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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킹
최윤 지음 / 열림원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이 이 소설을 쓰게 했다. 황량한 시간을 가로질렀기 때문이다.>(최윤, 작가 후기). 그러나, 필연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죽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죽음을 조장한 황량한 시간이야말로 아름다움을 있게 만든다. 크로노스가 잘라낸 우라노스의 성기는 생성과 죽음을 반복하는 시간성이 어머니의 자궁을 빌려 영원한 하늘에 대해 행한 복수였다. 키프로스섬에 닿기 까지 무수한 포말들이 애도한 것은 그래서, 포악한 현실, 그 권위의 팔루스를 향한 것이다. 거기서 탄생한 아름다움은 그 자신의 생존의 공허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 현실 없는 꿈이 부유하는 세계는 달리 말해, 신화 자체이며, 그것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포악한 현실 자체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날것의 현실이 포악하다 하지만 추구할 만한 가치를 상실하고, 그것이 신화 속에서 또다른 '현실'의 이름으로 재생산될 때다. 현실의 포악성은 '투쟁'의 진실에 놓여 있다. 투쟁할 만하지 않은, 그래서 전의를 상실한 현실만큼 비루한 것도 없다. 그것이 신화 속에서 재생산된다면, 그 또한 비루함의 반영일 뿐일 것이다.
작가 최윤이 소설을 통해 시선을 던지는 지점은 이곳이다. 작가가 말하는 <황량한 시간>이란 그래서, 그렇게 단순하게 신화적 상상력으로 치환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황량한 시간을 가로질>러 다다른 곳이 키프로스섬이라면, 마땅히 아프로디테는 제우스를 분별없는 사랑에 빠지게 하고, 아레스를 그녀의 침실로 끌어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신화적 상상력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마땅히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최윤의 현실은 비루하지 않으며, 따라서 신화는 어둠을 가로질러 날카롭게 공명하는 북가죽처럼 그 팽팽한 장력을 잃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사랑에서부터다. 육체와 정신이 함께 단련되는 것은 진도 선도 아니고 미를 통해서라는 것이 작가가 처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름다움 속에서 가능한 것, 지니는 그렇게 사랑을 열락(悅樂)의 한 가운데서 받아들인다.
그녀는 E의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몸을 가능한 한 팔을 넓게 벌려 안았다. … 한순간 그녀를 가두고 있는 천의 끈이 툭 하고 끊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더 이상 E의 안내가 필요 없었다. 그녀는 E에게 끝도 없이 따뜻한 위무의 말을 속삭이듯 그녀의 몸을 춤추게 했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깊은 희열 속에 모든 사건, 모든 기억이 하얗게 산화해 흔적도 없이 우주 저 멀리로 날아가버릴 때까지 그들의 몸은 단 하나의 리듬으로 춤을 추었다.(143-4)
우리는 이 아름다운 구절에서 두 사람의 육체와 함께 위악적이고 포악한 현실의 한쪽 벼랑에서 가뭇없이 뛰어내리는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우리는 알 수 있다. 최윤의 아프로디테, 지니가 지니고 있는 그 기억, <가장 깊은 희열 속>에서만 <하얗게 산화>할 수 있는 그 기억의 끈질김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비애를 품고 있다. 그리고, 말이 없다. 말이 없어진 그날, 지니는 현실로 향한 출구마저 봉쇄당한다.
어쩌면 그날의 기억은 늘 그녀의 뇌수 한구석에 찰랑이되 앞으로 나가지 않는 물음표 모양의 거품을 붙이고 하얀 부표처럼 떠 있었을 수도 있다. 마침내 신체의 일부가 되어 따로 상기되기에는 너무 익숙한 어떤 기억 중의 하나로. 그러다가 서서히 물음표는 물에 쓸려 없어진다. 그 기억이 부표로 떠 있어 그녀는 그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부표 밖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다. 그녀로 하여금 아주 일찍이 더 이상 세상에서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 밤, 그날로 그녀는 말을 잊었다.(100)
세상은 말이 필요없다. 그녀의 오빠와 언니가 그저 사악한 쾌락을 위해 자고 있던 그녀의 목을 번갈아 눌렀던 기억을 안겨준 세상이다. 세상과의 소통에 대한 체념은 말을 탈취당한 그 순간보다 이르게 온다. 저항이 필요없어지는 것도 이 순간일 것이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그 사건 자체가 세상을 끔찍한 것으로 만들었다. 아프로디테의 열락은 떠나온 현실의 기억으로 점철된다. 절정은 그 까무룩한 순간에 꺽이고 말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지니는 길을 떠난다. 열락과 기쁨이 없는 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녀가 그것을 안 것은 어느 순간, 그녀가 여행해 온 곳, 바다의 짠 감촉을 알고 나서다.
그녀는 그날 이후 조금씩 여행을 준비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바닷속 촬영이 있던 그날 … 그러나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것은 단 한 번의 하강, 기온과 색채와 물의 촉감이 그녀의 몸 속에 만들어내던 무한한 안도감, 아마도 우뭇가사리의 뱃속으로 하강하듯이 거의 완벽에 가까운 믿음으로 바닷속으로 들어간 순간 떠남을 위한 그녀의 여행 계획은 이미 무르익었다고 보아도 좋다. 그녀가 감은 눈을 떴을 때, 그녀 앞에는 옅은 푸른색으로 투명하게 다가오는 물의 세상이 있었을 뿐이다.(119)
작가의 신화적 상상력이 작품에 무연하고도 확연히 겹쳐지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지니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이미 예감한다. 그러면, 지니가 떠나온 위악한 그 현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남겨진 상어와 우뭇가사리와 불가사리, 그리고 소라는 지니 없는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 지니의 광고 수입에 기생했던 그들, 가해자이자 착취자인 그들은 서서히 파멸하는 쪽을 택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지니로 인해 파멸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지니를 이용했던 것은 그들이었고, 그런 만큼 그들은 우월감과 죄의식 사이를 요동치며, 삶의 기반을 상실해가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으려 할 뿐이다. 이들이 발딛고 있는 현실은 , 모든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 상실된 곳이며, 그래서, 지니를 애초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보다 아름다운 지니, 그들보다 막대한 힘을 가지고 그들을 제압하는 지니에게 그들은 폭력과 착취로 응답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우월감과 죄의식은 치유할 수 없을 정도의 나르시시즘을 반영할 뿐인 것이다. 따라서, 지니는 권위적인 제우스와 폭력적인 헤페스투스에게 책임이 없다. 이들은 모두 그날의 기억을 잊고 <씹어 삼키려>고만 할 뿐이다. 이들에게도 그 기억은 트라우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춤을 추지 않는, 긍정되지 않는 상처는 반드시 분열되고, 파괴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지니가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은 처음엔 스스로를 위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상처를 위무하는 춤은 공명을 만든다. 어떤 허위도 가식도 없이 펼쳐지는 상처의 춤, 고통의 제전, 그것은 타자의 상처를 대신한다기 보다, 그 상처를 그대로 드러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춤을 둘러싼 사람들의 슬픔은 거기서 유래한다. 지니는 그녀의 상처를 통해 타자의 상처를 드러낸다. 그것을 희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빛나게 하는 힘이 거기 있다. 아름다움이 진실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어둠을 밝은 빛 속에 드러내는 것이며, 어둠을 밝게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작가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진실이 어둡다는 것을 부정하는 자는 애써 그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좋은 게 좋다는 것>이며, 굳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거추장스럽고 품이 들어가는, 그렇다고 별다른 대가도 돌아오지 않는 그런 귀찮은 일>(195: 불가사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아프로디테가 알지 못한 지니의 비극이 있다. 해변에 다다른 지니, 광장 주변을 맴도는 지니, 춤을 추고 자궁과 같은 동굴에서 잠드는 지니는 영원히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녀의 상처가 만들어낸 춤이 이미 사람들을 사로잡았으며, 많은 이들이 그녀를 보기를 원하고, 궁금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결정적으로 어린 나이에 사생아를 낳아 들쳐업고 다니는 해변가의 작은 소녀를 버리지 못한다. 연민. 인간과 세상에 대한 연민이 그녀를 잡아끈다. 소설의 마지막을 묘사하는 작가의 감성은 그래서 현실과 신화 사이에서 미세하게 진동한다.
바람과 바다를 동시에 가지기 위해서 그녀는 여기 누워 있다. 늘 움직이고 그 움직임은 세상의 어느 움직임보다도 변화무쌍하다. 그 움직임이 있는 한 어찌 희망하지 않을 수 있으랴./ 바람은 가끔 생명의 자연스런 부패에서 그녀를 보호하려는 듯 건조하게 불어와 주위를 배회하고, 자라기를 멈춘 채 풍성하게 펼쳐진 머리카락을 날리게 하며, 강인하게 굳어진 그녀의 몸의 이곳저곳을 실로폰처럼 두드리다가, 마침내 그녀가 단단한 세계에서 유연한 세계로, 형체에서 추상으로, 유채색에서 무채색으로 그렇게 멀리, 마침내 액체나 기체 혹은 그 어느 것도 아닌 무형으로 세상 깊이 스며드는 일을 돕는다.(278-9)
바람과 바다. 바람은 뭍에서 불어온다. 바다는 그녀가 돌아갈 곳이다. 그 사이에서 죽음을 맞는 지니. 바다가 아니라, 흙의 원질로 돌아가는 아프로디테는 여기서 온전히 현실의 회귀점이며, 동시에 신화적 상상력의 곶(串)이다. 작가의 <아름다움>이란 그래서, 결코 현실을 저버릴 수 없다. 순수한 신화도 순수한 현실도 불가능하며, 그 양자택일은 파멸일 뿐이다. 현실과 신화에 대한 복합적인 감수성이란 그렇듯 서로가 서로를 침식하고 때로 추동하며, 심연으로 떨어트리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레스(솔배감펭)는 여신의 죽음이 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편안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순수한 신화를 쫓던 소라는 경계에 어정쩡하게 선 여신에 당황해하고, 끝내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과 신화가 만나는 곳, 땅에 발 딛고 선다는 것은 작가의 숙명이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의 작가 최윤이 그 숙명을 신화를 통해 엮어낼 때,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는 작가 자신의 말처럼 <아름다움>이다. 여기 우리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 아름다움은 지니가 펼쳐내는 그 고통의 춤, '어두운 진실의 아름다움'일 것이라고 말이다. 허위의식 없는 그 아름다움의 열망은 바로 그 춤을 통해 공명될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