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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F. C. 코플스턴 지음, 임재진 옮김 / 중원문화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코플스톤 철학사 시리즈를 일별하다 보면 그 '온건함'에 경의를 표할 때가 많다. 이건 비꼬는 말이 아니다. 철학사를 그토록 공평무사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많은 문헌에 대한 꼼꼼한 독해, 그리고 텍스트들의 상호성을 감안하는 종합적 정신의 노고가 필요하다. 논의의 말미에 자신의 의견을 적어넣는 것은 아마도 훌륭한 미술작품 귀퉁이에 적어 놓는 사인과도 같을 것이다. 그렇다고 코플스톤이 이를 통해 해당 시기의 철학사가 자신의 해석과정에서 어떤 식의 독특한 변형을 이루었다고 보지도 않는다.
이 책은 코플스톤의 A History of Philosophy-From the French Enlightent to Kant 중 '칸트' 부분의 번역이다. 이 부분을 따로 번역하기로 한 '중원문화'의 선택은 온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책은 코플스톤의 다른 철학사와는 달리 저자 자신의 관점이 보다 선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코플스톤은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을 대폭 수용하면서, 기존의 존재론적 편향을 교정하고자 하는 자신의 기획을 책 말미에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물론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자들이 칸트를 나름대로 전용하면서 물자체를 어떤 경험론적 대상에 가까운, '존재자'로 만들고, '이념'을 훼손했다고 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칸트에 관한 국내저서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은 아마도 백종현 선생의 [존재와 진리]일 것이다. 이 텍스트와 코플스톤의 논의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 이 텍스트에서 백종현은 코플스톤과는 달리 칸트의 관념론을 실재론 쪽으로 끌어당겨 놓기 때문이다. 물론 그 미묘한 논의전개 안에서 이 둘의 일치점이 더 많이 발견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관건적인 부분에서만큼은 차이를 형성한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백종현은 구성주의를 거부하지만 코플스톤은 칸트의 인식론을 '경험구성론'으로 보고 있다.
코플스톤이 이 책에서 특히 공을 들이는 부분은 아마도 [유작]에 관한 해석이 담긴 마지막 장일 것이다. 신학적 기반을 가진 저자가 이 부분을 칸트의 종교철학과 관련하여 논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저자의 관심사와는 별개로 이 부분은 [유작]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들을 위한 짧지만 훌륭한 가이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선험철학은 관념론이다. 주관이 자기자신을 구성하는 만큼. XXI, p. 85 [347]칸트는 물자체가 현존하는 대상으로서는 주어지지 않고 또 실제로 주어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주어질 수는 없으되 사유되어야 하는 (...) 가상체 혹은 필연적인 가상체"[XXII, p. 23]라고 말한다. 물자체의 관념은 현상의 관념에 상관한다. 사실 칸트는 한 번인가 두 번인가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실재론적인 방향에 깊이 들어간 것 같다. "우리가 세계를 현상으로 간주한다면 이것은 바로 현상이 아닌 어떤 것의 현존을 입증하는 셈이다"[XXI, p. 440]. [348]칸트는 물자체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앞뒤가 맞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서 생각하는 사람들의 반대가 비판철학의 틀 안에서 논박될 수 있다는 것을 [유작]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칸트는 [유작]에서 자신에 대한 비판가들의 견해를 논박하고 피히테와 다른 사람들의 철학발전에서 주장되었던 모든것을 자신의 철학이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신의 입장을 재구성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의 체계를 순수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로 변형시키려 했다는 것은 논의의 여기자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하는 것과, 칸트가 비판서들의 본질을 이룬 일반적인 관점을 분명하게 거부했거나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유작]은 칸트주의의 경향이, 존재를 사유에 종속시키는 혹은 그것들을 궁극적으로 동일시하는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로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칸트 자신이 이러한 결정적인 단계까지 밟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경향은, 비록 그의 체게에서 실재론적인 요소 - 즉 피히테는 그것을 `독단론`의 요소라고 부른다 - 를 제거해야 한다는 피히테의 주장에 칸트가 동조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의 저작들에 암암리에 내포되어 있다. 어쨌든 칸트의 철학을 그것에 뒤이은 사변적 관념론과의 관계 속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우리가 칸트의 철학을 그 자체로서 이해할 때, 우리는 그것 안에서 필연성과 자유라는 두 영역의 조화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본래의 시도, 다시 말해서 어느 한 편을 다른 편에로 환원시키지 않고 인간의 도덕적 의식 안에서 이들의 접합점을 발견함으로서 그것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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