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동생아, 너는 늘 꿈꾸는 아이였어.
나쁜 꿈, 무서운 꿈. 악몽이 너의 긴 밤을 채웠지. 기억나니? 내가 언제나 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지. 너의 등을 다독여 주며 작은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 주었어. 너는 옆 침대에서 작은 제비꽃 무늬가 수놓인 베개를 베고 자주 훌쩍훌쩍 울었어. 너는 언제나 슬픈 꿈을 꾸었어. 그래서 그 꿈이 현실과 뒤죽박죽되어 버렸나 봐.
나는 너를 악몽에서 빠져나오게 하느라 애를 썼지. 매일 아침 네가 꿈 이야기를 하면 나는 그 꿈을 밝은 결말로 이끌어서 너를 안심시켜 주었어.
맞아, 지금 생각하면 그 습관이 우리의 글 쓰는 힘을 키웠는지도 몰라. 매일 아침저녁으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지. 우리는 그렇게 지금까지 이야기를 만들어 왔어. 우리들의 성공은 우리 둘만이 가졌던 시간의 산물일지도 몰라.
검은 개라고? 그런 개는 없었어. 할머니가 개를 싫어하셨는걸. 개를 집 안에 들여놓겠다고 하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셨을 거야. 네가 착각한 거지. 나는 개를 쏘지 않았어. 총 같은 건 만진 적도 없고.
너는 늘 꿈꾸는 아이였어. 그 개도 아마 네가 꿈속에서 보았을 거야.
하지만 까만 머리의 어린 여자아이는 있었어. 언제나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설탕이 묻은 끈적끈적하고 뜨뜻한 손으로 우리를 만지려고 했던 그 어린 여자아이.
그 여자아이는 사촌 오빠를 성가시게 쫓아다니며 시끄러운 매미처럼 그의 주변을 붕붕 날아다녔어. 다들 그 아이를 귀찮아했지.
그 여름에 폭발사고가 있었던 건 사실이야. 작고 검은 머리의 그 여자아이는 나무상자 속에 넣어두었던 불꽃놀이용 화약을 만졌어. 설탕이 묻은 끈적끈적한 손으로.
밝은 총성 따위는 들리지 않았어. 다만 둔중한 폭발음이 먼 곳에서 들리고 땅이 울렸을 뿐이지. 다들 무슨 일인가 천장을 올려다보았어. 샹들리에의 유리알이 마치 싫다고 도리질치는 것처럼 짤랑짤랑 흔들렸어.
작고 검은 머리의 그 여자아이는 머리가 타 버렸대. 타다 만 성냥개비처럼 머리가 버석버석하고 검게 타 버렸다지.
그러니까 총성 따위는 들리지 않았어. 검은 개가 바닥에 누워 있지도 않았고.
그렇지 않니, 사랑스러운 아이야?
네가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불안해져. 네 눈을 통해 네가 본 악몽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올 것만 같아. 그러면 멀리서 검은 현이 울리며 머릿속이 안개로 자욱해져. 가슴 밑바닥의 늪 속으로 검은 돌이 질퍽거리며 빠져드는 기분이 들어.

아아, 언니, 세상이 온통 핏빛으로 불타고 있어.
이런 빛깔을 도대체 어디서 보았더라?
안타까워. 너무 답답해.
하지만 나는 확실하게 기억해. 바로 이 창가에서 저 빛깔을 본 적이 있어.
훤칠한 남자와 가냘픈 여자가 이 창가에 서 있는 정경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
세상에 단 두 사람밖에 없다는 듯 그림처럼 아름다운 두 사람. 고풍스러운 커다란 액자 속에 넣어서 장식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정경이었어.
신기하지? 그 두 사람을 떠올리면 무릎 위로 뱀이 기어다녀.
가느다란 뱀이야. 붉은 무늬의 작은 뱀. 언제나 왼발에서 무릎 쪽으로 기어올라와서 무릎 위를 고물고물 기어다녀. 조금 무섭지만 간질간질해. 아주 똑똑한 뱀이야. 아무래도 아주 옛날부터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아.
독은 없어. 절대로 물지도 않아. 왠지는 모르겠지만 내 무릎 위를 기어다니다가 어느 결엔가 시선 밖으로 사라져 버릴 뿐이야.
잠깐만. 잘 생각해 보니까 무릎 위뿐만이 아냐. 뱀은 사방에서 기어다녔어.
그런 풍경이 생각나네. 바닥 전체에 꽃잎이 깔려 있고 뱀이 그 위를 기어다니는 풍경. 벨벳처럼 곱게 깔린 꽃잎 위로 뱀의 반짝이는 비늘이 꿈틀거리는 게 마치 신기한 마술을 보는 기분이었어.
바닥에 깔아 놓은 엄청난 양의 꽃잎에서 꽃향기가 숨막힐 정도로 피어올라와 우리들의 옷과 머리에 스며들었어.
꽃잎이 정말 많았어. 옛날 정물화처럼 흩뿌려 놓은 여러 종류의 꽃잎과 줄기와 잎에서 생생한 냄새가 났어. 분명히 식물인데 마치 짐승의 냄새 같았어.
잠깐만. 꽃잎 위에 누군가 누워 있어.
저건 언니인데? 이상하네, 언니를 닮은 사람인가? 어떤 사람하고 꼭 끌어안고 있어. 갈색 머리의 젊은 남자와 서로 끌어안은 채 누워 있어. 손가락 끝이 갈색으로 물들었는데 왜일까?
방이 빙글빙글 돌고 있어. 누워 있는 두 사람을 중심으로 속도를 높이며 크게 돌고 있어.
이상하네. 뱀들이 온 방 안을 기어다녀. 붉은 뱀들이 저렇게나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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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반쪽 2009-03-17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왠지 유령이 된 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동생이 혹시....

온다리쿠팬 2009-03-17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제나 봐도 멋진 글이네요

현지 2009-03-18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안의 장면이 마구마구 상상이 되어지는-
묘한 분위기의 확실하게 정의내려지지않는 그림이-
더 호기심을 부추겨요 'ㅁ'

아이아띠 2009-03-19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화홍련이 떠오르는건 저만의 생각인가요?

포마녀 2009-04-03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역시 온다리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