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틀리지 않았다. 나비의 길은 하늘에 있고 목소리에 대답하고 있다.
색이 돌아왔다.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목소리에 나비사는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목소리라고 전부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가끔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 정도로 마음이 싸늘해지는 느낌의 목소리도 섞여 있다.
숲 속의 완만한 오르막길로 들어섰다. 나무들을 에워싼 향기로운 꽃향기에 사람들의 표정은 추억으로 흔들렸다. 그들은 죽은 자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행여나 보일까 나뭇가지 쪽을 두리번거렸다.
산에 들어와서 나비들을 느끼는 일만 가능해지면 나머지는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나비사는 눈을 거의 감은 채로 산길을 걷는다.
아까부터 그는 하나의 목소리를 느끼고 있었다. 먼 곳에서 한 가닥 실처럼 나지막하게 살며시 그에게 다가오는 목소리. 아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무시하고 있었다.
가슴 어딘가가 바늘에 찔리는 듯 아프다. 계속해서 뜨끔거리다 보니 이제는 아예 익숙해졌다.
여기예요, 여기. 지금은 갈 수 없어. 지금은 거기 못 가.
나비사는 가만히 가슴 속으로 중얼거린다. 하지만 가는 목소리는 항의라도 하듯이 또다시 나비사 안에서 울린다. 아직이야. 지금은 그곳에 갈 수 없어. 나비사는 그 목소리를 자기 안에서 몰아냈다.
소리는 사라지고 이내 조용해졌다. 나비사는 안도했다.
나비를 느낀다. 그들은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있다.
나비사는 윗옷 주머니에서 방울을 꺼내 딱 한 번 울렸다.
뒤따라오던 유족들이 긴장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목적지에 다 왔음을 깨달은 것이다.
발밑의 풀들이 소리를 냈다. 새로 움튼 풀 냄새가 자욱하게 올라오면서 사람들의 땀 냄새와 섞였다.
나비사는 또 한 번 색을 느꼈다. 연한 우윳빛 레이스처럼 반짝이는 색이었다.
아름다고 기품이 있는 걸로 보아 제대로 핀 꽃임에 틀림없다.
길이 좁아지면서 가파른 비탈길로 들어서자 사람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기다시피 올라갔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기어 올라오던 사람들이 일제히 얼굴을 들었다.
모두의 입에서 짧은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 한 그루가 시야가 좋은 산 중턱에 우뚝 솟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이 바로 그들이 찾는 곳임을 직감했다.
가느다란 외길이 그 나무 밑동까지 이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다녀갔을 것이다.
사람들은 조신하게 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나비사의 눈은 나뭇가지에 앉아 날개를 쉬고 있는 나비들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나비들은 늘 그렇듯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모였다. 이 아름답게 핀 새하얀 꽃 중에는 작년에 돌아가신 노인의 부인도 있었다. 나비사는 엷은 빛이 꽃에서 뻗어 나와 사람들을 감싸는 것을 보았다.
아까 그 소년이 퍼뜩 얼굴을 드는 것을 나비사는 놓치지 않았다.
소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겁먹은 눈으로 나무를 올려보았다.
그렇다, 소년은 빛을 느낀 것이다. 나비사는 감탄했다. 틀림없이 유망한 나비사감이다.
의식이 시작되었다. 나무 앞에 막을 치고 깃발을 세웠다.
나비사가 기도를 올리면 사람들이 따라 하고, 나비사가 종을 울리면 거기에 맞춰 사람들이 노래했다.
의식은 끝나고 사람들은 돌아갔지만, 나비사는 그 자리에 남았다. 이제부터 하는 의식은 나비사 혼자 해야 한다.
나비사는 나무 아래에 서서 모자를 벗어 땅바닥에 놓았다. 눈을 감고 목걸이를 잡고 나무 줄기에 손을 댔다. 꼼짝 않고 기도를 올리는 동안 손바닥이 점점 뜨거워졌다.
나무 줄기가 물렁하게 녹는 감촉이 느껴진다. 나비사는 나무 안으로 들어간다. 어두운 줄기 속을 헤엄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꽃을 찾는다. 앞쪽에서 순백의 빛을 발하는 꽃을 발견한다. 줄기를 통해 가만히 손을 뻗어 빛을 따서 나무 뿌리 쪽으로 내려간다.
어둡고 축축한 세상. 그곳에는 죽은 자의 꽃을 모시는 장소가 있다.
나비사는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빛이 보인다. 이번에는 달빛 같은 빛이다. 싸늘하고 고요한 빛을 가득 담은 바다가 그곳에 있다. 군데군데 부연 덩어리처럼 점멸하는 것들은 다른 나비사들이 가라앉힌 꽃이다.
나비사는 가만히 바다 위에 서서 천천히 꽃을 바다에 가라앉혔다. 처음에는 둥실 떠오르던 꽃이 이윽고 소리도 없이 가라앉았다.
그것을 지켜보고 기도를 올린 다음, 나비사는 조용히 떠올랐다. 은빛 바다에서 멀어져 축축한 나무 뿌리를 지나 어두운 나무 줄기에서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곳에는 목걸이를 쥔 채로 나무 줄기를 손으로 누르고 있는 자신, 열심히 기도문을 중얼거리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 외부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는데, 다음 순간에는 완전히 일치하여 하나의 나비사가 돼 있었다.
나비사는 긴 한숨을 쉬었다. 이 순간이 가장 안도하는 시간이다.
무사히 꽃을 은빛 바다에 가라앉힌 것에 대해 감사하며 나비사는 모자를 썼다.
눈부신 듯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뭇가지에 있는 나비들을 불렀다.
가장자리에서 광채가 나는 검은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와 나비사의 벌레통 안으로 들어갔다.
나비사는 만족하고 약간은 지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봄은 죽은 자들의 계절.
이 계절이 이제 막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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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2009-03-10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올라오자 마자 읽게되다니 기쁘네요. 읽으면서 상상되는 나비사의 모습이.. 음양사같네요.
요번단편은 두려움보다는 신비로움이 가득하네요. 물론 반전이있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또 내일을 기다리려니 너무나 설레고 애가 탑니다.

뒷북치는느림뽀 2009-03-10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의식을 행하는 자 나비사, 정확히 어떤 의식인지 확 와닿지는 않지만,,은은히 느껴지는듯해요,,
나비란 단어가 주는 신비로움과 잘 어우러지는 소설일듯,,
또 내일을,, ㅎㅎ

미니반쪽 2009-03-10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아직 잘 모르겠지만 죽은 자들의 안식을 위한 일인거 같으데.. 왜 그게 하필 나비와 연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암튼 내일이 또 너무 기달려지내요^^

뒷북소녀 2009-03-10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양사요? 영화를 보지 못해서 전 제대로 그려지지가 않네요.
이러다가 불현듯 공포가 나타날까봐 두근두근거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