁이야. 그날 일을 이야기해 줘. 우리들이 이 빛깔을 눈에 새겼던 그날 저녁의 일을.

사랑스러운 내 동생아, 너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름다운 저녁놀을 사위스런 색으로 물들이려고 하니? 불길한 말로 스스로를 멸시하지 마. 핏빛 같은 석양이라고? 농담이 너무 심하구나. 아무래도 네 눈에는 빛바랜 비단이 씌어 있나 봐.
보렴, 저 보석 같은 하늘을. 남국에 사는 새의 날개처럼 찬란한 빛의 변화를. 밤의 장막이 내리려면 아직 이르지만, 수정처럼 맑고 투명한 태양이 가라앉고 있어.
맞아, 너는 옛날부터 걱정이 많은 아이였어. 지나가는 고양이의 꼬리를 보고도, 곳간 차양에서 울고 있는 까마귀 그림자를 보고도 너는 언제나 새파랗게 질려서 바들바들 떨었어.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고 아무리 타일러도, 너는 옷자락을 꽉 움켜잡은 채 놓으려고 하지 않았지.
그런 불안한 눈으로 보지 마. 나는 너의 그 눈이 싫어. 네가 그런 눈으로 보면 내 머릿속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면서 어딘가 먼 곳에서 검은 현(弦)이 불온하게 울리기 시작해.
어느 날 저녁을 말하는 거니? 그날이라니 언제?
우리는 늘 강아지나 산사나무 꽃들처럼 사이좋게 장난치고 웃으면서 잘 지냈잖아.
그래, 우리는 시를 짓고 희곡을 썼어. 할머니 생신에는 둘이서 선물로 촌극을 보여 드렸지. 사랑스러운 어린 자매에게 모두들 박수갈채를 보내 주셨어. 네 뺨은 장밋빛으로 붉게 물들었고 우리는 무릎을 굽혀 인사 포즈를 취했지. 그날 저녁놀도 아름다웠어. 너 혹시 그날을 말하는 거니?

아아, 언니. 이런 빛깔은 본 적이 없어.
아니, 거짓말이야. 딱 두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나도 할머니 생신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 우리는 똑같은 하얀 옷을 입고 노래를 불렀어. 유리 꽃병이 여름날의 호수처럼 반짝였어. 사람들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빙 둘러싸고 있었어.
바닥에는 개가 배를 깔고 누워 있었는데, 생각나지? 크고 검은 개. 언니가 베개처럼 베고 누웠던 그 개 말이야. 성격이 온순해서 우리들이 다가가도 가만히 있었어. 개의 몸 위에 펼쳐져 있던 언니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눈에 선해. 그런데 개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나는 그러지 못했지만 언니는 가끔 검은 개 위에 올라타고 졸기도 했어. 개의 빠른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언니는 깜빡 잠이 들곤 했지. 하지만 그날을 말하는 건 아냐.
언니가 쏜 그 검은 개가 아직도 건강하게 바닥에 누워 있던 그날이 아니라고.
언니는 그 개를 쏘았어. 왜 그랬을까? 개가 덤비는 바람에 외출복이 더러워져서? 아니면 나를 더 잘 따라서? 내가 갈색 머리 사촌 오빠하고 놀러 나가서였을까?
그러니까 그날은 아니야.
그 갈색 머리 사촌 오빠가 기억나. 먼 곳에 살아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지만 환한 눈동자에 훤칠한 키, 다들 좋아했어. 나나 동네 여자아이들이나, 그리고 언니까지도. 내 말이 맞지?
우리는 상쾌한 초여름 오후에 외출했어. 그때 언니는 없었지. 언니만 두고 갈 생각은 아니었어. 우리는 집 안을 찾아보았지만 마침 언니가 집에 없었고, 부드러운 바람의 꼬드김에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을 뿐이야.
반짝이는 초원에서 그의 갈색 머리가 바람에 나부꼈어. 개도 나뭇가지를 던져주면 신나게 놀았어. 그가 짧은 나뭇가지를 주워서 던지면 개는 하늘에서 빙글빙글 도는 나뭇가지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어.
총성이 울렸지.
밝은 초여름의 푸른 하늘에 밝은 총성이 울렸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던 개가 그 자세 그대로 풀 위로 털썩 떨어졌어. 윤기가 자르르한 검은 털 위로 붉은 것이 흐르기 시작했어. 누군가가 개를 쏜 거야. 꽤 먼 곳에서. 우리는 망연히 개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개의 몸에서 붉은 것이 흐르고 개가 몸을 부르르 떨다가 이윽고 움직이지 않게 될 때까지 지켜보았어. 너무 슬펐어. 우리는 손을 마주잡고 울었어. 우리 눈앞에서 움직임을 멈춰 버린 개를 위해서.
다같이 농원 한구석에 개를 묻었어. 기도를 하고 묵도를 올렸지.
맞아, 그날 저녁도 이렇지는 않았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두 번의 황혼과는 거리가 멀어.
그날, 같이 기도를 올리던 언니의 옷에서 화약 연기 냄새가 났어.
맞아, 나는 기억하고 있어. 언니가 그 개를 쏜 거야. 하지만 정말일까? 언니는 정말로 개를 쏘았을까? 어쩌면 언니는 다른 무엇을 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개를 맞히고 만 건 아닐까? 아아, 그 개 이름이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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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mlim 2009-03-16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앞의 두 편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글이네요- 빠져들어요 정말 ㅠ

공순이 2009-03-16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마지막편 이네요... 앞에 두 편 넘 재밌게 보았는데... 이번편도 시작부터가 예사롭지 않네요~

파이 2009-03-16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앞에까지 단편하고는 다르게 확 온다리쿠 장편과 같은 느낌을 안겨주는 단편인거같네요.
아아, 온다리쿠다! 하는 생각이 들게만드는 특유의 그 느낌이 들기 시작했어요.
온다 리쿠가 그려낼 아름답고도 무서운 두 소녀의 이야기가 너무나 기대되네요.

52 2009-03-16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요조곡에 나오는 도키코가 쓴 단편인가봐요. 마침 오늘 목요조곡을 다시 보다가 도키코가 말년에 쓴 여러가지 단편 제목을 열거 하는데 중간에 뱀과 무지개라는 제목이 보이더라구요. 설마설마 했는데 역시나네요. 자매의 이야기라고 해서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는데 드디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됐군요.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나네요. 내일이 기다려져요~

파이 2009-03-17 07:4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와, 피리푸씨! 목요조곡 읽은지 꽤되서 기억 안났었는데, 뱀과 무지개라는 제목이 낯설지않았던 이유가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목요조곡을 기억해내며 읽을수있겠네요!

미니반쪽 2009-03-17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쌍둥이일 것 같은데... 보통 쌍둥이는 아닐 것 같은....궁금궁금^^

을지 2009-03-17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온다리쿠 작가 맞아요?
와~!
횡재했습니다.

현지 2009-03-18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_<
정말 목요조곡의- 그 단편인가요? 'ㅁ'
정말- 목요조곡 읽으면서 등장했던 존재하지않는 그 소설들이 언젠가 나올수도 있겠다-하고 생각했었는데-
>_< 진짜진짜 반가운 기분이에요 ㅎㅎ
 


때가 지나고 날이 바뀌었다.
죽은 자들이 허덕이며 울부짖는 계절도 거의 끝나 간다.
그 여름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여 나비사는 홀쭉하게 야윈 몸으로 산에 들어갈 채비를 했다.
오늘은 모든 나비사들이 일제히 산에 들어가는 날이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은 죽은 자들을 다같이 위로하고, 다같이 남은 꽃들을 가라앉혀야 한다. 이런 날에는 더 이상 나비들은 필요 없다.
사방에서 서로를 부르는 방울 소리가 들린다.
나비사들이 방울을 울리며 산에 들어갈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나비사들이 목청껏 기도를 올리자, 기도 소리와 산의 소리가 합쳐지며 숲 위에서 소용돌이쳤다.
문득 나비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년이 따라오고 있었다.
나비사는 화난 얼굴로 고개를 저었지만 소년은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한동안 노려보았지만 결국 나비사가 꺾이고 말았다. 다른 나비사들에게는 비밀로 하자는 몸짓을 보내자 소년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뛰어왔다.
방울 소리와 나비사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을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다. 나비사는 소년에게 자기 곁에 꼭 붙어 있으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산이 울고 있다. 흔들리고 있다. 아비규환에 휩싸여 떠들썩해진다. 지하로 가라앉기 싫은 죽은 자들과 가라앉히려는 나비사들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기도 소리가 하늘을 쪼갤 듯이 커졌다. 목걸이를 더듬는 나비사의 손이 점점 빨라지더니 격렬해졌다. 나무들이 흔들리고 꽃이 떨어졌다. 바람인지 목소리인지 모를 돌풍이 나뭇가지 사이를 빠져 지나갔다.
꽃들이 사라졌다. 패배한 것이다. 가 버리는 여름이, 자신들의 계절이 아쉬워서 비명을 지르며 꽃들은 차례로 가라앉았다.
태양이 기울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산은 차차 조용해졌다.
방울 소리도 기도 소리도 잦아들더니, 이윽고 작은 새의 속삭임처럼, 수면의 물방울처럼 사라졌다.
햇빛이 많이 약해졌다.
산은 또다시 정적을 되찾았다.
더 이상 방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저주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계속 나비사에게 매달려 있던 소년이 꿈에서 깨어난 듯 입을 열고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여름은 끝났다.
나비사는 해질녘 바람에 귀를 기울였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다음에도 귀에 익숙한 그 소리는 가늘게 남아 있었다.
나비사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약간 끄떡였다.
알고 있어. 나 여기 있어. 이제야 모든 게 끝났어. 지금부터 그쪽으로 갈게.
나비사는 조금 쌀쌀해진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시더니 걷기 시작했다.
아까 오던 길이 아니었다. 소년은 의아한 듯 얼굴을 들고 얼른 일어나 나비사를 따라갔다.
나비사는 이제 모자를 벗고 있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디로 가는 걸까? 소년은 의아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다른 나비사들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나비사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소년의 존재는 잊은 것 같았다. 소년은 놓치지 않으려고 죽을 둥 살 둥 쫓아갔다.
숨을 헐떡이며 덤불을 헤치며 소년은 나비사를 따라갔다.
소년은 나비사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섰다.
언제나 묶고 다녔던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한 남자가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작은 나무가 있었다. 잎사귀만 무성한 그 나무에는 작고 파르스레한 꽃이 달랑 한 송이 남아 있었다.
그는 살며시 꽃을 만지더니 천천히 입을 맞췄다.
꽃은 이미 질 시기가 지났는지,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던 것처럼 잎이 호르르 흩어지면서 싸늘한 바람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소년은 흩어진 꽃잎을 눈으로 쫓았지만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그대로 서 있던 나비사는 그제야 생각났는지 소년을 돌아보며 싱긋 웃고는 돌아가자고 했다.
누구예요? 소년이 물었다.
나비사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소년은 작은 나무를 자꾸 뒤돌아보며 걸었다.
언덕길을 내려가는 나비사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아직은 알 필요가 없겠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 좋은 나비사가 된다는 사실은.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소년은 다시 한 번 돌아보면서 나비사에게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나비사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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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반쪽 2009-03-13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소년의 소중한 사람.. 이 나비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잘읽었어요.. 아직도 뭐가뭔지 잘 모르겟지만
신비롭고 따뜻한 느낌이 좋내요

뒷북치는느림뽀 2009-03-13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젤 첫회에서 나왔던 좋은 나비사가 되기위한 네번째 조건이란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거였어요..
그래서 나비사는 늘 외로운 존재였던 것이구..
흠..어쩐지 조금 슬픈데요.. 그래두 참 신비로운 이야기 였어요~~ ^^*

뒷북소녀 2009-03-13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전 갑자기 섬뜩한걸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거라니...

chucahat 2009-03-13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북치는 느림뽀님의 해설후에서야 이해가 되네요...

그러고보니,,, 느림뽀님의 책읽는 솜씨가 대단하네요~
그제서야,,, 리쿠님의 소설이 훌륭하단 생각이...

파이 2009-03-13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생각했던거하곤 좀다르게 나갔네요.
짧은 단편의 온다리쿠는 또다른 매력을 발산해서 좋네요.
드라마처럼 왠지 애달퍼지는 최종회였습니다.
그럼 다음주는.. 뱀과 무지개네요. 문득 '3월은 붉은 구렁을'이 생각나네요.
어떨까요? 두근거리며 다음주를 기약합니다.

푸른산빛 2009-03-16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처음으루 이 블로그를 발견해서 반가운 맘으로 그동안 연재됐던 글들 몽땅 읽었습니다.
역시 온다리쿠...ㄷㄷㄷㄷ
어서 책이 나왔음좋겠어요-

이 작품은 참 신비롭고도 끝엔 눈물이 왈칵솟는 이야기였습니다..

지구별탐험가 2009-03-16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년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죠?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
짧지만 여운은 오래 갈 듯...

나비사라는 존재를 만들어낸 온다 리쿠
다음 이야기도 기대됩니다 ^^~


현지 2009-03-18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ㅡ
마음이 애잔해지네요..
ㅠㅠ
 


여름이 오고 있다.
아직도 죽은 자들의 계절은 계속되고 있다.
오히려 산의 목소리는 한층 더 높아졌다. 사를 듯이 강해지는 햇빛을 받아 산은 녹음으로 불타오르고 꽃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만발했다.
나비사는 새벽녘이면 산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시달리며 꿈을 꾼다. 봄이 지나도록 찾아오지 않는 식구들을 찾는 목소리, 무심한 가족들을 저주하는 목소리, 산에 사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목소리들이 그의 잠을 방해한다.
나비사는 대낮에도 꿈을 꾼다. 산에 들어갈 예정이 없는 날에도 몰려오는 파도처럼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언제나 느낀다.
무더위가 가신 다음에야 마지못해 산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다들 비슷비슷하다. 안색이 좋지 않고 겁먹은 눈빛으로 쭈뼛거린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다 못해 두려운 마음으로 이제야 죽은 자의 명복을 빌어 줄 결심을 한 사람들이다.
이 시기에 산에 들어가려면 힘이 든다. 사람들의 발걸음도 무겁고 산을 기는 목소리에는 불온한 울림이 있다. 나비들도 지쳐서 힘없이 날아간다.
대낮의 이글거리는 햇볕이 사람들을 태울 듯 뜨겁다.
나비사는 땀을 몹시 흘렸다.
오늘은 산이 거칠다. 들려오는 목소리도 몹시 험악하다.
나비사는 끊임없이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돌을 셌다.
아무래도 싸움을 하다가 실수로 목숨을 잃은 사람 같았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도 음울했고, 산 앞에서 새파랗게 질려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나비들은 죽은 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들어갔다.
나비사는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검은 냉기 같은 것이 몸을 타고 올라온 것이다. 땅이 울릴 것만 같은 저주의 목소리가 숲을 흔들었다.
나비사는 비틀거렸다.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뒤따라오던 가족들도 와들와들 떨며 머리를 감싸고 땅바닥에 엎드려 꼼짝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비사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 꽃을 찾아 바다에 가라앉히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산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
이를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머리가 점점 뜨거워졌다.
드디어 그것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나무가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는데, 핏빛이었다. 게다가 모양이 마치 사람 손처럼 생긴 자극적인 꽃송이들이었다.
나비사는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나무 위에서 쏟아지듯 들리는 저주의 목소리를 구슬려 가면서 긴 시간을 들여 충고를 하고, 용기를 내어 나무 줄기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겨우 손에 잡힌 꽃은 손을 태워버릴 듯이 뜨거웠다.
나비사는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필사적으로 뜨거운 것을 참고 땅속으로 가라앉았다.
어두운 은빛 바다에 떨어뜨렸는데도 꽃은 한동안 수면 위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좀처럼 꺼질 줄 모르는 꽃에게 나비사는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올렸다. 이제 그만 가라앉아라. 황천 으로 가거라.
그렇게 오랫동안 바다 위에 떠 있었던 적은 없었다.
여름 끝 무렵의 불꽃놀이처럼 겨우 불은 다 타 버렸고, 꽃은 허무하게 가라앉았다.
나무 밖으로 나온 나비사는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순간적으로 자신도 다 타 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밖에 있는 자신의 손을 소년이 잡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를?
소년은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산 쪽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서 쏜살같이 달려왔다고 했다.
아, 살았구나. 소년의 눈물을 보면서 나비사는 그제야 숨을 쉬었다. 영영 그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르는데.
지쳐 버린 나비들을 불러들이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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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2009-03-1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비사와 봄, 그리고 '여름'이 왔군요. 보면볼수록 음양사같네요.(하는일이 좀 다르긴하지만) 한국쪽으론 영매나 무당같고.. 아직까지는 나비사의 '일'을 보여주는 정도인데, 이제부터 펼쳐지려나요. 한번붙들면 쭉보는 스타일인 저로서는 짧막하게 하나씩보니까 무지 애가타네요ㅠ

뒷북치는느림뽀 2009-03-12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은자의 안식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로군요, 영혼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사람, 나비사,,
그런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느나라에나 있지만, 나비와 산을 통한 의식을 치루는 나비사란 존재는 처음 듣는것 같아요
역시 재미있어요,^^
그리구 저 소년은, 아마두 나비사가 될 소질이 많은 아이인가봐요~
내일 이야기가 또 기다려집니다,^^

미니반쪽 2009-03-1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비와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들어봤는데 잘 기억은 안나내요. 그래도 그 중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중국신화중 하나인 나비신화 양축인데.. 그게 또 자꾸 생각나면서 더 좋아지내요^^ 소년은 정말 타고났나봐요.. 나비사가 될 소질이.. 참...이름도 이쁘게 지었내요^^

카무 2009-03-13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은자들을 배웅하는 사람, 나비사.
최근에 장례사를 주제로 해서 나왔던 일본영화가 생각나네요.
앞으로도 재밌게 읽겠습니다~
 


태양은 천천히 움직인다.
꽃이 피고, 꽃이 진다. 벌레들이 새들이 짐승들이 보금자리를 만든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나비사는 찾아오는 사람들과 달력을 보면서 날을 잡아 산으로 간다. 나비를 풀어놓고 그 나비를 따라가 꽃을 찾아서 지하의 바다에 가라앉힌다.
온실에서 나비를 키우고 설탕물을 만들고 벌레통을 준비한다.
꽃을 달인 차를 마시며 혼자 어두운 사랑방에서 한숨을 돌린다.
그날 이후로 소년이 놀러오기 시작했다.
같이 풀을 뜯기도 하고 꽃잎을 말리기도 하고 뒤뜰에서 벌레통을 만들면서 지냈다.
나비사가 될 수 있을까요?
소년은 주저하면서 물었다.
나비사는 미소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대답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년도 그 점을 느꼈는지 우물거리더니 고개를 수그렸다.
나비를 받으러 가자고 나비사가 권했다.
받아요?
소년은 그 말을 되물었다. 나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산한테 받으러 가자.
두 사람은 나란히 집을 나섰다.
잔잔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오늘도 산속은 방울 소리로 가득하다.
청량한 방울 소리의 잔물결이 사방에서 흘러왔다가는 멀어지고 스쳐 지나갔다가는 사라졌다.
나비사는 오늘도 그 가는 목소리를 느낀다. 그를 향해 울려오는 그 비밀스러운 목소리.
여기에 있어요. 오늘은 갈 수 없어.
나비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한숨 쉬듯 살며시 사라졌다.
구릉에는 키 높은 여름풀이 무성하게 자랐고 곤충들은 여기저기에 집을 짓고 있었다. 소년은 환성을 지르며 풀 속을 뛰어다녔다.
야생 나비가 극채색 색종이처럼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하늘이 먼 곳에서 한순간 축복을 내리는 것만 같았다.
나비사는 소년의 나비를 받을 생각이었다. 나비사들은 산에 사는 야생 나비를 받아서 자신의 나비로 삼아야 한다.
소년을 나비사로 키울지 어쩔지는 아직 모르겠다. 소질은 있지만 과연 나비사가 되는 길이 소년에게 좋은 일일까. 나비사는 고민하고 있었다. 웬만하면 목수나 농부처럼 평범한 일이나 하면서 살게 했으면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조만간에 이 아이는 나비의 길을 찾고 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겠지.
소년은 신이 나서 매미채를 휘두르고 다녔다.
나비사는 소년을 도왔다.
쏟아져 내려오는 나비 중에서 소년이 손에 넣은 것은 태양빛이 담뿍 담긴 과실 빛깔의 나비였다.
소년은 장밋빛 뺨을 반짝이며, 새로 만든 벌레통 속의 나비를 들여다보았다.
소년에게 어울리는 나비라고 나비사는 생각했다.
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두 사람은 해 저문 길을 돌아왔다.
나비사는 외로운가요?
소년이 문득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질문했다.
나비사는 얼굴을 아주 조금 움직였다.
소년은 발밑을 내려다보며 볼멘소리를 했다.
나비사가 되겠다고 했더니 할아버지가 그런 일은 외로운 사람이나 하는 일이라고 하셨어요.
봄은 죽은 자들의 계절.
하늘에서 내려오는 색종이. 들판을 지나는 깃발.
마지막 조건을 갖추게 된 날이 언제였더라.
맞아, 외로운 사람이 좋은 나비사가 된다는 말이 있어.
나비사는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보면서 대답했다.
왜죠?
그 편이 산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으니까. 시끌벅적한 방에 있는 사람은 밖에서 비가 오거나 건너편 밭에서 개가 짖어도 잘 모르잖니. 그런 것과 마찬가지야. 조용한 방에 있으면 먼 곳에서 누가 울고 있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거든.
소년은 불안한 듯 나비사를 보았다. 나비사는 미소짓기만 할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의 말을 이해하겠지.
소년의 작은 손이 나비사의 겉옷을 잡았다.
작은 벌레통을 품에 안고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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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2009-03-11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외로운 나비사.. 시끄러운 방안에 있는 사람은 먼곳의 소리를 들을수 없다.라는 문구가 맘에 드네요.

뒷북치는느림뽀 2009-03-11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림에 비해 넘 짧은 글,,아쉽기만해요~~~ 목마름이 계속 되는군요.. 아웅~~,

뒷북소녀 2009-03-11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요... 또다시 다음회를 기다려야겠어요...ㅠ.ㅠ

미니반쪽 2009-03-12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파이님의 말씀과 동감...같은 부분이 참 맘에 들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