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나, 귀여워라.
너 지금도 꿈을 꾸고 있구나.
우리는 너의 꿈 이야기로 작은 연극을 만들곤 했지.
<꽃잎 요> 기억나? 별것 아닌 이야기야. 동틀 무렵에 꾼 꿈이라 잠에서 깨면 금세 잊어버릴 꿈이었지만 우린 그걸 이야기로 만들었어.
달빛이 비치는 푸른 꽃잎 위에 누워 있는 연인들은 결코 눈을 뜨지 않아. 연인들은 언제까지나 눈뜨지 않고 똑같은 밤무지개 꿈을 꾼다는 그런 이야기였어.
네가 그 꿈 이야기를 하던 그 아침이 생각난다.
…… 아아, 그날은 엄마가 돌아가신 날이었어. 우리가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엄마의 숨이 끊겼지. 아버지가 우리를 부르러 오셨을 때, 아직도 우리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밤무지개를 보았어.
네가 그랬지. 그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면서 그렇게 말했어. 그때 너는 두려워하지 않았어. 나를 가만히 보면서 밤무지개를 보았다고 했어.
너는 계속 말했어.
나는 꽃잎 위에 누워 있었어. 누군가와 꼭 끌어안고 죽은 듯이 누워 있었어. 몸은 싸늘해졌고 진한 꽃향기에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어. 손가락 끝이 얼음처럼 차가워서 내 손 같지가 않았어.
너는 계속 말했어.
…… 아버지가 부르러 오실 때까지.
그 사람은 나의 연인이야. 우리 둘은 사귀는 사이였어. 하지만 두 사람은 죽은 듯이 잠들었어. 싸늘하게 식은 몸으로 꼭 끌어안은 채 같이 밤무지개 꿈을 꾸고 있었지. 참 신기해. 꽃잎 위에 누워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는데, 나는 그와 꿈을 꾸고 있었어. 어둠 속에서 아름다운 활 모양을 그리며 일곱 빛깔 무지개가 조용히 떠 있는 것을 둘이서 눈을 감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어.
너는 그렇게 말했지.
나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어.
제비꽃이 수놓인 베개를 베고, 아직은 어스레한 아침 햇살 속에서.
…… 아버지가 우리들을 부르러 오실 때까지.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우리들에게 알려주기 전까지 계속…….

신기하지, 언니.
나, 그 꿈이 생각났어. 고요한 밤의 무지개. 죽은 듯이 잠든 두 사람.
나는 바닥에 깔린 꽃잎 위에 누워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두 사람의 꿈속에 나타난 밤무지개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이상하지, 거기에 뱀이 나오는 거야. 누워 있는 두 사람으로부터 붉고 작은 뱀 몇 마리가 도망치고 있어. 자세히 보니까 붉은 뱀이 여자의 목을 감고 있어. 본 적이 있는 얼굴이야. 잘 아는 얼굴인데 생각이 나지 않아.
아아, 왠지 언니를 닮았어.
저 사람은 누구지? 그날 죽은 사람이 아닐까? 그날 죽은 사람은 누구지?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인가?
맞아, 그날이야, 저 빛깔을 본 게.
누워 있는 두 사람은 천천히 썩어 가고 있어.
꽃잎들과 함께 색채와 점액을 잃고 서서히 썩으면서 말라가고 있어. 그 위를 저 새빨간 석양이 덮어 버렸어. 색채를 잃은 방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고 있어. 그래, 그날이 틀림없어. 지금도 내 눈에 선연하게 남아 있어.
언니, 부탁이야. 그날 일을 말해 줘.

글쎄, 이제 와서 무슨 생각이 나겠니, 사랑스러운 아이야.
이제 그런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우리는 이 방에서 많은 것들을 하면서 놀았어. 너를 좋아했던 그 작곡가도 자주 놀러왔는데, 생각나? 눈매가 꼭 개암 열매처럼 생긴 그 남자. 너를 ‘나의 작은 울새’라고 불렀지, 아마. 산책을 좋아해서 언제나 산책길에 꺾어온 꽃을 너에게 선물로 주었잖니.
우리들의 희곡 초연을 축하하던 날 밤 생각나? 이렇게 좁은 방에 그 많은 사람들이 들어온 일은 그 전에도 후에도 없었어. 선물로 받은 꽃다발을 전부 뜯어서 천장에서 뿌리게 했었지. 어려서부터 꿈꾸었던 꽃보라였어.
방 안 곳곳에 작은 사랑이 가득한 즐거운 밤이었어. 창가에서 불꽃놀이를 보고 술도 마셨지. 유쾌한 음악이 흐르고 얼음은 유리잔 바닥으로 미끄러졌어.
일곱 빛깔 불꽃놀이. 우리는 창밖으로 꽃을 던졌어. 그리운 여름밤의 추억이야.
그래, 네가 본 빛깔은 그 불꽃놀이였어.
유쾌한 음악과, 웬만한 장난쯤은 눈감아 주는 축제 분위기로 들떴던 그날 밤의 불꽃놀이 빛깔이야. 불꽃은 우리들의 색채를 온통 빼앗았고, 아이 같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우리들을 같은 색으로 물들여 버렸어.
누가 그랬지. 중국에서는 같은 변을 쓰는 뱀(蛇)과 무지개(虹)를 두고 땅을 기는 건 뱀이고 하늘을 기는 건 무지개라 한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상상해 보았어.
붉은 뱀이 밤무지개를 휘감고 있어. 발치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가 소리도 없이 담쟁이덩굴처럼 휘감았어. 뱀은 밤의 무지개를 서서히 옥죄고 있어.
왜냐고? 글쎄, 왜일까? 뱀 스스로는 그 행위가 사랑인지 미움인지 몰라. 그냥 뭔가를 휘감고 싶으니까 혼신의 힘을 다해 옥죄고 있을 뿐이야. 뱀은 소리도 없이 무지개를 휘감고 긴 시간을 들여 밤의 무지개를 조여 죽이고 말아.
이윽고 뱀의 몸에서 힘이 쑥 빠지게 되면 뱀과 무지개는 색채를 잃고 어둠의 밑바닥으로 추락할 거야. 그리고 그곳에는 정적만 남아.
어때? 그런대로 괜찮은 이야기지?
우리 희곡에 쓸 만하지 않니?
…… 맞아, 그날 밤에 불꽃 빛깔로 물든 방에 두 사람이 찾아왔어. 태연하게 웃는 얼굴로 우리 방으로 들어오더군. 우리들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었어. 아버지가 우리와 같은 나이의 딸을 데리고 우리들의 파티에 오셨어. 엄마의 관 뚜껑을 덮고 채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그 사람은 종종 모습을 나타냈어. 우리들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어. 그 사람은 살짝 미소지으며 그날 밤에 우리 방을 찾아왔어. 아버지한테서 받은 지 얼마 안 된 반지를 반짝이며, 불꽃빛으로 물든 그 방 안으로 들어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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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반쪽 2009-03-18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새엄마의등장? 음 여러 사람은 나오는데 꿈과 섞여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내요. 근데 분위기는 이상하게 맘에 들어요. 근데 참... 관광 여행 / 나비사와 봄, 그리고 여름 / 뱀과 무지개..
3편다 다른 작가 작품같다는....온다리쿠님 완전 더 좋아지내요^^

공순이 2009-03-18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짜릿짜릿 한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