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언니. 핏빛 같은 석양이 잠기고 있어.
우리는 저런 빛깔을 태어나서 지금까지 두 번밖에 보지 못했어.
세상이 멸망해 버릴 것 같은 황혼. 바람도 숨죽이고 나무들과 대지는 불길한 빛깔로 물들었어.
이런 날은 누구든 조용히 망가지고 말아. 요리하던 여자는 남편을 찌를 식칼을 장바구니 속에 몰래 숨기고, 성직자는 혼자 기도하는 고아를 범하려고 슬그머니 커튼을 들추지. 평소에는 닫혀 있던 서랍이나 작은 상자도 오늘 같은 날에는 말이 많아져. 깊이 숨겨 두었던 편지나 잊고 지냈던 비밀 연애담도 잔기침을 하면서 속살거리기 시작할 거야.
아아, 언니. 저 빛깔을 봐 주겠어?
저런 빛깔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두 번밖에 보지 못했어.
이렇게 해질 무렵에 우리들은 조용히 멸망하겠지. 핏빛 풍경 속에서 색채와 점액을 잃고 우리들은 완전히 썩어 버릴 거야. 그러니까 부탁이야. 그날 일을 이야기해 줘. 우리들이 이 빛깔을 눈에 새겼던 그날 저녁의 일을.

사랑스러운 내 동생아, 너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름다운 저녁놀을 사위스런 색으로 물들이려고 하니? 불길한 말로 스스로를 멸시하지 마. 핏빛 같은 석양이라고? 농담이 너무 심하구나. 아무래도 네 눈에는 빛바랜 비단이 씌어 있나 봐.
보렴, 저 보석 같은 하늘을. 남국에 사는 새의 날개처럼 찬란한 빛의 변화를. 밤의 장막이 내리려면 아직 이르지만, 수정처럼 맑고 투명한 태양이 가라앉고 있어.
맞아, 너는 옛날부터 걱정이 많은 아이였어. 지나가는 고양이의 꼬리를 보고도, 곳간 차양에서 울고 있는 까마귀 그림자를 보고도 너는 언제나 새파랗게 질려서 바들바들 떨었어.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고 아무리 타일러도, 너는 옷자락을 꽉 움켜잡은 채 놓으려고 하지 않았지.
그런 불안한 눈으로 보지 마. 나는 너의 그 눈이 싫어. 네가 그런 눈으로 보면 내 머릿속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면서 어딘가 먼 곳에서 검은 현(弦)이 불온하게 울리기 시작해.
어느 날 저녁을 말하는 거니? 그날이라니 언제?
우리는 늘 강아지나 산사나무 꽃들처럼 사이좋게 장난치고 웃으면서 잘 지냈잖아.
그래, 우리는 시를 짓고 희곡을 썼어. 할머니 생신에는 둘이서 선물로 촌극을 보여 드렸지. 사랑스러운 어린 자매에게 모두들 박수갈채를 보내 주셨어. 네 뺨은 장밋빛으로 붉게 물들었고 우리는 무릎을 굽혀 인사 포즈를 취했지. 그날 저녁놀도 아름다웠어. 너 혹시 그날을 말하는 거니?

아아, 언니. 이런 빛깔은 본 적이 없어.
아니, 거짓말이야. 딱 두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나도 할머니 생신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 우리는 똑같은 하얀 옷을 입고 노래를 불렀어. 유리 꽃병이 여름날의 호수처럼 반짝였어. 사람들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빙 둘러싸고 있었어.
바닥에는 개가 배를 깔고 누워 있었는데, 생각나지? 크고 검은 개. 언니가 베개처럼 베고 누웠던 그 개 말이야. 성격이 온순해서 우리들이 다가가도 가만히 있었어. 개의 몸 위에 펼쳐져 있던 언니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눈에 선해. 그런데 개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나는 그러지 못했지만 언니는 가끔 검은 개 위에 올라타고 졸기도 했어. 개의 빠른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언니는 깜빡 잠이 들곤 했지. 하지만 그날을 말하는 건 아냐.
언니가 쏜 그 검은 개가 아직도 건강하게 바닥에 누워 있던 그날이 아니라고.
언니는 그 개를 쏘았어. 왜 그랬을까? 개가 덤비는 바람에 외출복이 더러워져서? 아니면 나를 더 잘 따라서? 내가 갈색 머리 사촌 오빠하고 놀러 나가서였을까?
그러니까 그날은 아니야.
그 갈색 머리 사촌 오빠가 기억나. 먼 곳에 살아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지만 환한 눈동자에 훤칠한 키, 다들 좋아했어. 나나 동네 여자아이들이나, 그리고 언니까지도. 내 말이 맞지?
우리는 상쾌한 초여름 오후에 외출했어. 그때 언니는 없었지. 언니만 두고 갈 생각은 아니었어. 우리는 집 안을 찾아보았지만 마침 언니가 집에 없었고, 부드러운 바람의 꼬드김에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을 뿐이야.
반짝이는 초원에서 그의 갈색 머리가 바람에 나부꼈어. 개도 나뭇가지를 던져주면 신나게 놀았어. 그가 짧은 나뭇가지를 주워서 던지면 개는 하늘에서 빙글빙글 도는 나뭇가지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어.
총성이 울렸지.
밝은 초여름의 푸른 하늘에 밝은 총성이 울렸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던 개가 그 자세 그대로 풀 위로 털썩 떨어졌어. 윤기가 자르르한 검은 털 위로 붉은 것이 흐르기 시작했어. 누군가가 개를 쏜 거야. 꽤 먼 곳에서. 우리는 망연히 개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개의 몸에서 붉은 것이 흐르고 개가 몸을 부르르 떨다가 이윽고 움직이지 않게 될 때까지 지켜보았어. 너무 슬펐어. 우리는 손을 마주잡고 울었어. 우리 눈앞에서 움직임을 멈춰 버린 개를 위해서.
다같이 농원 한구석에 개를 묻었어. 기도를 하고 묵도를 올렸지.
맞아, 그날 저녁도 이렇지는 않았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두 번의 황혼과는 거리가 멀어.
그날, 같이 기도를 올리던 언니의 옷에서 화약 연기 냄새가 났어.
맞아, 나는 기억하고 있어. 언니가 그 개를 쏜 거야. 하지만 정말일까? 언니는 정말로 개를 쏘았을까? 어쩌면 언니는 다른 무엇을 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개를 맞히고 만 건 아닐까? 아아, 그 개 이름이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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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mlim 2009-03-16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앞의 두 편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글이네요- 빠져들어요 정말 ㅠ

공순이 2009-03-16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마지막편 이네요... 앞에 두 편 넘 재밌게 보았는데... 이번편도 시작부터가 예사롭지 않네요~

파이 2009-03-16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앞에까지 단편하고는 다르게 확 온다리쿠 장편과 같은 느낌을 안겨주는 단편인거같네요.
아아, 온다리쿠다! 하는 생각이 들게만드는 특유의 그 느낌이 들기 시작했어요.
온다 리쿠가 그려낼 아름답고도 무서운 두 소녀의 이야기가 너무나 기대되네요.

52 2009-03-16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요조곡에 나오는 도키코가 쓴 단편인가봐요. 마침 오늘 목요조곡을 다시 보다가 도키코가 말년에 쓴 여러가지 단편 제목을 열거 하는데 중간에 뱀과 무지개라는 제목이 보이더라구요. 설마설마 했는데 역시나네요. 자매의 이야기라고 해서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는데 드디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됐군요.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나네요. 내일이 기다려져요~

파이 2009-03-17 07:4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와, 피리푸씨! 목요조곡 읽은지 꽤되서 기억 안났었는데, 뱀과 무지개라는 제목이 낯설지않았던 이유가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목요조곡을 기억해내며 읽을수있겠네요!

미니반쪽 2009-03-17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쌍둥이일 것 같은데... 보통 쌍둥이는 아닐 것 같은....궁금궁금^^

을지 2009-03-17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온다리쿠 작가 맞아요?
와~!
횡재했습니다.

현지 2009-03-18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_<
정말 목요조곡의- 그 단편인가요? 'ㅁ'
정말- 목요조곡 읽으면서 등장했던 존재하지않는 그 소설들이 언젠가 나올수도 있겠다-하고 생각했었는데-
>_< 진짜진짜 반가운 기분이에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