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티아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6
플라톤 지음, 이정호 옮김 / 이제이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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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을 관조적이며 정치중립적인 철학자로 보는 것은 완전한 오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했을 때에도 그는 매우 적극적으로 정치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사후(BC. 323)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고향인 마케도니아로 피신한 것과는 달리 플라톤은 몇 번의 실패 후에도 자신의 '철인왕국'을 실현하기 위해 70의 노구를 이끌고 시라쿠사 여행길에 올랐다. 이것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다는 어이없는 전승(유신시절 문교부가 이렇게 유포했고, 그래서 이런 오해는 전세계적으로도 유래없다.)은 그가 진실로 철학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아테네의 중우들 앞에서 자신을 변론했으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저항'의 정신을 간직했다는 점을 알고 나면 하나의 넌센스처럼 비친다.

 

따라서 서구사상의 시원에서부터, 아니 정신(nous) 자체가 바로 니체적 의미에서 '반시대적'이며, 저항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러한 정신적 밀리탕스는 어디서부터 유래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이 대화편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미완의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이다. 이 대화편 자체가 '미완'이라는 것, 그리고 대화가 중단된 부분이 다름 아니라 타락한 아틀란티스에 대한 제우스의 징벌이 시작되는 부분이라는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이 부분은 여러 철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하지만, 그런 만큼 읽는 사람의 상상력을 모두 허용한다. 제우스의 징벌은 곧 '아테네'라는 다른 유토피아를 준비하는 '파괴'의 과정이다. 하나의 파괴 이후에 등장하는 완전한 유토피아로서의 아테네는 플라톤 당대의 아테네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며, 오히려 그것은 타락 이전의 아틀란티스를 그대로 가져온 모습이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건설할 것인가? 만약 아테네가 아틀란티스와 같은 물질적 번영을 달성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당시의 아테네처럼 중우정치에 물들어 버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해 플라톤은 '절제'와 '용기', 그리고 '정의'를 내세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덕목들이 물질적 번영의 토대 위에서 제대로 구현될 것인가? 혹 이 유토피아마저 변질되지는 않겠는가? 이러한 불안과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실천의 전망이 플라톤에게 '열망'을 불러 일으켰고 그의 발길을 끊임없이 시라쿠사로 이끌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철학은 시초부터 '반시대적'인 동시에 '실험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그것은 무언가를 언설로 갈무리 하여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지평에 스스로를 열어 놓음으로써 텍스트를 미완으로 돌리고, 현실 안에서 어떤 '발명'을 바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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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도입부 대화(106a-108)

1. 티마이오스의 마무리와 기원(106a-106b)

[106b]올바른 벌이란 틀린 소리를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대로 된 소리를 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겠지요.(4)

 

(4)dikē de orthē plēmmellounta emmelē poiein. 여기서 쓰인 ‘plēmmeleō’는 ‘to make a false note in music’ ‘틀린 소리를 내다’의 뜻이며, ‘emmelōs’는 ‘sonding in unison, in tune or time, harmonious’ ‘맞는 소리를 내다’의 뜻이다. 여기서는 조화로운 우주를 말로 설명하는 것과 조화로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동일하게 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2. 크리티아스의 양해(106b-108a)

3. 소크라테스의 당부(108a-108c)

4. 크리티아스의 다짐(108c-108d)

 

II. 옛 아테네와 선조들(108e-112e)

1. 서언: 전쟁의 발발과 아틀란티스의 위치(108e-109a)

2. 신들의 지역 배분과 최초의 통치방식 및 토착민들(109b-110c)

[110b]당시에는 여자와 남자 모두 전쟁에 관한 임무를 똑같이 가졌으므로 무장한 여신상은 당시 관습에 따라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봉납 신상일 수 있었는데, 그 여신 그림과 여신상 또한 ‘떼 지어 사는 것은 암수를 불문하고 다 똑같이 각기 고유한 탁월성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 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네.

그런데 당시 이 아테네 지역에는 시민 계층들 중 수공업에 종사하는 계층 외에도 땅에서 식량을 생산하는 계층이 살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인 계층이 신적 인간들에 의해 처음부터 격리된 채 따로 살고 있었다네(49). 양육과 교육(50)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구비하고서 말이네. 즉, 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그들 자신의 사적인 소유물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그들 모두의 공유물로 간주하였고, 식량 또한 생존에 필요한 정도 외에는 일체 다른 시민들로부터 얻으려 하지 않았네. 그러면서 그들은 어제 거론되었던 임무일체, 즉 우리가 제안했던 수호자들에 대해 언급한 모든 것들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네.[110d]

 

(49)《티마이오스》246 참고.

(50) trophē kai paideusis 양육은 신체 발육과 관련된 것이고 교육은 정신의 함양과 관련된다. ‘교육’은 ‘교양’으로도 옮길 수 있다. 교육(교양)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국가》3권 416b~c, 4권 423e~424c, 7권 518c~d 참고.

 

☞ 여기서 ‘떼지어 산다’는 표현은 인간 뿐만 아니라 전체 자연의 동물들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정호 선생은 주석에서 굳이 그렇게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이렇게 인간만을 따로 보지 않고 전체 자연의 일부로 취급하는듯한 표현은 대화편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그러한 인식체계로 인해 논리적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 경우에도 매우 복잡한 논변이 전개되기도 한다. 《뤼시스》에서 인간과 자연물을 복합적으로 취급하는 부분도 그러하다. 그리스 고대철학은 아직 인간을 하나의 ‘주체’ 즉 실체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는 통념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3. 계층의 구분과 임무(110c-110d)

4. 아테네의 땅(110d-111e)

1) 국경(110d-110e)

2) 토질, 자원, 기후(110e-111e)

5. 아테네의 도시(111e-112d)

1) 위치와 경계(111e-112b)

2) 거주지와 그 주변(112b-112d)

6. 수호자의 규모와 됨됨이(112d-112e)

 

III. 아틀란티스 섬과 사람들(112e-120d)

1. 명칭에 대한 사전 설명(112e-113b)

2. 기원과 시조(113b-113d)

3. 포세이돈의 최초 건설 작업(113d-113e)

4. 포세이돈의 후손들, 영지 및 부(113e-114d)

5. 자원(114d-115b)

1) 지하자원(114d-114e)

2) 산림 및 동식물, 식량자원(114e-115b)

6. 도시의 건설과 정비(115b-118e)

1) 해수 띠와 육지 띠, 운하(115c-116a)

2) 그 주변의 정비-다리, 돌담, 망루, 문, 선박계류장, 돌담장식(116a-116c)

3) 궁정의 배치(116c-116d)

4) 포세이돈 신전 내부(116d-117a)

5) 온천과 냉천, 수도관(117a-117c)

6) 외곽성벽, 항구(117d-118e)

7. 평야의 정비(118a-118e)

1) 평야의 위치와 크기(118a-118b)

2) 평와 외곽 산지(118b-118b)

3) 직사각형 해자(118b-118c)

8. 구역의 규모와 행정(118e-119a)

9. 구역별 병력 및 병기의 공출(119a-119b)

10. 통치 체계 및 법률(119c-120d)

1) 통치자 회의(119c-119d)

2) 서약 의식(119d-120c)

[120a]비석에는 그 법에 덧붙여 법에 복종하지 않는 자에게 엄청난 저주를 비는 서원이 새겨져 있었다네. 그들은 또 그들의 법에 따라 제물을 바칠 때 황소의 사지 모두를 바쳤으며(151), 크라테르(152)에 술을 섞으면서 자기들 각자를 위해 핏방울도 같이 집어 넣었네. 그리고 비석을 두루 정결케 한 후 나머지 피도 불에다 부었다네.

그런 다음 그들은 그 크라테르의 술을 황금 잔에다 따랐다가 그것을 불에다 부으면서 이런 맹세를 하였던 것일세. 즉 이전에 뭔가 법을 어긴 사람이 있으면 비문에 새겨진 법에 따라 심판하여 처벌할 것이며, 또한 이후 어떠한 법도 고의로 어기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의 법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는 통치하지도 않을 것이고, 또 그러한 통치자에게 복종하지도 않겠노라고 말일세.

 

(151) 포세이돈에게 황소를 바치는 의식이 여기서 응용되고 있다. 《오뒷세이아》iii 6 참고.

 

☞ “그때 그들은 넬레우스가 튼튼하게 지은 도시 퓔로스에 닿았다.

마침 바닷가에서 그곳 백성들이 새까만 황소들을 잡아

 대지를 흔드는 검푸른 머리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있었다.

그곳에는 아홉 줄의 좌석이 있었는데 각 줄마다 오백 명씩

앉아 있고 각 줄마다 황소 아홉 마리씩 준비되어 있었다.

이들은 마침 내장을 맛보고 나서 넓적다리뼈들을 제단 위에서

신께 태워드리고 있을 때 (...)

 

(152) kratēr. 술 등을 섞기 위해 만든 그릇

 

 

 

 

 

 

3) 법률들(120c-120d)

 

IV. 본성의 타락과 징벌(120-121c 중단부분)

1. 신적인 본성의 상실(120d-121b)

2. 제우스의 징벌(121b-121c 중단부분)

[121a]그들은 부의 사치스러움에 취해 자제심을 잃어 그들 자신을 망쳐 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오히려 깨어 있는 정신으로 이러한 모든 것들이 우애로운 교분을 통해 덕과 함께 불어 나는 것임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었다네. 반대로 부와 사치스러움을 얻고자 안달하고 그것들을 떠받들면 오히려 줄어들고 급기야는 그 덕 자체도 그들에게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말일세.

실로 그들은 이러한 생각과 신적인 본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서 불어났던 것이네. 그러나 그 신적인 부분은, 여러 사멸하는 것들과 수차에 걸쳐 뒤섞여짐으로써 그들에게서 점차 줄어들게 되었고, 오히려 인간적 성정이 우위를 차지하기에 이르자 그들은 급기야 갖고 있는 재물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평정을 잃어,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파렴치한 자로 간주되었네. 가장 귀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을 잃어버린 것이지.[121b]

 

[121c] 모든 것을 굽어 볼 수 있는 신들의 가장 존귀한 거처로 모든 신들을 불러들여, 그들이 다 모이자 이르기를 (…).

 

☞아틀란티스에 관한 National Geographic의 다큐멘타리:

http://www.youtube.com/watch?v=Kds6G4ffx-4&feature=rel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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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7 18: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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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시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에로스(eros)와 필리아(philia)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그리고 해제에서도 밝혀 놓았다시피 필리아의 용법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기도 하기 때문에 이 대화편의 주제를 전문적으로 꼼꼼히 보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어지기 쉬울 것이다. 오랫동안 플라톤을 연구한 학자들도 이 대화편은 이해가 쉽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니 번역의 노고가 얼마나 컸을까라는 것도 짐작할만 하다.

 

일천한 깊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 대화편은 사랑과 우정의 대화편이기도 하지만 플라톤의 변증법이 가지는 근원적인 '아포리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논변들은 참다운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주위로 회전하는데, 그것에 대한 답변을 마련하는 와중에 적절하게 내세워진 답변의 후보자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방식(소거법)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마지막에 와서는 결국 처음에 제거된 대답으로 돌아 오고야 만다.

 

렇게 해서 플라톤은 사랑과 친구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아포리아로 던져 놓는다. 이 과정에서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논변에 ‘욕구’를 도입하는 순간이다. 앞서 욕구는 반대되는 것 사이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헤시오도스에 대한 반박을 통해 마무리했고, 말미에 이르러 욕구란 비슷한 것에 대한 욕구라고 결론짓는다. 문제는 이 욕구가 결코 비슷한 것에 대한 욕구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이것을 애초에 기각하면서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을 후보자로 내세운 것에서부터 문제가 잠재되어 있다.

 

이 논변의 과정은 내 생각에 ‘자족’과 ‘결핍’ 사이를 진동한다. 그러면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제거하면서 결국 아포리아로 빠지는 것이다. ‘차 있지도 비어 있지도 않은 상태’가 규명될 경우에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인데, 플라톤의 논변 과정에서 이러한 ‘모순 관계’는 상정될 수 없다. 따라서 이때 주체는 항상 ‘헛것’처럼 보인다. 사랑을 채우지도 포기하지도 못한 채 허상을 찾아 헤매는 유령과 같은 존재, 그것이 플라톤의 ‘사랑의 주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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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로스와 필리아[도입](203a-207d4)

(1) 에로스[형식적인 틀]: 에로스의 비상호성(203a-206e2)

[205e]그가 자네에게서 달아나 버린다면 자네가 애인에 대해 말한 찬사들이 더 대단한 것일수록 자네는 그만큼 더 멋있고 훌륭한 것들을 빼앗긴 자가 되어 우습게 보이게 될 것이네. 그러니 친구여, 사랑(연애)에 관한 일들에 있어서 지혜로운 자는 누구든지 자기가 사랑(연애)하는 자를 낚아채기 전까지는 장차 어떻게 될지 염려되어 그를 칭찬하지 않는다네. 그리고 동시에 잘생긴 자들은, 누군가가 그들을 칭찬하고 추켜세울 때면, 자만심과 도도함으로 가득 차게 된다네.

 

(2) 필리아[내용상의 도입]: 친구간의 상호적 필리아(206e3-207d4)

[207c]친구들의 것이야말로 공동의 것이라고 이야기되니까(1), 바로 이 점에서 자네들 두 사람은 전혀 차이가 없을 것이네.

 

(1) 이것은 피타고라스학파의 격률로 알려져 있다. 이와 유사한 구절은 ≪국가(Politeia)≫4권, 424a; 5권, 449c;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8권, 1159b31 참고.

 

2. 필리아와 앎 혹은 유용성의 관계[예비적 탐구](207d4-211a1)

[210e]애인을 추켜세워서 우쭐하게 만들 게 아니라 깍아내려서 위축시켜야 한다는 말일세.

 

3.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친구의 두 후보](211a1-213d5)

(1) 메넥세노스의 능력[본격적인 논의 준비](211a1-211d6)

(2) 상호적 필리아와 비상호적 필리아[본격적인 논의 시작](211d6-213d5)

[212e~213c]그렇다면 메넥세노스 사랑받는 것이 사랑하는 자에게 친구인 것 같네. 사랑받는 것이 사랑하든, 아니면 미워하기까지 하든 말일세. (...) 이 말에 따르면 사랑하는 자가 친구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가 친구이네. (...) 그렇다면 또한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움받는 자가 적이네. (...) 그렇다면 이것 보게. 많은 사람들이 적들에 의해 사랑받고 친구들에 의해 미움받으며, 적들에게는 친구지만 친구들에게는 적이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것이 친구인 것이라면 말일세. 그런데 말이네, 친애하는 벗이여, 자기 친구에게 적이고 적에게 친구라는 건 아주 불합리하네. (...)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면,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의 친구가 될 것이네. (...) 그렇다면 미워하는 것이 미움 받는 것의 적이네. (...) 그렇다면 우리는 앞서의 것들에 대해서 했던 것과 똑같은 합의를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네. 즉 친구 아닌 것의 친구가 있는 경우가 자주 있고, 심지어 적의 친구마저 있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사랑하거나 아니면 심지어 자신을 미워하기까지 하는 것을 사랑할 때가 바로 그런 경우라는 것, 그리고 적 아닌 것의 적이 있거나 심지어 친구의 적마저 있는 경우도 자주 있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거나 아니면 심지어 자신을 사랑하는 것까지도 미워할 때가 바로 그런 경우라는 것 말일세. (...) 그러면 우리는 이걸 도대체 어떻게 다루어야 하지? 사랑하는 사람들도, 사랑받는 사람들도, 사랑하기도 사랑받기도 하는 사람들도 친구가 아니고 오히려 이것들 말고 아직 서로에게 친구가 되는 다른 어떤 사람들이 있다고 우리가 말하데 된다면 말일세.

 

4.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친구[셋째 후보](213d6-214e1)

[214c-214e]내가 보기에 (...) 훌륭한 자들은 서로 비슷하고 친구인 데 반해 나쁜 자들은 (그들에 관해 흔히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게 바로 이것이기도 한데) 도대체 서로 비슷하지 않고 심지어 그들 자신이 자신들과 비슷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변덕스럽고 불안정하다는 것이네. 그리고 그 자체가 자신과 비슷하지 않고 어긋나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과 비슷하거나 친구가 되는 일이 좀처럼 없을 것이네. (...) 그럼 이제, 벗이여, 내가 보기에는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친구라고 말하는 자들은 바로 이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네. 즉 훌륭한 자만이 오직 훌륭한 자에게만 친구인 반면, 나쁜 자는 훌륭한 자와도 나쁜 자와도 도대체 참된 사랑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거지. (...) 그렇다면 이미 우리는 누가 친구들인지를 말할 수 있는 것이네. 누구든 훌륭하기만 하면 그들이 바로 친구들이라는 것을 우리 논의가 보여주고 있으니 말일세.

 

5. 훌륭한 자의 자족성[셋째 후보 논의의 심화와 비판](214e2-215c2)

[215a-215c]서로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서로에 의해 존중될 수 있을까? (...) 훌륭한 자는 훌륭한 자인 한에서는 스스로 충분할 것 같은데? (...) 그리고 충분한 자는 자기의 충분함 덕택에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자일 것이네. (...) 그리고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는 뭔가를 존중하지도 않을 것이네. (...) 뭔가를 존중하지 않는 자는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네. (...)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자야말로 친구가 아니네. (...) 그러면 우리가 보기에 어떻게 훌륭한 자들이 애당초 훌륭한 자들에게 친구가 되겠는가? (...) 적어도 그들이 서로를 대단히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적어도 친구는 아닐 것이네.

 

6. 비슷하지 않은 것이 비슷하지 않은 것에게 친구[넷째 후보](215c3-216b9)

[215e]그[헤시오도스]는 아직도 자기 논의를 계속, 더욱 호기 있게 펴나가고 있었네. 그러니까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친구라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사실은 이와 정반대라고 말하면서 말이네. 그건, 가장 반대되는 것이 가장 반대되는 것에게 가장 친구니까 그렇다는 거네. 각 사물은 자기와 비슷한 것이 아니라 반대되는 것을 욕구하니까 말일세.

(...) [그런데]‘그렇다면 적대적인 것이 친구인 것에게 친구(인 것)인가, 아니면 친구인 것이 적대적인 것에게 친구(인 것)인가?’ (...) 그럼 정의로운 것이 부정의한 것에게, 혹은 절제된 것이 제멋대로인 것에게, 혹은 훌륭한 것이 나쁜 것에게 친구인가? (...) 반대됨에 의거해서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에게 친구라면, 이것들도 친구일 수밖에 없네. (...) 그렇다면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친구인 것도 아니고, 반대되는 것이 반대되는 것에게 친구인 것도 아니네.[216b]

 

7.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훌륭한 것의 친구[다섯째 후보](216c1-218c3)

[271a]그렇다면 이것 보게. 오로지 훌륭한 것에게,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만이 친구가 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네.

 

[271c]“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세. 누군가가 금발인 자네 머리카락들을 백연으로 문지른다면, 그때 자네 머리카락들은 흰가, 아니면 다만 그렇게 보이는 것뿐일까?” (...) “다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테지요.” (...) “그렇지만 그때 그것들에게 흼이 와 있을 것이네.” (...)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은 그것들이 조금이라도 더 희지는 않을 것이네. 오히려 흼이 자기들에게 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조금도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네.” (...) “하지만 친구여, 실로 노령이 그것들에다 바로 이 똑같은 색깔을 가져다주게 되면, 그때는 그것들이, 자기들에게 와 있는 것과 꼭 같은 유의 것이 되어 버리네. 즉 흼이 자기들에게 와 있음으로 해서 희게 되네.” (...) “자, 그러니까 바로 이게 내가 지금 묻고 있는 것이네.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에게 와 있을 때마다, 와 있는 그것을 가진 것은 와 있는 것과 같은 유의 것이 될 것인가,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 와 있을 때는 그렇게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안 그렇게 될 것인가?” “오히려 후자 쪽이죠.” (...) “그렇다면 나쁘지도 훌륭하지도 않는 것 역시 때로는 나쁜 것이 자기에게 와 있는데도 아직 나쁘지 않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미 자기에게 와 있는 것과 같은 유의 것이 되어 버린 때도 있네.” (...) “그렇다면 나쁜 것이 와 있는데도 나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것이 아직 나쁜 것이 아닐 때, 이 와 있음은 그것이 훌륭한 것을 욕구하도록 만드네. 반면에 그것을 나쁘게 만드는 와 있음은 그것에게서 훌륭한 것에 대한 욕구도 사랑도 빼앗아 버리네. 그때는 그것이 더 이상 나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니까 말일세. 그런데 앞의 논의에서 훌륭한 것은 나쁜 것에게 친구가 아니었네.” (...) “무지를 가지고는 있지만 아직은 그것으로 인해 분별없거나 무식하게 되지는 않고, 다만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이 무엇이든 그것들을 알지 못한다고 여전히 생각하는 자들이 남아 있네. 그러니까 바로 그 때문에, 아직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자들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네. 반면 나쁜 자들은 지혜를 사랑하지 않으며, 훌륭한 자들도 마찬가지네.(...)” (...) “나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것이 나쁜 것의 와 있음 때문에 훌륭한 것의 친구라고 우리는 주장 하니 (...)”

 

8. 첫째 친구[다섯째 후보 논의의 심화와 비판](218c4-220e6)

[220c-e]그러면 훌륭한 것이 사랑을 받는 게 나쁜 것 때문인가? (...) 그렇다면 우리에게 친구인 저건(즉 다른 모든 것들이-바로 그것들이 다른 친구를 위해서 친구라고 우리가 말하고 있는데-바로 그것으로 귀결된다고 할 때의 그것)은 정말로 이것들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네. 이것들은 친구를 위해 친구라고 불려 왔지만, 참으로 친구인 것은 이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타고난 것임이 분명하니까 말이네. 그것은 적을 위해서 우리에게 친구라는 것이 분명히 밝혀졌으니 말일세. 그런데 적이 떠나가 버리면, 참으로 친구인 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친구가 아닌 것 같네.

 

9. 욕구가 필리아의 원인[여섯째 후보로의 이행](220e6-221d6)

[221d]욕구가 참으로 사랑의 원인이고, 또 욕구하는 것이 욕구 대상에게, (욕구하는 바로 그때) 친구인 반면에, 이전에 무엇이 친구인가에 관해 우리가 말하고 있었던 것은 마치 길게 늘어진 시처럼 어떤 허튼 이야기 (...)

 

10. 가까운 것이 가까운 것에게 친구[여섯째 후보](221d6-222e7)

[222a]어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욕구하거나 사랑(연애)할 때, 만약 그가 혼에 있어서든, 아니면 혼의 어떤 습성에 있어서든, 아니면 기질이나 모습에 있어서든, 어떤 식으로든 사랑(연애)받는 자에게 가까운 자가 아니라면, 도무지 욕구하지 못할테고, 사랑(연애)도 사랑(친애)도 못할 것이네.

 

[222d]그렇다면 여보게들, 우리가 사랑에 관해서 우리가 맨 처음에 거부했던 그 논변들에 다시 빠져 들어가 버렸네. 훌륭한 자가 훌륭한 자에게 친구인 것 못지않게 부정의한 자는 부정의한 자에게, 그리고 나쁜 자는 나쁜 자에게 친구일 것이니 말일세.

 

☞이렇게 해서 플라톤은 사랑과 친구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아포리아로 던져 놓는다. 이 과정에서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논변에 ‘욕구’를 도입하는 순간이다. 앞서 욕구는 반대되는 것 사이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헤시오도스에 대한 반박을 통해 마무리했고, 여기서는 욕구라 비슷한 것에 대한 욕구라고 결론짓는다. 문제는 이 욕구가 결코 비슷한 것에 대한 욕구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이것을 애초에 기각하면서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을 후보자로 내세운 것이다.

이 논변의 과정은 내 생각에 ‘자족’과 ‘결핍’ 사이를 진동한다. 그러면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제거하면서 결국 아포리아로 빠지는 것이다. ‘차 있지도 비어 있지도 않은 상태’가 규명될 경우에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인데, 플라톤의 논변 과정에서 이러한 ‘모순 관계’는 상정될 수 없다. 따라서 이때 주체는 항상 ‘헛것’처럼 보인다. 사랑을 채우지도 포기하지도 못한 채 허상을 찾아 헤매는 유령과 같은 존재, 그것이 플라톤의 ‘사랑의 주체’라고 할 수 있겠다.

 

11. 아포리아[파장](223a1-223b8)

[223b]우리가 스스로 서로의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나 자신도 자네들 무리 가운데 속한다고 치고 있으니 하는 말이네만) 아직 친구가 무엇인지 발견해 내지 못했다고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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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네 대화 편 -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헬라스 고전 출판 기획 시리즈 3
플라톤 지음, 박종현 엮어 옮김 / 서광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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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수록된 네 대화편은 흔히 '역사적 소크라테스'를 알 수 있는 저작이라고 알려져 있다. [파이돈]의 연대기가 논쟁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소크라테스라는 서양철학의 위대한 영혼을 접하기에는 다른 어떤 2차서보다 이 대화편들이 더욱 실감나는 것은 사실이다. 무릇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원전을 독파해 나가야 한다. 그 중에서도 이 대화편들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박종현 선생의 원전번역은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것이니 큰 의심을 할 필요는 없다.

 

소위 '플라톤의 문제'라는 것은 굳이 촘스키의 언어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 것이다. 그의 저작은 스승과 자신의 일체감이 완연히 묻어나는 초기편에서부터 자신의 철학이 완성되는 후기 철학편에  이르기까지 읽는 사람에게 시대를 초월한 물음들을 던지게 만든다. 포스트 구조주의가 꽃피면서, 들뢰즈와 푸코 그리고 바디우에 이르기까지  한때는 누가 플라톤주의니, 또는 반플라톤이니 하는 말들이 무성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것이 또한 플라톤주의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품었던 철학의 문제가 지금까지도 해결불가능한 아포리아라는 것, 아니 철학 자체를 아포리아로 정의하고 보편적 정의(horismos katholou)를 희구했다는 것에 있다.

 

과연 '보편적'인 학문으로서의 철학, 즉 보편학은 가능할 것인가? 형상과 이데아는 어떤 자체(auto)로 존재하는 대상을 적중시킬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부정적인 답을 할 수밖에 없는 정신사적 상황 속에 살고 있음은 분명하다. 일정정도의 비난을 무릅쓸 각오를 하지 않으면 상식을 벗어나 '보편성'을 주장할만큼 배짱 있는 철학자는 이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자신없음의 한켠에는 과학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고, 또다른 한켠에는 정치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과학은 철학의 사유를 어떤 망상증으로 치부하기 일쑤고 정치는 철학의 형이상학적 비현실성을 비웃기 일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둘 모두 자신의 기반이자 전체 생존의 전제로 '철학적 물음'을 비켜가기는 힘들다. 즉 '존재'(einai)에 대한 물음, '정의'(dikaiosyne)에 대한 물음은 과학이나 정치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바로 그 '본질'을 의문에 부치는 작업이며, 이 작업자체와 과정은 철학만이 이끌어갈 수 있다. 과학자와 정치가들 자신도 이런 의문을 던지는 순간 자신의 존재근거를 다시 캐묻는 것이고 그것이 곧 철학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기만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플라톤은 아마 미래에도 자신의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그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한평생 지혜를 갈고 닦은, 그래서 스스로 영혼을 돌본 자는 불멸의 영애를 가질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성'이라기 보다는 스스로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진리'를 지키고자 했던 그 '의지'의 위대함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진리에의 의지'가 사소해진 오늘날이라 하더라도 그 의지가 위대하다는 것은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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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서광사, 2003

 

플라톤 (Platon, BC.427-347)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객관적 관념론의 창시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귀족 출신. 40세경 아테네 교외의 아카데미아에 학교를 열어 교육에 임하였으며, 또한 많은 저작(30권이 넘는 대화편)을 썼다. 그의 철학은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당시의 유물론자 데모크리토스의 사상과 대립하였다.

 

그는 유명한 이데아설을 제창, 이데아(혹은 eidos=형상)는 비물질적, 영원, 초세계적인 절대적 참실재이며 이에 대하여 물질적, 감각적인 존재는 잠정적, 상대적이고, 이 감각에 호소하는 경험적인 사물의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 모상(模相)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내세웠다. 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세계 영혼이며, 인간의 영혼은 세계 영혼이 주재하는 이데아계에 있던 것으로 이 영혼은 불멸(不滅)이며 이데아를 상기하는 것에서 진정한 인식이 얻어진다고 하였다.

 

감각적 지식은 단순한 '억견'(doxa)에 지나지 않고 영혼에 의한 지적 직관으로써 상기되는 것이 참지식으로, 이들 양자 사이에는 합리적 지식인 수학적 대상의 지식이 있다. 이때 그는 개념적 인식에 대하여 변증법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점차 일반적인 개념으로 전진하여, 가장 일반적인 것에 이르는 과정과, 이 발전적 개념으로부터 점차 일반성의 낮은 단계로 하향(下向)하는 2개의 과정을 취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인간에게는 육체에 임시로 머물고 있는 영혼에 의해 이데아계를 인식하는 곳에 인간의 최고의 기쁨이 있으며, 철학자는 현실 세계를 이 이상에 근접(近接) 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는 아테네 귀족의 대표로서 이상적 귀족국가의 구상을 내놓고 철학자에 의한 지배를 제창하여 이 지배자 아래에 군인이 있고 그 아래에 상인이 있는 계층을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가 영혼에는 이성적, 의기적(意氣的), 욕정적(欲情的)인 것이 있다고 한 것에 대응한다. 플라톤의 철학은 그 후 계속 관념론 철학에 강력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철학사전], 중원문화

 

 

차례

 

머리말

일러두기

 

<에우티프론> 편

해제

대화자들

목차

 

I. 시작하는 대화(2a~5d)

1. 에우티프론이 소크라테스가 기소된 이유를 들음(2a~3e)

 

2. 에우티프론이 자기 아버지를 살인죄로 기소하게 된 경위를 소크라테스가 들음(3e~4e)

 

3. 소크라테스가 에우티프론에게 ‘경건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청함(4e~5d)

 

II. '경건함‘에 대한 첫 번째 강의: 사례 열거를 통한 의미 규정의 잘못(5d~6e)

1. 에우티프론이 살인, 성물 절취 따위의 올바르지 못한 것에 대한 기소와 같은 사례를 들어, 이를 ‘경건한 것’이라 말함(5d~6c)

2. ‘경건함’에 대한 물음은 그것의 한두 가지 사례가 아닌, 그것의 ‘특성’ 자체에 대한 것임을 환기시킴(6c~11b)

 

III. 두 번째 정의와 이에 대한 검토(6e~11b)

1. ‘경건함’은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 이에 대한 검토(6e~9c)

2. ‘경건함’은 ‘모든 신의 사랑을 받는 것’; 이에 대한 검토(9d~11b)

3. ‘모든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경건함’의 우유성일 뿐 본질이 아님이 지적됨(11a~b)

 

IV. 맥이 빠진 에우티프론에게 소크라테스가 협력을 약속하며 성원을 함(11b~e)

 

V. 세 번째 정의와 이에 대한 검토(11e~14a)

1. 올바름의 한 부분인 경건함(신성함): 최근류(最近類)와 종차(種差)(12c~e)

2. ‘경건함’은 신들에 대한 섬김이다.

 

VI. 네 번째 정의와 이에 대한 검토(14a~15c)

1. ‘경건함’은 신들한테 제물을 바치고 기원을 하는 데 대한 일종의 앎이다.

2. ‘경건함’은 신들에게 만족스런 것(마음에 드는 것)들을 말하고 행하는 것: ‘신들한테 사랑받는 것’이라는 두 번째 정의로 되돌아감.

 

VII. 대화의 종결(15b~16a)

1. ‘경건함’이 무엇인지를 처음부터 다시 고찰할 것을 소크라테스가 제의함.

2. 이를 에우티프론이 훗날로 미룸.

 

 

<소크라테스의 변론> 편

해제

목차

I. 소크라테스의 자기 변론(17a~35d)

1. 법정에 처음 서는 늙은이의 말투에 대한 이해를 구함(17a~18a)

2. 고발인들을 두 부류로 나눔(18a)

3. 법정 고발 이전에 자신에 대한 선입관을 갖게 한 최초의 고발인들과 이들에 대한 변론(18b~24b)

1) 자신을 자연에 대한 탐구자로 잘못 말함(19a~d)

2) 자신을 소피스테스로 잘못 앎(19d~20a)

4. 자신에 대한 비방들을 생기게 한 특이한 일과 그 이후의 행각(20c~24a)

1) 델피 신탁의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는 없다”는 응답을 전해 들음(20c~21a)

2) 신탁의 응답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러 나섬(21b~22e)

(1) 정치인들과의 대화에서 확인한 것(21c~e)

(2) 시인들과의 대화에서 확인한 것(22a~c)

(3) 장인들과의 대화에서 확인한 것(22d~e)

3) 이들에 대한 캐물음으로 증오심을 사는 한편으로 자신이 현자로 소문이 남(23a)

4) 신탁의 응답이 뜻하는 바를 확인함: 무지의 자각이 곧 지혜임을 깨달음(23b)

5) 한가로운 젊은이들이 자신의 흉내를 내어 잘난 사람들에게 캐묻고 다님(23c)

6) 이로 인해 망신당한 자들이 자기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며 신들을 믿지 않는다고 비난함(23d~e)

5. 멜레토스 등 나중의 고발인들에 대한 신문(24b~28a)

1)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과 관련하여(24b~26a)

2) 나라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죄목과 관련해서(26b~27e)

6. 신이 지시한 사명에 대한 의식(28a~34b)

1) 자신에게 부과된 여러 가지 사명(28a~31c)

2) ‘영적인 것’ 또는 ‘영적인 알림’에 대하여(31c~d)

3) 한 정치적 사건에 대한 저항(32a~e)

4) 자신의 행각에 대한 증언을 요구함(33b~c)

7. 자신의 변론 태도와 관련해서: 무죄 판결을 애걸하지 않는 까닭(34b~35d)

 

II. 사형 구형에 대한 반대 제의를 벌금형으로 하는 것과 관련된 진술(35e~38b)

 

III. 최후진술(38c~42a)

1. 사형판결의 결과에 대해(38c~39b)

2. 유죄판결을 내린 이들에 대해(39c~d)

3. 무죄 방면을 위해 투표한 이들에 대해(39e~41d)

4. 모두를 향한 부탁과 작별(41d~42a)

 

 

<크리톤> 편

해제

목차

I. 대화의 시작(43a~44b)

 

II. 크리톤이 탈옥을 종용함(44b~46a)

1. 친구를 잃고 돈이 아까워 친구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많은 사람(다중)이 나쁜 평판도 듣게 될 일을 걱정하여(44b~45a)

2. 다른 나라로 가는 일이 다 잘될 것임을 말함(45b~c)

3. 자식들의 양육과 교육 문제를 생각할 것을 권유함(45c~d)

4. 친구를 어떻게든 구해내지 못한 소심함을 탓할 사람들의 평판을 두려워함(45e~46a)

 

III. 소크라테스의 대답(46b~54e)

1. 크리톤의 권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46b~49a)

1) 최선의 것으로 판단되는 원칙의 준수를 말함(46b~c)

2) 많은 사람의 의견들(평판들)에 대하여(46c~47d)

3) 건강과 관련해서는 많은 사람의 의견 아닌 한 전문가의 의견이 중요함을 강조함(47d~48a)

4)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며, 이에는 많은 사람의 의견이 중요한 게 아님을 말함(48a~b)

2. 이에 근거하여 판단할 두 가지 준칙(49a~50a)

1) 어떤 식으로든 고의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아니 된다949a~e)

2) 합의한 것이 올바른 것인 한, 이는 이행해야만 한다(49e~50a)

3. 소크라테스와 의인화된 법률 및 시민 공동체 사이의 대화(50a~54d)

대화자들

 

 

<파이돈> 편

해제

목차

I. 대화에 들어가기에 앞서(57a~61c)

1. 소크라테스와의 담화 내용을 소개하기에 앞선 첫머리 대화957a~59c)

2. 감옥으로 소크라테스를 찾아간 친구와 제자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눔(59c~61c)

 

II. 죽음과 관련된 논의(61c~69e)

1. 자살에 대해 논의함(61c~62e)

2.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와 죽음(63a~69e)

1) 죽음이 몸에서 혼이 벗어나는 것인 한, 그리고 철학자가 몸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한, 그는 죽음을 추구해 온 것임을 환기시킴(64a~e)

2) 혼 자체만으로 얻게 되는 지혜와 참된 훌륭함(덕): 혼의 순수화: 사후의 문제와 관련된 낙관적 희망(65a~69e)

 

III. 혼의 불멸성에 대한 논의(69e~107b)

1. 케베스가 혼의 불멸성이 증명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함(69e~70c)

2. 혼의 불멸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첫 번째 논변(70c~77d)

1) 대립되는 것들은 대립되는 것들에서 생긴다는 원리 또는 윤회설에 입각한 논변(70c~72e)

2) 상기설에 입각한 논변: 배움은 상기함이며, 그 앎의 대상들은 ‘아름다움 자체’나 ‘좋음 자체’와 같은 형상들이다(72e~77a)

3) 시미아스와 케베스는 이를 반쪽의 논증이라 하며 나머지 논증까지 요구함; 태어나기 전의 혼이 있었다 해서 사후에도 그것이 있다는 게 논증되는 것은 아니라며(77b~78a)

3. 혼의 불멸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논변: 닮음, 유사성에 의한 논증(78b~84b): 있는 것들의 두 종류 중에서 형상을 닮은 혼은 죽지 않는 것임을 말함.

4. 두 번째 논변에 대한 시미아스와 케베스의 의문 제기(84d~88b)

1) 시미아스의 의문 제기: 조율된 조화 현상에 빗댄 혼(85b~86d)

2) 케베스의 의문 제기: 여러 차례 거듭나더라도, 마지막 몸보다는 오래가지 못할지 모르는 혼(86e~88b)

5. 막간(88c~91c)

6. 시미아스의 의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91c~95a)

7. 케베스의 의문(95b~96a)

1) 그 요지의 재정리:혼은 전적으로 죽지 않으며 파되될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해 달라는 요구(95b~e)

2)케베스의 요구는 결국 사물들의 생성과 소멸 전반에 관련된 원인 구명을 요구하는 것이 됨(95e~96a)

8. 케베스의 요구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자연 탐구와 관련된 자신의 편력과 자신이 택한 차선의 방법에 대해서 말하게 함(95e~102a)

9. 혼의 불멸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논변: 형상 이론에 입각해 논변을 함(102a~107b)

 

IV. 신화: 저승 또는 참된 지구에 대한 이야기(107c~115a)

 

V. 소크라테스의 최후 장면과 그의 죽음(115a~118a)

 

 

관련 사진

참고 문헌

고유명사 색인

내용 색인

   

<에우티프론> 편

 

해제

대화자들

 

I. 시작하는 대화(2a~5d)

1. 에우티프론이 소크라테스가 기소된 이유를 들음(2a~3e)

 

2. 에우티프론이 자기 아버지를 살인죄로 기소하게 된 경위를 소크라테스가 들음(3e~4e)

 

3. 소크라테스가 에우티프론에게 ‘경건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청함(4e~5d)

 

II. '경건함‘에 대한 첫 번째 강의: 사례 열거를 통한 의미 규정의 잘못(5d~6e)

1. 에우티프론이 살인, 성물 절취 따위의 올바르지 못한 것에 대한 기소와 같은 사례를 들어, 이를 ‘경건한 것’이라 말함(5d~6c)

 

2. ‘경건함’에 대한 물음은 그것의 한두 가지 사례가 아닌, 그것의 ‘특성’ 자체에 대한 것임을 환기시킴(6c~11b)

 

III. 두 번째 정의와 이에 대한 검토(6e~11b)

1. ‘경건함’은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 이에 대한 검토(6e~9c)

[8c]소크라테스: 에우티프론, 사람들이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 걸 시인하면서도, 그래 그걸 시인해 놓고서도, 그렇더라도 자신들이 처벌을 받아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하오?

에우티프론: 결코 그리 하지는 않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그들이 온갖 짓과 온갖 말을 다 하지는 않소. 자신들이 비록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긴 했지만, 처벌을 받아서는 아니 된다는 걸 감히 말한다거나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나는 생각하오. 다만 자신들이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단는 게 내 생각이오. 아니 그렇소?

에우티프론: 참된 말씀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 자가 벌을 받아서는 아니 된다는 그 주장을 그들이 하는 게 아니라, 아마도 이걸, 즉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 쪽이 누구이며 무슨 짓을 했고 또 언제 했는지를 두고 말다툼을 하는 것일 게요.[8d]

 

[R-Commentary] 다시 말해 ‘올바름’이라는 실체적이고 불변하는 ‘기준’(idea)이 있으며, 사람들은 보통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스스로는 그것을 어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데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고 그것에 대한 ‘잘못된 정당화’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여기서 horismos katholou로서의 보편적 정의를 내리기 위해 ‘행위’와 ‘판단’ 쪽에 오류 가능성을 두는 셈이다. 과연 그럴 것인가?

 

2. ‘경건함’은 ‘모든 신의 사랑을 받는 것’; 이에 대한 검토(9d~11b)

[10a]소크라테스: (...) 우리는 ‘운반되는 [어떤] 것’과 ‘운반하는 [어떤] 것’, ‘이끌리는 것’과 ‘이끄는 것’,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거니와 (...)

(...)

[10b]그러니까, 그것이 보이기 때문에, 이 때문에 그것이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이 보이기 때문에, 이 때문에 그것은 보이는 것이오. 또한 그것이 이끌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 때문에 그것이 이끌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끌리기 때문에, 이 때문에 그것은 이끌리는 것이오.

(...)

[10c]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오. 즉 만약에 어떤 것이 생성되거나(무엇으로 되거나) 무엇을 겪는다면, 그것이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생성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생성되기 때문에 생성되는 것이오. 또한 그것이 겪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겪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겪기 때문에 그것은 겪는 것이오. (...) 즉 그것이 사랑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는 이들한테서 사랑을 받는 게 아니라, 그것이 사랑받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받는 것이라는 게 말이오.

(...)

[10d]그러니까 그것이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지, 그것이 사랑을 받기 때문에 즉 이 이 때문에 경건하지는 않겠소? (...) 그렇다면 에우티프론! 당신이 말하듯,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경건한 것이 아니고, 경건한 것이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도 아니니, 둘은 서로 다른 것이오.

 

[R-Commentary] 생성과 주체, 또는 겪는 것과 겪음을 당하는 것, 그것은 다르다. 이 복잡한 논변은 뒤에 이어질 ‘본질’과 ‘속성’(우유성)의 관계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플라톤이 각각의 현존에 대해 실체(ousia)를 분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

(...)

[10e]경건한 것은 이 때문에, 즉 그것이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받게 되지, 그것이 사랑받기 때문에 경건하지는 않다는 데 우리가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오. (...) 반면에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신들한테서 사랑을 받기 때문에, 즉 바로 이 ‘사랑받음’(phileisthai)으로 인해서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지, 그것이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즉 이 때문에 사랑을 받게 되는 게 아니라는 데도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오.

 

3. ‘모든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경건함’의 우유성일 뿐 본질이 아님이 지적됨(11a~b)

[11a]당신은 경건함(경건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받고서는, 내게 그것의 본질(ousia)을 밝히려고 하지는 않고, 그것과 관련된 어떤 성상(性狀, 偶有性, 속성: pathos)을, 말하자면 이 경건함이 처한 상태를, 곧 모든 신한테 사랑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소.

 

☞ ousia와 pathos를 대비 진술한 것은 플라톤의 문헌 중 이곳이 처음이다. ousia는 이전에는 ‘자산’이란 뜻의 일상어였는데, 자연철학자들로부터 시작해서 플라톤에 이르러 완연한 철학적 의미를 띄게 된다. 이 낱말은 ‘자산’(property, substance)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본질’(essence), ‘실재성’(reality), 존재(being) 등을 의미한다. 이 대화편에서는 플라톤의 중기 이후 대화편과는 달리 ‘실재성’이나 ‘존재’의 의미보다, ‘본질적 정의’의 단면을 드러낼 뿐이다. 흔히 ‘실체’로 번역되는 substance는 라틴어 substantia에서 유래되고, 이는 바로 ousia에 상응한다.

 

IV. 맥이 빠진 에우티프론에게 소크라테스가 협력을 약속하며 성원을 함(11b~e)

 

V. 세 번째 정의와 이에 대한 검토(11e~14a)

1. 올바름의 한 부분인 경건함(신성함): 최근류(最近類)와 종차(種差)(12c~e)

 

2. ‘경건함’은 신들에 대한 섬김이다.

 

VI. 네 번째 정의와 이에 대한 검토(14a~15c)

1. ‘경건함’은 신들한테 제물을 바치고 기원을 하는 데 대한 일종의 앎이다.

[14d]그렇다면 옳게 청을 한다는 것은 그들한테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그들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하오? (...)

[14e]그와는 달리, 옳게 바친다는 것은 우리한테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그들에게 보답으로 바치는 것이겠소? 어떤 사람에게 전혀 필요로 하지도 않은 그런 것을 그에게 선물로 바친다는 것은 어쩌면 제대로 알고서 하는 짓(technikon)이 아니겠기 때문이오.

(...)

그렇다면, 에우티프론! 경건은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일종의 거래 기술(교역술: emporikē, technē)일 것이오.

 

2. ‘경건함’은 신들에게 만족스런 것(마음에 드는 것)들을 말하고 행하는 것: ‘신들한테 사랑받는 것’이라는 두 번째 정의로 되돌아감.

 

VII. 대화의 종결(15b~16a)

1. ‘경건함’이 무엇인지를 처음부터 다시 고찰할 것을 소크라테스가 제의함.

 

2. 이를 에우티프론이 훗날로 미룸.

 

<소크라테스의 변론> 편

 

해제

 

I. 소크라테스의 자기 변론(17a~35d)

1. 법정에 처음 서는 늙은이의 말투에 대한 이해를 구함(17a~18a)

 

2. 고발인들을 두 부류로 나눔(18a)

 

3. 법정 고발 이전에 자신에 대한 선입관을 갖게 한 최초의 고발인들과 이들에 대한 변론(18b~24b)

1) 자신을 자연에 대한 탐구자로 잘못 말함(19a~d)

 

2) 자신을 소피스테스로 잘못 앎(19d~20a)

 

4. 자신에 대한 비방들을 생기게 한 특이한 일과 그 이후의 행각(20c~24a)

1) 델피 신탁의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는 없다”는 응답을 전해 들음(20c~21a)

[20d]아테네인 여러분! 제가 이 이름(명성)을 얻게 된 것은 어떤 지혜(sophia)로 인해서랍니다. 그러면 이건 어떤 지혜이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인간적인 지혜일 것입니다.

 

2) 신탁의 응답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러 나섬(21b~22e)

(1) 정치인들과의 대화에서 확인한 것(21c~e)

(2) 시인들과의 대화에서 확인한 것(22a~c)

(3) 장인들과의 대화에서 확인한 것(22d~e)

 

3) 이들에 대한 캐물음으로 증오심을 사는 한편으로 자신이 현자로 소문이 남(23a)

 

4) 신탁의 응답이 뜻하는 바를 확인함: 무지의 자각이 곧 지혜임을 깨달음(23b)

 

5) 한가로운 젊은이들이 자신의 흉내를 내어 잘난 사람들에게 캐묻고 다님(23c)

 

6) 이로 인해 망신당한 자들이 자기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며 신들을 믿지 않는다고 비난함(23d~e)

 

5. 멜레토스 등 나중의 고발인들에 대한 신문(24b~28a)

1)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과 관련하여(24b~26a)

[26a]그러나 내가 본의 아니게 그들을 타락시키고 있다면, 법은 그런 잘못들로 이리로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붙잡고서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이오. 내가 알아듣게 될 경우에는, 내가 본의 아니게 하는 것이면 그만두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

 

2) 나라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죄목과 관련해서(26b~27e)

[26d]보시오, 멜레토스! 그대는 자신이 아낙사고라스를 고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그대는 그래 여기 이분들을 그처럼 무시하여, 클라조메나이 사람인 아낙사고라스의 책이 그런 주장들로 꽉 차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문맹이라고 생각하오?

 

6. 신이 지시한 사명에 대한 의식(28a~34b)

1) 자신에게 부과된 여러 가지 사명(28a~31c)

[29a]여러분! 실로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현명하지도 않으면서 현명한 것으로 행각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건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니까요. 왜냐하면 아무도 죽음을 모르며, 그것이 인간에게 좋은 모든 것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것인지조차도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나쁜 것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라도 하는 듯이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어찌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안다고 생각하는 그 비난받을 무지가 아니겠습니까?

 

[R-Commentary] 이 진술은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의 언급과 너무나 닮았다. 과연 [파이돈]의 소크라테스와 [변론]의 소크라테스가 ‘죽음’에 대해 바라보는 관점은 왜 다른 것인가?

 

☞이와 관련해서 루크레티우스의 다음 언급 참조: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와 전혀 관련이 없다,

정신의 본성이 필멸적인 것으로 드러나 있는 한.

(...)

우리가 존재하지 않게 될 때, 서로 하나로 합쳐져

우리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바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일어날 때,

그때는 분명코, 이미 존재하지 않을 우리에게, 전혀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며, 그 무엇도 감각을 일으킬 수 없으리라

(...)

죽음 속에는 우리가 두려워할 게 전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비참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또 일단 불멸의 죽음이 필멸의 생명을 데려가버리면,

그가 언젠가 태어났었든, 아무 때도 태어나지 않았었든, 이제는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을.”(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830~869행)

 

[30c]만일에 여러분께서 제 스스로 말씀드리고 있는 그런 사람인 저를 사형에 처하신다면, 여러분께선 저를 해치시기보다도 여러분 자신들을 더 해치시게 될 것이라는 걸 잘 아시고 계십시오. 멜레토스도 아니토스도 전혀 저를 헤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30d]저는 한결 나은 사람이 한결 못한 사람에 의해서 해를 입는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2) ‘영적인 것’ 또는 ‘영적인 알림’에 대하여(31c~d)

 

3) 한 정치적 사건에 대한 저항(32a~e)

[32c]제가 구금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여, 올바르지 못한 결정을 내리려는 여러분 편이 되느니보다는 오히려 법(nomos)과 올바른 것(to dikaion)의 편이 되어 온갖 위험을 무릅써야만 한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이 나라가 아직은 민주 체제였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R-Commentary] 소크라테스의 이 언급 마지막 문장을 잘 봐야 한다. nomos는 민주체제일 때 위험을 무릅쓰고 지킬만 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아테네’에서 nomos는 불합리할 경우 지킬만한 권위를 시민들에게 제기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새겨야 한다.

 

4) 자신의 행각에 대한 증언을 요구함(33b~c)

 

7. 자신의 변론 태도와 관련해서: 무죄 판결을 애걸하지 않는 까닭(34b~35d)

 

II. 사형 구형에 대한 반대 제의를 벌금형으로 하는 것과 관련된 진술(35e~38b)

 

III. 최후진술(38c~42a)

1. 사형판결의 결과에 대해(38c~39b)

[38d]죽음을 피하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비천함(poēria)을 피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보다도 더 빨리 내닫기 때문입니다.

 

2. 유죄판결을 내린 이들에 대해(39c~d)

 

3. 무죄 방면을 위해 투표한 이들에 대해(39e~41d)

[40c]죽는다는 것은 둘 가운데 하나이겠기 때문입니다. 그건 이를테면, 아무 것도 아닌 것(mēden)이어서, 죽은 자는 아무 것에 대한 아무 감각(aisthēsis)도 갖지 않거나, 또는 전해 오는 바대로, 그것은 일종의 변화(metabolē)이며 혼(psychē)에는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의 이주(metoikēsis)일테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정녕 아무 감각도 없는 상태이기는 하나, 그것이 이를테면, 잠자는 사람이 아무 꿈도 꾸지 않을 경우의 수면상태(hypnos)라면, 죽음은 놀라운 이득일 것입니다. (...) [40e]그러므로 만약에 죽음(thanatos)이 그런 것이라면, 저로서는 그것을 이득이라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시간이란 것도 바로 이처럼 하룻밤보다 전혀 더 길 것이 없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죽음이라는 것이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그리고 전해 오는 말이, 즉 죽은 자들이 그래서 모두 거기에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재판관 여러분, 이보다 더 크게 좋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41a]만일에 누군가가 스스로 재판관들이라고 주장하는 이곳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저승(하데스)에 이르러, 진짜 재판관들을, 즉 그곳에서도 재판을 한다고 하는 바로 그 재판관들인 미노스와 라다만티스 및 아이아코스 그리고 트리프톨레모스를, 그리고 또 그 밖의 분들로, 반신 반인들 가운데서도 자신들의 일생을 통해서 올발랐던 분들을 그가 보게 된다면, 그런 경우에도 이 떠나감이 하찮은 것일까요? 또는 이번에는 오르페우스, 무사이오스, 헤시오도스 그리고 호메로스와 접하게 되는 대가로 여러분 가운데 누구라면 얼마를 지불할까요? 만약에 이것이 진실이라면, 몇 번이고 죽고 싶은 마음이니까요. (...) [41b]그리고 무엇보다도 굉장한 것은, 제가 이곳 사람들한테 했듯, 그곳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지혜롭고 또 누가 스스로는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지, 그들에게 캐묻고 시험을 하면서 지내는 것입니다.

 

4. 모두를 향한 부탁과 작별(41d~42a)

[41d]재판관 여러분! 여러분 또한 죽음에 대해서는 희망차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한 가지는 진실이라고 생각해야만 하고요. 즉 선량한 사람에게는, 그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간에 그 어떤 나쁜 일도 없으며, 또한 이 사람의 일들을 신들이 소홀히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말입니다.

 

<크리톤> 편

 

해제

[200]“정녕 이런 조건으로[철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 저를 방면하려 하신다면, 저는 여러분께 말할 것입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반기며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보다는 오히려 신께 복종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리고 할 수 있는 동안까지는, 지혜를 사랑하는(철학하는) 것도, 여러분께 충고를 하는 것도, 그리고 언제고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 만나게 되는 사람한테 이 점을 지적하는 것도 그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29c~d) 그는 여기서 당당하게 나라에 대한 불복종을 공언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더 상위의 것이라 할 델피의 신에 대한 복종을 내세우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Santas는 지난 1세기 동안 제기되어 온 문제로서, 《변론》편과 《크리톤》편 사이에 어떤 불일치가 있지 않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걸로 말하며, 퍽 재미있는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 한 구절을 보자. “우리는 《변론》편에서의 가정적(假定的)인 경우와 《크리톤》편에서의 현실적인 경우를 대하는 데 잇어서 소크라테스가 일관성이 없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변론》편에서는 가정적인 경우에 있어서의 소크라테스의 입장은 시민적 저항, 또는 양심적 거부의 한 사례이다. … 반면에 감옥에서 [201]탈출함은 법률에 대한 은밀하고 회피적인 불복 행위이며, … 법률과 나라를 해치는 행위이다. … 무엇보다도 우선 두 작품의 극적인 계기들이 매우 다른다. 《변론》편에서는 그가 자기의 온 생애이기도 했던 자기 일에 대한 공개 재판을 받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이는 오랜 세월 동안의 그에 대한 모든 비방에 대항하여 자신을 변호하고, 같은 시민들에게 자기가 하고 있던 일에 대해서,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던 이 일에 가치를 부여하게 될 … 적절한 때며 아마도 마지막 시점이다. … 그러나 《크리톤》편에서는 이 모든 것이 지난 일이다. 그의 일이 옳고 좋은 것이라는 걸 아테네인들에게 납득시키는 시간은 이미 지나갔다. 이제는 그의 일과 그의 삶이 의거했던 그 원칙들과 그가 온 생애에 걸쳐 택하였던 그리고 법정에서 택하였던 선택들을 지키는 것만 남아 있을 뿐이다.”(54~5면)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그런 원칙의 준수와 그런 선택은 현실의 조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일생을 통해 개선하여 이룩하고자 한 조국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R-Commentary] 이 문제는 아마 영원히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박종현 선생은 여기서 인용한 Santas의 의견과는 좀 다르게 소크라테스가 ‘조국의 실정법’보다 ‘자신이 원하는 어떤 법’을 원했다고 본다.

 

대화자들

I. 대화의 시작(43a~44b)

 

II. 크리톤이 탈옥을 종용함(44b~46a)

1. 친구를 잃고 돈이 아까워 친구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많은 사람(다중)이 나쁜 평판도 듣게 될 일을 걱정하여(44b~45a)

[44c]소크라테스: 하지만 여보게 크리톤! 왜 우리가 많은 사람의 의견(평판)에 대해서 그처럼 마음을 쓰게 되지? 더 종중해야 할 가장 합리적인 사람들은 이 일이 의당 그렇게 되어야 하듯, 그런 식으로 처리되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일세.

 

2. 다른 나라로 가는 일이 다 잘될 것임을 말함(45b~c)

 

3. 자식들의 양육과 교육 문제를 생각할 것을 권유함(45c~d)

 

4. 친구를 어떻게든 구해내지 못한 소심함을 탓할 사람들의 평판을 두려워함(45e~46a)

 

III. 소크라테스의 대답(46b~54e)

1. 크리톤의 권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46b~49a)

1) 최선의 것으로 판단되는 원칙의 준수를 말함(46b~c)

2) 많은 사람의 의견들(평판들)에 대하여(46c~47d)

3) 건강과 관련해서는 많은 사람의 의견 아닌 한 전문가의 의견이 중요함을 강조함(47d~48a)

4)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며, 이에는 많은 사람의 의견이 중요한 게 아님을 말함(48a~b)

[48b]그리고 이것 또한 가장 중히 여겨야 할 것은 사는 것(to zēn)이 아니라 훌륭하게(잘) 사는 것(to eu zēn)이라고 함이 우리에게 있어서 여전히 타당한지 아니면 그렇지 못한지 다시 생각해 보게나.

(...) ‘훌륭하게’(잘: eu)는 ‘아름답게’(훌륭히, 멋지게: kalōs) 및 ‘올바르게’(dikaiōs)와 동일한 것 (...)

 

2. 이에 근거하여 판단할 두 가지 준칙(49a~50a)

1) 어떤 식으로든 고의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아니 된다949a~e)

2) 합의한 것이 올바른 것인 한, 이는 이행해야만 한다(49e~50a)

 

3. 소크라테스와 의인화된 법률 및 시민 공동체 사이의 대화(50a~54d)

[51e: 의인화된 법률의 대사]그대들 가운데 누구든, 우리가 재판을 하거나 또는 다른 일들에 있어서 나라를 경영하는 방식을 보고서도 머무른다면, 우리는 이미 이 사람이, 우리가 시키는 것들은 이행하기로 우리와 사실상 합의한 것이라고 보아, 또한 복종하지 않는 자는 삼중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보고, 그건 자기를 태어나게 한 우리에게 불복한 때문이요, 자기를 양육한 우리에게 불복한 때문이며, 그리고 우리에게 복종하기로 합의하고서도 복종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우리가 무언가 잘못할 경우에 우리를 납득시키지도 않기 때문이지.

(...) [52d]시민생활을 함에 있어서 그대가 따르기로 우리와 맺은 계약(synthēke) 사항들과 합의사항들을 어기고서 도망하려 함으로써, 그대는 가장 미천한 노예나 함직한 바로 그런 짓거리들을 하고 있느니라.

 

[R-Commentary] 소크라테스가 의인화한 이 ‘법률’의 대사를 살펴보자면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결코 국가와 법에 대한 ‘맹목적 복종’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더 명백히 알 수 있다. ‘합의’나 ‘계약’을 깨는 것은 ‘미천한 짓’이라는 전제가 이 대사에는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실상 이 합의는 ‘암묵적 합의’로서 그것의 근본적인 정당성 여부는 소크라테스가 이 순간에 더 이상 묻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충분히 ‘납득시키’려고 노력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이 논변은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와 논변의 중요한 근거 하나를 누락하고 있는 게 되는 샘이다. 고의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54b]자식들도, 사는 것도, 또는 그 밖의 어떤 것도 올바른 것(to dikaion)보다 더 귀히 여기지 말라.

 

<파이돈> 편

해제

목차

I. 대화에 들어가기에 앞서(57a~61c)

1. 소크라테스와의 담화 내용을 소개하기에 앞선 첫머리 대화957a~59c)

 

2. 감옥으로 소크라테스를 찾아간 친구와 제자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눔(59c~61c)

[60e]지나간 나의 생애에 있어서 똑같은 꿈이 여러 차례에 걸쳐 내게 나타나서는,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똑같은 것들을 말하는 거야. ‘소크라테스여, 시가를 지어라, 그리고 이를 일삼아 하라’고 말하는 거야. (...) 그래서 이 꿈은 이처럼 내가 해 오던 이 일을, 즉 시가를 짓도록 나에게 성원을 해주었네. 철학(philosophia)은 가장 위대한 시가(megistē mousikē)인데,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기 때문이지.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철학과 시가를 동일시하고 있지만 이 뒤에 곧 ‘통속적인 시가’를 지어 보았노라고도 한다.]

 

II. 죽음과 관련된 논의(61c~69e)

1. 자살에 대해 논의함(61c~62e)

 

2.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와 죽음(63a~69e)

1) 죽음이 몸에서 혼이 벗어나는 것인 한, 그리고 철학자가 몸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한, 그는 죽음을 추구해 온 것임을 환기시킴(64a~e)

[63e]진정으로 철학(지혜에 대한 사랑: philosophia)으로 생애를 보낸 사람은 내가 보기에는 죽음에 임하여 확신을 갖고 있으며, 또한 자기가 죽은 뒤에는 저승에서 최대의 좋은 것들을 얻게 될 것이라는 희망에 차 있을 것이 당연하다 (...)

[64a]철학에 옳게 종사하여 온 사람들은 모두가 다름 아닌 죽는 것[apothenēiskein=to die=dying]과 죽음[tethnanai=to be dead=being dead]을 스스로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실은 모르고 있는 것 같으이. 그러니,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며, 온 생애를 통하여 다름 아닌 그것을 열망해 오다가, 오래도록 스스로 열망도 하며 추구하여 오기도 하던 것이 막상 자기에게 닥쳐왔을 때는 성을 낸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짓일 것이네.

 

2) 혼 자체만으로 얻게 되는 지혜와 참된 훌륭함(덕): 혼의 순수화: 사후의 문제와 관련된 낙관적 희망(65a~69e)

[65c]적어도 혼이 가장 훌륭하게 추론을 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것들 중의 어떤 것도, 즉 청각도 또는 어떤 고통이나 즐거움도 혼의 주의를 돌려놓으면 괴롭히는 일이 없고, 혼이 몸과 결별하여 최대한으로 그 자체로만 있게 되며, 혼이 가능한 한 몸과 관계하지도 접촉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진실: to on)에 이르고자 하는 그때일 걸세.

 

[67c~d]순수화(정화: katharsis)는 (...) 혼을 몸에서 되도록 분리하고(chōrizein), 몸이 모든 부분에서 혼이 그 자체로만 합쳐 모이고 결집되게 하여, 현재에 있어서나 이후에 있어서나, 마치 사슬에서처럼 몸에서 혼을 풀려나게 해서, 가능한 한 혼이 그 자체로 홀로 살아가게끔 버릇을 들이는 것 (...)

 

[67d]이것이 실은 죽음이라 일컬어지는 것으로서, 몸에서의 혼의 풀려남(lysis)과 분리(chōrismos)가 아니겠는가?

(...) 혼을 풀려나게 하는데 언제나 가장 열심인 사람들은, 우리가 주장하듯, 오직 제대로 지혜를 사랑하는(철학하는) 사람들(hoi philosophountes)뿐이거니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철학자들: philosophoi)의 수련(meletēma)이란 것도 바로 이것, 즉 몸에서의 혼의 풀려남과 분리이겠지?

(...) [68a]누군가가 참으로 지혜(phronēsis)를 사랑하고, 같은 이 기대를, 즉 저승에서가 아니고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제대로 지혜를 접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기대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죽게 되매 성을 내며 그곳으로 가기를 기꺼워하지 않을까? (...) 그런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건 아주 불합리한 일이 아니겠는가?

(...) [68c]그러니까 절제(sōphrosynē)도, 많은 사람(다중: hoi polloi) 또한 그렇게 일컫는 것으로서, 욕망들과 관련해서 몹시 흥분한 상태로 되는 일이 없고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절도를 유지한다는 것도, 이 사람들만에, 즉 누구보다도 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혜에 대한 사랑(철학) 속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지 않겠는가?

 

III. 혼의 불멸성에 대한 논의(69e~107b)

1. 케베스가 혼의 불멸성이 증명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함(69e~70c)

2. 혼의 불멸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첫 번째 논변(70c~77d)

1) 대립되는 것들은 대립되는 것들에서 생긴다는 원리 또는 윤회설에 입각한 논변(70c~72e)

[70c]대립되는 것들(ta enantia)은 대립되는 것들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서도 생기지 않는 것인지 (...)

(...)[71d]살아있음에 대해 죽어있음이 대립되는 것 (...) 그것들은 서로한테서 생기고 (...)

 

2) 상기설에 입각한 논변: 배움은 상기함이며, 그 앎의 대상들은 ‘아름다움 자체’나 ‘좋음 자체’와 같은 형상들이다(72e~77a)

[74a]상기함은 닮은(유사한) 것들(homoia)로 해서 성립되기도 하지만, 닮지(유사하지) 않은 것들(anomoia)로 해서도 성립하는 게 아니겠는가? (...) 그러나 닮은(유사한) 것들로 해서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아무튼 상기하게 될 때는, 그가 이런 걸 아울러 겪게(경험하게) 되는 게, 즉 상기함의 실마리가 된 것이 그가 상기하게 된 것과 그 유사성(닮음: homoiotēs)에 있어서 어떤 점에서 부족한지 또는 아니한지를 생각하게 되는 게 필연적이지 않겠는가? (...) 짐작건대 우리는 같은(동일한: ison) 무엇인가가 있다고 보겠지? 나는 나무토막이 나무토막과, 돌이 돌과 같음을, 또 그런 등속의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 이외의 다른 무엇인가를, 즉 같음(동일함) 자체(auto to ison)를 말하고 있는 걸세. (...) [74b]우리는 이것에 대한 앎(지식: epistēmē)을 어디에서 얻게 되었는가? (...) [74d]누군가가 뭔가를 보고서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할 경우에, 즉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것이 다른 어떤 것과 같은 그런 것으로 되려고 하지만, [74e]그것과 같은 그런 것으로 되기에는 부족하기도 하고, 또한 될 수도 없거니와 훨씬 하찮은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경우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사람은, 이것이 닮기는 했으되(proseoikenai) 훨씬 모자란다고 그가 대비하여 말하고 있는, 그 대상을 먼저 알고 있었을 것임이 어쩌면 필연적일 거라는 데 대해 우리는 동의하고 있는가? (...) 그와 같은 일은 우리 또한 같은 것들(ta isa)과 같음 자체(auto to ison)와 관련해서도 겪었을(경험했을) 게야. (...) 따라서 우리가 처음에 같은 것들을 보고서, 이것들 모두가 같음(to ison)과 같은 그런 것으로 되려고 하지만 훨씬 모자란다는 생각을 하게 된 때의 그 시간보다는 이전에 우리가 같음을 먼저 알고 있는(proeidenai) 게 필연적일세.

 

3) 시미아스와 케베스는 이를 반쪽의 논증이라 하며 나머지 논증까지 요구함; 태어나기 전의 혼이 있었다 해서 사후에도 그것이 있다는 게 논증되는 것은 아니라며(77b~78a)

 

3. 혼의 불멸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논변: 닮음, 유사성에 의한 논증(78b~84b): 있는 것들의 두 종류 중에서 형상을 닮은 혼은 죽지 않는 것임을 말함.

[80e]바르게 지혜를 사랑하는(철학하는) 것 (...) 가벼운 마음으로 죽는 것 (...) 죽음의 수련 (...)

 

[81a]혼은 자기와도 닮은 것인(to homoion) 보이지 않는 것(to aides), 즉 신적이며 죽지 아니하고 지혜롭게 하는 것이 있는 데로 떠나가, 이곳에 이른 혼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니 (...) 그렇다면 이들 중에서도 가장 행복한 자들은 그리고 가장 좋은 곳으로 가는 자들은 평민적이고 시민적인 훌륭함(덕)(hē dēmotikē kai politikē aretē)을 닦은 이들이 아니겠는가? [82b]바로 이것을 사람들이 절제(건전한 마음 상태; sōphrosynē) 및 올바름(정의: dikaiosynē)이라 일컫는데, 이는 철학이나 지성(nous)을 거치지 않은 채 습관(ethos)과 단련(수련: meletē)을 통해서 생기는 것이네만.

 

[84a]오히려 그[철학자]의 혼은 추론(헤아림: logismos)을 따르며 언제나 이에 열중함으로써 그것들에 대해 평온함을 갖추고, 참된 것(to alēthes)과 신적인 것(to theion), 그리고 의견(doxa)의 대상이 아닌 것(to adoxaston)을 바라보며, 이런 것에 의해 양육되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할뿐더러, 죽어서도, 동류의 것(to syngenes)과 그와 같은 것한테로 가서, 인간적인 나쁜 것들에서 해방될 것으로 생각하네. (...) 그의 혼이 (...) 사방으로 흩날리어 날아가 버리고 아무 것도 어디에고 남아 있지 않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혼이 두려워할 위험한 사태는 전혀 없으이.

 

4. 두 번째 논변에 대한 시미아스와 케베스의 의문 제기(84d~88b)

1) 시미아스의 의문 제기: 조율된 조화 현상에 빗댄 혼(85b~86d)

[85e][시미아스의 반론]어쨌든 제게는 이런 점에서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리라와 현들의 조화(harmonia)에 관련해서도 같은 주장을 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죠. 즉 조율된 조화란 볼 수 없고(aoraton) 물질적이지 않으며(asōmaton) 아주 아름다운(pankalon) 어떤 것이며 조율된 리라에 있어서 신적인 것(theion)이지만, [86a]리라 자체와 현들은 물체들(sōmata)이며 물질적인 성질의 것들이고 복합적인 것들이요, 지상의 것들이며 죽게 마련인 것(to thnēton)과 동류인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 현들이 툭 끊기면, 리라와 현들이, 사멸하는 성질의 것들인 터에, 여전히 존재할 아무런 방도도 없지만, [86b]신적이며 사멸하지 않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며 동류의 것인 조율된 조화는 소멸해버리니까요. 그것도 사멸하는 것에 앞서 소멸해버리는 겁니다.

 

2) 케베스의 의문 제기: 여러 차례 거듭나더라도, 마지막 몸보다는 오래가지 못할지 모르는 혼(86e~88b)

[88a][케베스의 반론]이런 것들[영혼의 윤회와 불멸]에 동의해 줄지라도, 다음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동의해주지 않는다면, 즉 혼이 여러 번의 태어남을 견디어내다가 마침내는 죽음들 가운데서 어느 한 차례의 것에서 아주 소멸해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동의해 주지 않는다면, [88b]그러면서도 이 죽음과 혼에도 파멸을 가져다 줄 이번의 몸과의 분리(dialysis)를 아무도 모른다고 말한다면 (...) 혼이 전적으로 죽지 않는 것이며 파괴도리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증명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죽음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 없이 확신을 갖는 것이 아니고서야, 누구에게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지가 못하다면, 죽게 될 사람이 자신의 혼이 몸에서의 이번의 풀려남에서 완전히 소멸해 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언제나 두려워할 게 필연적입니다.

 

5. 막간(88c~91c)

[89d]우리가 논변(논의)을 싫어하는 사람들(misologoi)로 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지. 사람을 싫어하는 이들(misanthrōpoi)이 되듯이 말일세. 이것보다, 즉 논의(논변)을 싫어하는 것보다도 더한 나쁜 일을 누군가가 겪게 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네. 한데, 논변 혐오(misologia)와 인간혐오(misanthrōpia)는 같은 식으로 생기지.

 

[90e]지금으로서는 나 스스로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지혜를 사랑하는 자세로 임하지 않고 마치 아주 교양 없는 사람들(hoi apaideutoi)처럼 이기기를 좋아하는 자세로 임하고 있어서네. 왜냐하면 교양없는 사람들도 뭔가에 대해 논쟁을 하게 되면, 그 논변이 다루고 있는 것들의 진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들이 내세운 것들이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데에 열을 올리기 때문일세.

 

6. 시미아스의 의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91c~95a)

 

7. 케베스의 의문(95b~96a)

1) 그 요지의 재정리:혼은 전적으로 죽지 않으며 파괴될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해 달라는 요구(95b~e)

 

2)케베스의 요구는 결국 사물들의 생성과 소멸 전반에 관련된 원인 구명을 요구하는 것이 됨(95e~96a)

 

8. 케베스의 요구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자연 탐구와 관련된 자신의 편력과 자신이 택한 차선의 방법에 대해서 말하게 함(95e~102a)

[98b]나로서는 이 기대들을 아무리 큰 대가를 받을지라도 단념할 수가 없었거니와, 오히려 그 책들[아낙사고라스의 책들]을 몹시 서둘러 입수해서는, 최대한으로 빨리 읽었는데, 이는 가장 좋은 것(to beltiston)과 한결 못한 것(to kheiron)을 되도록 빨리 알기 위해서였네. 여보게! 정말이지 이 굉장한 기대에서 나는 내침을 당했네. 그건 내가 책을 읽어 나감에 따라 그 사람이 정신(지성: nous)을 전혀 활용하지도 않고, 또한 사물들에 대한 질서 부여(diakosmein)와 관련된 어떤 원인들을 그것에는 돌리지 않으면서도, 공기와 에테르, 물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이상한 것들을 원인으로 주장하는 걸 보게 되었기 때문이네.

 

[100d]내가 단순히 그리고 솔직하게 또한 어쩌면 순진하게 견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일세. 즉 그것을 아름답도록 만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저 아름다움의 나타나 있게 됨(parousia)이거나 결합(koinoia)이거나 또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건 간에 말일세. 왜냐하면 내가 아직은 이것이다 하고 자신 있게 단언하지는 못하지만, 모든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to kalon)으로 해서라는 건 자신있게 단언하는 바이기 때문일세.

 

☞ parousia: 영어로는 presence, 불어로는 présence, 독일어로는 Anwesenheit. 플라톤에게 이는 ‘관여’(methexis)와 더불어 이데아 또는 형상이 사물과 관련되는 다른 방식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사물들에 아름다움(아름다움 자체)의 모습이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 있게 됨’을 의미한다.

koinoia: 공동체, 협력, 관계, 공동 관여, 공동 관계, 공유, 함께 함, 교합, 결합, 교류, 관계 맺음, 관여 등을 뜻한다.

※ ‘메텍시스’는 사물 쪽에서의 관계 맺음이며, ‘파루시아’는 형상 쪽에서의 관계 맺음, ‘코이노이아’는 상호적인 관계 맺음이다. 남녀의 성적인 관계를 일컫기도 한다.

 

[101b]하나에 하나가 더하여질 경우에 이 더함이 둘로 됨의 원인이라든가 [101c]또는 하나가 나누어질 경우에 이 나눔이 둘로 됨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걸 자네는 조심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도 자네는 큰 소리로 외치겠지. 각각의 것이 ‘생성되는 것’(…로 되는 것: gignomenon)이, 그것이 관여하게 될 각각의 것의 고유한 존재(본질:ousia)에 관여하는 것 말고, 달리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걸 자네는 알지 못한다고 말일세. 이 경우들에 있어서도 자네는 알지 못한다고 말일세. 이 경우들에 있어서도 자네는 둘(dyo)로 됨(to dyo genesthai)의 원인으로 둘인 것(둘임: dyas)에 대한 관여(metaskhesis) 이외의 다른 어떤 원인도 댈 수 없다고, 그래서 둘이고자 하는 것들은 이에 관여해야만 한다고, 그리고 하나(hen)이고자 하는 것은 하나인 것(하나임: monas)에 관여해야만 된다고 말일세.

 

⇒‘생성’을 ‘본질’에 관련시킴으로써 생성을 목적론에 종속시키는 이 방식이 플라톤의 관념론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이데아의 위계가 형성되는 것도 당연할 것이고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판하고자 한 지점도 이곳이다.

 

 

9. 혼의 불멸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논변: 형상 이론에 입각해 논변을 함(102a~107b)

 

[102d]그러고보니 내가 문서를 작성하듯 말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실은 내가 말한 대로일 게야.

 

⇒‘문서를 작성하듯 말’한다는 이 고백은 유심히 봐야 한다. 이 고백은 데리다도 자신을 일컬어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화의 protocol은 고유한 철학적 스타일이다. 어째서 철학이 가지는 parol에 대한 이 제국주의적인 욕구들.

 

[103b]자네는 방금 말한 것과 그때 말한 것의 차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네. 왜냐하면 그때는 대립되는 사물에서 대립되는 사물(to enantion pragma)이 생긴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대립되는 것(대립자) 자체(auto to enantion)가 자기와 대립되는 것으로 결코 될 수가 없다는 말을 한 것이기 때문일세. 그게 우리 안에 있는(우리에게 있어서의) 것이건 또는 그 본질(본성)에 있어서의 것이건 간에 말일세. 그때는 대립되는 것(대립자)들을 지니고 있는 사물들을 그것들과 같은 이름으로 부르며 이것들과 관련해서 우리가 말했던 것이지만, 방금은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사물들 안에 있게 됨으로써 이것들로 하여금 그런 이름을 갖게끔 해 준 저것들 자체에 대해서 말했던 것이니까. 그러나 저것들 자체는 상호간의 생성(됨: genesis)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걸세.

 

⇒형상(이데아) 자체는 생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 언급은 플라톤이 누누이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106b]죽지 않는 것이 파괴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면, 혼에 죽음이 닥친다해서, 그것이 죽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거니와 죽은 상태의 것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네. 마치 셋이 짝수일 수 없고, 또한 홀수도 짝수일 수 없고, 불이 찬 것일 수 없으며, 불 속에 뜨거움 또한 찬 것일 수 없다고 우리가 말했듯이 말일세.

 

IV. 신화: 저승 또는 참된 지구에 대한 이야기(107c~115a)

[107c]혼이 과연 죽지 않는 것이라면, 그 보살핌이야말로 비단 우리가 살고 있다(to zen)고 하는 이 기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때를 위해서 요구되네. 그리고 만약에 누군가가 이를 소홀히 한다면 그 위험은 이제 곧 무서운 것일 것으로 생각되네. 만일 죽음이 실은 모든 것에서의 벗어남(apallagē)이라면, 나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천행일 것이니, 이들은 죽음으로써 몸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혼과 함께 자신들의 나쁨(나쁜 상태, 사악: kakia)에서도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 [107d]그러나 실은 혼이 죽지 않는 것인 것 같으므로, 혼이 나쁜 것들에서 벗어나는 길이나 구원책으로는, 혼이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훌륭해지고 지혜롭게 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없으이. 왜냐하면 혼이 저승(하데스)으로 가면서 지니고 가는 것으로는 교육(교양: paideia)과 생활방식(trophē)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인데, 이것들이야말로 그곳으로의 여정의 바로 시작 단계에서부터 망자를 가장 크게 이롭도록 해주거나 해롭게 하는 것들이라고도 하네.

 

☞여기서 ‘교육’(교양)은 지혜(phronesis)를 얻은 상태고, ‘생활방식’이란 후천적으로 습관화된 것이다.

 

[113d]거기에서 그들이 기거하면서, 일찍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과들에 대해 벌을 받음으로써 정화가 되면, 용서를 받게 된다네. 만약에 누군가가 죄를 지은 일이 있다면 말일세. 또한 선행들에 대해서는, 저마다 거기에 상당하는 보답을 받게 된다네. 그러나 저지른 잘못들의 광범함으로 해서 교정(치유)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자들은 (...) 마땅한 운명(moira)이 이들을 타르타로스 속으로 던지는데 여기에서 영영 이들이 빠져 나오지 못한다네.

 

⇒‘심판’의 주제. 그러나 여기에 어떤 ‘원죄’는 보이지 않는다.

 

[114d]그렇다고 이것들이 내가 이야기한 그대로라고 자신있게 주장한다는 것은 지각 있는 사람에겐 적절치 않으이. (...) 그게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삶에게 있어서는 그게 적절하고도 모험을 할 가치가 있다고 내게는 생각되거니와, 이 모험은 훌륭한 것이니까 이와 같은 것들은 자신에게 주문을 외듯 해야만 해. (...) 바로 이런 이유들로 해서 누구든 이런 사람[혼의 불멸성과 심판을 아는 자]은 자신의 혼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야만 하네. 즉, 생애를 통해 몸과 관련된 다른 즐거움(hēdonē)들이나 치장(kosmos)들에 대해서는, 제 것 아닌 낯선 것들이며 이롭게 하기 보다는 해롭게 하는 것이라 여기고서, 결별을 하되, 배우는 것(to mathanein)가 관련된 즐거움에 대해서 열의를 보이며, 혼을 낯선 것이 아닌 혼 자체의 장식물(kosmos), 곧 절제(건전한 마음상태: sōphrosynē)와 올바름(정의: dikaiosynē), 용기(andreia), 자유(eleutheria) 그리고 진리(alētheia)로 장식하고서, 이처럼 저승(하데스)으로의 여행을, 정해진 운명이 부를 때는, [115a]떠날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말일세.

 

V. 소크라테스의 최후 장면과 그의 죽음(115a~118a)

[115b]자네들이 자네들 자신들을 돌본다면, 자네들이 뭘 하든, 자네들은 나를 위해서도 내 가족을 위해서도 그리고 또 자네들 자신을 위해서도 기쁠 일을 하게 될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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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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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대우고전총서 29
루크레티우스 지음, 강대진 옮김 / 아카넷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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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희랍어와 라틴어 원전번역을 하는 분들을 꼽자면, 이 책을 번역한 강대진 박사가 속해 있는 '정암학당'의 중견 연구진들과, 서울대 박종현 선생, 그리고 단국대 천병희 선생을 꼽을 수 있다. 열악한 학문적 환경(이 정권 들어와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속에서도 '원전번역'이라는 거의 '고행'에 가까운 길을 걷고 있는 이분들이 있기에 나같은 보잘것 없는 학인들도 공부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루크레티우스가 유물론자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원전을 접함으로써 그 사실이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 '명확함'이라는 것은 어쩌면 철학사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서 초래되는 어떤 부정확한 명확함일수도 있다. 루크레티우스의 경우에 그가 원자론, 그것도 에피쿠로스의 그것을 취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쉽게 오해에 노출되거나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다.

 

흔한 말로 헤도니즘은 '쾌락주의'지만, 조금이라도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번역용어가 매우 심상한 함축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쾌락주의는 '섭생'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특유한 시각이며, 난 그것을 들뢰즈적인 의미에서 '괴물의 시각'이라고 본다. 헤도니즘은 결코 인간중심적인 철학이 아니며, 오히려 '원자'또는 '기초' principium의 철학이다. 세계의 '바닥' 또는 '허공'을 응시하는 괴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많을수록 좋다. 괴물들은 바로 우리 자신일수도 있는 것이다.

 

괴물로서의 우리, 세계를 형성하고, 또한 그것의 일부분이 됨으로써 시공간을 하나의 '필연적 우발성'으로 바라보는 그 존재는 따라서 무한한 변화의 잠재성을 장착한 무시무시한 폭탄과 같다.  이런 이유로 헤도니즘은 그 많은 권력자들의 억압대상이 되어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정체된 체계, 또는 역사의 종말로서의 현체제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그것을 전복할 무한한 가능성을 설파하는 철학이자 삶의 원리, 중심 없는 아나키즘이면서 신없는 세상의 카오스모스를 추구한 이들은 당대의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 자신-다중-민중 외에 다른 누구도 아니다.

 

쏟아지는 '사랑의 미약'에 취한채로 원자의 빗속에 서서 한 세계의 바닥없음과 몰락을 예견하고 다음 세계를 미리 추동하는 그 힘, 그것이  루크레티우스-괴물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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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De Rerum Natura

 

 

루크레티우스 (Titus Lucretius Carus) : 기원전 90년대 초반에 태어나 기원전 50년대 중반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전혀 없다. 어떤 여인이 준 사랑의 미약을 먹고 정신 이상이 되어, 제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조금씩 기록한 것이 현재 전하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주장도 있으나, 믿기 어렵다. 이 작품 외에 다른 저술은 전해지지 않는다.-알라딘 저자소개

 

시인ㆍ철학자. 생애에 관하여는 확실치 않고 부유한 생활을 했으나 우울성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유일 작품 《자연에 관하여 De rerum natura 6 권》라는 철학적 교훈 시가 있다. 이것은 그가 속해 있는 에피쿠로스파의 철학 사상에 기초하여 물리적ㆍ논리적 교의(敎義)를 설명하려 한 것, 베르길리우스 등에 비하면 시로서는 떨어지나, 그 착상의 위대함에 있어서는 그 이상이며, 당시의 시계의 큰 영향을 주었다. 일체의 현상을 인과 관계에 기초하여 논리적으로 생각하려 하는 그의 태도는 주목할 만하다.-철학사전, 중원문화

 

로마의 시인ㆍ철학자. 생애에 관하여는 확실치 않고 부유한 생활을 했으나 우울성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유일 작품 《자연에 관하여 De rerum natura 6 권》라는 철학적 교훈 시가 있다. 이것은 그가 속해 있는 에피쿠로스파의 철학 사상에 기초하여 물리적ㆍ논리적 교의(敎義)를 설명하려 한 것, 베르길리우스 등에 비하면 시로서는 떨어지나, 그 착상의 위대함에 있어서는 그 이상이며, 당시의 시계의 큰 영향을 주었다. 일체의 현상을 인과 관계에 기초하여 논리적으로 생각하려 하는 그의 태도는 주목할 만하다.-인명사전, 민중서관

 

이 책의 번역 대본으로 쓰인 C. Baily 판본은 온라인에서 볼 수 있다: http://archive.org/details/onnatureofthings01lucruoft

 

 

 

 

차례

 

옮긴이 서문

 

제1권

A. 일반적 원칙들

B. 기원들은 견고하고 영원하며 나눌 수 없음

C. 다른 이론들에 대한 논박

D. 세계와 그것의 두 구성 요소는 무한함

 

제2권

A. 원자의 운동

B. 원자의 형태의 다양함과 그 결과

C. 원자들은 이차적 성질을 지니지 않음

D. 세계의 무한함, 그것들의 생성과 소멸

 

제3권

A. 영혼의 본성과 구조

B. 영혼의 필멸성에 대한 증명들

C. 죽음에 대한 공포는 어리석은 것이다

 

제4권

A. 영상(影像)들의 존재와 성질

B. 감각과 사고

C. 심리상태와 연관된 신체의 기능들

D. 사랑의 열정에 대한 비판

 

제5권

A. 우리의 세계에 대하여

B. 천체에 대하여

C. 땅에 관하여

 

제6권

A. 대기의 현상들

B. 지상의 현상들

C. 아테나이의 대역병(大疫病)

 

옮긴이 해제

찾아보기

 

 

 

 

 

 

 

 

옮긴이 서문

※‘[ ]’의 숫자는 원전의 행수 표시임.

제1권

[44]왜냐하면 신들의 본성은 자체로

최고의 평화 속에, 우리의 일들로부터 나뉘어 멀리 떠나

불멸의 세월을 즐기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본성은 모든 슬픔을 벗어난, 위험들을 벗어난,

스스로 자신의 풍요함으로써 권능을 지닌, 우리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며,

제물로써 환심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분노와 접촉하지도 않는 것이니까요.[49]

 

[55]사물들의 기원 (...)

자연은 거기로부터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 사물들을 자라게 하고 키우며,

또한 같은 것들을 사멸하도록 다시 거기로 헤쳐 보내도다.

이것들은, 우리가 이치를 설명함에 있어서, 재료라고, 사물이 될

생산적인 몸이라 부르고, 사물의 씨앗이라고

지칭해 버릇하던 것이며, 같은 이것들을 첫 번째 알갱이라

칭하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첫 번째 것인 이것들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기 때문이다.[62]

 

A. 일반적 원칙들

*아무것도 무에서 생겨나지 않음

[149]그것의 첫 원리 (...)

즉 그 어떤 것도 신들의 뜻에 의해 무(無)로부터 생겨나진 않았다는 것이다.

(...)

따라서 우리가, 그 어떤 것도 무로부터 생성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때는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좇는 것을 더 제대로

보게 될 것이다, 어디서 각 종의 사물들이 생성될 수 있는지도,

어떤 방식으로 각각이 신들이 애쓰지 않고도 만들어지게 되는지도. 왜냐하면 만일, 이것들이 무로부터 만들어졌다면, 모든 것들로부터 모든

종이 생겨날 수 있었을 것이고, 어떤 것도 씨가 필요치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160]

 

*아무것도 무로 돌아가지 않음

 

*사물들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음

[322]마지막으로, 무엇이든 날과 자연이 사물들에

조금씩 덧붙이는 것, 절도 있게 자라도록 시키는 것은

애써 살피는 눈들의 그 어떤 날카로움으로도 볼 수가 없다.

더욱이, 무엇이든 세월과 쇠함으로 낡아가는 것들이,

또한 바닷가에 매달려, 침식하는 소금기에 갉아 먹힌 바위들이

매 순간에 무엇을 떨구어 보내는지 그대는 분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보이지 않는 알갱이들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다.[328]

 

*빈 공간이 존재함

 

*다른 모든 것은 이 두 요소의 성질임

[459]시간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바로 사물들로부터

그것의 감각이 유래한다, 세월 속에 무엇이 지나가버렸는지,

어떤 사물이 현재 남아 있는지, 또 어떤 것이 그 다음에 나올 것인지.

누구도 결코 시간을, 사물의 움직임과 고요한 정지에서 분리된

자체적인 것으로 지각하지 못함이 인정되어야 한다.[463]

 

B. 기원들은 견고하고 영원하며 나눌 수 없음

*첫 번째 네 가지 증명: 원자의 견고함, 영원함, 단순함

 

*원자의 견고한 단순성

 

*원자의 불변성

 

*원자의 최소 부분들

[615]최소의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각각의 가장 작은

몸체들은 무한한 부분들로 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절반의 절반은 항상 또 절반을

가지고 있을 터이고, 어떤 사물도 끝을 한정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물들의 총합과 최소의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전혀 차이 날 게 없으리라. 왜냐하면 아무리 철저하게 전체

총합이 무한하다 해도, 가장 작은 것이

마찬가지로 무한한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622]

 

☞이에 관해 로이드의 언급 참조: “그들[원자론자들]은 원자가 물리적으로 분할불가능하듯이 수학적으로도 분할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원자는 확실히 물리적으로 분할불가능하지만 원자론자들은 논리적으로나 수학적으로도 분할불가능한 것-즉 부분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가정했을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몇몇 텍스트(예를 들어 《생성소멸론》315b 28 이하)는 원자론자들이 물리적인 분할가능성의 한계와 수학적 분할가능성의 한계를 전혀 구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들을 아주 잘못 해석하고 있지 않는 한, 만일 원자가 형태상 다르다면 그것은 원자가 부분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수학적으로 분할가능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 것 같다.”(『그리스 과학사상사』 G. E. R. 로이드 지음, 이광래 옮김, 지성의 샘, 1996, pp. 73-74) 로이드의 이 언급과 루크레티우스의 위 발췌문을 보면, 루크레티우스가 ‘무한한 부분’들이라고 하는 것이 수학적이면서도 물리적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로이드는 대체로 바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C. 다른 이론들에 대한 논박

*헤라클레이토스의 단일론에 대한 반박

 

*엠페도클레스의 다원론에 대한 반박

 

*아낙사고라스의 학설에 대한 논박

 

*루크레티우스의 사명

 

D. 세계와 그것의 두 구성 요소는 무한함

*우주와 공간의 무한함

 

*공간의 무한함

 

*원자수의 무한함

 

*잘못된 이론에 대한 논박

[1068]공허한 오류가 어리석은 자들에게 이런 거짓들을 천거하였도다.

이들이 뒤집어진 논리로 된 것을 껴안아 가졌으므로.

왜냐하면, 세계는 무한하게 되어 있어서, 한가운데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한가운데가 있다 해도, 무엇이든 간에

그 사실 때문에 거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어떤 다른 이유로 해서 거기서 다시 멀리 밀려나기보다.

왜냐하면 우리가 빈곳이라고 부르는 모든 장소 또는 공간은,

한가운데를 통해서건 한가운데 아닌 곳을 통해서건, 운동이 어느 방향으로

진행하든 간에 항상 무게를 지닌 것들에게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1076]

(...)

[1081]그러므로 사물들은 그런 방식으로 중심에 대한 욕망에

굴복하여 집합을 이루도록 붙잡혀 있을 수가 없다.[1082]

제2권

A. 원자의 운동

[75]그렇게 해서 사물들의 총체는 항상

새로워지고, 필멸의 존재들은 서로 차례 바꿔 산다.

한 종족은 늘어나고, 다른 종족은 감소한다,

짧은 간격 속에 동물들의 세대는 교대하며,

마치 주자들처럼 생명의 횃불을 전해주고 있다.[79]

 

*원자는 쉼없이 운동하며, 여러 밀도를 가진 사물들 속에 결합되어 있음

[90]당신이 꿰뚫어 볼수록, 모든 것의 총체에는 가장 깊은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그리고 기본적인 몸체들이

정지해 머물 곳이 없다는 점을 기억하라. 공간에는 경계도 한도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방으로 전 부분으로 펼쳐져 있다는 것은

내가 여러 말로 보여주었으며, 확실한 논증에 의해 입증된 바이다.

이것이 확정되어 있으므로, 확실히 깊은 허공을 두루 다니는

기본적인 몸체들에게는 어떤 휴식도 주어져 있지 않으며,

오히려 쉼 없는 여러 방향의 운동으로 요동되어,

일부는 충돌하여 큰 거리를 되튕겨 나가고,

일부는 또 부딪힌 데서 짧은 간격만큼 이동한다.[99]

 

*원자 운동의 속도

 

*무게에서 비롯되는 아래 방향의 운동

 

*원자들의 비껴남

[217]물체들이 자체의 무게로 인하여 허공을 통하여 곧장 아래로

움직이고 있을 때, 아주 불특정한 시간,

불특정의 장소에서 자기 자리로부터 조금,

단지 움직임이 조금 바뀌었다고 말할 수만 있을 정도로, 비껴났다는 것을.

하지만 만일 그들이 기울어져 가 버릇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아래로

마치 빗방울처럼, 깊은 허공을 통하여 떨어질 것이고,

충돌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타격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들에게는, 그래서 자연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했을 것이다.[219]

 

*질료와 운동의 영원함

 

*멈춰 서 있는 사물 속의 움직임

 

B. 원자의 형태의 다양함과 그 결과

*원자들은 형태가 다양하다

[335]얼마나 많은 종류의 형상으로써 [원자들이] 다양하게 되어 있는지 알라.

이것은 몇몇 것들만 비슷한 형상을 부여받아서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두가 모두와 같이 않아서이다.

이런 상황은 놀라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양이 그토록 많아서

한도도 없고, 내가 이미 가르쳤듯 총합도 없을 정도이므로,

그것들은 당연히 모두가 모두와 곧장 같은 실로써,

유사한 형상으로써 만들어져 있지 않아야 한다.[341]

 

*원자들의 형태가 달라서 생기는 결과들

[434]접촉, 바로 접촉이, - 아, 신들의 신성한 능력이여! -

신체의 감각이니 말이다. 외부의 사물이

밀고 들어올 때나, 몸 안에서 생긴 것이 해를 끼치거나,

베누스의 생산적인 일을 통해 나가면서 즐거움을 줄 때,

또는 외부 타격으로 해서 몸 자체에서 씨앗들이

요동되고 서로 간에 자극되어 감각을 혼란케 할 때에,

(...)

그러므로 시초들은 형태에 있어서 크게 차이가

있어야 한다, 다양한 감각을 산출할 수 있도록, (...)[443]

 

*원자의 형태들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음

[512]사물들에게 주어진 특정의

한계가 전체를 양끝에서 잡고 있으므로, 질료 역시

한정된 형상들에 따라 다르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

그러므로 그것들은 한정된 방식으로 다르게 만들어져 있다.

한쌍의 끝점에 의해 양쪽에서 표시되어 있으므로,

이쪽에서는 불길에 의해, 저쪽에서는 뻣뻣하게 만드는 서리에 의해 포위되어.

 

*같은 형태를 가진 원자의 숫자는 무한함

 

*생성과 파괴의 균형

 

*사물들은 섞인 형태들로 이루어져 있음

[585]시초적인 것의

한 가지 종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섞이지 않은 씨앗들로 이뤄진 것은 없다는 사실이,

그리고 무엇이든 자신 안에 더 많은 힘과 가능성을

지닌 것이 있으면, 그것은 그만큼 더 많은 시초들의 종류와 다양한 형상들이 자신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588]

*지모신 숭배 의식

 

*흙 속에 있는 형상들이 여러 성질을 설명해줌

 

*모든 방식의 연결이 가능한 것은 아님

[700]하지만 모든 것이 모든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그대는 도처에서 괴물들을 발견할 테니까,

반은 짐승인 인간의 종이 생겨나는 것을, 때로는

살아 있는 몸에서 높은 나뭇가지가 돋는 것을, (...)

[711]왜냐하면 각자에게 그 자신의 알갱이들이 모든 음식물로부터 나와

지체 속으로 분해되어 들어가고, 그것이 연결되어 적절한

운동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

[720]왜냐하면 마치 각각의 태어난 사물들이 전체적 성질에 있어서

서로 간에 다르듯이, 각각의 것은 시초들의

서로 다른 형상으로 되어 있어야 하니 말이다.

너무 적은 수가 같은 형상을 부여받아서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같지 않게 되어 있어서다.

나아가 씨앗들이 서로 다르므로, 간격, 행로,

연결, 무게, 타격, 만남, 움직임도

달라야 한다.

 

C. 원자들은 이차적 성질을 지니지 않음

*색깔에 대하여

[747]<근원적인 몸체들은 언제나 그 어떤 색깔도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모든 색은 변화하며, <색을 변화시키는>

모든 것은 <그 자신도 변화하므로>.

하지만 기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무엇인가는 변화하지 않고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834]그대는 모든 몸체가 소리나 냄새를 발한다고는

인정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그대는 모든 것에게

소리와 냄새들을 부여하진 않게 된다.

(...)

그럼에도 이것들을 민감한 정신이 인지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성질들을 앗긴 것들을 알아보는 것 못지않게.

 

*원자가 지니지 않은 다른 이차적 성질들

 

*원자들은 감각이 없음

 

*이차적인 성질과 감각에 대한 요약과 결론

 

D. 세계의 무한함, 그것들의 생성과 소멸

*증명들

[1059]씨앗들 자체가 저절로 우연히 거듭 마주쳐

여러 방식으로 공연히 헛되이 성과 없이 몰렸다가,

마침내 저것들, 즉 갑자기 만나서

이후로 계속 거대한 것들[세계들]의 시작이 될 것들,

땅의, 바다의, 그리고 하늘의, 또 생명체들의 종의 시작이 될 것들이 모였기에 말이다.

그러므로 다시 또다시 질료들의 그와 같은 다른 모임이

다른 곳에서도 있으리라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신학적 견해에 대한 반박

 

*세계들의 성장과 쇠락

[1173]하지만 그는 파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조금씩 스러진다는 것, 그리고

세월의 오랜 지속에 지쳐 무덤으로 간다는 것을.

 

제3권

[65]왜냐하면 아주 수치스러운 모멸과 쓰라린 궁핍은

안락하고 안정된 삶으로부터 격절된 듯 보이며,

마치 이미 죽음의 문 앞에서 서성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짓된 공포에 몰려 도망쳐버리고자,

또 자기를 멀리멀리 떼어놓고자 원하여,

시민의 피로써 재산을 부풀리고, 탐욕스레

부를 배가한다, 살인에 살인을 덧쌓으면서.

 

A. 영혼의 본성과 구조

*영혼은 신체의 일부이다

 

*정신과 영혼의 관계

[136]이제 나는 정신과 영혼이 서로 연결되어

스스로 하나의 본성을 이뤄내지만,

숙고 능력이 말하자면 머리이며 말하자면 전체 몸속에서 지배한다는 것을 이르노라.

한데 그것을 우리는 정신이자 이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가슴이라는 가운데 영역에 자리 잡고 붙어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전율과 공포가 뛰며, 이 자리 주위에서

행복감이 위로를 준다. 그러므로 여기에 이성과 정신이 있다.

영혼의 나머지 부분은 온몸에 흩뿌려져

복종하고, 정신이 고갯짓과 그것이 기우는 데에 맞춰 움직인다.

정신은 홀로 자체로서 스스로 음미하고, 스스로 기뻐한다,

(...)

[158]우리는 본다. 이로부터 누구든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이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정신의 힘에 의해

뒤흔들리면, 곧장 육체를 밀치고 때린다는 것을.

이 동일한 추론이, 정신과 영혼의 본성이

육체적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

[168]또한 그대는 정신이 육체와 더불어 동일하게 고통을 겪고,

우리 몸 속에서 함께 동일한 감각을 갖는 것을 본다.

(...)

[175]그러므로 정신의 본성은 육체적이어야만 한다.

육체적인 무기와 타격에 괴로워하니까.

 

*정신과 영혼의 구조

[179]우선 나는 그것[영혼]이 매우 섬세하다는 것을, 그리고 극히 미세한

몸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노라.

(...)

[182]즉, 아무것도, 이성이 할 일을 자신 앞에 떠올리고, 또 스스로 행동을

시작하는 것만큼, 그토록 빠르게 이뤄지는 건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눈 앞에 분명히 보이는 것보다 더빨리 스스로를 자극한다.

한데 그렇게 민활한 것은 극히 둥글고

극히 미세한 씨앗들로 이뤄져 있어야 한다.

 

[214]죽음은 모든 것을 보존한다.

살아 있는 감각과 따뜻한 열기 이외에는.

그러므로 영혼 전체는 매우 작은 씨앗들로 되어 있어야만 한다.

 

*영혼의 네 가지 요소

 

*네 요소 간의 관계

[386]영혼의 힘보다는 정신이, 생명을 붙잡아 두는 데

더 중요한 빗장이고, 삶을 위해 더 중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과 정신 없이는 그 어떤 영혼의 부분도

아주 짧은 시간의 부분 동안도 지체들에 두루 걸쳐 머물 수가 없고,

오히려 동반자로서 쉽게 그것을 따라가 버리고, 공기 중으로 떠나가

차가운 사지를 죽음의 싸늘함 속에 남기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성과 정신이 그에게 머물러 있는 존재는 삶 속에 계속 머문다.

아무리 둘레의 사지가 잘리어 동체가 손상되어도,

둘레의 영혼이 앗겨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도

그는 살아 있고, 삶을 주는 천상의 숨결을 받아들인다.

 

☞‘심신문제’: http://en.wikipedia.org/wiki/Mind%E2%80%93body_problem

B. 영혼의 필멸성에 대한 증명들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견해에 대한 반박들

 

*영혼이 출생 전부터 있었다는 견해에 대한 반박들

 

*일반적 논증들

 

C. 죽음에 대한 공포는 어리석은 것이다

*죽음은 감각의 정지다

[830]그러므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와 전혀 관련이 없다,

정신의 본성이 필멸적인 것으로 드러나 있는 한.

(...)

[838]우리가 존재하지 않게 될 때, 서로 하나로 합쳐져

우리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바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일어날 때,

그때는 분명코, 이미 존재하지 않을 우리에게, 전혀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며, 그 무엇도 감각을 일으킬 수 없으리라

(...)

[866]죽음 속에는 우리가 두려워할 게 전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비참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또 일단 불멸의 죽음이 필멸의 생명을 데려가버리면,

그가 언젠가 태어났었든, 아무 때도 태어나지 않았었든, 이제는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을.

 

*살아남는 것이 있다는 가정에서 오는 착각들

 

*생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욕구에 대하여 1

[964]왜냐하면 낡은 사물은 새로움에 밀려 물러서고

어떤 것은 다른 것들로부터 새로 만들어지는 게 필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도 심연이나 어두운 타르타라로 넘겨지지 않는다.

이후의 세대가 자라나기 위해서는 재료들이 있어야만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삶을 마치면 그대를 뒤따른다.

그래서 그대 못지않게 이런 세대들도 이전에 스러졌고, 또 앞으로도 스러질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가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기를 그치지 않으며,

삶은 누구에게도 완전히 소유되지 않고, 모든 이에게 그저 대여될 뿐이다.

 

*죽은 뒤의 징벌에 대하여

[982]현실에서 신들에 대한 공허한 두려움이 필멸의 인간들을

더 짓누르고, 그들은 각 사람에게 운수가 가져다 떨어뜨릴 것을 더 두려워한다.

(...)

[1020]그러면서 괴로움의 어떤 한계가 있을 수 있는지,

또 징벌의 어떤 끝마침이 있을지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같은 이 고통이 죽은 후에는 오히려 더 중해지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마침내 이승에서도 어리석은 자들의 삶은 아케론과 같은 것이 된다.

 

*생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욕구에 대하여 2

 

*불행의 원인

[1073]그것[원인]을 제대로 본다면, 각 사람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우선 사물들의 본성을 알고자 노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가 되는 것은 한 시간이 아니라, 영원한 시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멸의 인간들이,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들이 죽은 후에

남은 모든 세월 동안 그 상태에 처하리라고 예상해야 마땅한 것이다.

*결론

 

제4권

A. 영상(影像)들의 존재와 성질

*영상들의 존재

[42]그러므로 나는 말하노라, 사물들의 영상과 섬세한 형상은

사물들로부터, 그것들의 몸체 표면에서 발산된다고.

(...)

[51]그것들은 마치 막이나 껍질 같다고 표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상은, -우리는 이 상이 어떤 몸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떠돈다고

얘기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몸과 유사한 모습과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영상들의 조직은 섬세하다

 

*영상들은 공기중에서 저절로 형성되기도 한다

 

*영상들은 매우 빠르게 형성된다

 

*영상들은 빠르게 움직인다

 

B. 감각과 사고

*시각, 그리고 그와 연관된 현상들

 

*거울과 연관된 문제들

 

*시각의 특성들

 

*정신의 잘못된 추론들

[379]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눈이 조금이라도 속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

[384]이런 문제는 결국 정신의 추론이 분별하여야 하며,

눈들이 사물의 본성을 알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신의 이 악덕을 눈들에게 꾸며 붙이려 하지 말라.

(...)

[463]그 모두가, 말하자면 감각에 대한 신뢰를 깨뜨려보려는 것들이다.

하지만 쓸데 없는 짓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우리 자신이 덧붙이는

의견들 때문에 잘못되는 것이니 말이다.

감각에 의해 관찰되지 않은 것을 관찰된 것으로 여김으로써.

왜냐하면 명백한 것들, 정신이 즉석에서 스스로 덧붙이는바

불확실한 것들로부터 분간해내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감각은 틀릴 수 없음

[471]따라서 나는 이 사람에 맞서서 소송 다투기를 피하리라,

스스로 자기 머리를 거꾸로 발 둘 곳에 놓는 사람과는.

 

*청각의 문제

 

*미각의 문제

 

*후각의 문제

[686]그러므로 무엇이든 코를 자극하는 이 냄새 자체가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멀리 퍼질 수 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떤 것도 소리만큼, 목소리만큼

멀리 이동하지 않는다.

 

*사고의 문제

[724]사물의 많은 영상들이

도처에서 사방으로 여러 방식으로 떠돌아다닌다는 것을.

이들은 섬세하여, 그들이 서로 마주치게 되면, 거미줄이나 금박처럼

바람 속에서 자기들끼리 쉽게 결합하는 것들이다.

(...)

[730]이들은 몸의 조직의 성긴 부분으로 뚫고 들어가, 안에서

정신의 섬세한 본성을 자극하고 감각을 일깨우니 말이다.

 

[802]그것들[영상들]은 섬세해서, 보려고 애를 쓰는 것들 이외에는, 정신이

정확하게 분간할 수 없다. 그래서 정신이 그것을 향해

스스로 준비하고 있던 것들 이외에는, 있는 것들이 모두 사라진다.

나아가 정신 자체가 스스로 준비하고, 있게 될 것을 기대한다.

(...)

[807]또한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눈들이 섬세한 것들을

관찰하기 시작할 때, 스스로 긴장하고 준비하는 것을,

(...)

[812]만일 그대가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마치 그 시간 동안 내내

그 대상이 물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으리라는 점을.

그러니 무엇이 놀라운가, 정신이 자신이 몰두해 있는

사물들 이외의 다른 것들을 잃어버린다 해도?

더욱이 우리는 작은 표지들로부터 아주 큰 것을 추측하며,

스스로 기만의 속임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C. 심리상태와 연관된 신체의 기능들

*목적론에 대한 반박

[825]눈의 밝은 빛이 만들어진 게, 우리가 앞을 볼 수 있게 하려는 목적에서라고는

그대가 생각하지 말기를, (...)

[832]사람들이 내세우는 이런 종류의 다른 주장들은

모두가 뒤집힌 추론으로 인해 앞뒤가 바뀌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몸에 생겨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생겨난 그것이 용도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눈이 빛이 생겨나기 전에는 본다는 것이 없었으며,

혀가 생겨난 사건이 연설을 멀리 앞질렀으며,

소리가 들리게 되는 것보다 훨씬 전제

귀가 생겨났고, 내 생각으로는 결국 모든 지체가,

그것의 활용보다 먼저 있었다.

 

[881]나는 말하노라, 우선 우리 정신에 걸어가는 것의 영상이

생겨나, 전에 우리가 말했던 대로 정신을 때린다는 것을.

그러면 욕구가 발생한다. 누구도 정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미리 보기 전에는 아무 행위도 시작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정신이 미리 보는, 저 사건의 상이 있게 된다.

그래서 정신이, 걸어가기를 원하도록 자신을

자극하면, 그것은 즉시 사지와 지체들을 통해

온몸에 흩어져 있는 정신의 힘을 때린다. (...)

[890]그 다음엔 이것이 나아가 몸을 때린다. 그러면 조금씩

전체 덩치가 앞으로 밀쳐지고 움직여진다.

*잠의 문제

 

*평소 생활과 꿈의 관계

 

*사랑의 물리적 근원

 

D. 사랑의 열정에 대한 비판

*사랑에는 만족이 있을 수 없다

 

*사랑의 해악

[1135]어쩌다 가책받은 정신 자체가, 스스로 나태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삶이 방탕 속에 스러지고 있다고 후회하는 경우에나,

아니면 그녀가 말을 던져 모호함 속에 남겨놓았고,

그것이 갈망하는 가슴 깊이 박혀 불처럼 살아 오름으로 해서,

아니면 그녀가 눈길을 너무 자주 던지고 다른 이를 바라보는 듯

생각될 때, 그리고 그 얼굴에서 웃음의 흔적을 보았을 때에.

 

*사랑이 일으키는 환각

 

*남녀 모두에게 공통된 쾌락이 있다

 

*자식의 모습과 성이 결정되는 방식

 

*불임의 원인들

 

*태도와 습관이 효과

 

제5권

*에피쿠로스에 대한 찬양

 

*이제까지의 논의의 요약, 앞으로 나올 논의들의 개요

 

A. 우리의 세계에 대하여

*세계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신학적 세계관에 대한 논박

[132]그러므로 정신이 본성은 육체 없이 혼자는 생겨날 수 없으며,

힘줄과 혈액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다.

 

*세계에는 시작이 있었으며, 앞으로 끝도 있을 것이다

[393]서로 간에 대제국을 두고 전쟁을 판가름 지으려 투쟁한다.

그 사이 한 번은 불이 우위에 섰었고,

또 한 번은, 소문에 따르면, 습기가 경작지들은 다스렸었다.

 

*세계의 형성

[419]확실히 사물의 기원들 각각이 현명한 정신에 의해

계획을 따라 자신들을 그 질서 속에 놓은 것도 아니고,

각각이 어떤 운동을 할 것인지 진정으로 협의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사물들이 수많은 기원들이 수많은 방식으로,

무한한 시간으로부터 이제까지, 타격들에 동요되고

자신이 무게에 시동되어 옮겨지고,

온갖 방식으로 만나고, 무엇이건 자신들 사이에 만나서

낳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 버릇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긴 세월을 통해 널리 퍼져서

모든 종류의 만남과 운동을 시험하고서,

마침내 갑작스런 충돌로써, 자주 큰 사물들,

즉 땅, 바다 그리고 하늘과 생명체들의 종족의

시초가 되는 저것들이 만나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B. 천체에 대하여

*천체들의 움직임

 

*땅의 위치

 

*천체들의 크기

 

*태양의 빛과 열

 

*천체의 궤도

 

*밤과 낮의 원인

 

*새벽의 원인들

 

*밤과 낮의 길이가 변화하는 이유

 

*달과 빛과 그 모양

 

*일식과 월식의 원인들

 

C. 땅에 관하여

*식물과 동물의 발생

 

*땅이 지닌 생산성의 한계

 

*자연의 창조실험

[404]그리고 그때 땅은 또한 괴물들도 만들기를

시도했었다, 놀라운 얼굴과 사지를 지닌 것들,

남녀추니, 둘 사이에 있으나 어느 쪽도 아닌 것, 양쪽으로부터 동떨어진 것,

 

*생존능력 있는 것만이 살아남음

 

*신화적 존재들

[920]지금도 풀들의 종류과 과실들과

행복한 나무들이 땅으로부터 넘쳐나지만,

그럼에도 서로 간에 뒤얽혀서는 생겨날 수 없고,

오히려 각 사물은 자신의 방식에 따라 나아가고, 모든 것이

자연의 정해진 규율에 따라 경계를 지키니 말이다.

 

*원시인간의 생활

 

*원시인간의 죽음

 

*초기의 공동체들

[1011]그후, 그들이 집과 가족과 불을 마련하고,

남자와 결합된 여자가 한 <집으로> 물러나고, <혼인의 법이>

알려지고, 자신들로부터 자손이 태어나는 것을 본 뒤에,

그때에 인간 종족은 처음 약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불은, 이제 차가워진 몸이 하늘의 지붕 밑에서

추위를 견디지 못하도록 그렇게 돌보았고,

베누스는 그들의 힘을 줄여, 자식들이 부모의

오연하던 의지를 애교로써 쉽게 꺾었기 때문이다.

또 그때에 이웃들은 서로 간에 해를 끼치기도 침해를 당하기도

원치 않아서 우정을 맺기 시작했고,

아이들과 여성의 세대들을 돌보도록 맡겼다,

 

*언어의 기원

[1087]그러므로 다양한 감정들이 동물들을, 그들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다양한 소리를 발하도록 몰아간다면,

그때 필멸의 인간이 서로 다른 상황들을 이런저런 소리로써

표시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 얼마나 더 당연할 것인가!

 

*불의 발견과 이용

 

*왕이 생겨나고 부가 발견됨

 

*도시국가의 성립, 법에 대한 두려움

 

*종교의 기원

[1083]더욱이 그들은, 하늘의 이치와 일 년의 다양한 시간들이

정해진 질서에 따라 돌아가는 것을 보지만,

어떤 원인에 의해 그것이 이뤄지는지 인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든 일들을 신들에게 넘기고, 저들의 고갯짓에 의해 모든 것이

방향을 바꾼다고 생각하는 걸 도피처로 여겼다.

 

*금속의 사용

 

*동물의 사용

 

*직조의 기술

 

*과수원 가꾸기

 

*음악의 발달, 물질적 발전과 도덕적 타락

[1430]그러니 인간의 종족은 공연히 헛되이 항상

애쓰고, 공허한 걱정 속에 세월을 낭비하는 것이다.

놀랄 일도 아니다, 그들은 소유의 한계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고, 참된 쾌락이 어디까지 자랄 수 있는지 전혀 모르니까.

그리고 이것이 조금씩 조금씩 삶을 높은 곳으로 데려갔고,

바닥에서부터 전쟁의 거대한 흐름으로 충동해갔다.

 

*다른 지식과 기술의 발전

[440]이와 같이 세월은 각각의 것들을 조금씩 한가운데로

끌어내고, 이치는 그것을 빛의 해안으로 올려 보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에 이어 다른 것이 점차 명확해지는 것을 정신으로써

보았기 때문이다, 예술로써 꼭대기 정상에 당도할 때까지.

제6권

*에피쿠로스에 대한 찬양

 

A. 대기의 현상들

*천둥

 

*번개

 

*벼락

 

*용오름과 회오리바람

 

*비

 

*그 밖의 대기현상들

 

B. 지상의 현상들

*지진

 

*바다의 크기는 일정함

 

*화산

 

*나일강의 홍수

 

*아베르누스 호수

 

*기이한 샘들

 

*자석

 

*풍토병과 전염병

 

C. 아테나이의 대역병(大疫病)

*질병의 근원과 증상

 

옮긴이 해제

※여기서부터 ‘[ ]’ 안의 숫자는 페이지 수임.

 

1. 루크레티우스의 생애

 

2.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내용

[527~540: 강대진(옮긴이)의 상세 소제목들-원출처는 M. F. Smith의 번역 소제목이며 이것을 약간 변형했다고 역자가 밝히고 있다.]

 

제1권

서문

베누스를 향한 기원(1~43)

신들의 참된 본성(44~49)

멤미우스에게 요청함, 시의 주제(50~61)

에피쿠로스가 종교에 대해 승리함(62~79)

종교가 오히려 죄악을 낳음: 이피아낫사의 경우(80~101)

 

☞이피아낫사: 『신화집』, 아폴로도로스 지음, 강대진 옮김, 민음사, 2005, p. 94.

“아크리시오스에게는 라케다이몬의 딸 에우뤼디케로부터 다나에가 태어나고, 프로이토스에게는 스테네보이아로부터 뤼십페와 이피노에, 그리고 이피아낫사가 태어난다. 그런데 그녀들은 장서하였을 때 미치게 되었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디오뉘소스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아서이고, 아쿠실라오스가 말한 바에 따르면, 헤라의 목상을 헐뜯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미쳐서 온 아르고스를 방황했다. 나중에는 아르카디아와 펠로폰네소스를 두루 다니며 온갖 곱지 못한 모습으로 황야를 내달렸다. 그런데 아뮈타온과 아바스의 딸인 에이도메네 사이에 난 아들이면서 예언자이고, 약물과 정화 치료법을 처음 발견한 자인 멜람푸스가 그 처져들을 치료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만일 나라의 3분의 1을 준다면 그러겠다는 것이었다. 프로이토스가 그렇게 큰 보수로는 치료를 맡기지 않으려 하자, 처녀들은 더욱더 광기가 심해졌고, 이들에 더하여 나머지 여자들까지 그렇게 되었다. 그녀들은 집을 버리고 자기 아이들을 죽이고 황야를 헤맸다.”

 

미신적 믿음과 싸울 필요성에 대하여(102~135)

시인의 과업과 어려움(136~145)

 

원자론의 기본 원리

아무것도 무에서 생겨나지 않음(146~214)

아무것도 무로 돌아가지 않음(215~264)

사물들은 보이지 않는 물체들로 이루어져 있음(265~328)

빈곳이 있음(329~417)

원자와 공간만이 궁극적인 것임(418~448)

다른 모든 것은 원자와 공간의 성질이거나 사건임(449~482)

원자가 존재함: 논증의 도입(483~502)

원자들은 견고하고 영원하며 단순함(503~550)

원자는 나눠지지 않음(551~583)

원자는 변화를 겪을 수 없음(584~598)

원자에는 부분이 있으며, 이것이 연장의 최소단위임(599~634)

 

다른 이론들에 대한 반박

일원론: 불이 궁극적 존재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론(635~704)

제한적 일원론: 이원론과 4원론(엠페도클레스)(705~829)

극단적 다원론: 아낙사고라스(830~920)

 

시인의 사명

자신이 영감을 얻은 원천, 시를 쓰는 목적(921~950)

 

우주의 무한함

공간과 물질과 우주의 무한함(951~1051)

우주에 중심이 있다는 이론에 대한 반박(1052~1113)

 

덧붙이는 발

멤미우스와 독자들을 격려함(1114~1117)

 

제2권

서문

계몽되지 못한 자와 비교할 때 에피쿠로스학파의 상대적 행복(1~61)

 

원자의 운동

들어가는 말(62~79)

모든 원자는 항상 운동함(80~141)

원자의 속도는 엄청남(142~166)

곁 이야기: 신들이 세계를 창조하고 다스린다는 믿음에 대한 반박(167~183)

모든 것은 원래 아래로 움직임(184~215)

어쩌다 비껴가는 운동이 생겨 충돌과 자유의지가 있음(216~293)

물질과 운동은 언제나 있음(294~307)

사물들 속의 운동이 감지되지 않는 이유: 우리 감각으로 느끼기에는 너무나 작은 운동임(308~332)

 

원자의 모양

원자들은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음(333~380)

모양이 다르면 영향도 다름: 감각에 미치는 영향(381~477)

원자 모양의 수는 한정되어 있음(478~521)

각각의 모양을 갖는 원자 수는 무한함(522~568)

보충설명: 생성과 소멸의 힘은 균형이 잡혀 있음(569~580)

한 가지 종류의 원자만으로 구성된 사물은 없음(581~599)

곁 이야기: 대지모신 숭배(600~660)

원자들의 모양 차이에서 사물들 사이의 차이가 생김(661~699)

원자들은 아무 방식으로나 결합할 수 없음(700~729)

 

원자들은 이차적인 성질을 갖지 않음

원자에는 색깔이 없음(730~841)

원자에는 열, 소리, 맛, 냄새가 없음(842~864)

원자들은 감각이 없음(865~990)

요약과 결론(991~1022)

 

세계들의 수는 무한함

들어가는 말(1023~1047)

증명들(1048~1089)

곁 이야기: 자연은 신들의 징벌을 벗어나 있음(1090~1104)

세계는 성장하고 쇠하여 소멸함(1105~1174)

 

제3권

서문

에피쿠로스에 대한 찬양(1~30)

3권의 주제 소개: 죽음의 공포를 없애는 것이 중요함(31~93)

 

정신(사고와 감정의 자리)과 영혼(감각의 자리)의 본성

정신과 영혼은 육체의 일부임(94~135)

정신(가슴에 자리 잡음)과 영혼(온몸에 퍼져 있음)은 하나로 묶여 있으나, 정신이 주도적임(136~160)

정신과 영혼은 물질적인 것임(161~176)

정신과 영혼은 네 요소(숨결, 열, 공기, 이름 없는 요소)로 이루어져 있음(231~257)

네 요소가 결합하는 방식들, 결합 방식의 차이가 사람과 동물들의 기질 차이를 설명해줌(258~322)

영혼과 욕체는 서로 연결되어 상호 의존함(323~349)

육체 자체가 감각을 가짐: 감각기관은 입구일 뿐이라는 이론에 대한 반박(350~369)

영혼과 육체의 원자가 교대로 정렬되어 있다는 데모크리토스 이론을 반박함(370~395)

생명에는 정신이 영혼보다 더 중요함(396~416)

 

정신과 영혼이 생성, 소멸한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들

들어가는 말: 영혼의 필멸성이 증명되면 이것은 정신에도 적용됨(417~424)

영혼은 육체를 떠나면 공기 중에 흩어져야 함(425~444)

육체가 태어나고 자라서 쇠하므로, 정신도 육체와 함께 죽어야 함(445~458)

정신적 질병과 고통은 정신의 필멸성을 보여줌(459~462)

정신이 육체의 질병의 영향을 받으며, 약으로 치료된다는 사실도 그것의 필멸성을 보여줌(463~525)

사람이 죽어갈 때, 영혼이 점차적으로 떠나간다는 사실은 그것이 분할 가능하며 필멸임을 보여줌(526~647)

정신은 육체의 일부이며, 육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548~557)

정신과 육체는 연결되어서만 존립할 수 있음(558~579)

영혼이 해체와 죽음을 겪는다는 것에 대한 다른 증명들(580~614)

정신은 육체 속 특정한 자리에 있음(615~623)

영혼은 육체를 떠나서는 감각을 가질 수도 존재할 수도 없음(624~633)

영혼은 분할 가능하고 따라서 필멸적임(634~669)

영혼이 불멸한다면, 우리는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어야 함(670~678)

정신과 영혼은 인간이 태어날 때 들어와서, 죽을 때 나가는 것이 아님(679~712)

영혼의 일부는 죽은 후에도 육체 속에 남아 있으므로, 분할 가능하며 필멸적임(713~740)

종들의 특성이 영속적인 것을 보면 정신과 영혼은 다른 존재로 옮겨가는 것도 아니며, 불멸적인 것도 아님(741~775)

불멸하는 영혼들이 필멸의 육체를 놓고 다툰다는 것은 우스운 논리임(776~783)

정신과 영혼은 육체 밖에서 존재할 수 없으며, 필멸의 육체아 불멸의 영혼은 결합할 수 없음(784~805)

 

죽음에 대한 공포는 비논리적임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님(830~869)

사후의 육체가 당할 일에 대한 두려움은 이치에 맞지 않음(870~893)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의 말들은 정당하지 않음(894~911)

죽은 후에는 어떤 욕구도 없음(912~930)

죽음에 대해 불평하는 자를 향한 자연의 꾸지람(931~977)

저승과 징벌은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함(978~1023)

이전의 위대한 인물들도 죽었으므로, 죽기를 억울해 하는 것은 옳지 않음(1024~1052)

불안과 권태는 사물의 본성을 알면 쫓아낼 수 있음(1053~1075)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영원하므로, 삶에 집착해봐야 소용없음(1076~1094)

 

제4권

서문

시인의 사명(1~25)

4권의 주제(26~53)

 

사물에서 나온 얇은 영상의 존재와 속성

영상들의 존재에 대한 증명들(54~109)

영상들은 섬세한 성질을 지녔음(110~125)

영상들은 힘도 없고 감각도 일으키지 않음(127~128)

어떤 영상들은 공기 중에 저절로 형성됨(129~142)

영상들은 매우 빠르게 형성됨(143~175)

영상들은 놀랍게 빠른 속도로 이동함(176~216)

 

감각과 사고

영상들은 시(視)지각을 일으킴(217~238)

영상으로 인해 우리는 거리를 판단할 수 있음(239~268)

거울에서 일어나는 현상(269~323)

시각의 여러 문제들(324~378)

착시 현상들(379~468)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한 논박: 감각은 틀릴 수 없음(469~521)

소리, 맛, 냄새에 대한 논증 도입부(522~523)

청각은 귀를 때리는 소리 입자에 의해 발생함(523~548)

목소리와 메아리에 대한 설명(549~594)

보는 것을 막는 방해물들을 소리가 뚫고 지나가는 이유(594~614)

맛의 원인(615~632)

같은 음식이 동물마다 다른 영향을 끼치는 이유(633~672)

냄새의 원인(673~686)

냄새가 소리나 영상만큼 멀리 가지 못하는 이유(687~705)

동물마다 다른 형태와 색깔을 싫어함(706~721)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마음 속에 그려지는 이유(722~748)

꿈 속에 나타나는 영상들이 움직이는 이유(749~776)

마음속 영상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들(777~822)

 

여러 가지 생명의 기능들: 영양, 섭취, 운동, 수면, 꿈, 짝짓기

감각기관과 사지가 현재의 쓰임에 맞도록 설계되었다는 믿음에 대한 반박(823~857)

생명체들은 잃어버린 질료를 보충하기 위해 음식을 섭취하고, 내불의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마심(858~876)

육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설명(877~906)

수면에 대한 설명(907~961)

꿈에 대한 설명(962~1036)몽정(1030~1036)

남성의 성욕의 원인(1037~1057)

성적인 사랑은 혼란을 일으키며, 만족을 모르고, 헛됨(1058~1120)

성애는 건강과 부, 명성을 헤치고 사람을 불행하게 함(1121~1140)

성공적이지 못한 사랑의 질병: 좋아하는 여자의 단점을 보지 못함(1141~1191)

성적인 쾌감은 남녀에게 공통임(1192~1208)

유전에 대하여(1209~1232)

불임의 원인과 처방(1233~1277)

평범한 여자가 사랑을 얻는 법(1278~1287)

 

제5권

서문

에피쿠로스에 대한 찬양(1~54)

앞에 나온 내용의 요약과 5권 주제 소개(55~90)

 

우리 세계의 성질과 그 구성방식

이 세계는 조만간에 파괴됨(91~109)

땅과 천체들은 신적 존재가 아님(110~145)

신들은 이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음(146~155)

신들은 인간을 위해 이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음(156~234)

세계의 4대 원소(흙, 물, 공기, 불)는 필멸적임(235~323)

세계에는 시작이 있으며, 이 세계는 아직 젊은 상태임: 역사 기억은 그리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며, 기술과 학문은 아직 발전 중에 있음(324~350)

이 세계는 불멸적 속성을 갖지 못했음(351~379)

요소들 간의 다툼이 어느 한 요소의 승리로 끝날 때, 그것이 세계의 종말임(380~415)

세계 각 부분이 형성된 과정(416~508)

 

천문현상들

천체들의 움직임(509~533)

땅이 세계 한가운데 머물러 있는 이유(534~563)

해, 달, 별들의 크기(564~591)

작은 태양이 큰 빛과 열을 줄 수 있는 이유(592~613)

천체들의 궤도(614~649)

밤과 새벽이 오는 이유(650~679)

밤과 낮의 길이가 변하는 이유(680~704)

달의 모습이 변하는 이유(705~750)

일식과 월식의 원인들(751~770)

 

생명체의 발생에 대하여

들어가는 말(772~782)

어머니 대지가 동식물을 낳음(783~836)

처음에 땅은 불완전한 생명체들도 낳았음(837~854)

생존능력 있는 것들만 살아남음(855~924)

서로 다른 종이 복합된 것은 존재할 수 없음(878~924)

원시인의 생활(925~1010)

 

문명의 발전

문명의 시작(1011~1027)

언어의 기원(1028~1090)

불의 기원과 그것의 사용(1091~1104)

군주정의 발생, 부의 발견과 나쁜 결과들(1105~1135)

왕들의 몰락, 행정관 선출, 법 제정(1136~1160)

신에 대한 믿음의 원인들(1161~1193)

신들의 본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비참한 상태들(1194~1240)

금속의 발견과 사용(1241~1280)

철의 사용(1281~1296)

전쟁에 말과 코끼리를 사용함(1297~1307)

황소, 멧돼지, 사자를 전쟁에 이용하려는 시도와 그 결과(1308~1349)

직조술의 발달(1350~1360)

음악의 기원, 소박한 것에 대한 싫증, 불필요한 소유를 향한 어리석은 욕망(1379~1435)

계절의 순환에 대한 지식91436~1439)

기술의 발달(1440~1457)

 

제6권

서문

에피쿠로스에 대한 찬양(1~42)

6권의 주제 소개(43~95)

 

대기의 현상들

천둥과 그 원인들(96~159)

번개와 그 원인들(160~218)

벼락의 성질(219~238)

벼락의 형성과정(239~322)

벼락의 속도와 위력(323~356)

벼락의 주로 봄, 가을에 떨어지는 이유(357~378)

벼락을 신들이 던진다는 믿음에 대한 논박(379~422)

용오름과 회오리바람(423~450)

비와 무지개(495~526)

다른 대기현상들(527~534)

 

지상의 현상들

지진의 원인들(535~607)

바다의 영역이 일정한 이유(608~638)

아이트나 산의 분출(639~702)

나일 강이 여름에 범람하는 이유(712~737)

그 위로 지나가는 새를 죽게 하는 아베르누스 호수 같은 장소들(738~839)

우물물의 온도변화에 대한 설명(840~847)

낮에는 차고 밤에는 따듯한 암모 성역의 샘(848~878)

쏘시개에 불을 붙이는 도도나의 샘(879~905)

자석(906~1089)

풍토병과 전염병(1090~1137)

아테나이의 대역병(1138~1286)

 

3. 루크레티우스가 사용한 자료의 문제

 

4. 집필순서에 대한 논의들

 

5. 작품의 시작부분

[565]요약하자면, 루크레티우스는 호메로스 전통과 헤시오도스 전통을 모두 받아들이는 한편,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엠페도클레스의 틀에 얹어 작품을 썼고, 그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은 이가 베르길리우스라는 것이다.

 

[566]이런 추측[미완성이라는 추측]을 하는 것은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의 요약 중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네 가지 치유책(tetrapharmakon)’이라는 것에서 다른 것들은 다 언급되었는데, 마지막 하나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핵심적인 가르침(Kyriai Doxai)’의 첫 네 항목을 요약한 그 치유책이란 이렇다. “신은 두려움을 주지 않으며, 죽음은 걱정을 주지 않는다. 좋은 것은 얻을 수 있고, 나쁜 것은 견딜 수 있다.” 그러니까 마지막 ‘나쁜 것’의 사례로 아테나이의 전염병이 나왔다는 것이다.

 

☞‘테트라파르마코스’에 대한 위키 설명: http://en.wikipedia.org/wiki/Tetrapharmakos

그리고, 이건 이 격언이 적힌 최초의 파피루스조각

 

 

6. 작품의 끝맺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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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의 영혼 폴 리쾨르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8
칼 심스 지음, 김창환 옮김 / 앨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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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쾨르는 기독교 좌파 철학자다. 이렇게 말해 놓고 보면, 그의 후기 철학의 철저성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철학자려니 ... 하면 그만이다. 1968년 당시 낭떼르의 학교 당국자였던 리쾨르가 수정주의자로  낙인찍히면서 학생들이 던진 쓰레기통을 뒤집어쓴 것은 당시의 가치기준 안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리쾨르는 말년에 다시 낭떼르로 돌아 간다. 그의 넓이다. 그게 바로 해석과 함께하는, 크리스찬으로서의 넓이다.

 

리쾨르를 읽으면, 거기서 토마스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궤적을 느끼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리쾨르가 자주 <그리스도교 교양>의 해석학적 원칙들을 말하는 것은 그가 토마스가 기반한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플라톤의 이념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이것은 그리 과도한 해석은 아니다. 좌파 지식인들이 종종 오해하는 것처럼 실천의 측면에서 유물론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플라톤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플라톤은 70의 고령을 이끌고도 시라쿠사로 가서 그의 이상국가를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조금 위악적으로 해석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게 닥쳐올 정치적 보복을 피해 고향인 마케도니아로 피신했다. '정면 대결'이라는 정치적  행동원칙이라는 측면에서 누가 더 유물론적인가? 나는 기꺼이 플라톤의 손을 들 것이다.

 

리쾨르도 마찬가지다. 그가 비록 해석학이라는 보수적인 철학적 방법론을 택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정의'를 희구했다는 것은 그의 말년 저작들(주로 정치철학)에서 드러난다. 이 책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리쾨르가 끝내 드러내지 못한 그의 올곶은 그 '좌파 기독교인'의 정체성이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서 지복을 누릴 수 있는 자는 어떤 이일까? 지금의 우리 '자랑스런'(?) 사찰 정부, 쥐일당은 아닐 것이다. 리쾨르의 시각에서 그들은 교회를 모독했으며, 마땅히 지옥의 후견인들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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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쾨르-해석의 영혼》

칼 심스 지음, 김창환 옮김, 앨피2009,

옮긴이의 글_해석을 기다리는 텍스트, 폴 리쾨르

왜 리쾨르인가?

협력과 믿음의 사상가

[21]어떤 소재를 다루든지 간에 리쾨르는 항상 종교적 믿음의 가치와 사회정의를 방어한다. (...) 그는 결코 유행을 따르는 경박한 사람이 아니다. 침착하고 끈기 있는 문체로 씌어진 리쾨르의 작품들은 학문적 담론을 통해 그가 사회에 바라는 바, 곧 협력을 추구한다. (...)[22]그는 자신의 사유가 다른 사상가들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 소리 높여 주장하기보다 조용히 유사성을 끌어내는 유형이다.

리쾨르의 이력

이 책은

[29]리쾨르는 자신의 사상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사상가라고 부를 수 있다. 194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월의 무게만큼 사유를 계속 축적해 온 그의 작품에는 그 이면에 어떤 연속성이 존재한다. 그의 사상 하나 하나는 이전 사상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발전이다.

[R-Commentary] 이 ‘연속성’은 리쾨르가 말년의 인터뷰뷰에서도 말했다시피 ‘주체성의 복원’이다. 과연 이에 대해 들뢰즈는 뭐라 할 것인가? “그건 해서 뭐하게?” 또는 ...

01_선과 악

인간 삶의 변증법

[33]초기 사유에서 삶은 ‘변증법적’인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다. 나는 선택하고 내가 나아갈 바를 정한다.(이것이 의지적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나의 통제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지닌 채로 세계 내적 존재의 필연성에 종속된다. (...)나는 내 존재의 필연성과 더불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그 성격이 나의 의지를 거스르는 무의식적인 정신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이러한 존재가 ‘비의지적인 것’이다.)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의지와 정념

[35]의지에는 ‘결정’, ‘움직임’, ‘동의’라는 세 가지 ‘양태’ 혹은 방식이 있다. 내가 ‘결정할 때’ 내 의지의 목적은 ‘내가 구성한 ...... 내 능력에 맞게 내가 수행한 기획’이다(Ricoeur 1966: 7) 내가 ‘내 몸을 움직일 때’ 행동이 실행된다. 내가 ‘동의할 때’ 나는 필연성에 승복한다. 즉 사물은 본성대로 존재하고 나 또한 생물학적 몸을 지니고 산다는 필연성에 묵묵히 순응한다.

리쾨르에 의하면 의지의 세 차원은 의지의 반대, 즉 비의지적인 것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첫째, 내가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은 결정의 특정한 목적이 기획뿐 아니라 그 결정을 정당화하는 동기와의 근원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Ricoeur 1966: 7) (...) 결정을 내릴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이유들은 비의지적인 것의 형식이다. 이 이유들은 리쾨르는 ‘동기부여’라고 부른다. 둘째, ‘내 몸을 움직일 때’ [36]나는 내 몸이 의지에 지배당하는 만큼이나 [호흡과 같은] 비의지적인 움직임에도 지배당한다는 것을 반드시 인지하게 된다. (...) 셋째, 내가 ‘동의할 때’ 나는 나보다도 내가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나 자신을 양도한다. 이는 필연성의 형식이다.

[40]리쾨르는 내가 몸을 지니는 것은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비라고 주장한다. (...) 문제는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비’는 우리가 답을 몰라도 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해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코기토는 나 자신을 정립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나는 무엇[41]보다도 코기토를 가능케 만드는 조건, 즉 몸을 지녀야 한다는 조건에 참여해야만 한다. (...)

내가 몸을 지닌 세계 내적 존재라는 필연성이 없이는 자유의지도 가질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자유의지는 필연성에 의해 조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역설이다. (...)

[R-Commentary] 자유는 그래서 ‘몸’을 놓고 의지와 사유가 벌이는 하나의 ‘내기’일 것이다. 만약 몸이 변용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자유의 승리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몸의 승리가 된다. 둘 모두 패배하지 않는 주체의 내기인 것이다. 낙관론 또는 의지의 낙관론.

[42]인간의 자유는 욕구, 감정, 습관, 필연성 등의 부정적 개념들로 제한되는데, 이때 부정적 개념들은 자신을 거절할 수 있는 의지의 가능성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결정한다. 리쾨르는 그것들을 ‘한계 개념’이라고 불렀다.

오류를 면치 못하는 인간:실수, 불균형, 연약성

상상력

성격

[46]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관점을 선택하더라도 나는 동일한 성격을 가질 것이다. (...) 근본적인 변화라 하더라도 그 변화를 위해서는 어떤 결정이 필요한데, 그 결정은 ...... 당연히 내 성격에서 도출될 것이다.

필수불가결한 것인 성격은 내 유한성의 일부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격이 내 자아의 모든 것은 아니다. 나는 성격 외에 인간성을 지니고 있다. 이때 인간성은 무한하다. 왜냐하면 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덕과 악덕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인간성이 [47]성격의 역(逆)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성격은 ...... 특정한 각도에서 본 인간성이다.’(Ricoeur 1965a: 93)

감정

[49]철학적으로, 지향과 감정을 분리하려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사유의 영역에서 ‘현상학적 환원’이 하는 일이다. 하지만 감정의 영역에서는 동일한 책략이 통하지 않는다. 감정의 대상을 내적 대상과 분리시켜 보라, 그러면 그 대상은 감정의 분리와 함께 사라져 버리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다.

[50]우리는 어떤 것도 중립적으로 지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직관적으로 선호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을 더 좋아한다. 이때 직관으로서의 ‘좋음’과 ‘나쁨’은 도덕적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우리가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단순히 좋은 것을 좋다고 ‘느끼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느낀다. (...) [51]충분함, 즉 좋음과 나쁨에 관한 도덕적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감정과 인식을 종합하는 것이다.

[R-Commentary] 그렇다고 해서 충분할 것인가? 알고서 좋아하는 것, 좋아하고 아는 것. 어느 것이 더 충분한가? 다른 식으로 물어 보자. 알기 위해 믿는 것(credo ut intelligam), 믿기 위해 아는 것(fides quaerens intellectum) 어느 것인가?

갈등과 창조성

[51]리쾨르는 ‘갈등은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능’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 갈등은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아와 타자의, 성격과 인격의, 그의 사유와 감정의 갈등이다.

리쾨르는 각각의 대립 쌍 중 후자를 선호한다. 다시 말해 타인, 인격, 동료라는 감정은 인류 공동체로 진입하는 경로이며, 주관적 자아가 모든 인류가 가지고 있는 특징에 참여하는 지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리쾨르는 인간의 내적 갈등 자체가 필연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창조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악의 상징성

인간은 [오류의 필연성, 실수, 깨지기 쉬움으로 인한] 악에 대한 수용 능력을 공언함으로써 (...) 타락한 존재로 넘어간다.

고백의 현상학

[53]악은 적어도 악을 고백할 가능성이 의식에 떠오르기 전까지는 악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보면 고백의 가능성은 이미 악한 행위 속에 담겨 있다.

[53]리쾨르는 고백, 곧 실수와 관련된 우리의 행위가 세 가지 원천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흠, 죄, 허물이 그것이다. 흠은 죄보다 더 근본적이다. [이때 흠은 더러움, 부정함이 아니라 불순함과 오염에 대한 윤리적인 두려움이다]

[54]흠의 상징이 ‘고대적인’ 것이라면, 죄의 상징은 사회가 신의 개념을 가진 다음에야 발생한다. 흠의 상대역이 정의라면, 죄의 상대역은 구속이다.

허물

[55]허물과 죄 혹은 흠의 차이는, 허물이 주관적이라면 흠과 죄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객관적이라는 점이다. 흠은 외부의 몸의 개입으로 발생한다. 죄는 여러 문화가 공유하고 있는, 실수에 대한 공식적인 상징화이다. 한편 허물은 실수를 내면화한다. (...)

허물은 우리 자신의 악행에 따라붙는, 처벌받을 것이라는 ‘우리의’ 예측이다. (...)

허물은 정말로 흠이나 죄와 달리 그 방법에서 고백적이다. 흠은 내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다. 죄는 내가 비난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허물은 내가 나 자신을 비난한다. (...)

허물은 나쁜 선택을 하기 위해 자신을 속박함으로[57]써 부자유하게 된 자유의지를 가리키는 궁극적 표현이다.

[R-Commentary] 자유의지는 자신의 허물을 통해 부자유하게 되는 것이지 신에 의해 부자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죄는 신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 플로티노스적 악의 관념. 칸트까지. 과연 ‘죄’는 존재하는가? 스피노자-들뢰즈는 그렇게 물을 것이다.

신화들

[57]네 가지 유형의 신화란 창조신화, ‘비극적’ 인간관의 신화, 타락한 인간의 신화, 유배당한 영혼의 신화를 말한다.

(...)모든 창조신화는 세계의 탄생을 말하기 전에 신의 탄생을 말한다. (...) 본질적으로 창조신화들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안적 답변이다. (...)

[58]비극적 인간관의 신화는 악한 신 개념에 의존한다. (...)창조신화와는 달리 비극적 관점은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장면 보기를 지향한다. (...)

타락의 신화[는] ‘아담의 신화’ 즉 ‘탁월한 인간학적 신화’이다.(Ricoeur 1967: 232) (...) 아담신화의 특수성은 악의 기원을 인간 안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

[61]유배된 영혼의 신화[는] 자신을 ‘영혼’과 ‘몸’보다는 ‘영혼’과 ‘나머지’로 이해한다는 것이다.(Ricoeur 1967: 279) 이에 관한 탁월한 예가 오르페우스이다. (...)[이 신화는] 몸을 종말론적인 힘으로 만든다.

근대성 속의 신화들

[63]리쾨르는 (...) 아담의 신화를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는다. (...)

[64]‘아담의 신화가 뛰어나다고 해서 다른 신화들은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Ricoeur 1967: 309) 오히려 아담의 신화는 다른 신화들을 전유함으로써 그것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준다.

[R-Commentary] 이 ‘새로운 생명’이란 분명 설명되어야 할 무엇이다. 리쾨르의 신화해석이 그렇게 광범위한 예들을 취급하고 있지 않은 것은 그가 다른 예들을 몰라서라기보다는 그의 신화해석이 겨냥하는 바, 즉 기독교 신화해석의 이 ‘전유’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들이 불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해석의 잔여’는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02_해석학

세계를 텍스트로 삼는 해석학

[71]리쾨르의 해석학은 상징적 의미에 집중하고자 의미론적 의미에 괄호치기를 한다. 즉 그의 구호는 ‘상징은 해석을 불러일으킨다’이다.(Ricoeur 1967:352)

상징 해석

언어와 텍스트

지향적 의미

이해

해석학적 순환

내기

거리 두기

[87]텍스트성(텍스트가 되게 하는 것)은 이중적으로 거리 두기를 한다. 즉 텍스트성은 작품을 생산수단에서 떼어 놓는다. 그리고 청중들에게서도 떼어 놓는다. 텍스트는 저자의 심리적인 ‘의도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저술 시기를 지배하고 있던 사회적 조건들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더 나아가 텍스트는 그것이 말해진 사람들에게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읽을 수 있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읽힐 수 있다. 리쾨르는 이러한 텍스트 해방의 ‘자율성’을 발견했다. 이 같은 속박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텍스트는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 세계에 거주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

독자는 작품과 결합함으로써 자기 이해를 획득하는데, 이는 저자의 의도에서 작품을 떼어 놓을 수 있는 글쓰기의 거리 두기 효과를 통해 가능하다. (...)

[88]바르트와의 유사성 (...) 리쾨르는 인간 역사의 한 시점에서 글쓰기는 ‘단순히 전대(前代)의 구전 담론을 고정시키는 것’이기를 그치고, 대신에 ‘인간 사유는 직접적으로, 구어의 매개 단계 없이 바로 글쓰기가 되었다’고 말한다.(Ricoeur 1976: 29)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씌어진 담론’ 또는 새긴 글자를 갖게 되면서부터 ‘저자’의 의도와 텍스트의 의미는 서로 부합하기를 그친다.(Ricoeur 1976: 29) 이로서 텍스트는 해석자 혹은 독자의 관점을 통해 ‘의미론적 자율성’을 획득한다.

[R-Commentary] 문자에 대한 긍정. 플라톤에 대한 비판. 이것은 곧 리쾨르가 히브리 전통에 속한 해석학자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당연하다. 노장과 불교에서는 오히려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사상을 실천철학에까지 밀어붙인다. 그것이 선(禪)이다.

03_정신분석

상징 해석이라는 연결 고리

정신분석 대 해석학

[96]해석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 프로이트에 의하면 꿈 언어는 왜곡된 언어이다. 무의식이 (꿈)재료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기[97]실 이 억압은 꿈 재료가 의식에 들키지 않도록 감추는 것이다. 반면 신화를 다루는 대목에서 보았다시피, 리쾨르가 보기에 담론은 우리를 속이려 하지 않는다. (...)

[R-Commentary] 이 chapter는 상당히 미심쩍다. 주로 정신분석과 리쾨르 해석학의 대조점을 찾고 있는데, 이는 리쾨르 해석학의 근본 취지(종합과 화해)와도 맞지 않으며, 또한 그가 프로이트에 대해 한 작업(《해석에 대하여》, 《해석의 갈등》)의 결과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R-Commentary] ‘상징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만약 이 ‘상징’이 오류의 상징이라면 어떻겠는가? 우리는 과연 리쾨르처럼 담론의 진리를 무한정 신뢰해야 하는가? 아니, 혹시 심스는 해석학의 ‘해석’이라는 것에서 어떤 ‘의심’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보기에 리쾨르는 충분히 ‘담론을 의심’하고 있다. 그것은 ‘믿기 위해 안다[인식한다]’라는 것에도 충분히 함축되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리쾨르와 프로이트 사이에 있는 해석의 강은 루비콘 강처럼 아득한 것은 아닐 것이다.

[98]두 번째 차이는, 전자[프로이트]가 무신론을 향한다면 후자[리쾨르]는 기독교 신앙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정신분석에 의하면 양심은 초자아의 기능[이며] (...) 단순히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것의 이름이 되고 사회의 명령에 순응하기 위해 이기적인 정신이 따라야 하는 유일한 모티프가 된다. (...) 선악을 측정할 수 있는 외적이고 절대적인 도덕적 기준은 없다. 대신 ‘선’과 ‘악’은 상대적으로 ‘허용될만한 행동’과 ‘허용될 수 없는 행동’으로 축소된다.

(...) 이 모든 것은 리쾨르의 사유와 상반된다. (...) 리쾨르에게 악은, 설령 그것이 사람의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 사람에게 작용하는 외적인 힘이 아니라 하더라도, 실재이며 영원히 그러하다. (...) [99]리쾨르가 인간의 선을 향한 자연적 기질을 견지하는 한편, 프로이트는 인간은 자연적으로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프로이트 자신이 ‘자연’이라고 부른 것) 기질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리쾨르에게 악은 우리가 가장 연약한 순간,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념이 이끄는 대로 내버려 두는 순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는 어떤 것인 반면, 프로이트의 사유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정념이 이끄는 대로 개방적으로 내맡길 때 세계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R-Commentary] 초자아의 기능은 정념을 통제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사회구성체’가 형성, 유지될 수 있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주장이다. 이 부분은 심스가 실수하고 있는 듯 보인다.

(...) 세 번째 차원은 (...) [해석학의 시초인] 현상학은 의식철학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리쾨르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을 없애 버렸다. 다시 말해서 리쾨르는 정신을 몸과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다루지 않고, 정신은 몸에 대한 성찰 없이 자신을 사유할 수 없다는 현상학적(그리고 기독교적 실존주의자의) 관점을 공유한다. 이 주장에서 현상학자는 존재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정신의 일부인 무의식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R-Commentary] 내가 보기에는 리쾨르의 ‘몸’과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리쾨르는 분명 《의지의 철학 1》에서 몸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는 ‘비의지적인 것’의 범주에 무의식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100]정신분석적 관점은 현상학의 데카르트적 확실성에 관한 탐구와 일치하지 않는다. (...)

[R-Commentary] 리쾨르가 현상학에만 머물지 않았던 것은 데카르트적 확실성이 의식의 직접성이라는 맹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직접성을 우회하여 주체를 충전하기 위해 해석학적 순환(반성철학)이 필요했다. 따라서 리쾨르의 작업을 현상학으로 뒤늦게 환원해서는 곤란하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이드가 있는 곳에 에고가 있을 것이다’라는 공식으로 대체한다(1973: 112). (...) 주체, 즉 ‘나’라고 말하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 자신과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은 해석학이다

[101]정신분석학과 해석학의 첫 번째 유사성은 둘 다 어느 정도 성스러움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 [프로이트에게는] 인간이 어떻게 종교를 경험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한편 해석학은 철학적으로는 현상학에서 나온 것이지만, 읽기 경험으로 보면 성경 해석의 전통인 ‘성경해석학’에서 나온 것이다. (...) 정신분석은 세속적인 고백과 유사하다는 말을 종종 듣고 있으며, 해석학도, 최소한 리쾨르가 실천한 해석학은 인간 조건 안에서의 실수 분석과 관련된다.

[R-Commentary] 이렇게 되면, 리쾨르의 것만이 아니라 그 어떤 해석학도 프로이트의 분석과 유사하게 된다. 단지 ‘관심’만으로 리쾨르와의 유사성을 파악한다 ... 글쎄 이건 꽤나 실수투성이처럼 보인다.

[102]정신분석은 환자들에게 무의식의 감추어진 의미가 드러나면서 파악된 진리에 입각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해 준다. 해석학은 텍스트의 감추어진 의도 속에서 세계 속에서 윤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교훈을 발견한다.

정신분석 이론과 현상학적 태도

반대 방향의 에포케

오이디푸스

종교

04_은유

리쾨르의 ‘살아 있는 은유’

은유, 미메시스, 행동

[124]미메시스는 (...) 어떤 것을 재현하고자 신중을 기한 창조이다. (...) 즉 은유와 직유의 관계는 미메시스와 모방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 미메시스는 행동의 모방이다. 달리 말하면, 미메시스는 플롯muthos을 수반한다.

은유는 비유다

[129]비유론은 전통적으로 ‘의미론적 탈문lacuna’ 개념에 의존한다. 탈문은 의미의 틈이다. 의미론적 탈문은 작가가 채우기 원하는 문장 속의 틈이다. 그 틈은 다른 담론 영역에서 빌려 온 변칙적인, 혹은 상궤를 벗어난 단어로 채워진다. 빌려 온 낯선 용어는 문장 속에 부재하는 용어를 대신하게 되는데, 이는 작가의 선호 문제이기도 하고 작가의 어휘에 틈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의 선호는 작가 고유의 수사를 낳고 어휘의 틈은 비유의 남용을 낳는다.

[R-Commentary] 이 ‘틈’은 의미론적 ‘잔여’와 같다. 이 틈을 메우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잔여가 작동할 것이며, 그것은 영원히 반복된다. 해석학적 순환의 심층에는 이 ‘차이나는 것들의 반복’이 있는 것이 아닐까? 과연 들뢰즈와 리쾨르가 처음 조우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 ‘은유’가 아닐까?

[132]퐁타니에의 결론과 달리, 리쾨르는 은유가 명제를 가리키며 개별단어의 층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퐁타니에는 자기 이론의 귀결을 보지 못했다. 예를 들면, 그의 맹목은 알레고리를 확장된 은유로 보지 못하게 방해했다. 반면 리쾨르에게 알레고리는 명제의 층위에서 명시적으로 작동하는 은유이다. 실제로, 일단 은유가 단어에서 자유로워지면 그 다음에는 모든 기술description이 은유적[133]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133][익숙해진 은유와 달리] 새로운 은유는 언어 속에서 자유를 실행한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 속에서의 자유는 리쾨르가 보기에 인간 창의성의 표지이다.

은유와 의미론

I. A. 리처즈: 리처즈의 이론은 노골적인 컨텍스트적 이론이다. 다시 말해 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가 사용된 문맥에 의거하여 단어가 나타나는 매 순간마다 독자 혹은 청자가 ‘추측해야 하는’ 것이다. 사전의 정의는 그저 한 단어가 차지하고 있는 영역을 투박하게 안내하는 것에 불과[135]하다.

[R-Commentary] 추측하는 것, 이념이 작동하는 것.

막스 블랙:

먼로 비어즐리:

로만 야콥슨:

은유와 해석학

[142]은유는 청자나 독자들에게 해석을 강요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다. 해석 작업(다시 해석학이다.)은 은유적 과정의 고유한 부분이다. 하나의 과정인 은유는 단어의 연결을 단어가 위치하고 있는 전체 문장의 문맥 속에 연관시킬 뿐 아니라, 그 문장이 위치한 담론의 문화적 맥락과도 연관시킨다. 이것이 바로 은유가 살아 있다는 말(곧, 해석하는 존재가 된다.)이 뜻하는 바이며,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은유적 차원이 언어 가운데 가장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R-Commentary] 또 하나. 은유는 ‘강요’한다. 즉 은유는 어떤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사유를 불러 일으키는 그 ‘기호’ 들뢰즈-스피노자의 ‘기호’가 아닐까?

[144]그러면 시적 은유란 무엇인가? 시적 언어는 물론 그것이 시 안에서 번번히 발견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시의 언어일 필요는 없다. 리쾨르는 은유가 자기 발견적 허구를 생산하는 언어, 달리 말하면 우리가 뭔가를 파악하도록 혹은 발견하도록 이끄는 허구라고 말한다. 언어의 시적 기능은 우회로를 통해 실재에 대한 재서술을 추구한다. 실재를 기술하는 경로를 간접적으로 만듦으로써 은유는 재서술의 수단이 된다. 언어가 은유를 통해 직접적인 기술이라는 제 기능을 스스로 벗어 버릴 때(Ricoeur 1977: 247), 언어는 발견의 기능에서 해방되어 신화적 차원을 획득한다.

[R-Commentary] 이 신화는 아폴론의 것인가? 디오뉘소스의 것인가? 아니면 미노타우로스의 것인가?

은유와 철학

05_이야기

은유와 이야기의 생산적인 창안

이야기와 해석학

건강한 순환

시간

[156][아리스토텔레스-칸트로 이어지는 시간에 관한 이론과는 다른] 시간에 관한 두 번째 이론은 (...)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으로 개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근대의 현상학에 대해 몰랐지만, 그의 이론은 시간에 관한 ‘현상학적’ 이론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20세기의 후설과 하이데거가 그의 이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만일 시간이 ‘현재들’의 연속이라면, 언제나 내가 지금을 말할 때 그 지금은 이미 지나간 것이 된다. (...) 시간 개념은, 더 엄밀히 말해서 현재 시간 개념은 항상 현재 시간, ‘지금’에 뒤쳐져 있다. 이 역설은 현재를 가리키는 ‘지금’이라는 단어가 실제로는 현재를 가리킬 수 없다는 데 있다. (...) [157]수학적 용어로 말해서 현재의 지금-점noe-point은 연장이 결여되어 있다. 즉, 무한히 작은 점이다. (...)

[158]아우구스티누스의 역설에 대한 해결책은 ‘세 겹의 현재’라는 개념이다. 과거와 미래는 한편으로 기억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 기대를 통해 마음속에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려면 정신은 반드시 이완되어야, 확장되어야 한다. (...) 현재의 연장의 결여는 정신의 이완을 통해 극복된다는 것이다. 사실 사유는 정신의 이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신이 사유인 한 그것은 하이데거가 ‘현전’이라고 부른,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매개된 현재의 지속적인 펼쳐짐으로서의 사유이다. 정신이 이런 방식으로 연장되는 한, 지속적인 현재는 그 안에 과거와 미래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유가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는 시간과 영원성의 대조를 가능케 한다. 영원성은 ‘매우 긴 시간’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시간의 바깥이다. (...) [159]신은 시간을 창조했고, (...) 신은 영원하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 시간은 정신의 움직임으로 생긴다고 선언했다. (...)

신의 정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하다. 만약 사람의 정신이 ‘움직이지 않게 고정된다면’ 영원성이 어떤 것인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신과 달리) 창조된 존재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아니고선 정신을 정적인 상태로 유지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영원성이 어떤 것처럼 보이는지 간신히 상상할 수는 있다. 우리는 마음의 지향성intentio을 가질 수 있다.

아우[160]구스티누스의 시간 이론은 리쾨르가 이야기에 의존하는 시간을 기술할 때 받아들인 모델이다. 리쾨르의 공식은 팽창 속의 마음의 지향성, 즉 고요를 향하는 정신의 지향과 그 움직임을 시간 속에서 구성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지각하게 만드는 정신의 팽창이 만들어 내는 변증법이다.

마음의 지향성의 ‘지향’은 리쾨르에게 현상학적 지향, 혹은 현상학적 지향성이다. 의미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 정신의 동기부여하는 힘이다. 만약 의미가(문장 속에서의 단어의 펼쳐짐 그리고 담론 안에서의 문장의 펼쳐짐. 고립된 채 의미를 갖는 단어는 없다.)에 기인한 것이라면, 의미는 시간 속에서 생산되고 이해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세 겹의 현재’라고 이해한 인간적 시간이며, 영혼을 가지도록 북돋워 주는 인간적 의미이다. 이야기는 플롯에 의존함으로써 인간적 의미 중에서 가장 풍요로운 담론의 형식이 된다. 이야기의 의미를 발견하라. 그러면 인간 영혼의 영원한 진리를 발견할 것이다.

[R-Commentary] 의미가 과연 ‘본질의 펼쳐짐’인가? 본질이 의미를 통해 오는 것이라면, 시간은 이야기를 ‘해석’하는 그 정신의 지향성으로 인해 오히려 굴절되거나 비껴가지 않겠는가? 여기!! 현상학의 지향적 시간성 대 들뢰즈의 수동적 시간성.

미메시스1, 미메시스2, 미메시스3

줄거리 구성

역사

[169]역사는 의사플롯인 것이다. (...) 요컨대 역사의 사건은 의사사건인 것이다. 그것들 사이에서 의사플롯, 의사인물, 의사사건은 리쾨르가 다른 어떠한 형식의 담론과도 대비되는 ‘역사의 지향성’이라고 부른 것, 즉 역사가 되기 위해 역사 이면에 있는 ‘의미-의도’라고 부른 것을 이룬다.

[R-Commentary] 그렇다면 진정한 사건, ‘실재로서의 사건’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은 리쾨르에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리쾨르에게는 역사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의 실재성 여부는 당장 인간의 삶 또는 종교적 비의와는 관계 없어 보이는 것 같다.

허구

[171]허구 이야기는 언술statement(말해진 것)과 언술행위utterance(말할 때의 방식)의 구분을 강요하며 동사 시제 사용함으로써 구분한다. 담론은 ‘나는 상점에 갈 생각이다I am just going to the shops’처럼 전형적으로 현재시제를 변형(예를 들면 진행형과 함께 사용) 하거나 (미래시제가 있는 언어들에 대해서는) 미래 시제를 변형해서 사용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야기narrative는 ‘그 남자는 독양을 마신 후 죽었다The man drank the hemlock and then he died’처럼 전형적으로 과거시제, 특히 ‘아오리스트aorist’(한정 단순 과거)와 ‘단순 과거 시제preterite’를 사용한다. 여기서 동사 시제는 시간을 과거, 현[172]재, 미래로 구별하는 것과 필연적으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175]허구 이야기의 이러한 특성은 작가의 시점과 (작가가 만들어 낸) 화자 그리고 작중 인물 사이에 즉각적인 거리를 만들어 내고, 통상적인 의미에서는 작가의 견해 혹은 이데올로기인 작가의 시점을 쉽사리 드러나게 한다. 작가는 화자의 입을 통해 작중인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함으로써 혹은 그 반대로 평가함으로써, 아니면 독자가 승인한 작[176]중인물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냉담한 화자를 통해서 어느 쪽이라도 자신의 시점을 드러낼 수 있다.

[R-Commentary] 픽션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작가는 작품의 공간(이를 ‘topos phantasmata’라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전일적인 위치에 있게 되며, 반대로 작품에 부재하게 된다. 과연 블랑쇼와 바르트 이래 ‘작가의 죽음’이 진정 허무주의를 내장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작가는 본래 부재하면서 허구의 공간 안에 유령처럼 떠돈다.

역사와 허구를 함께

[179]명백한 차이는 허구적 과거의 비실재성과 대조적인 역사적 과거의 실재성이다. (...)

‘역사적 실재’는 순진하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 역사적 과거는 (...) 한때 실재했다. 하지만 그 실재성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 리쾨르에 따르면 역사적 과거의 실재성은 증언, 기록, 목격담 등 리쾨르가 ‘흔적’이라고 부른 것들 속에, 그리고 개인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흔적이란 현재에 남아 있는 자취를 통한 과거의 지속이다. 하지만 이는 과거 자체의 지속이 아니라 과거 사람들의 지속이다. 전형적으로, 과거의 흔적은 사람들의 업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엄밀히 말해서, 역사는 이러한 흔적들을 재작업해서 우리의 현재 속에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다.

[180]리쾨르에게 이 심연[역사와 허구]을 이어 주는 것은 읽는 행위인데, 이것은 전략적 지점에서 역사와 허구의 결정적인 유사성을 드러낸다. 우선, 저자의 층위에 연결고리가 있다. 역사의 저자는 그가 다루는 사실들로써 제한된다. 저자는 그럴듯하게 사실들을 배열하는 한도 내에서만 (역사를) 구성한다. 그는 사실을 창안하지 않는다. 반면 허구 작가는 창안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리쾨르는 이것이 단지 ‘~로부터의 자유’일 뿐 아니라 ‘~을 위한 자유’라고 지적한다. 리쾨르는 ‘예술적 창조의 법칙’은 역사적 사실의 규칙이 역사가에게 그런 것처럼 예[181]술가에게도 엄격하다고 주장한다. 창조의 법칙은 예술가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세계관을 가능한 한 완벽하게 되돌려 주는 것이며, 역사가와 그 독자가 죽은 자들에게 진 빚에 정확하게 상응한다.

[181]텍스트는 독자가 불신을 잠정적으로 중지할 것을 알고 있다. 리쾨르가 주장하는 것은, 텍스트를 수용하는 것과 텍스트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 사이의 협상 구조는 역사와 과거의 실재성의 관계가 ‘의미하는’ 구조와 같다는 것이다.

[182]리쾨르는 그저 역사와 허구는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역사와 허구가 ‘상호 직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R-Commentary] 문제는 이 ‘상호직조’의 과정에서 역사와 허구가 조우할 때, 어떤 융합, 분열이 일어나는가이다. 미궁에 빠진 역사적 실재 쪽으로 가는 문턱과 독자와 작자 모두를 ‘허구의 실재적 효과’(Deleuze) 쪽으로 몰고 가는 문턱이 존재한다. 과연 이런 문턱들의 구별이 가능할 것인가? 들뢰즈라면 그렇게 물을 것이다.

06_윤리학

덕의 윤리학

이야기 정체성:IDEM과 IPSE

성격과 약속 지키기

스토리 대 삶

삶의 스토리

‘나 여기 있어!’

[199]이야기 정체성으로서의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삶 속에 자기-항구성을 정착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이해된 자기-항구성은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나는 타자들에게 한 나의 말, 나의 약속이 변함없음을 통해 나의 자기-항구성을 입증한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타인들의 삶의 이야기 가닥과 내 삶의 이야기 가닥의 서로 얽힘이 윤리적 타당성을 갖게 된다.

[200]idem에서 ipse로의 이동이 ‘나는 무엇인가?’에서 ‘나는 누구인가?’로의 이동이라는 것을 기억한다. (...) [이 둘의] 간격은 이야기 정체성을 이룬다. ‘나 여기 있어!’라고 선언하는 것과 관련된 도덕적 항구성은 도덕적 정체성을 이룬다. 이야기 정체성과 도덕적 정체성 사이에서 리쾨르가 ‘생산적인 긴장’이라고 부른 것이 생긴다. 즉 이야기 정체성이 자아를 의문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도덕적 정체성의 근원이 된다. 반면 도덕적 정체성은 자신감에 가득 찬 단언처럼 보인다. 이야기 정체성의 질문은 계속해서 도덕적 정체성의 단언을 견제한다. ‘나 여기 있어’는 허풍쟁이의 자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임의로 다룰 수 있는 권한을 준 한 개인이 표현한 겸손함이다. ‘나 여기 있어!’는 배려의 표현이다.

[R-Commentary] 국가폭력은 이러한 ‘겸손’과 ‘배려’에 흔히 죽음으로 답한다. 특히 타자가 약자로서 노출되어 있을 때, 국가폭력은 국가폭력 혐의자들의 개인 이익을 위해 희생양을 찾는다. 2009년 1월 20일 용산 남일당 건물은 그러한 반동적 작용이 무고한 타자들을 화염 속에서 던져 넣은 날을 애도하는 기념비적 토포스다. 그리고 그 화염은 경찰폭력에서 사법폭력으로 변용되어 지금도 죽은 후손들의 몸을 태우고 있는 중이다. 유력한 범인인 김석기는 지금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07_정치와 정의

‘정치의 모순’

[210]‘5개년 계획’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주의 국가는 ‘사물을 지배하는 것’과 ‘사람을 통치하는 것’을 혼동한다. (...) 국가가 노동자의 생산물에서 획득한 부를 분배함으로써 노동자의 ‘의욕을 고취하지’ 않고 위협, 폭력을 통한 협박, 강제 이주 같은 방식으로 ‘동기부여’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주의와 비슷했다. (...) 사회주의 국가는 세대주의적 관점에서 미래를 보았다. (...) 이러한 관점으로 인해 국가가 현재 세대를 함부로 다루게 되고 (...)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소외’를 재도입했다. (...) 사회주의 국가는 ‘자유주의’ 국가보다 더 이데올로기적이다. (...) 다른 말로 하면 사회주의 국가는 사람들의 외적 환경 뿐 아니라 내면세계까지 통제하려 한다.

[R-Commentary] 이 모든 리쾨르의 비판은 사실상 ‘고전적’이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유효하다. 과연 현재 구좌파 사회주의자들이 이 물음에 대꾸할 근거가 ‘스탈린주의’나 ‘국가자본주의’라는 것 외에 무엇이 있을까? 판은 새로 짜여져야 한다. 어떻게? 내가 보기에 그 철학적 기초는 리쾨르-들뢰즈-스피노자-맑스에 있다.

사회주의국가 없는 사회주의

[211]국가를 소멸시키는 것에 대한 대안은 국가를 통제하는 것이다. 국가는 ‘자유주의’ 국가에서만 통제될 수 있지, 소비에트 시절에 볼 수 있었던 ‘현존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통제될 수 없다는 것이 리쾨르의 논점이다. 리쾨르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여겼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발언은) 상당히 파격적인 지적 이동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정치 안에 사회주의 경제를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리쾨르의 주장이다. 그의 사회주의는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이다.

[R-Commentary] 굳이 정확성을 기하자면 리쾨르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라고 하겠다. 이 방면에서 그의 사상적 궤적을 탐구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과격파에서 온건파로의 이 변화양상. 이 변화 와중에 68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사실 리쾨르를 반마르크스주의자라고 기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가 생각하기에] 사회주의 국가의 흠 혹은 악은 그 안에 여론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 자유주의 국가는 ‘다원적인’ 국가이며, 사회주의는 타자, 즉 상반된 견해를 가진 자를 허용하는 정치적 구조 안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R-Commentary] 자유주의적 다원주의가 표면적으로 보면 의견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구조인 것처럼 여겨진다. 리쾨르는 이 함정 안에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이 측면에서는 맑스가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법은 부르주아 국가 기구의 통치 이념이며, 그것은 평등하지 않고, 따라서 다원성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법은 정치의 연장이며, 더 신랄하게 말한다면 ‘전쟁’(계급투쟁)의 연장인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법이 국가의 도구인 것과는 반대로] 자유주의국가에서 법은 (...) 국가보다 상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민은 국가가 불합리하게 힘을 행사하려고 할 때 이에 맞서 법에 호소할 수 있다. (...) [212]국가는 야만적 자유와 안전의 교환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법을 통해 시민적 존재로 가는 길을 제공한다.

정의 대 복수

공리주의에 맞서

황금률과 새 계명

[218]사랑과 정의는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 사랑 없는 정의는 진정한 정의가 아니라 가장 약한 자의 희생을 허용하는 것이다. 반대로, 정의는 그것을 통해 사랑이 표현되는 매체이다. 나는 정의로운 사회제도를 통해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사랑은 에로스(관능적 사랑)에 대립하는 아가페(형제의 사랑)적 의미의 사랑이다. (...) 왜냐하면 형제의 사랑은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할 때에도 다른 사람에게 주는 넘침의 윤리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관능적 사랑은 욕망에 기초한 것이다. (...) 욕망은 동등한 양자 간의 호혜적 관계를 요구한다. 이에 반해 우정은 행위자가 수동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R-Commentary] 욕망과 윤리를 갈라놓는 순간 그 욕망은 윤리를 훼손하면서 우정의 당사자들에게 거래를 강요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욕망을 거세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기쁨의 윤리를 위해 기꺼이 봉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관능적 사랑은 윤리의 다른 가능성이며 윤리가 상호성이라는 약한 만남을 넘쳐흐르도록 만드는 진정한 동인이다. 내 생각에 (기쁨의) 욕망이 없는 우정은 2인칭의 우정에 머물 뿐이다. 그것이 3인칭으로 또한 공통체적으로 확대, 전염되기 위해서는 욕망이 반드시 필요하다.

선물과 용서

[219]피해를 입은 측에서 가해자가 자기들이 당한 만큼의 대가를 치르지 않을 것임으로, 다시 말해 처벌이 그들이 당한 범죄에 상응하지는 않을 것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 복수가 될 것이다. (...)

그렇다면 모든 정의는 적어도 범죄의 [220]희생자에게 일정정도의 용서를 요구한다. 용서는 이처럼 사랑과 비슷하다. 혹은 사랑 자체의 한 국면이거나 사랑이 표현이다. ‘왜냐하면 용서는 선물 경제, 즉 용서를 명확히 표명하고 정의를 지배하는 등가성의 논리에 맞서야 하는 넘침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R-Commentary] 용서는 우월성의 표현인가? 거리의 표현인가? 우월성의 표현일 때, 그것은 ‘감옥’과 ‘처벌’이 될 것이고, 거리의 표현일 때 그것은 ‘추방’과 ‘유배’가 될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를 탈출(exodus)의 경우에 적용해 보자. 다중의 쪽에서 탈출은 자발적인 유배며, 스스로를 추방하는 것이다. 이는 용서를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용서하고 용서 받는 것이다. 다중의 탈출은 그래서 부르주아의 사법적 판결로 인한 처벌을 넘쳐 흐르면서 사법적 지향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거리의 윤리’ 이것이 다중의 윤리다!

사면

[222]범죄자에 대한 사면은 범죄자들에게 남아 있는 범죄에 대한 책임감을 제거한다. 이 같은 책임감의 제거는 범죄자들이 그들의 희생자들을 비인간화했던 것만큼이나 범죄자들을 비인간화한다. 왜냐하면 자기 행동에 책임지는 행위자가 자유로운 인간 존재의 정의(定義)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범죄자와 희생자 간의 법적 거리를 설정하는 제3자인 판사 역시 희생자에 대한 책임이 있다. 만일 정의를 받아들임으로써 희생자가 복수를 포기해야만 한다면, 적어도 희생자는 정의를 얻어야 한다. 범죄가 사면을 통해 잊혀진다면 희생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것은 복수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다.

[R-Commentary] 부르주아 사법은 희생자의 포기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그렇게 함으로써 사면을 보지 못하도록 한다), 사면의 부정의에 대한 논의는 은폐하거나, 무시한다.

‘정치의 모순’ 극복하기

국가 모델

리쾨르 이후

영미 비평계에서 촉발된 ‘은유 논쟁’

데리다, 은유 그리고 언어

하이데거, 언어, 해체

성경을 문학작품으로 읽기

리쾨르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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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쾨르에 관한 저작

폴 리쾨르에 관한 비디오

폴 리쾨르에 관한 웹사이트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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