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재장전 -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이현우 외 옮김 / 마티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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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1917년 당시에는 크렘린 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리무중인가? 이 책의 저자들이 레닌의 손가락을 열심히 보는 동안 혹시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 지금/여기 발 아래는 아니었던가?

 

일정한 현장성을 상실하면서도(이를테면 그것이 복고적 취향이라거나 아니면 레닌의 혁명적 일대기에 대한 회고라는 식의 비판을 어느정도 수용하면서) 레닌이 지금 중요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한 바퀴 돌아 다시 1917년이 되는 것인가? 이 책의 필자들을 일렬로 세워 보면 거대한 산맥들을 마주대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 산맥의 면면을 살펴 보면 이런저런 '절박함'이 먼저 묻어난다. 산맥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막대한 권위는 아닌 것이고, 오히려 레닌의 정체성에 신들린 듯한 모습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레닌을 불러 오는 주술은 매우 강력해 보인다. 레닌의 정당성은 이렇게 불러 오는 자들이 얼마나 '이론적 열정'을 투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레닌'이라는 저 이름, 아니 이제 이름이 아니라 '혁명의 구호'이자 '명령'이 된 명사는 신자유주의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공교롭게도 유령이 되어 버린 좌파들의 둔해진 대뇌에 강력한 아드레날린을 주입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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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비교 발췌]

Lenin Reloaded-Toward a Politics of Truth

Duke Univ Pr, 2007

《레닌 재장전-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이현우, 이재원 외 옮김, 마티, 2010

옮긴이의 글 -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과 더불어 무엇을 할 것인가? - 이재원

[16]결국 우리는 언제든 옳게 정세를 읽을 수 있는 주체라기보다는 그저 사태가 한창 진행 중인 정세 속에서 ‘결단’과 ‘선택’을 감행하고, 스스로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모든 결과에 ‘응답’한다는 의미에서 ‘책임’을 떠안는 주체일 수밖에 없다.

[17]그렇다면 레닌이 말한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으로서의 진리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흔히 논리학에서 말하는 인식(진술)과 사실(사물)의 일치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주어진 사태나 상황, 즉 정세의 ‘본질’에 대한 진술로서의 진리이다. 예컨대 제2인터네셔널의 붕괴를 가져온 1914년의 상황에서 자국 노동자들의 전쟁 참전을 지지한 이른바 ‘사회애국주의자들’의 상황판단도 모두 정세의 일면을 포착했다는 의미에서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다(우선은 조국을, 동지를, 가족을 지켜야 한다 등등). 그러므로 세계전쟁의 물꼬를 혁명을 위한 내전으로 돌려야 한다는 당시의 레닌의 테제는 거짓과 반대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진리가 아니라 ‘개개의 사실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진리였다. 레닌의 진리가 그때그때 달라지는 상대적 진리가 아니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개개의 사실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주어진 정세의 전체 판도를 반영하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는 의미에서 레닌의 진리는 차라리 보편적 진리라고도 불림직하다.

그런데 이 말은 곧 주어진 정세를 구성하는 여러 사건들 속에서 그런 보편성을 식별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이 있다는 말과도 같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당파성’이다.

서문 - 레닌을 반복하기 - 세바스티앙 뷔쟁, 스타티스 쿠벨라스키, 슬라보예 지젝

[22/2]포스트 모던의 정치 사유는 정확히(precisely)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탈-마르크스주의(post-Marxist)이다. 레닌에 대한 참조는 이러한 두 개의 함정(pitfalls)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의 개입(intervention)을 구분하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마르크스와 관련해 레닌의 외부성(Lenin's externality with regard to Marx)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레닌은 초기 주동자들(the initiated)로 이루어진 마르크스 내부 서클의 회원이 아니다.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만난 적도 없다. 게다가 “유럽문명”의 동쪽 끝에 위치한 땅에서 왔다. 이렇게 해서 이 외부성은 레닌에 반대하는 표준적인 서양의 인종주의적 논의의 한 부분이 된다. ... 레닌은 마르크스의 위치를 격렬하게(violently) 전치시켜(displace) 놓았다. 다시 말해, 원래의 문맥에서 마르크스 이론을 떼어내 다른 역사적 순간에 이식함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실질적으로 보편화한 것이다.

두 번째로, 오직 이러한 격렬한 전치(violent displacement)를 통해서만 원래의 이론은, 정치적 개입의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하면서, 작동할 수 있다. ... [23/3]레닌은 포스트모던 상대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인 오늘날, 여느 때보다 더 실효성이 있는 진리와 편을 드는 태도인 당파성partisanship이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서로의 조건이라는 데에 내기를 걸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보편적 진리란 오직 철저하게 당파적인 입장을 통해서만 표명될 수 있다. 진리는 정의상 한쪽 편이다. 물론 이는 충동하는 다수의 이해관계 속에서 중도를 찾는 타협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반해서 나아간다.

우리에게 “레닌”은 낡은 독단적 확실성을 향한 향수어린 이름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되살리려는 레닌은 생성 중인 레닌Lenin-in-becoming, 그의 근본적인 경험이 파국적인 새 성좌 속으로 던져지고 그 속에서 오래된 참조점들이 아무런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나버려 할 수 없이 마르크스주의를 재발명해야 했던 레닌이다. 묘비석을 찾거나 그림을 바라보는 것처럼, 레닌으로 단순히 돌아가는 것은 충분치 않다는 말이다. 우리는 레닌을 반복repeat하고 재장전reload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오늘날의 성좌에서 똑같은 추동력을 되살려내야 한다. ... 이 귀환은 ... “레닌의” 제스처를 현재의 지구적 조건 속에서 반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24]

PART ONE 레닌을 복구하기

1. 하나는 스스로를 둘로 나눈다 - 알랭 바디우

[28/8]카우츠키는 프롤레타리이트 독재(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일반의 문제 뿐 아니라 민주주의 일반의 문제에까지 개입하고 싶어 했다. 러시아에 국한된 전술적인 결정이라는 근거를 내세워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 바로 이것이 배신의 본질이었다. 원칙을 어기기 위해 전술적 상황 운운하는 것. 원칙의 문제로 정의되는 정치 개념을 개량주의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부차적인 모순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배신의 본질이다.

[29/8]결국 이론은 문제의 국면을 사유 속에 통합하는 것이다.(So theory is precisely what integrates in thought the moment of a question.) 민주주의라는 문제의 국면은 부자들과 착취자들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것과 같은 전술적이고 지엽적인 결정이나 혁명의 특수성과 관련된 결정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국면은 일반적인 승리를 쟁취한 혁명들의 국면에, 착취자들을 실제로 무너뜨린 국면에 있다. ... 이론가는 결정된 국면의 내부(the inside of the determined moment)에서부터 민주주의의 문제에 접근한다. 반면 배신자는 국면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순전히 자신의 정치적 분노를 위해 특정한 에피소드를 기회로 이용한다.

[30/9]이 세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어떻든 간에 이 세기는 약속이 아니라 실현의 세기(not a century of promise, but of accomplishment)라는 것이다. 그것은 선언과 미래의 세기가 아니라 행동과 실행의 세기이고 절대적인 현재(absolute present)의 세기이다. 이 세기는 수많은 시도와 실패의 밀레니엄 이후, 승리의 세기로 살아오고 있다. 20세기의 주역들은 헛됨, 숭고한 시도, 이데올로기에의 예속 등에 대한 숭배는 이전 세기 즉 19세기의 불행한 낭만주의의 것이라고 치부했다. 20세기는 말한다. 패배는 끝났다. 이제는 승리의 시대다! 이 승리감에 찬 주체성은 모든 명백한 패배에서 살아남는다. 왜냐하면 그 주체성은 경험적이라기보다는 구성적이기 때문이다. 승리는 패배까지도 조직해 내는 초월적인 동인이다.(Victory is the transcendental motive that organizes even the defeat.).

[33/11]만일 하나를 향한 욕망으로, 주관적인 공식으로 여겨지는 종합의 준칙(둘은 하나로 통합된다)이 우파적이라면, 중국 혁명가들의 눈에 비친 이런 견해는 전적으로 미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준칙의 주체는 최종에 이를 때까지 둘을 극복해 나가지 못한다. 그것은 완전하게 승리하는 계급투쟁이 무엇인지를 끝내 알지 못한다. 이 입장을 따를 때, 욕망을 산출하는 하나는 사유할 수조차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이는 말하자면 종합을 빌미로 고전적인 하나(즉, 일자)를 요청하도록 만들게 된다. 그래서 변증법에 대한 이런 해석은 복고주의적이다. 오늘날 보수주의자가 되지 않고 혁명적인 행동가가 된다는 것은 의무적으로 분열을 욕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새로움의 문제는 그 즉시 상황의 특이성 속에서 분열을 창조하는 문제가 된다.(Not to be a conservative, to be a revolutionary activist nowadays, means obligatorily to desire division. The question of the new immediately becomes the question of the creative division in the singularity of the situation.)

[36/13]그렇다면 때때로 극단적으로 치달았던 폭력은 어떠한가? ... 정치가 만일 부자들, 권력과 권력가들, 학문과 학자들, 자본과 그 하수인들에게 사회를 종속시키고자 하는 영원한 질서를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이런 정치가 자애로우면서 진보적이고 평화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 총체적 해방total emancipation이라는 주제는 현재 속에, 절대적 현재의 열광 속에서 실행으로 옮겨지면서 언제나 선과 악 너머에 위치하게 된다.[37] 왜냐하면 행동의 와중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선은 기존 질서가 자신의 영속성을 명명하는 데서 나온 귀중한 명칭인 일자the one일 뿐이기 때문이다.(The theme of total emancipation, when put into practice in the present, in the enthusiasm of the absolute present, is always situated beyond good and evil, because in the middle of the action the only good that is known is the one that bears the precious name whereby the established order names its own persistence.) 그래서 극단적 폭력은 극단적 열광이 가진 상대적인 상관물이고, 정말로 시급한 것은, 니체식으로 말해보자면, 모든 가치들의 가치전환이다. 실재를 향한 레닌주의적 열정은 사유를 향한 열정이기도 하며, 어떤 도덕도 알지 못한다.(The Leninist passion for the real, which is also a passion for thought, knows [14]no marality)

[38/14]정치적인 것은,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실재와 관련해서 자신의 원칙을 세우며, 자신을 제외한 다른 어떤 필요도 가지지 않는다. ... 확실히 실재를 향한 열정은 항상 가상semblance의 증식을 동반한다.(Certainly the passion for the real always accompanied by a proliferation of semblance) 혁명가에게 세계는 기만과 타락으로 가득 찬 구세계이다. 그는 베일 아래 가려진 실재를 폭로하면서 끊임없이 다시 정화작업을 시도한다.

[39/15]이 세기가 그려온 또 다른 방식, 즉 테러의 발작적인 매력에 굴하지 않고 실재를 향한 열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방식을 나는 공제의 방식the subtractive way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공제의 방식은 진짜 지점을 현실의 파괴가 아니라 최소한의 차이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기가 드러낸 또 다른 방식은 아주 작은 차이, 즉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소멸항vanishing term을 간파하기 위해 외견상의 통일성으로부터 이 항을 뽑아냄으로써 현실을 정화하는 것이지 현실의 표면 속에서 그것을 절멸시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벌어진 일은 그것이 벌어진 장소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모든 충격the affect이 위치한 곳은 바로 이 “거의” 의 안, 내재적인 예외 안이다.(it means to exhibit as the real point not the destruction of reality but a minimal difference. The other way set forth by the century is to purify reality, and not to annihilate it in its surface, by subtracting it from its apparent unity in order to detect the tiny difference, the vanishing term that is constitutive for it. What takes place "hardly" where all the affect is, in this immanent exception.이 세기에 의해 제기되는 다른 방식은 작은 차이, 즉 그것을 구성하는 소멸항을 파악하기 위해 외견상의 통일성으로부터 그것을 빼냄으로써 현실을 정화하는 것이며, 그것을 표면에서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40/16]새로운 인간은 모든 범주화와 특성화에 저항한다. 특히 가족과 사적 소유, 민족-국가에 저항한다. ... 마르크스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적 특이성universal singularity은 범주화에 저항하며, 어떤 특성들도 지니지 않고, 특히 가장 중요한 점으로는 개별적인 민족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41]

[42/17]이 세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테마들 주위로 이끌리고 있다. 불가능한 주체적 혁신과 안락함 그리고 반복(impossible subjective innovation, comfort and repetition).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강박관념(obsession)이다. 이 세기는 안전에 대한 강박관념 속에서 끝나고 있으며, 실제로는 보다 더 비참한 다음과 같은 하나의 준칙 아래서 종결되고 있다. 즉 당신이 숨쉬고 있는 이곳은 사실상 그렇게 나쁘지 않다. … 더 최악인 것들이 존재해 왔으며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강박관념은 프로이트와 레닌이 모두 이해했던 것처럼 히스테리의 파괴, 행동주의, 타협하지 않는 군국주의라는 기표 아래 탄생한 이 세기와 완벽하게 대립적으로 진행된다.(And this obsession goes completely against the century that, as both Freud and Lenin understood it, had been born under the sign of devastating hysteria, of its activism, and its intransigent militarism. 그리고 이러한 강박관념은 프로이트와 레닌이 모두 이해했던 것처럼, 파괴적인 히스테리와 그러한 행위양식 또한 그것의 완고한 군국주의[적 경향이]라는 기표 아래에서 탄생했던 그 세기와는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다.)

2. 21세기의 레닌주의? 레닌, 베버 그리고 책임의 정치 - 알렉스 캘리니코스

[48/21]1919년 1월에 이루어진 「직업으로서의 정치」 강연은 흔히 알려진 바와는 달리 사심 없고 공평한 학자적 논평이 결코 아니었다. 1918년 11월에 독일 혁명이 일어났고, 베를린 좌파 봉기 실패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비명횡사한 것을 상기해 보라. 페리 앤더슨의 지적처럼 위에 인용한 글에는 혁명에 반대하는 국가주의적 수사가 차고 넘친다. 베버는 신념의 윤리를 채택한 대표적 사례로 혁명적 좌파를 든다. ... 결국 그들은 이 세계와 실질적 성공을 포기해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무결한 원리(신념)를 실현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모든 정치에 있어 고유한 폭력에 의존하고, 결국 “모든 폭력에 숨어 있는 악마적 힘”과 싸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취해진 정치적 행동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혁명 운동 자체도 물질적 이해관계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 [49/22]베버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신념의 윤리와 책임의 윤리를 대비시겼다. ... [50]「직업으로서의 정치」의 전체 구조와 수사를 통해 우리는 베버가 이런 윤리적 입장을 선택했고, 자신의 적들인 볼세비키와 스파르타쿠스단의 해악적 아마추어리즘에 반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지젝이 베버와 아주 유사한 용어들을 사용하는 걸 지켜보는 일은 정말이지 기묘하다.

[50/23]책임의 윤리와 신념의 윤리(the ethic of responsibility and of conviction)를 구분하는 작업은 사실과 가치를 신칸트주의적으로 분류하겠다는 구상에 기반하고 있다.[51] 후자의 윤리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규범적 목표들의 절대적 특성은 그 목표들이 일체의 실질적 과제 상황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 책임의 윤리에 수반되는 결과 평가는 현실의 정치관행(활동)으로 구성된다.

[51/23]앤더슨이 베버의 “결정론”(결단주의, decisionism)이라고 적절하게 지칭한 것은 레닌의 정치 이해 방식과는 아주 동떨어진 세계이다. ... [53/25]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실상은 레닌이 엄청나게 다급한 환경에서조차 이론과 실천 사이의 끊임없는 진동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해 한발 뒤로 물러서 상황을 이론적으로 재검토했다는 사실이다. ... [54]레닌이 1917년에 한 일을 살펴 보면 그의 정치 사상의 두 가지 핵심 테마를 발견할 수 있다. (1) 역사의 복잡성과 예측불가능성(the complexity and unpredicability of history), (2) 정치적 개입의 필요성(the necessity of political intervention). ... 레닌은 1917년 2월에 결합되었던 다양한 요소들을 분석한다. 1차 대전이라는 “강력한 가속기”, 열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러시아, 영국과 프랑스의 부추김 속에서 로마노프 왕조가 효과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고 결론 내린 보수파 및 자유주의 정치인들의 음모, 노동자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에서 점증하던 불만 등등. 요컨대 “아주 독특한 역사적 상황의 결과로서 전혀 다른 흐름들, 완전히 이질적인 계급 이해관계, 완전히 상반되는 정치적, 사회적 쟁투들이 합쳐졌다. 그것도 아주 ‘조화롭게’ 말이다.” ... [55/26]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도 2월 혁명에 허를 찔렸고, 깜짝 놀랐다. 당대의 사유는 메를로-퐁티가 칭한 역사의 모호성을 인정하면서 대개 정치 행동을 회피했고, 아주 복잡한 사회 세계가 제시한 얄궂은 결과를 수수방관했다. 레닌은 그렇지 않았다. 역사의 그 예측불가능성이 우리가 개입해서 역사를 만들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정치적 개입은 맹목적이고 무모한 짓이 아니다. 무엇이 핵심 고리인지 파악하려면 주의 깊은 분석이 필요하다. 또 그러려면 “전체 사슬”(whole chain)을 이해해야 한다.

[56/27]물론 세력균형에 대한 그 어떤 평가도 부분적으로나마 잘못으로 판명날 수 있다. 우리는 바로 이런 견지에서 레닌의 나폴레옹 인용(또는 잘못된 인용, (mis)quotation)을 해석해야만 한다. “일단 해 보면 알게 된다.”(On s'engage et puis ... on voit) 혁명가들은 가능한 최상의 분석을 바탕으로 개입한다. 그렇게 개입함 - 혁명가들에게 사슬의 핵심고리로 비친 것을 부여 잡기 - 으로써만 그들은 자신들의 분석이 맞는지 틀린지 알 수 있다.

[57/28]역사의 예측불가능성(the unpredictability of history)은 역사의 불확정성(its indeterminacy)과 다르다. 이론적 분석은 특정한 상황을 구성하는 구조와 경향을 파악한다. 그러나 그렇게 밝혀진 구조와 경향이 상황을 남김없이 규명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개념화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혁명가는 상황과 관련해 할 수 있는 최상의 분석을 바탕으로 사태에 개입한다. 상황의 결정적 요소들(로 비치는 것들)에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최고의 이론이라도 어쩔 수 없는 한계 - 맞다고는 해도 상황을 철저하게 규명할 수 없는 한계 - 로 인해, 내가 앞서 레닌의 정치적 실천이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주장한 내용, 곧 분석과 개입 사이의 끝없는 진동(분석과 행위 사이의 끝없는 상호 추적the constant tracking backward and forward between analysis and action)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사태가 잘 풀리면 (정말이지 많은 경우 그렇게 되지 않지만) 그 결과는 상호계시(상호조명mutual illumination)의 과정이 된다. 그 속에서는 성공적인 개입으로 이론이 정련되고, 더 나은 실천으로 되먹임된다.

[59/29]지젝이 관심을 집중하는 결과는, 현재 시점에서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해 줄지 모르는 미래의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다. 그는 이 세계에서 착취와 억압을 제거하기 위해 수행되어야만 하는 불쾌한 과업을 우리가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런 훈계는 희망적 사고를 교정해 줄 때에만 가치가 있다. 문제는 그런 훈계가 적절한 맥락에서 신중하게 채택되지 않을 경우 변명에 동원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65/34]스탈린주의가 레닌주의의 완결이기보다는 레닌주의와 단절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가 부상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었다. 1923년 10월 독일 혁명이 최종적으로 패배하면서 볼셰비키가 처했던 상황의 우발적 결과가 스탈린주의의 부상이었던 것이다.(its emergence was not inevitable but was a contingent outcome of the circumstance in which the Bolsheviks found themselves, particularly as a result of the final defeat or the German Revolution in October 1923.)

[69/36]오늘날의 레닌주의... 1. 자본주의를 전략적으로 분석하는 것의 중요성. 레닌은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경제 사상가가 결코 아니었다. ... 레닌이 다른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더 확연하게 보여 준 게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따라 정치적 행위자들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는 것(strategically situating political actors)의 중요성이다. ... 좌파는 자본주의의 현 시기 발전 단계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70]이와 관련해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훌륭한 책 『제국』은, 사람들이 그들의 분석에 얼마만큼 동의하고 또 의견을 달리하는가와는 무관하게, 당대 자본주의의 특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중요성을 가진다. 『제국』이 발전시키려고 하는 종류의 이해 방식이 없다면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행동하게 될 것이다.

2. 정치의 구체성과 중심성(The specificity and centrality of politics). ... 대다수의 평자들은 경제가 전지구화되면서 민족 국가가 약화되었다고 믿고 있다. 나는 그 입장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는다. 우선 첫째로 전지구화의 촉진자로서 국가 권력의 행사가 결정적이었다. 국가 권력은, 크게 보아 여전히 국가 단위로 구성된 자본가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주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로서 여전히 건재하다. ... 하트와 네그리는 레닌의 가장 약한 고리 개념이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형성된 “제국”에서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주장한다. 제국은 모든 지점이 취약하다는 것이다.[71] 그러나 자본의 힘과, 자본이 착취하는 사람들의 힘이 이 세계에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않다면 선전과 선동의 우선순위를 밝히려는 노력은 절대적으로 불가피해 보인다.

3. 정치조직의 필요성. ... 자본가의 권력이 국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맞서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에너지 역시 한데 모아야 한다. ...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수가 그런 중앙 집중화된 조직의 필요성에 이의를 제기한다. ... 그러나 그런 전략이 각오해야 할 혼란과 탈진의 위험성은 제쳐 놓는다 하더라도 효과적인 급진 운동이라면 구체적 불만을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에 관한 보다 포괄적인 그림으로 통합 수렴해 내는 방법과, 그런 비전을 현실로 바꿔낼 수 있는 정연한 수단을 요구할 것이다. / 현대의 정당은 그런 강령적, 전략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출현한 제도적 형태이다. 그런 형식이 진부해져서 쓸모가 없다는 널리 유포된 관념을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데 실패한 대중 운동들의 운명을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 [72]자본주의 사회가 야기하는 그 모든 불만에 관심을 기울이고 일반화하는 사회주의 정치조직이라는 정당의 문제는 당대의 좌파와 관련해서 레닌의 양도할 수 없는 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3. 포스트모던 시대의 레닌 - 테리 이글턴

[78/42]포스트모던 시대는 경제주의의 어설픈 환원론에 저항한다. 포스트모던 시대가 선호하는 권력모형은 중앙집권적인 것이 아니라 복수적인 것, 산재하고 편재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협소하게 계급이라는 개념에 기반한 정치에 대해 회의를 품으며, 대신 민족 간의 차이와 대지의 저주받은 이들에 주목하는 정치를 갈망한다. / 한마디로 말해 포스트모던 시대가 추앙하는 것은 곧 … 레닌주의인 것이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던 시대가 말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레닌주의에 전부 들어맞는 사실이기 때문이다.(What a postmodern age admires, in short, is ... Leninism. For all this is true of Leninism too.)

[79/43]염세주의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우리는 우리 시대에 사회주의로부터 무관심이나 반동으로 옮겨 갔던 것이 아니다. 대신 우리는 사회주의로부터 반자본주의로 이동해 왔다. 이는 물론 커다란 변화가 전혀 아니며, 최근 현실 사회주의의 운명을 고려했을 때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는 하나의 퇴보이다.

[81/44]문학과 혁명은 둘 다 물론 또한 예술 형식이다. 특히 혁명은 한없이 복잡한 실천의 작용이며 어떤 각도에서 보자면 맥주 마시기보다 뇌수술에 더 가깝다. 누구나 혁명을 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성공적인 혁명을 완수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언제나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으며, 또 성공적인 혁명에서는 이런 이들이 전면에 부각되기 마련이다. 전위의 문제란 이렇듯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것이 아니다. 전위의 문제란, 예를 들자면 그러한 종류의 전문가들이 대중에 의해 자발적으로 산출되는 것인가, 아니면 잘 훈련된 개인으로서의 혁명가가 이미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치적 위기의 시기에 대중이 그를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85/47]전위가 우둔한 대중에 대해 사회적, 영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선다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전위라는 고전적 레닌주의의 교리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할 필요는 없다. / 첫째로, 엘리트는 자기 영속적인데 반해 전위는 자기 파괴적이다. ... [86]해방적인 종류의 권위라면 거기엔 잘못된 것이 전혀 없다. 일단 그러한 권위의 경험이 일반화되고 그 기능을 다하게 되면 전위는 그 임무를 마치고 사그라질 수도 있다. 확실히 전위는 엘리트주의로 경직될 수 있는데, 레닌주의로부터 스탈린주의로의 이행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적절하지 못하다. ... 광부들, 여성 참정권 지지자들, 미래주의자들, 초현실주의자들은 일종의 전위였지만, 그들이 모두 빠짐 없이 엘리트로 변모하지는 않았다.

[86/48]혁명이란 비일상적이며 비정상적인 사건(unusual, aberrant affairs)이라는 자명한 진리를 통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혁명은 매일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혁명적 운동이 유토피아의 전조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일상생활의 소우주처럼 여겨져서도 안 된다. 사실 혁명은 그 행위와 관계를 통해 추구하고 있는 사회적 가치들을 예시해야 하는데, 이는 단순히 도구적이기만 한 볼셰비키주의에는 없는 차원이다. ... 혁명은 유토피아에 대한 이미지도 아니다. ... [87]혁명이 응당 강조하는 투쟁과 갈등과 엄격한 자기부정 등의 규율을 자유, 번영, 평화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미래의 정치상으로 오해할 일은 점점 줄어든다. 이는 아마도, 혁명 운동에 가장 활발히 참여하는 사람들이 ... 그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뜻일 것이다. 브레히트가 「후손들에게」라는 시에서 쓰고 있는 것처럼, “아, 우리는 / 친절함을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했으나 / 우리 스스로 친절할 수는 없었다.”(Ach, wir / Die wir Boden bereiten wollten für Freundlichkeit / Konnten selber nicht freundlich sein)

[88/49]우리는 동인 집단을 정의상 원래 그리고 독자적으로 전위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런 전위란 존재할 수 없다. 엘리트는 그 정의상 보통 사람들을 경멸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능력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다면 전위는 활동하지 못할 것이다. 기호학적으로 말하자면, 전위와 군대 사이의 관계는 은유적이라기보다는 환유적이다. 이 관계를 은유적으로 보는 것은 아마도 대체주의라는 이단이 될 것이다. 볼셰비키 자체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하는 주변적이고 격하된 지시대상 위에 내걸려 있었던 것처럼, 전위 또한 떠다니는 기표가 될 수 있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레닌주의적 전위 개념은 레닌주의와 자주 혼동되곤 하는 단순한 폭동주의나 블랑키주의와는 매우 다르며, 이는 또한 레닌 자신이 언제나 거부했던 것이기도 하다.

[93/52]벤야민이 모스크바에 대한 글에서 관찰했던 것처럼, 그 결과는 “기술적 삶의 양태와 원시적 삶의 양태 사이의 완벽한 상호침투”(a complete interpenetration of technological and primitive modes of life) 인데, 말하자면 이 두 경우에서 모두 일직선적인 시간성은 내부에서 폭발하고 위대한 고전적 역사주의들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폭로되며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은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 되고 공허한 동질적 역사의 흐름은 벤야민이 “지금시간”jetztzeit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갑자기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부르주아 혁명의 시간이 무르익는 순간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계급이 들어가게 될 좁은 문이 되며, 또한 이 순간은 절대주의의 역사, 부르주아와 민주주의의 역사,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 지방 프티부르주아의 역사, 국가의 역사와 세계시민의 역사 등 여러 다양한 역사들이 순환하고 새로운 배치 안에서 직조되는 지금시간이 된다. 벤야민의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처럼, 혁명은 과거의 쓰레기더미에 애처로운 시선을 보내면서 미래로 떠밀려 간다.[94] 그리고 일반적으로 혁명의 시간이 자기동일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순전히 산만하지도 않은 것처럼, [/53]모더니즘의 시간과 볼셰비키 실험의 시간 또한 그렇다. 한편에서는 한 국가의 문화가 잡종, 혼합어, 세계시민적 자본 - 여기서는 새로운 공통어(lingua franca)나 세계적인 은어(argot)가 예술 그 자체인데 - 에 치욕적으로 자리를 내주고 있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적 혁명에 의해 해방된 권력이 자본주의의 세계적 공간을 왜곡하고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국제주의적 접합들을 형성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국가적 혁명을 터뜨려 국가 자체라는 시간적 연속체로부터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blasting the national revolution out of the temporal continuum of the nation itself into another space altogether)이다.

[96/54]레닌은 당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를 일소하고 제거하는 가차 없는 결벽주의자였지만, 정치적 혁명이라는 실제적 과업에 있어서는 결벽주의자가 아니었다. ... 순수한 혁명에 대한 희망 속에서만 사는 사람은 결코 그러한 순수한 혁명을 보지 못할 것(whoever lives in hopes of a pure revolution will never see one)이라는 이유에서이다.

[97/55]레닌이 포스트모던적인 틀에 순응하기를 완고하게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문화와 관련된 지점에서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레닌은, 비록 문화라는 용어의 의미는 다를지라도, 문화의 가치 자체는 높게 평가했다. ... 실제로 그는 문화를 러시아 혁명의 실행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로 봤으며, 또한 동시에 문화를 러시아혁명을 위협했던 유일하게 중요한 요인으로 보기도 했다. ... 러시아에서 혁명의 실행이 가능했던 것은 문화가 취약했기 때문에, 곧 시민사회가 결핍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정교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부족했기 때문에, 따라서 또한 “문명화되고” 통합된 노동계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문화적으로 취약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으로 더 강력했던 것이다.그러나 혁명의 지속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 또한 과학, 지식, 교양, 기술, 노하우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상대적으로 부재하는 문화 때문이었다.(ironically, the Russian working class was ideologically stronger just because it was culturally weaker. But it was the relative absence of culture, in the alternative sense of science, knowledge, literacy, technology and know-how, which made it so hard to sustain.) 기대치 않게 혁명이 탄생할 수 있도록 했던 똑같은 일이 반대로 혁명을 망칠 수도 있는 위협이 되는 것이다.

[99/56]레닌의 가장 대담한 전위적 텍스트는 확실히 『국가와 혁명』인데, 이 책은 정치적 신랄함의 정점에 서 있다는 의미에서 전위적일 뿐만 아니라 형식의 정치를 촉발한다는 보다 기술적인 의미에서도 또한 전위적이다. [100]사회주의 권력은 단순히 하나의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의 이행이 아니라 하나의 권력 양태로부터 또 다른 권력 양태로의 이행(not simply from one class to another, but from one modality of power to another)을 내포하는 것이라는 『국가와 혁명』의 논지는 마르크스의 생각에서 파생된 것이다.

[101/57]결국 볼셰비키는 그들이 할 수 있었던 만큼 노동계급을 신뢰하기에는 단지 너무 두려움이 많았고, 그들의 가차 없는 전위주의(relentless vanguardism)는 결국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스탈린주의에 토대를 제공하는 결과를 빚었다. 만약(말하자면, 레닌과 스탈린 사이에서) 순전한 연속성을 설정하는 것이 “형이상학적”이라면, 몇몇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들 둘 사이에 알 수 없는 심연을 설정하는 것 역시 똑같이 형이상학적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이며 포스트모던적인 형태의 레닌주의로 통하는 기괴한 희화화(grotesque travesty)는 도전 없는 회피이기에 허용될 수 없다.

[102/58]그 체제는 인민을 총으로 위협한 채 모더니티 속으로 행진하게 했던 것이다. 또한 만약 자본주의의 강력한 반대자인 레닌이 너무 서구 자본주의의 한쪽 면만을 봤다면, 오늘날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반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저 “전위적” 부정을 잊고 있다. 그들은 동시에 사회주의가 위대한 혁명적 부르주아의 전통과 그 물질적 발전에 대해 지고 있는 빚을 냉정하게 인정해야 하며, 도덕주의적 독선에 사로잡혀 단순히 그 빚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연속주의가 없다면 부정도 없다. 레닌의 결점들이 무엇이든 간에, 그는 모더니티의 이익을 향유하는 이들만이 동시에 그러한 모더니티를 경멸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Whatever his failing, Lenin stands as a perpetual reminder that only those who enjoy the benefits of modernity can afford to be so scornful about it.)

4. 레닌과 수정주의-프레드릭 제임슨

[107/60]여기서 나의 전제는 레닌이 여전히 무언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그 무언가가 결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아니라는 것이다.(The premise is that Lenin still means something: but that something, I want to argue, is not precisely socialism or communism.) 공산주의에 대한 레닌의 관계는 절대적 믿음에 속하는 것이며[108] 레닌은 이를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기에 우리가 그의 저작에서 이에 관해 새롭게 생각할 것은 따로 없을 것이다. 맑스는 하나의 대타자이자 유일한 대타자인 것이다.(Marx is a big Other, the big Other. 맑스는 하나의 대타자, 즉 바로 그 대타자인 것이다.)

[110/62]레닌은 항상 정치적으로 사유했다. 이러한 의미에서라면 레닌이 쓴 글도, 그가 행한 연설도 [111] 그가 초안한 시론이나 논문도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으며, 더구나 이 모두는 동일한 종류의 정치적 충동(political impulse)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 [/63]정치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쨌든 이것이 전통적인 개념의 정치나 정치학적 이론과도 별 상관이 없으며 또한 최근 프랑스에서 le politique[정치적인 것]와 la politique[정치] 사이에 행해지고 있는 저 번역할 수 없는 구분과도 별 관계가 없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114/65]나는 보다 깊은 구조적 문제(deeper structural issue)를 지적하고 싶다. 나는 언제나 하나의 사유체계로서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정신분석처럼 하나의 독특한 “이론과 실천의 조합”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특수성 - 그리고 또한 그 독창성이 - 두 개의 완벽한 스피노자적 양태가 서로 겹쳐지고 공존하는 방식에 있다고 느껴 왔다. 그 하나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양태(capitalist economics)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계급과 계급투쟁(socail class and class struggle)의 양태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둘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이 두 어휘는 어떤 메타언어를 통해서도 상관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나 또한 끊임없이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번역translation - 나는 트랜스코딩transcoding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은데 -을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각각 군림한다. 그렇다면 레닌의 지배적인 코드는 확실히 계급과 계급투쟁의 코드일 것이며 경제학의 코드는 훨씬 덜 지배적일 것이다. / 그러나 나는 또한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어떤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심급으로서 경제학이 지니고 있는 우위를 주장하고 싶다.(If this is so, then Lenin's dominant code is clearly that of class and class struggle, and only much more rarely that of economics. But I also want to insist on the priority, within Marxism, of economics as some ultimately determining instance) ... [115/66]내가 말하는 것은 분명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경제학은 아니다. 왜냐하면 경제를 다른 주제로 대체하거나 추가적이고 병행적인 다른 주제 - 전통적인 의미에서 권력이나 정치 등의 주제 -를 제시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지닌 독창성과 힘을 구성했던 모든 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경제를 정치로 대체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모든 부르주아의 공격이 취했던 표준적인 모습이었다.

[115/66]{마르크스의 ‘경제’와 관련하여}우리는 성이 프로이트주의의 중심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성이라는 사실로부터 후퇴하는 것은 일종의 수정주의를 열어 젖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프로이트 자신이 언제나 재빠르고 기민하게 비판하고 비난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이는 죽음충동이라는 프로이트의 후기 개념이 그의 신경제정책이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116/66]어떤 형태로든 권력이라는 수사학은 언제나 수정주의의 근본적 형태로 간주되어야 한다.(The rhetoric of power, then in whatever form, is always to be considered a fundamental form of revisionism.) 나는 여기서 주장하고 있는 이 대중적이지 못한 의견이 이전 시대(냉전시대나 제3세계 해방의 시대)보다 오늘날 더 합당하지도 모른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왜냐하면 바로 지금이야말로 분명 모든 것이 다시금 경제적이 되어 버린 시기이며, 특히나 가장 속류화된 마르크스주의의 의미에서 그렇기 때문이다. 더욱 확실한 것은, 전지구화 안에서, 곧 전지구화의 국가 내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그것의 외적인 역학 관계 안에서, 순전히 정치적이거나 권력적인 문제로 보였던 것들조차도 그 배후에 어느 정도 경제적 이해관계가 작동하고 있음이 훤히 보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117/67]내가 만약 이러한 미래의 철학에 대해 요구할 수 있는 몇 가지 사항들을 개략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면, 여기서 나는 두 가지 다른 층위들을 주장하고 싶다. 이 두 층위는 어쨌든 혁명의 순간에 아주 잠깐 동안이나마 서로 하나로 통합되고 합치될 것이다.[118] 하나는 사건(Event)의 층위인데, 우리는 이것이 어떤 절대적 분극화polarization를 성취한다고 말해야 한다. ... 이러한 분극화는 계급에 대한 이분법적 정의가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구성한다. / 혁명은 또한 인간의 삶이 지닌 집단적 층위가 하나의 중심적 구조로서 표면에 부상하게 되는 독특한 현상이기도 한데, 이러한 혁명의 계기 속에서 하나의 집단적 존재론은 개인적 실존에 귀속되는 부가적인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혹은 시위나 파업 등의 도취적 순간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포착될 수 있다. ... 그러나 이러한 모든 특징들은 여전히 폭력을 전면에 내세우는 고전적인 이미지들을 불러일으키기 쉬운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곧 혁명적 상황에서는 폭력이 처음에는 우파로부터, 곧 반작용으로부터 출현하고, 그리고 다시 좌파로부터 폭력이 그러한 반작용에 대한 또 다른 반작용으로서 등장한다고 말이다. ... [119/68]이 때문에 우리는 이 지점에서 혁명이 그만큼 본질적인 또 다른 얼굴 혹은 또 다른 층위를 갖는다고 주장해야 할 텐데, 그것은 곧 (사건과는 반대되는) 과정 자체(process itself)의 층위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혁명은 체제 변화라는 길고 복잡하며 모순적인 전체 과정을 의미하며, 또한 망각, 고갈, “도덕적 동인”이라는 절망적 발명품인 개인적 존재론으로의 후퇴에 의해 위협 받는 과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혁명은 무엇보다 집단적 교육법pedagogy의 긴급성을 요청하고 있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집단적 교육법이란 수많은 개인적 사건과 위기들이 그 자체로 어떤 거대한 역사적 변증법을 이루는 방식들을 하나하나 지형도로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변증법은 개인이 위치한 각각의 지점에서는 감각적 지각과 마찬가지로 보이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으며 반대로 그 변증법의 전체적 운동만이 그 지점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부재하는 것과 현전하는 것의 통합,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통합, 세계적인 것과 국지적인 것의 통합이다. ... 이는 곧 혁명이 그 각각의 실존적 일화들 안에서 상징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에 대한 어떤 집단적 자각을 매 단계마다 요구한다. ... 레닌의 진정한 의미는 오히려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 저 과정으로서의 사건과 사건으로서의 과정 안에서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이 혼재하는 형태에 있다.(The true meaning of Lenin is the perpetual injunction to keep together in that Event-as-process and process-as-Event we call revolution) 레닌의 진정한 의미는 혁명을 살아 있는 것으로 유지하라는, 심지어 혁명을 그것이 일어나기 전의 어떤 가능성으로 살아 있게 하라는, 일상화와 타협과 망각 등으로 실패하고 악화될 위협 속에서도 혁명을 매 순간마다 과정으로서 살아 있게 하라는, 그런 영속적인 명령인 것이다.

[121/69]우리가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민주주의의 불가피한 실패가 진정한 좌파의 어떤 기본적인 교훈과 근본적인 교육법(the basic lesson, the fundamental pedagogy) 을 구성해 주기 때문이다. 나는 우선 여기서 사회민주주의가 전 세계를 통틀어 이미 실패했다는 사실을 덧붙이려고 한다. ...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 곧 모든 것을 바꾸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one cannot change anything without changing everything.) 이것이 바로 체계의 교훈이며 ... 동시에 혁명의 교훈임을 알게 될 것이다.

[122/70]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혁명적 경험 또는 실험은 그 혁명 지도자의 이름으로 대표되어 왔고 또한 종종 그 지도자 개인의 운명과 생물학적으로 동일시되어 왔다.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떤 수치스러움(scandalous)을 느껴야만 한다. 무엇보다 하나의 집단적 운동이 한 인간 개인의 이름으로 대표된다는 것은 우의적으로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125]『제국주의』는 세계시장의 부분적 등장을 이론화하고자 했던 레닌의 시도를 대변했다. 현재 그러한 세계시장은 전지구화를 통해 그때보다 더 완전한 형태로 혹은 최소한 경향적으로는 완전한 형태로 등장했으며, 또한 질과 양의 변증법을 통해 레닌이 묘사했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게 변모했다. 일견 그 고리를 끊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 전지구화의 변증법(The dialectic of globalization)은 우리의 정치적 사유가 천착해야 할 우리의 “결정적 모순”(determilnate contradiction)인 것이다.

5. 오늘날 레닌주의적 제스처란 무엇인가: 포퓰리즘의 유혹에 맞서 - 슬라보예 지젝

[128/74]여기서 진정한 과제는 10월 혁명의 비극을 사유하는 것이다. 곧 그 위대성, 그리고 유례없는 해방적 힘과 함께 스탈린주의로 귀결된 역사적 필연성을 동시에 인식해야만 한다. 우리는 두 가지 유혹에 맞서야 한다. 하나는 스탈린주의가 궁극적으로는 우발적인 일탈(contingent deviation)에 불과하다고 보는 트로츠키식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 기획이 본질적인 차원에서 전체주의적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132/77]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구-공산권 국가들로부터의 이주노동자 유입이 다문화주의적 관용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78]그것은 실상 노동자들의 요구를 통제하기 위한 자본의 한 전략이다. 미국에서 부시가 노동조합의 발목이 잡힌 민주당보다 멕시코 불법 이민자의 지위 합법화에 더 열성적이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여기서 좌파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포퓰리즘적 인종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증오를 외국인들에게 전치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그 전치된 계급적 내용을 간과하고 다문화적 개방을 명분으로 포퓰리즘적 반-이민 인종주의를 반대만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호의적 의도에서라 하더라도 단순히 다문화주의적 개방만을 고집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에 반대하는 가장 기만적인 형식이다.

[133/78]기성의 탈정치적 좌표계에서 벗어난 어떠한 사고도 “포퓰리즘적 선동”이라고 자동적으로 기각해 버리는 것은 우리가 실상 새로운 사고금지Denkverbot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가장 순수한 증거이다.

[134/79]포퓰리즘은 특수한 정치운동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가장 순수한 형태이다. 즉 그것은 어떠한 정치적 내용도 취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의 “굴절부”inflection이다. 포퓰리즘의 요소들은 순수하게 형식적이고 초월적이며,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포퓰리즘은 일련의 특수한 “민주주의적” 요구(더 나은 사회적 안전, 의료 서비스, 낮은 세금, 전쟁 반대 등)가 등가적 요구의 사슬로 엮여서 보편적 정치 주체로서의 “인민”을 생산할 때 발생한다. 포퓰리즘을 특징짓는 것은 이런 요구들의 실체적 내용이 아니라, 그 사슬을 통해서 “인민”이 정치적 주체로 출현하고 다른 모든 특수한 투쟁과 적대가 “우리(인민)”와 “그들” 사이의 총체적인 적대적 투쟁의 부분으로 나타나는 형식적 사실이다. 거기서 다시금, “우리”와 “그들”의 내용은 미리 규정될 수 없으며, 그것은 정확하게 헤게모니 투쟁에 달려 있다. “그들”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야만적인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조차도, 포퓰리즘이 등가적 요구의 사슬에 엮여 들어갈 수 있다.

[136/81]포퓰리즘에서 적은 존재론적인 실체로 외부화되거나 구체화되며(비록 이 적이 허깨비더라도), 그것의 제거는 균형과 정의를 회복시키게 된다. 이에 상응하여 포퓰리즘적 정치의 행위자로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 또한 적의 공격에 앞서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In populism, the enemy is externalized or reified into a positive ontological entity (even if this entity is spectral), whose annihilation would restore balance and justice. Systematically, our own - the populist political agents -identity is also perceived as preexisting the enemy's onslaught.)

[137/81]포퓰리스트가 보기에, 문제의 원인은 궁극적으로 시스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타락시키는 침입자이다(예컨대, 자본가 자체가 아니라 금융투기자), 즉 구조 자체에 기입된 치명적 결함이 아니라 구조 안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어떤 요소이이다.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보기에(프로이트주의자도 마찬가지다) 병리적인 것(어떤 요소의 일탈적 비행)은 정상적인 것의 증상, 곧 “병리적인” 폭발의 위험을 안고 있는 구조 그 자체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말해주는 지시자이다. 마르크스에게서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작동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그리고 프로이트에게서 히스테리의 폭발 같은 병리적 현상은 “정상적인” 주체 구성(과 그 작동을 지탱하는 숨겨진 적대)의 열쇠를 제공해 준다.

[139/83]포퓰리즘은 정의상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의 최소 형식, 기본 형식을 포함한다. 비록 포퓰리즘이 실상 서로 다른 정치적 변형(반동적 민족주의자, 진보적 민족주의자 등)이 가능한 정치적 논리의 형식적 틀, 혹은 모체이지만, 그럼에도 내재적인 사회적 적대를 통합된 “인민”과 그 외부의 적 사이의 적대로 전치시킨다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포퓰리즘은 “최종심급에서는” 장기적, 원형적 파시즘의 경향을 품는다. / 이것은 또한 어떤 종류이든 공산주의 운동을 포퓰리즘의 한 변형으로 간주하는 것이 미심쩍은 이유이다. 공산주의를 “포퓰리즘화”하는 데에 맞서, 우리는 정치가 주어진 각 국면에 개입하는 기술이라는 레닌의 개념에 충실해야만 한다. 레닌에게서 이 국면들은 “주요” 모순(적대)이 특수하게 집중되는 방식으로 정립된다.(the art of intervening in the conjunctures that are themselves posited as specific mode of concentration of the "main" contradiction(antagonism).) 진정한 “급진적” 정치와 여타의 모든 포퓰리즘을 구별시켜 주는 것은 바로 이 “주요” 모순에 대한 지속적인 참조(persisting reference to the "main" contradiction)이다.

[141/85]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주된 위협은 이런 양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상품화를 통한 정치적인 것의 죽음(the death of the political through the commodification of politics)에 있다. 여기서 문제는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기본적으로 [142]상품처럼 포장되고 판매된다는 데 있지 않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선거 자체가 상품(이 경우엔 권력)을 구입하는 행위로 간주된다는 데 있다. 선거는 서로 다른 상인-정당 사이의 경쟁이며, 우리의 표는 우리가 원하는 정부를 구매하기 위한 화폐와도 같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구입하는 또 하나의 서비스 상품으로 보는 관점이 놓치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관련된 이슈나 결정에 대한 공적인 논쟁의 공유로서의 정치이다. / 그래서 민주주의는 적대를 포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대를 요청하고 전제하며 제도화하는 유일한 정치적 형식으로 보인다. 민주주의는 다른 정치 시스템이 위협(권력의 “자연스런” 계승자가 결여돼 있다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긍정적 조건으로 고양시킨다. 권력의 자리는 비어 있고 그 자연스런 청구자는 없으며, 폴레모스polemos 또는 투쟁은 해소불가능하며, 모든 실정적 정부는 자웅을 겨루는 투쟁을 통해서 얻어져야 한다.

[143/85]만약 (제도화된) 민주주의의 내기가 적대적 투쟁을 규칙에 따라 제어되는 경쟁으로 바꿈으로써 그것을 제도화된 차별적 공간으로 통합하는 것이라면, 파시즘은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된다. 파시즘은 그 활동 양태로 보면 적대의 논리를 극단으로 밀어붙이지만(자신과 적 사이의 “목숨을 건 투쟁”을 말하고, 비록 실현하지는 않더라도 복잡한 법적-제도적 경로를 무시하고 “인민의 직접적 압력”과, [/86]제도 바깥의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위협을 언제나 견지한다), 정반대로 극도로 위계화된 사회적 체제를 정치적 목적으로 삼는다. ... 민주주의는 적대적 투쟁을 자신의 목적... 으로 인정하지만 그 절차는 규제적-체계적이다. 반대로, 파시즘은 고삐 풀린 적대란 수단을 통해서 위계적으로 구조화된 조화를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지향한다.

[147/88]우리는 여기서 엄격히 구분되는 보편성의 논리(two opposed logics of universality to be strictly distinguished 엄격히 구분되는 보편성에 관한 두 가지 대립적인 논리)를 다루고 있다. 한편으로 사회의 보편적 계급(혹은 더 넒은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경찰로서의 인권과 민주주의의 보편적 수호자로서의 미국)으로서의, 혹은 전지구적 질서의 직접적인 대행자로서의 국가 관료 체제가 있다. 다른 한편으론, “정원 외적(surnumerary)” 보편성, 곧 기존 질서에서 빠져나온 요소에 구현된 보편성이 있다. 이것은 그 질서에 내재해 있으면서도 그 안에 자신의 자리를 갖고 있지 않다(자크 랑시에르가 “자기 몫이 없는 부분”("part of no-part) 이라고 부른 것이다). 문제는 이 두 보편성이 단지 서로 다르다는 것 정도가 아니다. [/89]투쟁이 궁극적으로 보편성의 특수한 요소들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이 두 보편성 사이의 투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특정한 내용이 보편성의 빈 형식에 대한 헤게모니를 쥘 것인가를 놓고 벌어지는 투쟁이라기보다는 보편성 자체의 상호 배제적인 두 형식 사이의 투쟁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working clas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구분했다. “노동계급”은 실상 특정한 사회집단인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주체적 입장을 가리킨다. 그리고 레닌은 여러 사회적 실천 가운데 정치적 차원이 갖는 특수성에 대한 깊은 감수성에서뿐만 아니라, 고도로 이질적이며 [148]모순적인 것으로서의 “계급”에 대한 인식과 이런 계급과는 차별화된 것으로서 당에 대한 그의 “비유기체적”(non-organic) 개념을 통해 마르크스를 따르고 있다.

[150/91]더 나아가 우리는 정치경제학 비판이란 용어 자체가 지시하는 바를 잊지 말아야 한다. 경제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때문에 우리는 정치 투쟁을 단순히 보다 기본적인 경제적, 사회적 과정의 부수효과 내지는 이차적 효과로 축소시킬 수 없다. 이것이 마르크스에게 “계급투쟁”이란 말이 의미했던 바이다. 경제의 바로 그 핵심에 정치적인 것이 존재하며, 이것이 마르크스가 계급투쟁을 직접 다루고자 할 때 『자본론』3권의 원고가 중단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한 이유다. 이 중단은 단순한 누락이나 실패의 신호라기보다는 사유의 방향이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고, 이미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차원으로 회귀한다는 신호이다. “정치적” 계급투쟁은 처음부터 모든 분석을 관통한다.(The "political" class struggle permeates the entire analysis.) 정치경제라는 범주는 (가령,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 혹은 이윤율)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데이터가 아니라 언제나 “정치적” 투쟁의 결과를 보여주는 데이터이다.[151]

[151/92]“자본주의”는 단순히 실제적인(positive) 사회 영역을 구획하는 범주가 아니라 사회 공간 전체를 구조화하는 형식적이고 초월적인 모체, 문자 그대로 생산양식(mode of production)이다. 자본주의의 힘은 바로 그 약점에서 나온다. 자본주의는 자체의 근본적인 적대, 구조적인 불균형과의 조우를 회피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역동적 상태로 항구적인 긴급 상태로 밀어 넣어진다. 그런 한에서 자본주의는 존재론적으로 “개방”되어 있다. 그것은 항구적인 자기-극복을 통해서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미래로부터 빌려와서는 그 청산일을 영원히 유예하는 [152]식으로 자본주의는 자신의 미래에 빚을 진 것처럼 보인다.

[152/92]그것의 기본 태도는 상황의 복잡성과 대면하기를 회피하고 그것을 유사-구체적인 적의 형상(pseudo-concrete enemy figure)(브뤼셀의 관료들에서부터 불법이민자까지)과의 분명한 투쟁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정의상 부정적인 현상, 거절(refusal [진실에 대한] 거절)에 기반한 현상, 심지어는 무력함의 암묵적 승인이다. 우리 모두는 가로등 아래에서 흘린 열쇠를 찾는 한 남자에 대한 오래된 농담을 알고 있다. 어디서 잃어 버렸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캄캄한 구석에서 잃어버렸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는 왜 여기 불빛 아래서 찾고 있는가? 왜냐하면 여기가 훨씬 잘 보이기 때문이라고. 포퓰리즘에는 항상 이런 종류의 속임수가 있다.

주10]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체제에 동조하는 많은 사람들은 차베스의 현란하다 못해 때로는 어릿광대 같은 스타일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실각했을 때 놀랍게도 다시금 그에게 권력을 되찾아 준 가난하고 배제된 사람들의 대중적인 대규모 자가-조직운동을 대조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관점의 오류는 전자 없이 후자가 가능하다고 보는 데 있다. 대중운동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라는 동일시 형상을 필요로 한다. 차베스의 한계는 다른 곳에 있다. 그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요인인 바로 그것, 오일머니다. 석유는 당장의 저주는 아니더라도, 언제나 길흉이 뒤섞인 축복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오일머니 덕분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정말로 새로운 것을 발명하지 않고서도 그는 자신의 포퓰리즘적 태도를 계속 견지해 나갈 수 있다. 돈은 실제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행위, 곧 근본적인 변화를 연기하면서 (포퓰리즘적인 반자본주의적 조치들을 취하면서 동시에 기본적으로 자본가들은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두는) 모순적인 정책들을 수행할 수 있게 해준다. (반미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와 미국 사이의 협약이 정기적으로 체결되도록 꽤 신경을 쓴다. 그는 실로 “석유를 갖고 있는 피델 카스트로”다.)

PART TWO 철학에서의 레닌

6. 레닌과 변증법의 길 - 사바스 미카엘-마차스

[165/103]계속한다는 것은 동일한 것의 성장, 확장, 반복이 [166]아니다. 계속성은 하나의 모순, 스스로 예리해지고 절박해진 나머지, 이전과 다른 새로운 모순을 향해 그 자신을 초월해가는 그러한 모순이다. 그래서 계속성은 그 필연성의 열매일 뿐만 아니라 계속성이 이뤄질 수 없다는 불가능성의 열매이기도 한 것이다.

[177/111]레닌이 라이프니츠에게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사실은 그동안 거의 완벽하게 무시되어 왔다. ... 라이프니츠에 대한 이 새로운 관심은 포이어바흐의 책을 읽으면서 생겨난 우연한 일탈이 아니다. ... 마르크스가 라이프니츠를 어떻게 평가했든지 간에, 레닌은 이 『모나드론』의 사상가에 의해 물질을 외부에서 오는 생명 없는 덩어리로 보던 데카르트적 관점이 완전히 극복되었다고 보았다. 라이프니츠에게 신체적 실체corporeal substance는 “그 내부에 역동적 힘, 결코 소진되지 않는 활동성의 원리”[178]를 갖고 있는 무엇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신학을 통과해, 물질과 운동 사이에는 분리 불가능한 (그리고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는 원리에 도달하였다”고 레닌은 쓰고 있다. ... 그것은 기계적 유물론과는 대립되는 것이었으며 오히려 현대의 비-뉴턴 물리학이 발견한 물질 개념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185/116]요컨대 변증법은 교훈적 사례들의 총합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의 발견이다. 달리 말해, 변증법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인식론”이며 “사태의 본질(the essence of the matter 물질의 본질)이다. 플레하노프는 그것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하물며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알튀세르와는 달리 레닌에게 철학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 아니다. 단지 어떤 조건하에서만, 이를테면 어떤 인식론적 허약함이라는 조건, 특히 부분이 전체로부터 분리되거나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변형되는 그런 조건 하에서만, 철학은 우리를 “수렁 속으로” 이끌게 되며, “거기서 그것은 지배계급의 계급적 이해에 닻을 내리게 될 뿐이다.”

[187/117]문제를 현재의 시점까지 끌고 내려와 보면,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스탈린주의가 붕괴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유산들, 무엇보다도 변증법적 방법이 그 잔해 아래 함께 묻어 버렸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모든 모순이 폭발하는 시기에, 냉전-이후의 세계를 특징짓는 난폭한 이변과 첨예한 불연속이 도처에 나타나고 있는 바로 이 시기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평화롭고 점진적인 진보라는 진화론적 관념에 빠져 거의 순응주의자가 다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수치스런 아니러니가 또 있을까. ... 변증법은 무엇보다 이행에 대한 연구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위기 속에서의 이행에 관한 이론이 결여돼 있다. 가로막힌 역사적 이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저 차단벽들을 넘어서고자 한다면, 오직 혁명적 초월만이 그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If we are to escape the blocked historical transition in which we exist now, we can only achieve it by a revolutionary transcendence of the impasse. 만약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꽉막힌 역사적 이행을 벗어 나고자 한다면, 오직 이 교착상태의 혁명적 초월에 의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7. “변증법은 살아 있다”-철학과 세계정치에서 변증법의 내구성과 생명력에 대한 재발견(The Rediscovery and Persistence of the Dialectic in Philosophy and in World Politics 철학과 세계 정치에서 변증법의 재발견과 지속성) - 케빈 B. 앤더슨

[192/120]레닌의 사상에는 몇몇 결정적 취약점들이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두어야 할 것 같다.(Since this chapter will stress Lenin's theoretical achievements, I would like to state at the outset that I also see some serious weaknesses in Lenin's thought. 이 장은 레닌의 이론적 성취를 강조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레닌의 사유에 있어서 몇몇 심각한 약점들을 찾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전위당의 주도적 역할에 대한 레닌의 지지는 마르크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각으로, 너무나 오랫동안 혁명조직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빈곤하게 만드는 짐이 되어왔다. [/121]둘째, 1917년 이후 레닌의 행보들, 특히 일당 지배 국가를 만들고 노동자 소비에트를 붕괴시킨 점 등은 결코 혁명적 민주주의의 모델로 간주될 수 없다. 셋째 ... 변증법 사상에 대한 레닌의 기여는 아주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고른 일관성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같은 저작은 거칠고 기계적이다.

[194/122]서구 마르크스주의와 비판이론의 역사에 대한 표준적인 해설들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과소평가하거나 아예 빠뜨리고 있다. [195]첫째 일반적인 수준에서 보더라도, 헤겔에 관한 레닌의 중요한 저작인 헤겔 노트는 1914~15년에 작성된 것으로 1923년에 나온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에 비해 거의 10년이나 앞선다. ... 이러한 사정으로 미뤄보건대, 레닌이 루카치를 위해 앞길을 닦아 놓았다는 것은 분명하다.(Thus Lenin helped pave away for Lukács. 따라서 레닌이 루카치의 앞길을 도운 것이다.) / 1960년대 서독의 비판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거의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 둘째, 전문적인 수준에서 보았을 때도, 서구 마르크스주의 또는 비판적 마르크스주의에 끼친 레닌의 영향을 보여주는 증거는 프롬의 에세이 말고도 꽤 많이 있다.

[199/125]변증법적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이 책{『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은 두 개의 근본적인 한계를 갖는다. 첫째,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을 “객관적인 현실의 모사, 현실에 근접한 모사”로 보는 조야한 반영이론을 내비친다. 둘째, 레닌은 모든 형태의 관념론을 “윤색된 유령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199/125]... 본격적인 헤겔 연구가 시작된 1914년의 지적 위기 동안 ... 제2인터네셔널의 마르크스주의와 정치적으로 결별 ... 새로운 인터네셔널의 창립을 요청 ...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키자고 요청 ... 혁명적 패배주의 ...

[200]그런 의미에서 레닌이 자신의 철학적 사고를 재점토했던 기간은 정치적 과업에서 풀려나 조용히 침잠했던 시기가 아니라 자신의 근본 원칙들을 송두리째 재조직할 것을 요구받은 소란스런 시기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와 노동자 계급을 배신하고 그들을 전쟁의 참호라는 도살장으로 내모는 데 일조하고 있던 제2인터네셔널의 지도자들이야말로, 레닌 자신도 이제껏 추종해 왔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 [/126]전쟁이 시작되던 1914년 10월에서 이듬해인 1915년 1월에 이르는 몇 달 동안 레닌은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 헤겔을 파고들었다.

첫 번째 변화는 레닌이 조야한 유물론에서 벗어나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을 비판적으로 전유하는 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레닌은 곧이어, 철학을 관념론과 유물론의 “양대진영”으로 나누는 엥겔스의 이분법을 넘어서 다른 무언가로 나아가게 된다. ... [201]레닌은 “속류 유물론”(vulgar materialism)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처음 도입하고 있다. ... 보다 일반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두말할 것고 없이 레닌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발언은 통상 ‘정통 레닌주의’라 일컬어지는 어떤 것보다 차라리 ‘비판적 마르크스주의’라 불리는 것에 더 가깝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202/127]레닌은 어디선가 헤겔의 변증법을 “자기-운동과 생명력의 내적 충동”(the inner pulsation of self-movement and vitality)이라 불렀다. 레닌은 관념론을 거부한 예전의 태도로부터 점차 거리를 두게 되며, 이제 문제는 [관념론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헤겔의 변증법적 관념론을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접속시키는 것이 된다. 철학사를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양대 진영으로 구분했던 엥겔스에 맞서, 레닌은 관념론과 유물론의 변증법적 종합(dialectical unity between idealism and materialism)이라 불릴 만한 어떤 입장에 접근해 가기 시작한다. 레닌은 알지 못했지만, 비슷한 변화가 1844년 마르크스에게서도 나타났었다. 그즈음 마르크스는 “관념론과 유물론 모두로부터 구분되는 또한 동시에 그 둘의 통일적 진리를 구성하는” “일관된 자연주의 또는 인간주의”("a consistence naturalism or humanism" that was "distinguished from both idealism and materialism")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203/127]두 번째로 나는 레닌이 투박하고 조야한 반영이론으로부터 차츰 거리를 두었으며 1908년의 관점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러한 변화의 분명한 증거는 헤겔 노트의 거의 말미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인간의 의식은 객관적 세계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창조해 내기도 한다.”(Man's cognition not only reflects the objective world, but create it) 이는 헤겔의 관념론을 혁명적, 능동적, 비판적으로 전유하는 한 사례이다. 인식은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사회적 관계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향해 현재의 물질적 조건 너머로 나아간다. 여기 이 “최종 분석”의 자리에서는 [인식의] 유물론적, 혹은 반영적 측면이 우선권을 가질 수 없다. 그와 반대로 레닌의 문장은 우리를 “관념이나 개념들이 객관적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생각 쪽으로 이끈다. ... “(레닌에게서) 변증법은 단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단언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인식을 주체와 객체의 영원한 상호작용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며, 여기서 둘 중 어떤 것이 절대적 우선권을 갖는다는 식의 주장은 변증법의 핵심을 벗어나는 것이다”(콜레하노프)

[207/130]레닌은 지구를 뒤덮은 제국주의에 의해 억압당하는 수천만의 민중들과 해방을 향한 그들의 열망에 관해 쓰고 또 썼다. 그는 억압된 민족들 내부에서 움튼 해방적 민족운동과 지배민족들의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유럽, 미국, 그리고 일본과 같은 열강들의 민족주의가 제국주의를 부추기고 지탱했던 반면, 약소민족들의 민족 해방 운동은 지구적 제국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대립물이었던 것이다.

[216/136]오늘날 과거와 달라진 것 중 하나는, 이전에 식민과 점령의 고통을 당했던 민족들도[217]일단 독립한 다음에는, 지구적 자본주의하에서 그들이 지속적으로 대면하는 지배관계에 따라, 국경 안에든 밖에서든 다른 민족적 소수자들을 억압하는 세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어떤 특정한 형태의 민족주의가 반동적 성격을 띨지 아니면 해방적 정치를 활성화하게 될지에 관한 레닌의 요점이 있다. 레닌은 민족주의가 반동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은 영국이나 미국 같은 강대국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고 보았다.

[219]“ ... 객관적인 태도로 그의 글들을 읽어본다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과 헤겔 노트 사이에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헤겔 노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레닌의 사유는 유연하고, 생동감 있고 … 한 마디로 변증법적이 되었다. 레닌은 1914년 제2인터네셔널이 붕괴하기 이전까지는 변증법을 참되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르페브르는 각주에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였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내세우면서 헤겔 노트는 뒤로 밀쳐 주었던 스탈린주의자들의 저 오랜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 뒤늦은 이 고백이 핵심적인 문제를 짚고 있지만, 그의 주요 저술이나 레닌 관련 논문이 아니라 두꺼운 자서전 한 귀퉁이에 나오는데다 지나가는 말처럼 언급되는 형편이어서 1960~70년대에 루이 알튀세르와 그의 학파들이 반변증법적이고 반헤겔적이며 마오쩌뚱-근본주의적인 해석들 - 특히 알튀세르의 『레닌과 철학』에 잘 드러나 있는 -을 쏟아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139]『레닌과 철학』의 표제 논문은 1968년에 행해진 대중 강연의 원고인데 『유물론과 경험비판론』과 레닌의 경제 관련 저술들만 언급하고 있지 헤겔 노트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장 이포리트가 이 점을 공개적으로 지적하고 나서야 알튀세르는 마침내 헤겔 노트에 집중한 논문을 한 편 제출했는데, 거기서나 다른 곳에서나 알튀세르가 레닌과 헤겔에 관해 논평하는 것을 보면 실은 정반대인 두 사람의 텍스트를 한데 비비꼬아서 헤겔에게 해야할 비판을[220] 레닌에게 겨누면서 모호하게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다.

[221/140]{두나예프스카야는} 레닌의 헤겔 복귀를 마르크스의 헤겔 복귀와 함께 다루기도 했다. “『자본론』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먼저 헤겔의 『논리학』 두 권을 열심히 다 읽어야 한다는 것이 레닌의 속뜻은 분명 아니었다. 결정적인 것은 레닌이 낡은 개념을 가지고 어떤 중요한 돌파구를 열었다는 것인데, ‘인식은 세계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창조한다’는 말보다 그 점을 더 예리하게 표현해주는 말도 없을 것이다. … 레닌은 헤겔에게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통일성에 관해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획득하게 됐으며[222] 1915년 이후 레닌의 저작들에 지속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이 바로 이 새로운 이해이다.”

[222/140]두나예프스카야는 레닌의 헤겔 전유에 대해 몇몇 설득력 있는 비판을 전개하기도 했다. 첫째 그녀는 레닌이 헤겔 변증법에 관한 자신의 새로운 사고를 보다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그 유산을 모호한 상태로 남기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 [/141]두나예프스카야가 보기에 이 모든 문제는 레닌이 1920년에 러시아에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 재출간되도록 허용했을 때부터 뒤엉켜 버렸다. 공식적으로 레닌은, 『제국주의』와 『국가와 혁명』을 완성함에 따라, [이 저작들과 철학적 바탕을 달리하는]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번역 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 하겠다. 그러나 차츰 스탈린주의적 성향을 띠어가던 기관들이[223] 1927년에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여러 언어로 번역해 광범위하게 출판했고 국제 공산주의 정당들도 관념론에 대한 이 책의 투박한 공격들을 마음껏 활용하기 시작했다. ... 두나예프스카야의 두 번째 비판은 레닌이 매우 중요한 결절점에서 변증법의 실천적, 행동적 측면을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그 이론적 측면을 축소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헤겔 『논리학』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나오는 ‘선의 이념’을 다루는 레닌의 논의에서 잘 드러난다. / 세 번째로 그녀는 레닌이 여러 곳에서 헤겔을 너무 협소한 유물론적 시각에서 해석했으며, 특히 『논리학』의 마지막 장인 ‘절대적 이념’을 다룰 때 그러하다고 주장한다. 레닌이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6)에 나오는 엥겔스의 생각을 부분적으로 깨뜨렸던 것은 사실이다. ... 레닌은 엥겔스와는 다른 길을 택해, ‘절대적 이념’ 장이 관념론적이라기보다 유물론적이어서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전유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나예프스카야는, 레닌이 엥겔스보다는 깊이 있게 파고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결정적 실수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레닌은 ‘부정성’negativity이라는 헤겔의 핵심 개념에 무게를 두지 않고, 대신 ‘모순’에 초점을 맞추었다.[224] 여기서 그는 제2인터네셔널 문서고에 방치된 채 잊혀져 있던 『1844년 수고』에 나오는 부정성의 변증법에 관한 마르크스의 논의와 친숙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 확실히 레닌은 『논리학』 마지막 장을 끝맺는 문단에서 헤겔이 ‘논리에서 자연으로의 이행’에 관해 쓰고 있음을 파악했으며, [/142]그 대목에서 헤겔이 “유물론 쪽으로 손을 내밀고 있다”(LCW 38: 234)고 썼다. 하지만 두나예프스카야는 레닌이 이 부분 바로 뒤에 이어져 있는 헤겔의 논의를 무시했다고 지적한다. 거기서 헤겔은 또 다른 이행을 말하고 있으니, ‘논리에서 정신으로의 이행’이 바로 그것이다. /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두나예브스카야는 제국주의와 민족 해방 사이의 모순을 통해 세계 정치를 변증법적으로 재해석한 것은 레닌의 위대한 업적이지만, 그가 전위당이라는 엘리트적 개념을 변증법적으로 재해석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 그녀는 이러한 전위당 개념을 대신해, 그녀가 조직과 철학의 변증법이라고 부른 새로운 조직의 개념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헤겔 뿐 아니라 마르크스가 1840년대 공산주의 연맹 이래로 1860년대 제1인터네셔널과 『고타강령비판』(1875)에 이르기까지 조직 활동 속에서 확장했던, 그러나 종종 무시되었던 조직 문제에 관한 저술들에 뿌리를 둔 것이어야 할 것이다.

8. 도약! 도약! 도약! -다니엘 벤사이드

[234/149]마르크스는 헤겔의 국가철학에 관한 1848년의 주석에서 “국가가 모든 것에 유효한 것은 아니다”라고 썼다. 이는 관료국가를 추상적 보편성의 구현으로 만들어 버리는 지극히 과장된 정치적 요인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사회적인 것에 대한 일방적인 열정을 넘어 마르크스는 억압된 자들의 정치가 출현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정치는 비국가적 정체(政體)의 구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국가를 [총체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으로 약화시키는데 필요한 방법을 준비하는 것이다. / 중대하고도 시급한 문제는 아래로부터의 정치라는 문제, 곧 지배계급의 국가정치에 의해 배제되고 제거된 사람들을 위한 정치의 문제이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그 반복되는 비극이라는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 [235]강요된 노동이라는 비자발적 예속상태 때문에 육체적이고 도덕적으로 일상생활에 고착되어 있는 하나의 계급은 어떻게 인간해방의 보편적 주체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이 점에 관한 마르크스의 답변은 어떤 사회학적 내기(sociological gamble)에 기대고 있다. 산업의 발전은 수치상의 성장과 노동계급의 집결을 가져오고, 이는 다시 노동계급의 의식과 조직에서 진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의 논리 자체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으로 구성”해 준다는 말이다.

[235/150]레닌의 정치적 사유를[236] 전략으로 파악하는 사유이며 또한 약한 연결고리에서 유리한 계기를 찾아내는 사유이기도 하다. ... 레닌은 정치를 투쟁으로 가득찬 시간으로, 위기와 좌절의 시간으로 생각했다. 레닌에게 정치의 특수성은 혁명적 위기의 개념 속에서 표현되는 것인데, 이러한 위기란 사회운동의 논리적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모든 계급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가 총체적으로 맞게 되는 위기를 뜻한다. 그리하여 이 위기는 국가적 위기로 정의된다. 이러한 위기는 상품이라는 신비한 환상에 의해 가려져 있던 전선을 확연히 드러내 주는 작용을 한다. 그때야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롤레타리아트 본연의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소위 필연적으로 무르익게 되는 역사적 단계의 시기(inevitable historical ripening)와는 무관한 것이다.

[237/150]레닌의 접근법은 정치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조잡한 노동자주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레닌은 계급의 문제를 당의 문제와 뒤섞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계급투쟁은 단지 노동자와 그 고용주 사이의 적대라는 문제로만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이란 자본주의 생산의 총체적 과정이라는 층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자본가 계급 전체에 대립시키는 것인데 ... [/151]따라서 레닌에게 하나의 정당으로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란 단지 몇몇 고용주들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뿐만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모든 계급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도, 그리고 조직된 권력으로서 국가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도 또한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 [237/151]레닌주의적 전략에서 적절한 계기로 여겨지는 시간은 더 이상 선거의 시간이 아닌데 ... 오히려 레닌에게 알맞은 시간이란 투쟁에 [238]어떤 리듬을 부여하는 시간, 위기에 의해 중단된 시간이다. 이 시간은 필연과 우연, 행위와 과정, 역사와 사건이 서로 함께 맺어지는 독특한 접합의 시간, 알맞은 계기의 시간인 것이다. 우리는 혁명이라는 것을 어떤 단독적인 행위의 형태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 혁명은 다소 깊은 고요의 상태와 다소 폭력적인 분출들이 빠르게 번갈아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레닌에 따르면 이러한 까닭으로 당의 본질적 활동은 그 활동의 본질적 중심은 가장 폭력적인 분출의 시기와 고요의 시기 양쪽 모두에게 가능하고 필요한 작업이 되어야 한다. 곧 당의 본질적 활동은 그 두 시기에서 모두 통합적 정치 선동의 작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혁명은 가속과 감속으로 특징지어지는 그 자신만의 박자를 갖고 있다. 또한 혁명은 직선이 두 갈래로 나뉘고 급작스럽게 선회하는 그 자신만의 기하학도 갖고 있다. 이렇게 하여 당은 새로운 관점에서 부각된다. ... 당은 전략의 작동자, 일종의 변속장치이자 계급투쟁의 대표자가 된다. 발터 벤야민이 명확히 인지했던 것처럼, 정치의 전략적 시간은 계급 역학의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어떤 불연속적인 시간, 곧 사건들을 잉태하는 여러 매듭과 원천들로 가득차 있는 시간인 것이다.

[240/152]“순수하고 단순한 노동운동”이 그 스스로 어떤 독립적인 이데올로기를 구상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다. 반대로 노동계급 운동의 순전히 자발적인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의 종속”만을 부를 뿐이다. 왜냐하면 지배 이데올로기란 의식의 조작이라는 문제가 아니라 상품 물신성의 객관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오직 혁명적 위기와 당의 정치적 투쟁만이 그러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철권통치가 강요하는 예속 상태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할 수 있다. [/153]바로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의 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대한 레닌주의적 답변인 것이다. / 레닌은 정치를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게 되는 침입(the invasion whereby that which was absent becomes present)으로 개념화한다. 확실히 계급구분은 최후의 보루로서 정치적 결집의 가장 핵심적인 기초가 되는데, 이러한 최후의 보루는 오직 정치적 투쟁에 의해서 확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말 그대로 사회적 삶의 모든 지점들로부터 분출하는 것이며 확실히 그 꽃은 모든 곳에서 피어난다. 만약 그러한 배출구들 중 하나가 특별한 조처로 막혀 있다면, 공산주의의 전염력은 때때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출구를 찾아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불씨가 불꽃을 점화하게 될지 알 수 없다.

[242/154]레닌이 카우츠키의 정전과 같은 텍스트를 바꾸어 말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가 카우츠키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하게 왜곡시켰음을 알 수 있다. 카우츠키는 “과학”이 “계급투쟁의 외부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해 배태되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도래한다고 썼다. 특이할 만한 어구상의 변화를 통해 레닌은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다르게 옮겨 적는다. “계급의 정치의식”은 (“과학”이 아니라!) “경제적 투쟁의 외부에서”(사회적인 만큼이나 정치적이기도 한 계급투쟁의 외부에서가 아니라!) 그리고 더 이상 사회적 범주로서의 지식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영역을 특정하게 구성하는 한 작용자로서의 당에 의해서 배태되어 도래한다고. 이 두 문장의 차이는 매우 본질적이다.

[244/155]레닌은 자신만의 고유한 논리를 통해 의회제도도 없고 민주적 전통도 없는 한 나라에서의 다원성과 대표라는 문제를 파악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는 못했다. 여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레닌은 프랑스 혁명을 사례 삼아, 일단 압제자가 제거되고 나면 인민(혹은 계급)의 동질화는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156]인민들 내부의 모순은 오직 타자(이방인)로부터, 반역으로부터 도래한다는 것이다. 둘째, 정치와 사회적인 것 사이의 구분은 치명적 전도를 막아주는 보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것을 사회화하지 않는 대신 [245]자칫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사회적인 것을 관료적으로 국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246/157]모든 영역을 선동하라! 가장 예상할 수 없는 해결책들에 주의를 기울여라! 급작스런 형식의 변화에 대비하라! 모든 무기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습득하라! / 이것이 바로 정치를 예기치 못한 사건들의 기술art로 파악하는, 그리고 또한 정치를 결정적 접합의 효력을 지닌 가능성들의 기술로 파악하는 격언들이다. / 정치에서의 이러한 혁명은 「제2인터네셔널의 붕괴」에서 체계화했던 혁명적 위기의 개념을 상기시킨다. 혁명적 위기의 개념은 한 상황 안에서 몇 가지 가변적인 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정의된다. 상부의 요소들이 더 이상 예전처럼 군림하지 못할 때, 하부의 요소들이 예전처럼 억압 받는 것을 더 이상 참지 못할 때, 그리고 이러한 이중의 불가능성이 대중들의 급작스런 비등으로 표출될 때가 바로 그때이다.

[249]며칠! 한 주 1917년 9월 29일에 레닌은 혁명을 결행할지 망설이고 있던 중앙위원회 앞으로 글을 써 보냈다. “위기가 무르익었다.”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죄악이었다. 10월 1일에 레닌은 “당장 권력을 쟁취”하고 “당장 봉기에 돌입”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며칠 후 그는 재차 주장했다. “나는 이 문장들을 10월 8일에 쓰고 있다. … 러시아 혁명과 세계 혁명의 성공이 2~3일 동안의 싸움에 달려 있다.” 그는 계속해서 주장한다. “나는 이 문장들을 [250]24일 저녁에 쓰고 있다. 상황은 극도로 중대하다. 봉기를 연기하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 될 거라는 점이 이제 실로 분명해졌다. … 이제 모든 일이 경각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바로 오늘 저녁, 바로 오늘 밤에”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251/160]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의 환상이 남아 있는데, (오늘날 권력이 특정한 지역적 범위와는 상관없는 것이 되었고 따라서 도처에 산재해 있는, 곧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는 명목으로) 우리가 대항권력(counterpower)이라는 수사학을 통해 정치권력의 쟁취라는 문제를 제거함으로써 저 응답의 어려움을 피해갈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권력은 아마도 더욱 광범위하게 산재하게 되었지만, 또한 그러한 권력들은 어떤 면에서 그 이전보다 더욱 집중화되기도 했다. 우리가 권력을 모른 척할 수는 있을 테지만, 권력이 우리를 모른 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권력을 취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우월한 듯 행동할 수는 있겠지만, 1937년의 카탈루냐로부터 치아파스와 칠레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경험들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권력은 주저 없이[252] 우리를 가장 난폭한 방식으로 취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말해 대항권력이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이중의 권력과 그 해결이라는 관점에서뿐이다. 누가 승리할 것인가?

[252/161]공산주의의 민주적 중앙집권제를 피상적으로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레닌을 비방하는 이들은 무엇보다 스탈린 시대의 당이 가장 나쁜 형태로 예시하고 있는 극단적인 관료중심주의를 문제 삼는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반대되지 않는 어느 정도의 집중화는 오히려 민주주의가 존속하기 위한 본질적 조건이다. 왜냐하면 당의 경계를 한정짓는 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분쇄 책동에 저항하는 수단이며 또한 당원들 사이에서 어떤 평등을 목표로 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253/161]당(운동, 조직, 연맹, 당 등 주어진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이 [/162]없는 정치란 대부분의 경우 정치 없는 정치로 귀결한다. 그러한 정치는 사회적 운동의 자발성을 향한 맹목적 추수주의일 수도 있고, 엘리트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전위주의의 가장 나쁜 형태일 수도 있으며, 또한 미학적이거나 윤리적인 것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결국 정치적인 것을 억압하게 되는 일일 수도 있다.

PART THREE 전쟁과 제국주의

9. 헤겔의 독자 레닌: 레닌의 헤겔 『논리학』 노트를 독해하기 위한 몇 개의 가설적 테제들 - 스타시스 쿠벨라키스

[264/166]모든 것이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으며, 무엇보다 노동운동이 그러했다. 제2인터네셔널의 붕괴, 제국주의적 갈등의 폭발 앞에서 제2인터네셔널이 보여준 총체적 무능은 사실상 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뿌리 깊은 경향, 즉 운동 조직들(그리고 운동의 사회적 기반 대부분)을 제국주의 중심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질서를 지지하는 쪽으로 타협해 가던 “통합”의 경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었다. 따라서 레닌의 표현을 쓰자면, 이 “붕괴”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정치적 실천 전반의 붕괴를 의미했으며 그들 모두가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재검토를 받아야 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세계대전이 우리의 투쟁 조건들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까지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쓰고서 “숨이 끊어져 가는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에 생명을 불어넣을” “가차 없는 자기-비판”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270/170]레닌의 행위는 무엇보다 먼저 헤겔과 변증법에 대한 평가절하 혹은 헤겔 억압이라 불릴 만한 시류에 대한 거의 본능적 반작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반헤겔적 태도는 일반적으로 제2인터네셔널의 마르크스주의를 변별해주는 특성이었고, 더 특정해서 말하자면 러시아에서 철학적 문제에 관한 한 제2인터네셔널을 대표하는 인사이며 인터네셔널 내에서도 상당한 권위를 인정받았던 ... 플레하노프 마르크스주의의 성격이기도 했다.

[273/172]사실 플레하노프가 억압하고자 했던 대상은 정확히 헤겔 자체가 아니라(어떤 의미에서 러시아 지식인들은, 플레하노프도 주장했듯이,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헤겔을 훨씬 덜 억압했다고 할 수 있다), 헤겔에 들어 있는 변증법이라는 문제, 레닌이 『논리학』을 읽고 난 후 플레하노프에 대해 철학적 평가를 내리면서 썼던 표현을 빌리자면, “사태의 본질”(essence of the matter)에 관한 문제였다.

[274/173]레닌은 헤겔의 체계에서 진짜 문제가 대두되는 곳은 헤겔의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텍스트나 역사를 다룬 텍스트라기보다는 가장 추상적인 텍스트, 가장 형이상학적이고 관념론적인 텍스트라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레닌은 후기 엥겔스로부터 상속되어 제2인터네셔널 전체에 의해 축성되었고, 레닌 자신의 “이전의 철학적 의식”도 거기에 포함돼 있던, 철학적 문제들을 다루던 어떤 방식과 돌이킬 수 없이 [275]결별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 방식이란 철학을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서로에 대해 기본적으로 외재적이고, 상호 적대하는 계급의 이해를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두 개의 대립적 진영으로 구분하는 것이었다. ... [275]레닌은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제3의 길, 중도적이거나 융화적이거나 혹은 둘 사이의 대립을 넘어서는 어떤 범주 같은 것들을 언제나 정언적으로 거부했다. 그런 류의 태도는 일괄적으로 제거해 버려야만 할 이론적 메커니즘의 잔재를 존속시킬 뿐이다. 그와 달리, 레닌의 시도는 “단지” 헤겔을 유물론자로 읽는 것(Lenin "simply" attempted ... to read Hegel as a material) - 그러나 이 단순한 시도 속에 모든 어려움이 엉켜 있다 - 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방식으로, 그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길을,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의 진정한 재정초를 위한 길을 열게 되었다.

[276/174]레닌이 집필한 『그라나트Granat 백과사전』의 ‘마르크스’ 항목 ... 이 텍스트에는 “속류” 유물론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욕망이 도드라져 보이는데, 이 “속류” 유물론이라는 정식화는 제2인터네셔널의 시각에서는 상당히 수상쩍은 것이었다. 우리는 제2인터네셔널이 어떠한 유물론이든 그것이 유물론이기만 하면 족하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음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레닌은 그러한 유물론을 “변증법에 반한다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는데, 이런 고발은 플레하노프의 머리에는 떠오를 수가 없는 생각이었다. 플레하노프에게 낡은 유물론이란 그저 “일관성 없는” 유물론, “물질” 일원론이나 사회자연적 “환경”에 의한 결정론에 충실하지 않은 유물론, [277]요컨대 충분히 유물론적이지 않은 유물론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기껏해야 “일면적인” 유물론을 뜻했을 뿐이었다. / 같은 글에서 레닌은 진화와 혁명의 문제 양쪽에 똑같이 관심을 기울이면서 “진화에 관한 현재의 생각들”과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진화”를 구분하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진화는 “비약, 파국, 혁명”(여기서 핵심어는 “파국”catastrophe이다)에 의한 진화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당시의 통상적인 생각들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다. ... 특히 의미심장한 것은 레닌이 “철학적 유물론”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절을 “혁명적 실천 행위”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며 끝맺고 있다는 점인데, 이 “혁명적 실천 행위”(revolutionary practical activity)는 정통파들의 결정론적 진화론에 의해 엄격하게 폐기되어 온 생각이었다.

[282/178]헤겔을 향한 레닌의 경로는 그리하여 우리가 되돌아가 보아야 할 세 개의 서로 다른 경로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은 서로 구분되는 다른 양태들을 가지고 있으나 각각 나름의 내적 필연성을 갖고 있으며 상호 독립적이지만 넓게 보자면 동일한 이론적 줄기에서 나온 세 개의 가지이다. 게르첸과 마르크스가 풀어야만 했던 것은 동일한 정치적 수수께끼였다. 그것은 그들 각각이 마주한 사회 구성체들의 비-동시성(non-contemporary of their respective social formation)이라는 수수께끼, 다시 말해 그 사회구성체의 지체를 뒤집어 한발 앞선 진보로 바꾸는 것, “너무 이른” 그리고 “너무 늦은”이라는 용어를 변형시켜, 결정된 정세 속에서 혁명적 과정의 특수한 현실성으로 바꾸는 주도적 힘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변증법의 문제이며, 레닌은 자신의 길 위에서 이를 깨닫게 될 것이다.

[283/178]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로 논의를 시작해야만 한다. ‘헤겔 『논리학』에 대한 레닌의 노트라는 텍스트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 말하자면 그것들은 사적인 용도로 작성된 필기들일 뿐이며, 혹은 적어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 출판될 것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어떤 것들이다.

[284/179]헤겔 『논리학』에 대한 레닌의 노트는 아주 기이한 텍스트로,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서도 전례 없이 독특하다. 헤겔의 저작에서 발췌한 인용문들과 주석들을 모아 놓은 이 텍스트는 무슨 책이 이런가 싶을 정도로 콜라주의 외관을 하고 있고, 애초부터 파편적이고 이질적이도록 구성돼 있으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다수의 텍스트들이 여러 층위에서 서로에 대해 하위 텍스트로, 상호 텍스트로 기능하면서 끊임없이 뒤섞이게 되어 있다. 또 파편적 텍스트 각각은 끝없이 다른 텍스트들을 지시하며, 특히 어떤 부재하는 (하위) 텍스트, 즉 『논리학』으로부터 베낀 것이 아닌 모든 텍스트들을 가리키게끔 작용한다.

[285/180]대상에 대해 외재적인 “방법” 혹은 (후기 엥겔스의 공식에서처럼) “체계”로부터 떼어낼 수 있는 것으로서의 변증법이 아니라, 사유에 의해 파악된 사물의 자기-운동의 내재성의 정립(the very positing of the immanence and self-movement of things, 말 그대로 내재성의 정립이면서 사물들의 자기-운동)이자, 동일한 운동을 가로질러 자신에게로 귀환하는 사유로서의 변증법. 각개의 사물은 그것 자체이며 동시에 그것의 타자이므로, 그러한 자신을 자기 안으로 반영함으로써 통일성이 깨지고 쪼개지게 되며, 다시 차이의 계기 자체로부터 자신을 떼어내고, 바로 그 자기-매개의 운동 속에서 그것의 “절대적” 자기동일성을 주장함으로써 그것[차이의 계기]을 취소하는 어떤 방식을 통해 다른 것이 된다.

[287/181]슬라보예 지젝은 “반영”에 들어 있는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깔끔하게 정식화한 바 있다.

레닌의 “반영이론”이 지닌 문제점은 그것의 암묵적인 관념론(implicit idealism)에 있다. 의식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적 현실에 대한 레닌의 강박적 요청은, 의식 자체가 그것이 “반영하는” 현실 바깥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 가정을 은폐하는 일종의 증상적 전치(symptomatic displacement)로 읽혀야 한다는 것이다. … [/182]거울이 오직 거울 바깥에 있는 대상만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 오직 세계 바깥에서 현실을 관조하는 의식만이 “실제 있는 그대로의” 현실 전체를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 요점은 저 바깥에, 나의 외부에 독립적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여기 바깥에”, 현실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헤겔의 논리학의 언어로 다시 말해 보자면, 이 논의에서 레닌이 보지 못한 것은 존재와 의식의 [서로에 대한] 이 최초의 외재성은 주체적 행위에 의해 - 그 개념이 정확히 바로 그러한 사태를 지시하고 있듯이 - 초월된다는 것, 그리하여 폐기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반영” 혹은 더 낫게 말해, 반성(독일어 Reflexion은 “숙고함”이라는 뜻에 더 가깝다)은 외적 현실의 복사가 아니라 매개의 계기, 부정성의 계기로 이해될 수 있다.

[289/183]그러므로 우리가 처음부터 강조해야만 할 사실은 “반영”이라는 개념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보게 되겠지만, 이중의 행위를 내장하는 하나의 메커니즘 속에서 그 자체가 “변증법화”된다는 것이다. 이 메커니즘은 헤겔 논리학의 참된 내용으로 하여금 “정통”에 의해 강하게 억압되었던 헤겔-마르크스 관계를 다시 구축하게 하는 것, 그리고 같은 조처를 통해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혁명적 추진력, 즉 그것의 변증법적 핵심을 되살려내는 것이었다. [290]이러한 과정에서 “반영”은 의식에 대한 사물의 외재성 혹은 자연의 정신으로의 환원불가능성 등, 처음(『논리학』에 관한 레닌의 노트가 시작될 때) 주장되었던 바와는 사뭇 다른 어떤 것이 된다. ... 레닌이 도달한 결론은 헤겔을 “유물론적으로 전복”하는 과제가 ... ‘개념론’에 개진된 ‘주체적 활동성’을 관념론적인, 따라서 전도된 혁명적 실천의 “반영”으로 읽어내는 데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헤겔은 “물질”이 아니라 혁명적 실천으로서의 물질적 이행의 선차성(the primacy ... of the activity of material transformation 물질적 변형이라는 현실성의 선차성)을 주장하는 새로운 유물론,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더 가까우며, 그런 점에서 정통 “유물론자들”보다 (혹은 마르크스 이전의 유물론보다) 한없이 더 유물론에 가까이 있다.

[294/186]본질의 외관, 즉 “반영”은 (단지 모사하고 있을 뿐인 어떤 참된 물질적 존재로 그것을 되가져다 놓음으로써) 환원되어야 할 환영이 아니라, 외적 운동의 투사된 이미지이다. 그것은 실재를 현실성Wirklichkeit으로 이끄는, 그래서 자기 결정의 과정을 시작하게 해주는 계기이다. ... 헤겔적 ‘운동’의 참다운 내재성 ... 외부의 자리에서 관조된 우주의 흐름, 만유유전이 아니라, 자기-운동selbstbewegung이다. “운동과 ‘자기-운동’(이것에 주의하라! 자주적인, 자립적인, 자발적인, 내적 필연적 운동) … 이것이 ‘헤겔 풍’의, 즉 추상적이고 난해한 … 헤겔주의의 핵심이라는 것을 그 누가 믿겠는가?? 이 핵심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살려내고hinüberretten, 알맹이를 가리고, 정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바로 그것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수행하였다.”

[300/190]이상적이거나 합목적적인(목표에 정향된) 행위에 대한 헤겔의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레닌이 끌어내고자 하는 결론은 이중적이다. 첫째 레닌은 “진리”를 향한, 개념과 객관의 절대적 동일성을 향한, 자기 안에 주관성의 작업을 포함하며 또한 그것을 인지하는 객관적 진리를 향한 매개로서의 인간 활동에 대한 헤겔의 분석의 중요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따라서 헤겔이 역사유물론과 “매우 가까워” 보이는 것은 (단지 주관적 목적의 합리성의 매개화의 첫 번째 형식에 불과한 도구에 대한 복권의 제스처에 의해서가 아니라), 포이어바흐에 관한 두 번째 테제의 언어로 규정하자면, 실천의 우선성에 의해서이고 “인간이 자신의 실천을 통해 이념, 개념, 지식, 과학의 객관적 정확성을 입증한다는 견해”에 의해서이다. 이때 “정확성”은 이러한 실천들에 내재적이며, 그러한 실천은 자신의 타당성의 척도를 스스로 생산한다. / 같은 이유에서 헤겔에 대한 “유물론적 전복”도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더 이상 자연과 정신, 존재와 사유, 혹은 물질과 관념이 아니라 논리와 실천적 행위 사이의 관계, 그 둘의 “동일성”이다.[/191] 헤겔이 내놓은 [301]사상의 “대단히 심오하고, 순수하게 유물론적인 내용”이 찾아져야 하는 곳도 바로 여기이다. “유물론적 전복”은 이제 [객관의 우선성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 속에서 논리학의 여러 식들을 “수십억 번”을 반복함으로써) 논리 그 자체의 공리들을 생산하는 실천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데 있게 된다. ... 논리를 실천의 과정적 성격의 기반 위에서 외화의 계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

[304/193]엥겔스가 『포이어바흐』에 썼던 것과 반대로, 절대적 이념은 고집불통처럼 앞뒤가 꽉 막힌 “독단적 내용”이 아니라, 인식의 궁극적 목표로서의 ‘헤겔의 체계’와 동일시될 수 있으며 자기-준거적 지점에서 포착된 과정 자체(the process itself taken to its point of self-reference)이다. 이는 관점의 전도가 일어나는 빛나는 순간이다. 거기서 우리는 이론 자체 “안에” 언제나 이미 이론과 실천의 통일성이 존재함(안토니오 그람시가 비범한 방식으로 발전시킨 테제)을 이해하게 되며 “형식”과 “내용”의 통일성이라는 문제는 그 자체가 형식의 문제, 그것 바깥에서는 어떠한 내용도 존속할 수 없는 “절대적”형식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306/194]절대적인 방법으로서의 변증법은 그것이 생산하는 효과들의 총합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 레닌이 헤겔 독해를 통해 획득한 새로운 철학적 입장 ... 그러한 입장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1차 대전 발발 이후 레닌이 보여준 철학적 개입들(실천들)에 잘 드러나 있다. ... 첫 번째는 ‘제국주의 전쟁의 내전으로의 이행’이라는 테제이며, 거기에는 억압된 민중들이 식민지에서 벌이는 민족해방투쟁과 대도시에서 벌이는 반자본주의 투쟁이라는 이중적 차원이 있다. ... 전쟁을 고전적인 국가 간 갈등이 아니라 적대의 과정으로 이해 ... “총력전” 안에서의 대중들의 분출을 무장봉기로 “전환”하는 것, [/195]달리 말해 대량살상 산업 쪽으로 쓸려 들어가는 대중들의 힘을 돌려 세워, 식민세력과 부르주아 지배라는 내부의 적에 대항하는 쪽으로 뒤집는 것이다. / 두 번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의 이행이라는 테제이다. ... 문제는 혁명적 과정이라는 모순의 내재성 속에, 결정이 이루어져야 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 그리하여 ... [307]사회민주주의적 정통파의 “단계론적” 전망과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과제를 수행할 수 없는 러시아 부르주아의 무능력이라는 추상적인(추상적으로 올바른) 전망, 이 정반대로 대립하는 두 전망 사이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이었다. ... 슬라보예 지젝이 힘주어 강조한 바 있듯이, “2월이라는 계기에서 10월이라는 계기로”의 전환은 결코 하나의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전진일 수 없으며, “최대주의”라는 증상의 발현이나, 혹은 조건의 “미성숙”을 주의주의적으로 뛰어넘는 것일 수도 없다. 그것은 차라리 “단계”라는 통념의 기준을 규정하는 근본적 좌표 그 자체의 전복(but rather a radical questioning of the very notion of "stage", a reversal of the fundamental coordinates that define the very criteria of the "maturity" of a situation차라리 “단계”라는 바로 그 통념에 대한 근본적 질문, 즉 상황의 “성숙”이라는 이왕의 기준을 정의하는 근본적 좌표의 역전)을 뜻한다.

10. 전쟁이 규정한 정치에서의 철학적 계기: 1914~16년의 레닌 - 에티엔 발리바르

[323/323]엄밀하게 볼 때 레닌에게는 단 한 번의 철학적 계기가 있었는데, 그 계기를 규정한 것은 바로 전쟁(전쟁과 관련된 쟁점들, 전쟁의 즉각적인 결과)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철학의 대상과 정치의 대상이 분리될 수 없다면, 이 사실은 철학에 중요할 수 있다.

[325/208]레닌이 엄밀한 의미에서 철학자는 아니었다고 주장하련다. 레닌이 자기 식대로 생산한 것은 기존의 철학적 논쟁에 개입하는 이데올로기적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철학노트』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등에 대한) 이런 비판적 독해는 철학적 담론에는 이르지 않았고, 또 그것을 의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1915년 이후 레닌은 더 이상의 철학적 저작을 결코 집필한 적이 없다.

[329/211]1915-16년 레닌이 쓴 텍스트들은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역사적 “경향들”로부터 나온 추정에 기초한 경제적 진화주의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점진적 형태(자본주의의 점진적 변환)였든 파국적 형태였든(자본주의의 갑작스런 붕괴) 제2인터네셔널 시기의 사회주의 사상을 지배해 왔던 이 경제적 진화주의는 레닌이 새롭게 제시한 “전술”과 갈수록 조화를 이루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이런 진화주의는 혁명의 순간이 다가오기 직전인 1916년 말~1917년 초의 분석들에 의해 근본적으로 수정된다. 이제는 모든 역사적 발전이 “불균등한”(uneven) 것으로 이해됐을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정치적 영역의 복잡성을 “경향들”의 논리로 환원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루이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며, 우리는 이 사실을 이론적 영역과 전략적 영역에서의 계급적대에 내재하는 중층결정의 발견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331/212]우리는 레닌이 1915년 이후, 특히 자신의 투신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연루되어 있던 세 개의 잇따른 혁명(1917년의 2월 혁명과 10월 혁명, 그리고 이후의 신경제 정책 혁명)을 거치며 끊임없이 변해 왔음을 볼 수 있다. “전술”에서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와 당의 역할(또한 그 구성 자체)에 대한 분석에서도, 그리고 그에 따른 “혁명적 주체”의 정체성에 대한 분석에서도 그렇다. 이제 [레닌에게] 계속 문제가 될 이 혁명적 주체는 (의식화, 즉 즉자적 계급이 대자적 계급으로 “변형”되어가는 형태까지 포함해) 이미 확보된 사회경제적 전제조건(an established socioeconomic presupposition)이 아니라, 복잡한 정치적 구성과정(the result of a complex political construction)의 결과로 등장하게 된다. 내 견해로는 전쟁이 제기한 질문들로 인해, 그리고 전쟁이 자극한 철학적 사유로 인해 혁명적 주체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전쟁 와중에 이미 레닌의 사유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결국 이 질문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소멸”("disappearance of the proletariat)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것이다(그것도 극적인 형태로 말이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론과 실천의 관계가 더 이상 단순한 응용 관계가 아니라 미리 결정되지 않은 구성의 관계(the relationship ... of non-predetermined construction)로 여겨지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33/214]레닌이 헤겔의 정식과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을 결합하려 했던 것은 “총력전”(total war) 이론의 의미에서 계급 투쟁이 총력전의 특정한 형태라고 말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사실은 이런 결합 자체가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레닌은 클라우제비츠가 “헤겔의 신봉자”였을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몇 차례씩 반복하면서 이런 결합을 회고적으로 역사에 투영한다). 그러나 레닌은 이중의 정정이라는 맥락에서 헤겔과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을 결합시킨다. 한편으로는 클라우제비츠의 실용주의를 갖고 헤겔의 사변(혹은 이성Vernunft)을 정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헤겔의 변증법을 갖고 클라우제비츠의 실용주의(분석적 오성Verstand의 응용으로서의)를 정정한다.

[334/214]레닌이 헤겔에게서 정정하는 것은 정세와 독립되어(independently of the conjuncture) “상대 속에 절대”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변증법적 모순 개념과 대중 동원이 “우연적인” 형태로 이뤄진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역사변증법을 실천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레닌은 단지 마르크스를 통해 헤겔을 읽을 뿐만 아니라 클라우제비츠를 통해서도 헤겔을 읽는다. 이 실천적 해석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전쟁 자체에 전쟁에 대한 정치의 우위성이 존재한다(즉, “다른 수단에 의해”, 그리고 “다른 형태”로일지라도 계급투쟁은 부단히 그 효과를 생산한다[전쟁에 영향을 끼친다]). 그에 따라 계급투쟁의 복잡성은 군사적 계기가 강제하는 “단순화”를 늘 넘어설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 자체를 단순한 “충동”인 양 여기는 단순화된 표상도 늘 넘어선다. 이렇듯 (정세에 개입하기 위해서) 정세를 사유한다는 것은 역사적 과정에 대한 이중의 단순화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전쟁이 계급정치를 일시적으로 “분쇄하면서” 강제하는 (또는 전쟁이 실현하는 듯한) 단순화, 그리고 이런 단순화에 관념적으로 맞서서 민족전쟁을 계급전쟁으로 그저 대체할 것을 주장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여기에는 룩셈부르크처럼 자기 진영을 배반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포함된다)의 단순화.

[335/215]레닌은 전쟁이 이중성을 지닌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216]즉, 전쟁은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대결일 뿐만 아니라 각 교전국이 “자신의” 프롤레타리아트를 굴복시키기 위해 적대국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힘 자체는 결국 프롤레타리아트 혹은 프롤레타리아트화된 대중으로 만들어진다.따라서 전쟁의 고통을 격화시킬 뿐만 아니라 갈등의 객관적, 주관적 여건을 변형시키게 될 전쟁의 지속기간이 결정적 요인이 된다. ... [336]일단 전쟁에 연루되면 대중은 조작가능한 단순한 “대상”이 되는 동시에 장기적으로 통제불가능한 힘이 된다는 이중적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336/216]사회주의는 전쟁을 막을 수 없었는데 전쟁은 어떻게 사회주의를 “생산”할 수 있을까, 라는 골치아픈 질문으로 되돌아가면, 우리는 이 질문의 답변이 열려 있음을 알게 된다. 경제의 사회화, 그리고 전방과 후방에서 대중이 일으킬 잠재적 반란은 단지 혁명적 상황을 규정할 뿐이다. 이 상황은 실제적인 단절 쪽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바로 여기서 전쟁이 역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해진다. 전쟁이 그 대립물로부터 어떤 유형의 “계급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알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내적 분할을 분석하는 동시에 그 분할이 발전하는 방식을 따로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 [338/218]결국 전쟁이 혁명적 상황이라는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킨 듯하다. 이제 혁명적 상황이란 더 이상 (전쟁이 그 징후인) 자본주의의 “성숙” 같은 개념과 연관된 가정이 아니라, (특히 러시아의 경우처럼) “선진국들”과 “후진국들”이 공존하며 상호침투하는 변별적인 세계구조에 전쟁이 끼치는 효과 자체를 분석해서 나오는 결과가 된 것이다.

11. 제국주의에서 전지구화까지 - 조르주 라비카

[353/228]아직도 우리에게는 현실을 파악하는 능력에 있어 그 효과를 상실하지 않는 몇 가지 용어들이 있다. 제국주의는 바로 이런 용어들 중 하나로[354] 수많은 개념들의 성좌를 계속해서 지배해 왔으며, 자본주의와 착취, 소유, 계급들과 계급투쟁, 사회민주주의와 혁명적 이행이라는 개념들은 그 속에서 완전한 의미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355/229]다시 말해 유럽과 일본은 지배 권력인 미국에 대해 하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오늘날은 완전히 속국화되어 하도급의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지구화는 오직 하나, 미국화Americanization - 또는 미합중국화 - 와 동일한 것이라고 불리는 것이 정확하다.[356]

[360/232]“전지구화”의 핵심 단계라고 알고 있는 투기자본과 관련된 사례 하나만을 들어보기로 하자. [/233]브레튼 우즈 협정의 포기와 금본위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통화제도의 종식 이후로, 이미 불안한 것으로 여겨졌던 1969년의 500억 유로달러는 8조 유로 달러로 치솟았는데, 그럼에도 이는 단지 “세계 금융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예전의 “새로운 제국주의”에서는 알지 못했던 요소들을, 당시에는 그저 존재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몇몇 사례에서 그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던 그런 요소들을 최종적으로 고려해 본다면, 국제적인 통화 기구들이 조절하는 부채의 압력은 이제 대륙 하나(아프리카)를 통째로 파멸로 이끌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며, 우리는 이런 압력을 핵무기의 위험이나 환경파괴, 식수의 고갈위험이나, 장기 매매와 대규모 아동매춘으로까지 확장되는 상품화 같은 것처럼 지니고 있다.

[364]모든 국제주의자internationalist들이 꿈꿔온 진정한 의미의 전지구화는 여전히 쟁취해야 할 어떤 것으로 남아 있다. 제국주의의 비밀을 파헤친 로자 룩셈부르크의 다음과 같은 판단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자본주의는 전지구화를 성취할 수 없다. 내적 모순들이 이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자본주의를 삼켜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지구화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회주의뿐이다.

주 52)“(자본주의는) 보편이 되려고 몸부림침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이런 그 자신의 경향성 때문에 붕괴되고 만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내재적으로 생산의 보편적 형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자신의 역사 속에서, 자본주의는 자체로 모순적이며, 그래서 그것의 축적 운동은 갈등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동시에 이 갈등을 악화시킨다. 발전의 특정한 단계에서는 사회주의의 원칙들을 적용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의 목표는 축적이 아니라 전 세계의 생산력을 발전시킴으로써 고통 받는 인류의 바람들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바로 그 자신의 본질에서 조화롭고 보편적인 경제 시스템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Rosa Luxemburg, The Accumulation of Capital(London: Routledge, 1963), 467.

12. 레닌과 ‘지배민족’[Herrvolk] 민주주의 - 도메니코 로쉬르도

[375/242]대도시에서의 법치는 식민지에서의 계엄 상태, 경찰과 관료조직의 폭력 및 자의성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결국 미국 역사에서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일이 유럽의 역사에서도 있었다. 다만 유럽의 경우엔 식민지 사람들이 대도시가 아니라 대양 건너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덜 또렷하게 보였을 뿐이다.

[379/245]국제적인 언론에는 이스라엘을 찬양하거나, 적어도 정당화하려는 논조와 기사들로 넘쳐난다. 어쨌든, 중동에서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있고 민주적인 정치체제가 작동하는 유일한 나라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거시적인 디테일은 은폐된다. 법과 민주적인 보증에 의한 정부는 오직 주인종족을 위해서만 유효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살던 땅에서 쫓겨날 수 있으며, 재판 없이 체포되고 투옥되고 고문받고 죽을 수 있다. 하여튼 군사정권 아래서 매일같이 인간의 존엄성이 모욕당하고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정치적이기보다는 인식론적인 대안 앞에 서 있다.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약탈할 이스라엘의 권리, 식민주의적이거나 반(半)식민주의적인 억압을 가할 권리를 용일할 때, 우리는 이스라엘의 “민주주의”에 의지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지배와 약탈, 억압의 현실로부터 이스라엘의 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른 특징을 고려해야 하는가?

[380/246]봉쇄(embargo)는 강제수용소의 포스트모던식 버전이다. 전지구화의 시대엔, 더 이상 사람들을 쫓아내야 할 어떤 필요도 없다. 이라크에서처럼, 약간의 식료품과 의약품의 유입을 차단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약간의 “지능폭격”만으로 상수도관, 하수 시스템, 공중위생 기간시설을 파괴하는데 성공할 수 있다.

[382/248]“새로운 국제질서”의 윤곽이 분명하게 떠오르고 있다. 한편에서는 “국제적인 경찰활동”에 나서야 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 나라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 불법적인 행동을 때려눕혀야 할 “깡패국가”, 불량국가, 더 정확히는 비국가가 있다. 여기서 환기되는 세계국가의 종류에 관해서, 서구는 배제당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정당한 폭력의 독점을 완성한다.[383] 그리고 이는 탈해방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PART FOUR 정치와 그 주체

13. 레닌과 정당, 1902~17년 11월 - 실뱅 라자뤼스

[392/255]20세기 정치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조직이다. 조직적이지 않은 정치활동은 없으며, 실제로 정당이라는 단어가 이를 잘 보여준다. / 1871년에 구성되었던 파리코뮌을 통해 알 수 있듯이, 19세기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지형이 펼쳐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 활동의 기본은 봉기(insurrection)였다. ... [/256]이 과정에서 정당들의 계급관계이데올로기적, 강령적으로 바뀌었다. 계급문제는 더 이상 당원들의 사회적 출신 성분에 따라 판단되지 않았다. 당이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강령에 따라 모든 사회계급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393]19세기 말에 정치를 담는 유일한 그릇이었던 계급이라는 범주가 몰락했다. 20세기 말에는 국가 정당이라는 정당형태가 몰락했다. / [/257]그렇게 해서 이제 우리는 정당 없는 정치 활동(politics without party)이라는 명제를 부여잡게 되었다. 이 메커니즘은 권력과 국가를 겨냥하지 않으며 인민을 지지하고 편든다(on the side of the people). 국가를 규정할 능력이 있지만, 국가의 주변에서 입장을 취하면서도 외부에 존재하고, 동시에 국가와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Hence we have these theses on a politics without party, and a mechanism not aiming at power and the state but on the side of the people, though still capable of prescribing for the state, that is, taking a position in its vicinity while remaining external and radically heterogeneous to it. 그러므로 여전히 국가에 대해 이러저러한 처방을 내릴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주제들을 정당 없는 정치의 측면과 권력과 국가를 겨냥하지 않고 인민의 편에 서기를 원하는 어떤 메카니즘에서 취한다. 다시 말해 국가에 대해 외재적이고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남는 반면, 그 부근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395/258]『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현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자생적으로 출현한다는 『공산당 선언』(1848)의 명제와 결별했다. [/259]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존재하는 곳에 공산주의자가 존재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에 반대했다.[396] 레닌은 자생적인 사회민주주의 (곧 혁명적) 의식이 말도 안 되는 사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런 반대 입장을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397/260]1917년 2월에서 10월에 이르는 시기의 저술을 살펴보면 레닌이 정치와 역사를 명백히 분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역사는 명백했고(전쟁분석), 정치는 불투명했다(1917년 3월에 레닌은 발동이 걸린 혁명의 장래가 미결정 상태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아무도 모르고, 알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역사와 정치가 그렇게 위상이 달라졌다. ... 이 단계에서 정치는 철학과 그리하는 것처럼 역사와 끝없이 토론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둘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정치는 내재적인 자체 사상을 가져야만 했다. 정치가 존재하려면 그래야 했다. 둘 사이의 분리가 요구된 시점도 바로 그때였다.

[398/261]그렇게 정당의 정치적 유효성이 1917년 11월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그때부터 우리는 혁명이 키워드로 등장하는 정치학의 역사주의적 문제 상황에 진입하게 된다. 레닌주의는 그렇게 최종적으로 두 가지 논점을 제기했다. 정당형식의 정치적 소멸과 혁명이란 범주의 진부화(the political lapsing of the party form and the obsolescence of the category of revolution).

[399/291]두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첫째 나는 국가와 정치를 구별했고, 그에 따라 국가의 구조가 바뀌는 것이라는 혁명의 개념을 폐기했다. [/262]정치 활동의 방식, 그러니까 일련의 연속적 상황에 관한 이론 속에서는 결국 “혁명”이 의식과 주체성을 가리키는 용어일 때에만 역명을 언급할 수 있다. 혁명적 방식 말이다. / 둘째, 그 용어는 일반적으로 역사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나한테 “혁명”은 역설적이게도 정치 개념과 동일하지 않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여기서의 논쟁이 정치와 혁명의 관계뿐만 아니라 둘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아는 것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402/264]이론적이고, 정치적이며, 개인적인 당대의 유일한 과제는 국가와 역사주의가 불필요하게 정치를 포박한 상황을 풀고, 혁명의 개념을 해방하는 것이다.

[404/266]적어도 프랑스에서는 “혁명”은 1968년에 쓸모없는 개념이 되어버렸다. 바로 그때 혁명이 핵심어였음에도 불구하고 봉기나 국가 권력에 대한 도전과 의문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가에 의문을 더 이상 제기하지 않은 것은 국가가 더 이상 공통의 유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405] ... 계급주의는 1968년에 사망했다. ... 다시 말해 계급의 견지에서 정치에 접근하는 태도는, “계급”과 “계급정당”이 국가와 관련해 구체적인 계획을 전혀 제출하지 못하고 외부적이거나 내부적인 사건을 목표로 삼지도 못하면서 쇠퇴했다. ... 국가는 중요한 문제였지만, 더 이상 정치의 핵심이 아니었다.

[405/266]첫째, “혁명들”(revolutions)은 정치와 동일시된다. 놀라운 창의력과 독창성이야말로 모든 혁명의 특징이다.("revolutions"are identified by politics, and each one by a remarkable inventiveness. “혁명들”은 정치와 동일시된다. 그리고 각각의 혁명은 놀라운 창의성과 동일시된다.) 혁명들(Revolutions)은 복수로 존재하지 않는다. “혁명”이 보통의 사건으로서 정부와 국가에 일어나는 거대한 변화를 의미한다는 부적당한 개념에서가 아니라면 말이다. 오히려 모든 혁명은 아주 구체적이고 독특한 특성을 갖는 특이성의 무대가 될 것이다.(but each time with singularities of an extremely specific character. 오히려 각각의 혁명의 시간은 극적으로 특유한 특성을 가지는 특이성들을 의미한다.) 러시아 혁명의 경우는 『무엇을 할 것인가』, “4월 테제,” 봉기 결정, 직업 혁명가들, 단독 강화가 발명이자 발견이었다. 우리는 확실히 여기서 단절(break)을 발견한다. 그러나 노력과 활동의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 둘째 “혁명”이 정치적 역량을 낳는다는 엄격한 의미를 적용할 경우에는 단 한 가지 사건만이 존재한다. 프랑스 혁명이다. 다시 말해 프랑스 혁명은 정치적 주체성에 관한 사상이 만개한 유일한 혁명이었다. 반면 1917년 10월은 사상이 범주화된 혁명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전락한 혁명이었다. ... [407/268]셋째, 정치는 역사적 사실에 앞서고 그것을 만들어 내며, 운반하고 지원한다. 우리는 역사주의를 끝낼 필요성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먼저 그 과정을 재개봉해서 (혁명, 정당, 국가 등의) 술어를 재조사하고, 우리의 이름으로 선언해야만 한다. 역사주의는 더 이상 필요가 없고, 그 확인과 종결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14. 정확함의 사도 레닌, 혹은 재활용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 장 자크 르세르클

[409/269]레닌은 재활용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의 전형, 더 정확하게는 근본적으로 만회하기가 불가능한 마르크스주의(a form of Marxism that is radically irrecuperable)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413/271]언어철학에서도 레닌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곧 이 점에 대해서 다룰 텐데 레닌은 마르크스주의 언어철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어렴풋이 보여준다. 둘째 레닌이 체화하고 있는 덕목은 마르크스주의가 (완전히 행방불명인 게 아니라면) 기껏해야 주변부에만 머물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적 국면에서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413/271]레닌의 첫 번째 덕목은 엄격함(hardness)이다. 레닌은 간단없고 단호한 논객이다. 레닌에게는 어딘가 냉혹한 면이 있는데, 그의 특별한 텍스트들이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공세를 퍼부어야할 때 레닌은 주저하지 않는다. 괴팍함을 타고나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표현대로 전쟁 중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 이것이야말로 현재의 정세,즉 마르크스주의가 묽게 희석된 채로 혹은 소심하게 재활용되고(watered-down or faint-hearted) 있는 정세(이런 정세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의 나약함을 강함으로 착각한다)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다.[414] 공세적인 마르크스주의(Marxism on the offensive)(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레닌주의의 원칙은 이렇다. 늘 공세를 취하라!), 지배 이데올로기와 그것의 갖가지 위선을 폭로할 수 있고, 기꺼이 폭로하는 마르크스주의 ... 를 말이다. ... [/272]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끊임없이 주장했고, 프티부르주아의 도덕을 동정하지 않았다. / 레닌의 두 번째 덕목은 확고함(firmness)이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전략적 힘을 정확히 이해했다. ... 다시 말해서 교조주의자 레닌은 자신이 확고한 이론적 토대 위에 서 있어야 함을 결코 잊지 않았다. 여기서 레닌주의의 또 다른 원칙이 나온다. 혁명이론 없이 혁명운동은 없다. ... /레닌은 세밀함(subtlety)을 세 번째 덕목으로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 가장 약한 고리를 공격하라는 이론이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슬로건 등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에 기여한 주요 공로도 바로 이런 부분에 존재한다.

[415/272]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와 이에 따른 마르크스주의의 후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가 언어의 문제를 주제로 삼거나 언어이론을 제시한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이데올로기 투쟁이 가장 중요해진 이 시대에 무장해제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 언어철학과 관련해 보면, 재활용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자 레닌의 진면목은 슬로건 이론을 통해서 드러난다.

[417/273]이 구체적인 힘의 중심성은 마르크스주의 언어철학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지에 관해서 무척 중요하다. ... {“On Slogans”의} [/274]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의미의 개념은 발화가 이뤄지는 정세와 연결되어 있다. 의미는 힘 관계(rapport de force)의 결과물, 즉 상호협력적인 언어게임이 아니라 정치적인 투쟁의 결과물이다(여기에는 일정한 규칙이 없다. 혹은 정세가 변할 때마다 재검토되어야 하는 끊임없이 변해가는 규칙이 있을 뿐이다). 둘째, 이렇게 보면 결국 발화는 정세의 사태에 대한 기술(記述)이 아니라 개입(intervention)이 된다. 발화는 발화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의 관계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변형시키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슬로건의 중요성을 이해하게 된다. ... 셋째, 올바른 슬로건은 정확한 슬로건, 정세 속에서 작동하며 정세와 일치하는 슬로건을 의미한다. 정세의 적합한 계기를 명명하는 슬로건과 슬로건을 의미있게 해주는 정세는 서로를 순환적으로 반영한다.[418] 이와 같은 의미의 정세성(conjuncturality)은 정확함(justness)이라는 개념으로 파악된다. 요컨대 올바른 슬로건은 진실은 아니지만 정확하다. 넷째, 그러나 이 팸플릿에서 레닌은 인민이 “진실을 들어야만 할” 때, 즉 당면 정세에서 국가의 권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게 누구인지(계급의 대표자이든, 한 계급의 하위집단이든)를 인민이 알아야 한다고 말할 때 진실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진실은 슬로건의 정확함에 따라 엄격하게 좌우된다. 진실은 정확함의 결과, 그도 아니면 그 영향이라는 것이다. 발화-행위 이론의 개념으로 설명하면, 발화수반적 정확함(illocutionary justness)이 발화효과적 진실perlocutionary truth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만들어 내는 의미의 효능을 보장해 주는 것이 바로 진실과 정확함의 결합(combination of truth and justness)이다. 마지막은, 이 팸플릿이 주장하는 것은 담론, 즉 개입으로서의 담론이라는 정치적 개념이다. 지극히 정치적으로 도덕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 팸플릿은 프티부르주아지의 도덕성 운운하는 것은 환상이며 “사태의 본질”(the substance of the situation) 운운하는 것은 상황을 호도할 뿐이라고 부장한다. ... 이런 질문은 대중이 혁명에 배반당해 왔음을 대중에게 알려줬다. 정치와 도덕의 대립은 구체와 추상의 대립이다. 여기서 레닌주의의 또 다른 원칙이 나온다. 혁명의 시기에 혁명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극악하고 위험한 죄는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것(the substitution of the abstract for the concrete)이다.

[419/275]『천 개의 고원』에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레닌의 슬로건 이론을 해석한 구절은 잘 알려져 있다. ... 슬로건의 힘은 수행적(performative)일 뿐만 아니라 슬로건 자체가 호명하는 계급을 탄생시킬 수 있을 만큼 구성적(constitutive)이라는 것이다. ... 이들이 말하는 언어학적 결합체nexus, 기호체계(regime of signs), 기호계적 기계(semiotic machine)등은 발화(utterance)(이 경우에는 슬로건), 함축적인 전제(슬로건이 노리는 효과를 수행하는 행위), (수행성이나 슬로건이 명명하는 힘에 영향을 받는) 비물체적 변형의 혼합물이다. 슬로건이 핵심부분을 이루는 언표행위의 아상블라주assemblage에 존재하는 내적 변수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420/276]가타리의 첫 번째 에세이 모음집 『정신분석과 횡단성』의 서문으로 기고한 이 텍스트에서 들뢰즈는 자신이 ‘레닌주의적 단절’(Leninist break)이라고 부른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 유일한 문제는 이 승리의 가능성, 혁명으로 이어진 이 전환이 혁명과 당의 주체를 부르주아 국가와 경쟁하는, 따라서 그 모습을 본뜬 [또 하나의] 국가장치로 만들어 버리는 대가를 치르고서야 이뤄졌다는 것이다. ... 들뢰즈는 이 문제, 역병처럼 늘 공산주의 운동을 따라다녔던 (지금도 따라다니고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한다. 가타리가 제시했듯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할) 종속집단groupe assujetti과 (언젠가는 스스로 소멸되어야 함을 늘 주장하는) 주체 집단groupe sujet을 구분함으로써 말이다. / 나는 들뢰즈의 이 해법이 정치적으로 타당할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이 해법은 뭔가 도움이 되기에는 소비에트 권력 초기에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보인 편향과 지나치게 비슷하다(레닌은 팸플릿이나 글을 쓸 때마다 이런 편향을 격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나는 정치와 언어가 연결되어 있으며, 언어가 혁명적 사회변혁에 뭔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들뢰즈의 지적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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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컴맹 2015-05-28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식 남겨둡ㄴ다 두고 읽어봐얄텐데 자신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