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와 관련자료 정리]
한국어판 서문 : 아직 뵙지 못한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 5
서문 : 세계민중 도시로의 초대 13
[29]미국의 보수적 이데올로기는 결국 ‘내륙적 이데올로기’로서 ‘의사(疑似)적 자연생활’ 혹은 ‘교외적’ 생활 형태의 고수를 목적으로 하는 것 같다. 미국의 보수주의는 요한 묵시록에 근거하여 대도시를 종말론적이며 사악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오늘날 현실에서 상실된 개척자 시대의 자연과의 접촉, 자연과 직접적으로 격투하는 노동을 신성화한다. 여기에서 이 결정적인 ‘상실’을 임시방편적으로 편리하게 대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쾌적한 ‘교외생활’이다. 이러한 ‘교외생활’을 방어하는 논점에 이르러 비로소 기독교 우파와 석유이권주의자들의 이해관계가 결합한다.
☞기독교 우파, 석유 이권, 부시 정부와 관련 읽을만한 포스팅:
http://blog.naver.com/mystarway?Redirect=Log&logNo=10132132475,
http://www.cyworld.com/rivertree1/2412283,
http://blog.naver.com/qnrkrk?Redirect=Log&logNo=70002446609
☞『용서받지 못할 자』J. H. 헤스필드 지음, 정지인 역, 시학사 2002, p. 110: 새 법으로 큰 혜택을 얻게 되는 석유사업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원 법안의 대표적인 지지자는 미들랜드의 공화당 의원이며 부시와 가장 가까운 웨스트 텍사스 고향 친구인 탐 크래딕이다. 크래딕의 재정공개신고서를 보면 면세의 혜택을 받은 유정들 가운데 가장 큰 세 유정에서 그가 챙기는 연간 사용료 수입은 11.00다러에서 34,997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면세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민주당의 케빈 베일리 의원은 기자들에게 부시의 동기는 대통령 출마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비난했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주지사 부시는 공화당 내의 특정한 이익집단을 만족시켜야만 했고 석유이권이야말로 공화당원들이 갖고 있는 강력한 이권이다.”
[33]9/11은 틀림없는 카타스트로피였다. 통상적인 용어에 따르면 9/11은 정통적인 의미에서의 ‘파국’(카타스트로피)으로 불러져야 할 것이다. (...) 수직으로 기립하던 건축운동을 단숨에 ‘하나의 사건을 통해 부정’하였다. 즉, 마천루를 만들어 가던 건축방식의 본질이 마천루의 붕괴를 통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 안토니오 네그리, 『다중과 제국』, 갈무리, 2011, pp. 79-80, 다음 구절도 참조:
“그것[9.11 테러]은 실체론적 주권개념이 부적절함을 드러냈다. 주권은 자립적인 실체가 아니며 오히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관계이다. 주권적 권력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그것[80]은 끊임없이 피지배자에 대한 헤게모니를 공고히 하고 재생산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복종하는 자가 명령하는 자만큼이나 주권의 기능과 주권의 이념 자체에서 본질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래서 실체론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식의 주권의 배타적 원천은 존재하지 않는다.
(...) 미국 정부는 주권의 자립적 원천이 아니라 주권의 현재 형태를 정의하는 전지구적 관계들의 체제에 통합되어 있음을 9.11이 결정적으로 보여줬다고 할 수도 있다.“
[R-Commentary]관계론적 실체개념으로 ‘주권’을 이해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실체를 양태들의 상호성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실체의 표현으로서 양태들의 활력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이론적 전략이기도 하다.
[34]이 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점은
‘지금 현재 여기에 있는 어떤 거대도시(megapolis)’가 하나의 시공간을 대표하는 ‘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도시에는 다양한 차원의 시공간이 공존하며, 그 시공간조차도 일부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도시의 ‘위대함’인 것이다. 본 기획에서 주역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잡다한 민중’이며, 또한 우리들이 살고, 투쟁하며, 생산하는 ‘미시적인 시공간’이다. 이를 ‘일상성’이라는 개념으로 환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민중의 다양한 일상적인 시공간은 개발의 시공간보다 훨씬 짧고 규모도 작다. 그러나 이는 다양한 미립자적 흐름을 조직할 수도 있으며, 신체와 정동을 생산할 때에는 ‘개발’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개발을 통해 시공간이 일단 제도화되어 버리면 민중의 시공간은 틀림없이 운명적으로 그것에 의해 규정된다. 그렇지만 민중의 실천은 독립적이고 훨씬 더 미시적인 차원에서 개발이 의도했던 방향들을 어긋나게 하고 흐름을 바꿔 최종적으로는 개발 자체를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잡다한 민중’이 본래 가지고 있는 ‘밀집’(congestion)과 ‘근접성’(propinquity)이야말로 뉴욕이 지닌 힘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밀집과 근접성에 바탕을 둔 ‘군거공간’인 도시로부터 모든 것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나온 부와 삶의 양식은 자신[35]들의 ‘기원’으로 회귀하기 보다는 그 부와 삶의 양식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제도가 되어, 자동적인 운동을 반복해 간다. 그리고 ‘잡다한 민중’은 그 내부에서 영구히 투쟁해 가는 것이다.
- [R-Commentary]사실상 민중이 생활하는 이 ‘미시적 시공간’이 거대도시의 표면을 뒤덮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도시는 민중의 생활하는 이 치마타를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거대도시가 생존하게 하는 숙주이기 때문이다. 민중들의 미시적 움직임 속에서 모든 것이 작동한다. 건물의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시장의 상거래 그리고 스포츠 센터 안에서 우글거리는 이들의 역능들.
- [R-Commentary]거대도시의 계획자들과 권력은 이러한 두 가지 민중의 힘의 원천을 약화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동선을 끊어 놓는다. 한국에서는 그 유명한 ‘명박산성’이 있다. 이 방식은 그 이후로 시위 현장 곳곳에서 활용되고 있다.
1부 영토의 확장, 대지의 진동
1장 대지에 거처하기, 영토에 살기 045
서문 : 추수감사절과 미국의 선주민
대지에서 영토로
잡거지에서 센트럴파크로
집합주택에서 비장소로
[72]주거형태와 관련하여 ‘비장소’(non places)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개념은 프랑스 인류학자 마크 오제(Marc Augé)가 제시[73]했던 것으로 기술 발전 자체는 아니지만 기술발전과 평행적으로 생성되는 공간적 경험이다. 기술발전이 상류계급의 생활에서 먼저 발생, 도입되면서 점차 일반화되는 것처럼, 이 현상도 상류계급에서 시작하여 일반화되는 공간적 경험이다.
(...) 이 개념은 현대에서 우리들의 일상을 점차 잠식하기 시작한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장소’와의 접촉을 상실하는 것이며, 장소를 매개로 한 관계의 생산성 상실, 그것도 ‘기능적 상실’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이 개념은 민중이 거주하고 교류하는 ‘도시’의 파괴와 이러한 파괴로부터 파생하는 ‘경험’이 지향하는 곳을 파악할 때 유효하다. ‘비장소’란 뉴욕에서 북경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으며, 또 비행기를 기다리는 공항의 대기실에도 있고, 맨하튼의 업퍼 이스트 사이드의 고층 아파트에서 출발하여 뉴욕주 북측의 캐츠킬산의 별장으로 향하는 BMW 차내에도 있으며, 그 순간 파리에서 쇼핑을 즐기고 있는 부인과의 전화 속에도 있다.
[74] (...) “오늘날 세계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장소과 공간, 장소와 비장소는 서로 뒤엉켜 있다. 비장소의 가능성은 그 어디라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장소는 인적이 드문 시골에 별장을 갖고 싶다고 꿈꾸는 비장소 중독자들의 피난소가 된다.”[Marc Augé] 이런 점에서 뉴욕과 세계의 수많은 도시공간은 분명히 ‘비장소적 장소’로 변하고 있다.
- [R-Commentary]네그리는 ‘제국적 주권’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이 개념을 활용한다. 제국적 주권이 ‘비장소’의 특징을 가지게 됨으로써 외부가 사라지고, 제국의 전쟁은 필연적으로 내전이 된다. 이는 또한 비장소적 갈등을 초래함으로써 제국의 위기를 심화시키기도 한다.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 김소영 저, 현실문화연구, 2006, p. 302: 성수대교와 같은 근대적 기념비들의 붕괴에서 정점에 이르는 파열된 근대성이 전광판에서 보일 때, 그것은 전광판을 둘러싼 관객성에 대한 최대의 도전이 된다. 마르크 오제(Marc Auge)의 초(super) 근대적 비장소(non-place) 또는 마뉴엘 카스텔스(Manuel Castells)의 흐름(flow)으로 표현되는 후기 산업 공간의 대표 아이콘으로써 전광판은 영화와 TV, 빌보드 사이의 경계를 교란한다. 그것은 또한 퍼블릭아트와 상업광고, 공익광고들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집단적 관객성과 관련해, 전광판은 영화 관객성에 근접하지만 내용물(상업물, 뉴스, 대중 공고)에서는 TV와 유사하다. (...)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은 대중들이 당시 우후죽순처럼 도시에 생겨난 전광판을 지각하는 방식이 현저하게 변화한 예를 보여 준 사건이다. 시청 앞 전광판은 집단 관객성에 걸맞은 퍼블릭 시네마와 거리 TV로써 부분적으로 기능했다.
☞조정환 지음, 『아우토노미아』, 갈무리, 2003, p. 21: 중요한 점은 그 공장이라는 장소가 화폐와 시간이 지배하는 국가와 회사의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으로는 아무리 단일화시켜도 결코 환원될 수 없는 특정한 상황하에서의 특이성(고유성), 잔여, 공백, 다수 또는 비장소(non-place)로 명확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역설적인 점은 그 비장소가 그러한 단일화를 지탱하지만, 또한 하나(一者, the one)로 환원하는 단일화를 파괴함으로써 노동자 정치의 장소, 즉 사건의 장소가 된다는 점이다.(...) 그 장소는 여전히 노동자 정치 현장의 잠재적 장소, 즉 비장소로 존재한다. 노동자의 현장은 이동하는 공장과 가족 그리고 지역 속에서 비장소의 형태로 국지화되어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은 고유한 역사성을 갖고 집단적으로 조직화되거나 사건으로 출현하는 사고의 형태 또는 정치양식으로서 양태 변화된 비가시적인 형태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언제나 이미’ 존재한다. 문제는 이 사라진 노동자 정치의 장소를 어떻게 가시화하고 조직적 역량과 주체적인 투심에 기초하여 반전시킬 것인가이다.
이스트빌리지의 공간정치
2장 군집신체에 꽃을 피워라! 085
서론 : 집단이동의 현재
[87]만약 생명이 정당화된다면, 스쾃팅도 정당화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삶의 필수적인 요소’를 빼앗아 버리는 ‘사적 소유’의 세계 속에서 쉼터(Shelter)나 식료품이 부족한 사람들은 이 필수적 요소를 지킴으로서 연명할 권리를 지닌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생필품을 훔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도 말이다. (...)
(...) ‘대지’와 대지에 대한 폭력적 수탈로서의 ‘영토’, 그리고 사적 소유화(=상품화)로서의 ‘부동산’과 부를 (초)다원적으로 축적한 ‘도시적 공간’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공[88]간에서 좀 더 깊이 들어가 ‘거처하는 것을 둘러싼 투쟁’이다. 집단이동으로 인한 자본주의적 노동(시간)으로부터의 이탈, 그리고 (...) 이러한 이탈을 더욱 발전시킨 자율공간 구축은 현실 도시 속에서 밖에 이뤄질 수 없다. 바로 이것을 뉴욕에서 가장 현실적이며 근본적으로 실천해 왔던 것은 ‘스쾃운동’이며, 이 운동을 극적으로 실천한 것은 ‘도시 공동체 부흥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경기의 변동에 따라 흔들리면서도 도시의 ‘군집신체’(mass corporeality)가 지닌 조정기능을 저변에서부터 지탱해 왔다.
- [R-Commentary]이 개념은 코소가 들뢰즈의 ‘집합적 주체’로부터 추론한 것으로 보인다. ‘떼’와 같은 의미이다.
☞한국의 ‘스쾃’관련 읽을만한 기사: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0
약간의 배경
원예사들의 급진주의
[104]농업은 어디까지나 대지의 수확, 상품화, 사적 소유를 바탕으로 작물의 상품화=자연의 자본주의화를 담당해 왔지만, 원예 혹은 ‘뜰운동’은 항상 그러한 농업적 활동의 외부에 위치해 온 실천이다. 들뢰즈 가따리 식으로 부연하자면, 이것은 대지의 영토화(territorialization)에 대한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을 지칭한다. 젠트리피케이션의 거센 바람이 불어와 줄곧 영토화되어 가는 도시 공간 속에서도 정동을 통해 대지를 일으켜 세우며 우리들의 군집신체(mass corporeality)의 풍부한 네트워크를 조직한다. 이러한 활동은 우선 활동에 필수불가결한 꽃과 과실의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위에 우리들의 상상력을 조용히, 그렇지만 끊임없이 자극한다. 이러한 상상=꿈을 공유한 자들은 독자적인 시간(=공동체)을 [105]형성할 수 있다. 그때 우리들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면서, 또 어딘가 멀리 이동할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유토피아의 충동―<에이비씨 노 리오>
회귀하는 아메리카대륙―<태양의 집>
2부 투쟁하는 정동의 도시 125
3장 정동의 도시
들어가며 : 치마타의 기적
비물질노동과 정동노동-그 중복과 차이
진부한 나비 넥타이-42번가와 타임스퀘어
여성들의 거리
4장 정동의 조직론 161
들어가며 : 퀴어운동에 대해
... 거꾸로 ‘책임’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유일한 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기반을 치워 버린 후에, 즉 우리들이 결정을 내릴 때 믿게 되는 규칙과 지식을 버릴 때 비로소 나타난다. 기반이 없다는 것은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들의 결정사항을 위해 참조할 만큼 의지할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까지 ‘책임’은 항상 서양의 윤리적, 정치적, 문학적 전통 속에서 ‘행위된 것’을 ‘아는 것’으로 분절시키는 형태로 사고되어 왔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 우리들은 ‘책임’을 인식과 행동의 질서적 비대칭, 혹은 절편으로써 재정의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오히려, 마땅히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조차 알지 못 할 때, 그리고 우리들의 행동의 효과와 조건을 더 이상 계산할 수 없을 때, ‘자신’(self)을 포함하여 그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을 때, 우리들은 처음으로 ‘책임’이라는 것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Thomas Keenan, Fables of Responsibility,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pp. 1-2).
이것이 바로 AIDS 위기의 정점에서 ‘투쟁하는 정동’이 직면했던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림프(Douglas Crimp)는 “참된 책임이란 오히려 성행위의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하는 최고조의 상태에 있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단정하면서, “나는 이러한 참된 책임을 퀴어라 부른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뉴욕 게이의 개사(자료1)
뉴욕 레즈비언 개사(자료2)
퀴어 스페이스에 대해(자료3)
스톤월의 전후
☞이런 영화가 있었다. 2010년 작, 다큐멘타리. 영화를 무료로 볼 수도 있다.
http://video.pbs.org/video/1889649613/
액트업과 그 주변
[205]‘심리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 혹은 ‘개인적 심정, 치료’의 문제와 ‘공적 운동’의 문제로써 서로 따로 떨어져 있고, 결국 어느 한 쪽을 취하면 다른 한 쪽을 버리는 관계가 된다. 그리고 이 둘을 단지 ‘슬퍼하지 마라, 조직하라!’라는 슬로건으로 엮어내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크림프는 이러한 모순과 대립을 반전시켜, <액트 업>에서 전투성을 ‘정동적인(affective) 반응’으로 간주하고, 위로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어떻게든 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애도’와 ‘전투성’의 특수한 결합을 고찰하기 위한 유효한 실마리는 프로이드적 정신분석에서 쓰이는 두 가지 대립적인 개념일 것이다. 첫 번째는 철[206]저한 조작(영어: Working-through, 독일어: Durcharbeitung, 불어: perlaboration)이다. 이는 정신분석에 의해 주체가 스스로 마음속의 억압된 요인을 인지하고 그 반복적인 메카니즘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마음의 움직임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치유로 이어지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이에 비해 ‘행동화’(영어: Acting, 독일어: Agieren, 불어: mise en acte)는 무의식적 희망이나 공상을 지닌 주체가 (희망이나 공상이) 발생하는 원인과 그 반복적인 성질에 대한 이해를 거절하면서, 마침 지금 현재에 발생하고 있는 현장감을 통해 희망이나 공상을 되살리려는 상태이다. 이것은 치유로 다다르지 못하고, 병리의 반복적 표현이 된다. 전자는 트라우마의 해소라는 좋은 반응이 되며, 후자는 그 반복적 상연으로써 나쁜 반응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해 레즈비언 이론가인 앤 츠베트코비치(Ann Cvetkovich)에 의하면, AIDS 위기 중 운동하는 <액트 업>에서는 더 이상 이러한 분류가 가능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행동화’(Acting Out)로써 <액트 업>이 치마타에서 벌였던 행동은 개별의 내면에서는 결코 해소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공적 공간에서 상연하는 것이 되며, 이것이 트라우마에 대한 정치적인 대응이었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크림프가 말한 ‘비탄’(애도)과 ‘전투성’의 보기 드문 합성, 결합이 된다. 운동조직으로써 <액트 업>이 지닌 힘은 ‘해소되지 않는 트라우마’, ‘불완전 연소의 비탄’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 과거에 대해 계속 고집하는 것, 죽은 자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 이 운동의 힘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 [208] 본성적으로 비극적인 이 운동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었다. 일찍이 신좌파들의 ‘정치, 사회운동’처럼 개별 인간의 삶을 미래의 이상사회를 성취한다는 명목 하네 관리, 통제하려고 했던 자세로부터 180도 바뀌게 만들었다. (...) <액트 업>이 늘 유토피아적인 요소를 보이고 있는 것은 욕망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특성에 대해 ‘공명정대함’(justice)으로 관여하려는 정치적 생활을 부분적으로나마 실천했기 때문은 아닐까.
☞ 액트 업 관련 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Q__wGtL_rOM
☞ 츠베트코비치 교수 강의 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QJ2hFUtisWE
증여의 액티비티즘
3부 흑(아나키즘)과 적(볼셰비키즘), 그리고
5장 혁명운동의 밀월 215
들어가며 : 주의주장과 도시적 사건
[216]아직도 아카데믹한 담론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상정되어 있다. 즉, 우선 사상이 있고, 운동이 있으며, 그것이 민중을 조직하고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우선 민중의 떼적 신체(mass corporeality)가 좋든 싫든 상관없이 하나의 추세를 만들고 있으며, 그 선상에서 조직가가 나타나 바로 그곳에 지식인에 의한 [217]이론적 개입이 발생하고, 이를 분석, 총괄하여 ‘당파운동’을 형성해 가다가 반드시 어딘가의 지점에서 무너지고, 분파가 생기며, 소멸하고, 또한 별도의 조직화가 시도된다.
여기서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발전은 형성될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이론과 실천을 명확히 분리해서 후자의 전자에 대한 선행성을 강조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상과 이론의 구축도 그 자체로 멋진 실천의 일부이다. 그러나 거꾸로 체계화된 사상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별도의 ‘운동의 패러다임’이라는 것이 확실히 존재하며, 경우에 따라 보다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다.
(...) 우선, ‘떼적 신체’(mass-corporeality)와 그것의 거대한 운동이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전통적 ‘조직화’에 대한 반대급부적인 ‘자연발생성’(spontaneity)이라는 개념으로 전해져 온 우발성(contingency)으로 인해 추동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계 민중’에게는 생활하는 것이 곧 즉자적인 조직화이며, 투쟁이며, 문화의 생산이었고, 이런 의미에서 ‘떼’(무리, mure; pack)라는 단위는 ‘미시적 조직화’를 통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착종체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엄밀하게 보면 ‘자연발생적’이지 않다.
- [R-Commentary]이때 ‘미시적 조직화’라는 것은 다중의 신체와 정동이 교차하는 일상성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관계성의 구축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직론적 차원에서 거대담론을 이루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생활하는 그 순간과 그 치마타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런 방식의 조직화를 전통적인 조직론의 관점에서 재단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마치 우발적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로고스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튀케나 에로스의 영역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에 헤라클레이토스는 ‘알 수 없는 말을 주절거리는’ 인물일지 모르지만, 당대의 시인들에게는 훌륭한 현자였을 수도 있다.
[221]‘노동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례로 손꼽히는 ‘언더그라운드 철도’(Underground Railroad)이다. (...) 남부에서는 이러한 노동력의 소실만이 아니라 노예도주로부터 자극받은 백인 빈농들이 북부로 탈출하도록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농업 기반이 약화되어 농업 생산을 위해 카리브연안의 각지로 외[222]주를 주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건의 흐름 전체가 남부의 전력상실로 귀결되었다. 통속적인 미국사에서는 링컨에 의해 대표되는 북부의 양식있는 백인지도자가 무력하며 불쌍한 흑인을 도와준 덕택이라는 어감을 짙게 띠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였다. 어디까지나 노예의 투쟁이 이동하는 노동력 전체로써 북군에게 그 전쟁의 승리를 증여한 것이고, 게다가 북부의 모든 도시에서는 잉여가치의 창출이 없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항상 교체가능한 저변노동력으로써 근대적 산업의 발흥을 지탱했던 것이다.
☞ 언더그라운드 철도 관련 동영상:
http://www.teachertube.com/viewVideo.php?video_id=19374
근대 노동운동 개사
무장투쟁, 생디컬리즘, 그리고 다종다양성의 조합주의
워블리스의 야외극 혹은 ‘보헤미아의 쾌거’
뉴욕 지식인들의 궤적, 혹은 급진주의가 문화 속으로 흩어지다
노동자의 인종적 분단, 혹은 계급의 폐허(보론)
[266]현재까지도 롱 아일랜드의 [267]히스페닉계 하루벌이 노동자들과 백인 노동계급의 대립 등 뉴욕은 ‘인종’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았다. 이러한 조건은 일찍이 노동운동이 내포하고 있던 ‘계급의 가능성’을 해체해 버렸고, 모든 뉴욕인에게 ‘최악의 정치’를 계속해서 강요하려고 한다. 다만, 우리들이 명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예전의 ‘노동자의 시대’에서 ‘노동자의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백인중심의 것이었다는 것이다. (...) 오늘날 뉴욕은 점점 더 다종다양한 인종의 교환과 교류로 구성되었다. 그게 무엇이든 우리로선 이러한 도시를 긍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뉴욕의 힘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 속에서 어떻게 느끼며 무엇을 생각하는 것과는 관계 없이, 우선 신체 수준에서 유일한 것이 아닌 복수의 타자들과 매우 밀접하게 접하고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를 통해서만 오직 새로운 계급을 상상할 수 잇을 것이다.
6장 도시화와 변혁운동의 공생 269
들어가며 : 분열생성과 공생생성
[270]새로운 투쟁의 분포를 보면 (...) ‘산업과 관련된 것’(Industrial Nexus)으로부터 ‘도시공간’(Urban Space)으로 이행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책에서 르페브르의 중심적 개념은 ‘도시화’(Urbanization)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과거에 모든 변화는 ‘산업화’(industrialization)으로 인해 추동되었고, 산업화를 위해 길을 비켜주었지만, 오늘날은 다른 차원에서 산업화를 능가해 버릴만한 (도시화의) 세계적 기세(global impetus)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산업화를 대신할 무엇인가가 아니라, 산업화를 다른 차원에서 통제하는 틀(프레임)로써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이것이 나의 해석이다. (...) 이러한 문맥 속에서 도시화란 ‘생산의 사회화’를 뜻하는 별도의 명칭이기도 할 것이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도시화’에서 “새로운 것이 있다면 사회공간의 전[271]지구적이며 전체적 생산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지금까지 인간 사회에 존재해 왔던 모든 도시형태(정치도시, 상업도시, 산업도시)를 집어삼키고, 세계와 일체화되는 ‘위기적이며 동시에 비판적 권역(critical zone)’이 되고 있다. 역설적으로 “도시적 현상은 오직 전체성의 관점에서만 이해되지만, 이러한 전체성을 파악하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도시화’란 볼 수 없는 전세계 도시들의 네트워크, 혹은 ‘불가시적인 내재성’(black box)을 포함한 가상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도시화의 운동에는 ‘외향적 파열’(explosion)과 ‘내향적 파열’(implosion)이 동시적으로 진행되며, ‘고유의 장소성’(isotopy), ‘교통공간’(heterotopy), ‘유토피아’(utopia)라는 세 종류의 서로 다른 차원의 ‘장소성’(topos)이 서로 중첩되며, ‘차이화를 포함한 현실’을 만든다. 따라서 이 운동은 ‘형식’(form)으로서 고찰될 수 있을 뿐, ‘체계’(system)로서 파악할 수 없다.
(...) [272]보다 커다란 시점에서 보면, 통상 ‘68혁명’을 ‘학생주도’, ‘직접 민주주의’, ‘히피적 대항문화’(counter-culture)로써 동일시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일종의 ‘도시적 연합’(urban coalition)의 실험이지는 않았을까 (...)
[274]‘거시적 정치’에 대한 ‘미시적 정치’ 혹은 ‘분단’으로부터 유출되는 ‘흐름’은 아마도 ‘분열생성’(schismogenesis)과는 별도의 차원에서, 그러나 틀림없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공생생성’(symbiogenesis)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275]닐까?
학생주도의 운동 혹은 ‘신좌파’의 과격화에 대해
인종 : 지역적 급진주의에 대해
축제적 광경으로써 뉴욕 운동의 시원
[305]도시화는 개별 국민국가의 도시와 시골의 경계와 영지를 넘어서 대지와 다시 만나고 있다. 국가가 보호하는 영지는 지구의 표면을 ‘조리적 공간으로’ 만들면서 끝없이 확대하고 있지만, 동시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엄청난 강도로 자연재해와 유민들의 양자류가 밀려와 ‘조리적 공간화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야!’라고 울부짖고 있다. 이른바, 도시문화의 용어로는 더 이상 형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일지도 모른다. 도시화는 이러한 파괴를 그 근저에 내포하고 있다. 그때, 우리들은 미국 선주민들의 목소리를 다시금 듣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른바 ‘제4세계’의 목소리를 ….
7장 아나키, 자율, 예술-현대 뉴욕 액티비즘의 양상 307
들어가며 : ‘액티비즘’의 가능성과 미정성
[311]신좌파시대의 활동가와 오늘날의 액티비스트를 구별하는 가장 극명한 차이는 무엇인가? 전자가 미래에 실현되어야 할 이상을 위해 ‘이념’에 봉사하는 자들이었다면, 후자는 자기존재와 존재의 일부분으로 구성된 집합성을 뛰어 넘어 존재하는 가치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집합성이 운동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라고 한 것에 있다. (...) 전자에서 모든 원리를 구성하는 ‘이론’은 절대적이다. (...) 세계의 경제구조 법칙을 파악하며, 그것으로부터 세계변혁의 원리를 도출한 사람과 이러한 ‘외재적 법칙’에 말을 부여하는 사람이 해방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 [312]이 경우 ‘투쟁 자체’는 해방을 위한 필요악이며, 희생적 행위가 되었다. 여기에는 행복이나 환희의 요소가 있을 수 없고, 또한 있어서는 안 되었다. 활동가의 최종적인 입지는 부여된 ‘사명감’이었다. 이에 대해 후자는 ‘투쟁이 곧바로 액티비즘[삶 그 자체로서의 투쟁-옮긴이]이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풍요롭고 더욱더 크게 키워 가야할 목적이 된다. 요컨대, 오늘날 액티비스트의 이론적 주안점은 ‘이 행동’을 위한 ‘실용주의적 낙천주의’를 획득하는 것이다.
‘액티비스트’ 속에는 상이한 이론적 입장들이 존재하며 이론적 입장 차이로부터 일상적인 대립과 투쟁이 발생한다. 단, 이러한 입장 차이로 인해 서로를 증오하거나 파괴하고 죽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들은 대립과 투쟁을 반복하면서 원리적으로는 서로의 입장 차이를 커다란 운동의 일부로써 취급한다. 투쟁전술에 대해서도 직접행동파는 비폭력주의를 경시하[거나] (...) 거꾸로, 비폭력주의자들이 모든 비합법적인 직접행동을 단속해서도 안 된다. (...) 전체를 형성하는 대행동의 내부에는 합법에서 비합법에 이르는 몇 가지 단계가 존재할 수 있으며, 행동형태도 강한 ‘퍼포먼스형’에서 ‘대결형’까지 몇 갈래의 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 (...)
‘액티비즘’은 철저한 ‘반권위주의’이다. 액티비스트는 스스로가 민중을 지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도 민중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따라[313]서 조직화란 지도가 아닌 네트워크의 확장인 것이다. 또 지성이란 그것을 겸비한 자가 가지고 있지 못한 자를 가르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필요한 경우에 ‘조사’하여 획득하고, 또 타자와 공유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존재양태는 우리들에게 전혀 새로운 ‘집합적 존재성’의 환희를 가르쳐 준다. 또한 이 존재양태는 경제지상주의가 깊게 신봉하는 ‘이익’과는 다른 차원의 ‘환희 원리’를 집단적으로 개발하여, 신자유주의에 의해 절대화되었던 ‘사적 개인’의 대극적 존재성을 지칭하고 있다.
지구적 공공공간의 개발
당인가 연합인가?―현재의 조직화에 얽혀있는 정경
예시적 정치의 이론, 혹은 존 홀로웨이와 데이비드 그레이버
[341]홀로웨이의 ‘반권력의 영역’과 그레이버의 ‘가치창조(상상)의 장’은 오늘날 ‘액티비즘’이 제1원리로 삼고 있는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의 또 다른 이론적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시적 정치’란 해방운동을 지향하는 자들이 타도해야 할 적들의 제도(국가권력)을 모방하여 스스로 제도를 형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운동을 형성하는 집단의 집합성 속에서 이미 ‘지금 이곳에서’ 해방된 관[342]계성을 형성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윤리적 결의를 갖는다. 이는 거의 대부분의 해방운동이 역사적으로 반복해 왔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자기기만과 단절하려고 하는 젊은 세대로부터 터져 나온 요청이다. 이 운동 조직에게 유일한 무기는 스스로가 구축한 운동조직의 ‘정동’이다. 어떠한 강제력도 행사하지 않는 이러한 ‘액티비즘’은 스스로의 창조력에 의해 모두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풍부한 정치적 문화적 투쟁을 전개하는 것을 통해 확산된다. 또한, 운동의 존재성의 확장은 이러한 ‘감염주의’(contaminationism)를 바탕으로 한 투쟁 이외의 다른 길은 없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그 어떤 것도 강제하거나 강요하는 것 없이 그들의 자유의지로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관계방식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한다. 이미 이러한 모습은 사빠띠스따나 PGA[People's Global Action, 지구적 민중 행동]가 넓혀온 사상과 방법론을 통해 예증되어 있다.
‘예시적 정치’는 그 이름과는 달리 미래를 향한 시간적 발전에 대한 상정을 괄호 속에 묶어두는 운동이다. 미래는 순식간에 찾아오지만, 미래로의 발전을 투사적(投射的)으로 방법화시키는 것은 국가나 도시개발업자가 특기로 가지고 있을 법한 ‘권력이 하는 일’이다. 이에 비해, ‘예시적 정치’는 현재를 최대한 풍성하게 하면서도 사빠띠스따처럼 ‘전진하며 묻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레이버가 ‘윤리철학적’으로 제시한 것처럼, ‘도래해야할 이상사회는 지금 이곳에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액티비즘’이란 지금 이곳에서 실천하는 것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역사의 연속성을 분쇄하고 열 수 있는’ 가능성이 개재하고 있다. 개개인의 기능과 의욕과 정열에 대응하여 끝없이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액티비스트의 예술, 혹은 ‘노동’과 ‘학예’의 재회를 추구하며
[343]예술의 가능성은 예술제도가 어떤 식으로 정형화된다고 하더라도 그 틀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창작행동’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재생력’에 있다. 예술의 핵심은 (...) [344]‘물체’와 ‘개념’이 어긋난 차원과 유리성(遊離性)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한 순간 홀로웨이와 거리를 두겠지만) ‘예술’의 제1 본성은 ‘명명성’에 있다. (...) 이러한 동인은 바로 ‘명명성의 자유’이다. 현대미술의 공헌은 변기를 예술로 명명한 뒤샹을 필두로 ‘자유로운 명명의 실천’을 통해 ‘예술 개념’을 끝없이 확장할 수 있음을 제시한 것에 있다.
(...) 예술작품의 ‘이름’을 치마타의 무명성 속으로 방출(해방)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여기서 나는 다시금 홀로웨이와 합류한다.)
(...) [345]<워블리스>가 역사적으로 키워 온 그래픽 예술과 포크송, 상황주의자, 네덜란드의 프로보(Provos), 시카고 초현실주의자 … 여기에 치마타의 그래피티 작가들 (...) 또한, <게이 해방 전선>과 <액트 업>의 멋진 선전활동과 가두시위를 예술로 부르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이 예술이 될 것인가? (...)
[345]이들은 모두 예술과 액티비즘이 교차하는 지점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 [346]이들은 서로 상이한 차원이면서도 본성적으로 ‘소외되지 않은 본래의 노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
여기서 관계된 흥미로운 문제는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의 노동 특징으로써 분석되어 온 이른바 ‘정동노동’의 영역과 예술이 합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 [347]웨이트리스, 웨이터, 건설노동자, 바텐더, 요리사, 점원, 예술가의 조수, 프리랜서 디자이너, 웹 마스터, 컴퓨터 프로그래머, 컴퓨터 기사 … 그들은 예전 포드주의적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가 사회로 집단적으로 이동한 모습(Exodus)을 보여준다. 그들은 대부분 일을 하면서 짬을 내어 참된 노동(=예술)을 실천하고 있었다.
‘정동노동’은 본성적으로 ‘예술’과 유사하다. 시각적 디자인과 시각예술의 유사성은 물론, 웨이트리스와 웨이터가 매일 실천하고 있는 것은 배려와 기술적인 측면에서 광범위한 의미의 ‘퍼포먼스’이다.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예술’ 자체가 ‘정동노동’의 일종이다.
(...) [348]‘예술’과 ‘액티비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본질적으로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본래의 노동’으로 되돌아 가려는 쌍둥이 자매와 같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다만, 여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액티비스트’들은 ‘소외되지 않은 노동’과 ‘무상의 생산’을 개인으로서가 아닌 집단적 관계성 속에서 보다 의식적으로 획득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집단을 세계화하려고 한다. 말을 바꾸자면, ‘액티비스트’는 스스로 ‘소외되지 않은 노동’과 ‘무상의 생산’을 추구하며, 사회적, 역사적 근거와 조건에 대해 의식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 [349]‘정동노동’이라는 범주는 도시공간을 무대로 삼아 예술과 액티비즘에 대해 ‘소외되지 않는 본래의 노동을 추구한다’는 본성을 ‘기술적이며 존재론적으로’ 가르치면서 이 양자를 연결시키려고 한다. (...) [350]액티비스트의 예술은 (...) 도시공간이라는 문맥에서 스스로를 ‘명명’하는 예술이 될 것이다.
4부 떠도는 지령의 장소
서론 : 운동하는 장소, 혹은 장소의 촉수
[354]민중이 살고, 투쟁하며, 교류하는 ‘치미타 공간’이란 물질적으로 고정된 건축공간과 다르다. 요컨대, 치마타란 이동하는 민중의 집합적 신체의 운동이다. 이동하는 민중은 이동하는 곳마다 자신들의 치마타를 만들고, 치마타들을 연결시켜 간다. 이는 ‘건축=장소의 고정화’로부터 도주하는 양자(量子)의 운동이다. 따라서 하나의 도시 내부에서 다른 도시의 이름이 산재한다. 도시들이 서로 지명을 교환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도시는 다른 몇몇 도시의 ‘지령’(地靈: Genius Locii)을 흡수하면서 살고 있다. 민중의 이동과 함께 도시들은 촉수를 늘어뜨려 서로 얽혀가는 것이다. 이러한 네트워크가 바로 리좀Rhizome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도시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도시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밖의 도시와의 관련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시를 형성하는 사람도 자본도 그들 사이를 왕복하는 유체(흐름)이기 때문이다. ‘통치제도’, ‘상징체계’로써 도시는 자신의 장소적 중심성을 주장하지만, 그 실재는 사람과 자본의 교통을 통한 이동과 운동이다. 이러한 ‘도시운동’, 혹은 ‘도시관계’는 하나의 도시 내부에서 다종다양한 이민자들의 주거구가 지닌 지역성과 지역성들 사이의 상극(相剋)으로써 표현되는 한편, 지리적으로는 광역적인 도시들 간의 위계적 관계성으로 나타난다.
18장 지하철과 뉴욕적 다중 359
19장 회귀하는 히드라 373
[382]영국 식민지 시대에 뉴욕의 노예들은 자기의 욕망을 억누르면서 주인가족에게 봉사를 하는 톰 아저씨(Uncle Tom)처럼 ‘좋은 노예’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이해를 바탕으로 과감하게 ‘투쟁하는 노예’였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들은 카리브해역이나 남미,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막 도착한 문자 그대로의 타자였다. 그들 대부분에게 뉴욕 사회의 언어, 습관, 도덕, 종교 등등은 어느 것도 의미 있는 것이 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뉴욕적인 것을 갑자기 강요받는다면 누구라고 그것에 저항할 것이다. 아마 이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들(히드라)은 관습이나 언어도 다종다양했으며, 서로가 타자들로서 ‘순수한 이종성’(heterogenuity)을 지녔다. 따라서 지배자들의 ‘두려움’은 세계 각지에서 강제로 끌려온 히드라가 갑작스런 강요에 대해 스스로 반항할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두렵게’ 생각했을 것이다.
10장 디킨즈의 파이브포인츠 389
11장 포위된 차이나타운의 수수께끼 399
12장 할렘 풍경론 415
할렘의 개사
[430]이 사건[줄리아니 뉴욕시장이 실시한 할렘개발]은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건물에 대한 투자나 개축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자. 이는 ‘공공 공간’의 위상을 완전[431]히 새롭게 기록하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치마타에서 벌어진 군집신체(mass-corporeality)의 왕래를 ‘위법행위’로 규정하면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었고, 오직 거대 자본이 허용하는 교통과 왕래만을 ‘합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국가의 보호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 일단 젠트리피케이션이 되어 버린 공간에서 존재할 수 있는 권리 및 그곳에 문화를 구축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기는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이러한 권리를 주장하려는 사람들의 논거에는 이전부터 ‘그곳에 있었다’라는 과거의 사실이 있을 뿐,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면 이들의 논리는 더 이상 의미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할렘유람
13장 브롱크스―불꽃의 지역에서 449
화염에 휩싸인 치마타의 문제들
떼들의 문화혁명
[459]중요한 것은 힙합에서 팬이나 ‘작사가’, ‘음악가’, ‘댄서들’ 모두가 ‘패거리’(crew) 혹은 ‘친구’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랩의 정열적인 연구자인 트리시아 로즈(Tricia Rose)는 “이들은 갱단에 가깝고, 간문화적 유대로 연결되어 있는 새로운 가족이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단열재와 같은 역할과 지원을 하면서, 새로운 사회운동의 기초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Black Noise, Middletown, Connecticut: Wesley University Press, 1994, p. 34] 이것은 이 책이 관심을 지니고 있는 들뢰즈, 가따리가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로부터 인용한 ‘떼’(meute/pack)라는 개념과 관계된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아프리카 밤바타(Africa Bambaataa)의 경우처럼 이러한 ‘떼’야말로 ‘소년갱단’이 그대로 ‘힙합을 생산하는 그룹’으로 전향할 수 있었던 ‘혁명적 집단성’의 원리였다고 할 수 있다.
[467]그[아프리카 밤바타]는 ‘갱단으로서의 떼’를 ‘힙합 떼’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갱단으로서의 떼’ 속에는 이미 이러한 전환이 가능했던, 혹은 이를 갈구하는 요인이 있었다. 랩, 그래피티, 브레이크 댄스의 영역에서는 갱단과 힙합 그룹의 무리들이 중복되어 있었다. 이렇듯, 어떤 영역에서라도 ‘떼’와 ‘영역’을 통하여 타자의 세계들과 교류하였던 것이다. 갱단이 ‘영역’을 집중화하여 확장하는 몰(mole)적 움직임이었다면, 힙합은 ‘영역’과 접촉하면서 타자와 네트워크를 통해 교류하고 확장해 가는 분자적 움직임이었다는 것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어느 특정 시점에서부터 전자에서 후자로의 흐름이 주가 되었다. (...) 대립적인 긴장감이 축제적인 에너지로 전환된 것이다.
☞ 아프리카 밤바타 뮤비: http://www.youtube.com/watch?v=9lDCYjb8RHk
14장 상상의 세계공동체 브룩클린 자전거 유람 469
대륙의 군도적 세계
브룩클린 개사
브룩클린 자전거 유람
에필로그 : 뉴욕 개념장치 517
[518]이것[치마타]은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파리에 대해 취했던 특이한 고찰이었던 『파사쥬론』과 전혀 관계 없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도시공간이란 ‘지금’에 있어서 복수의 과거 기억이 살아 있는 장소, 복수의 시간이 교차하는 장소이다. 도시의 공간성이란 동시에 시간적 착종성을 지닌다. 만약, 우리들이 자본과 권력이 강제하고 있는 선적인 발전의 미래상에 대해 대안이 될 수 있는 변혁에 대한 상상력을 발전시키려고 한다면, 이러한 도시적 본성을 출발점으로 하는 방법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 [519]철학자 질 들뢰즈에게 ‘개념’이란 통상적인 철학적 조작에 있어서처럼 현실의 경험을 고정적으로 분류하는 장치가 아니었다. 개념이란 보다 능동적으로 사건의 우연에 대한 부정성(不定性)과 변이성(variable)을 사고하여, 경험을 뛰어 넘는 ‘변혁가능성’을 상상하는 장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개념이란 현실을 재구성하기 위해 투쟁하는 자들의 무기였다. 『뉴욕열전』은 철학서를 사칭하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뉴욕이라고 하는 특수 도시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가능하다면 ‘변혁’에 대한 상상력을 획득하기 위한 ‘개념장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기술해 왔다.
민중에 대하여
[521]‘민중’ 혹은 ‘잡다한 민중’이라고 하는 ‘이미지’(혹은 ‘개념’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괜찮을지 모르지만)를 다시금 음미하려 할 때, 바로 언더그라운드라는 개념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민중’이란 공식적인 캠페인을 지향하든, 언더그라운드에서 실천하든, 때와 장소에 맞춰 전술을 어떻게든 변경시켜 가는 존재들이다. 아마도 ‘언더그라운드’의 영역이 활동의 전제로써 폭넓게 존재하며, 그 부분이 ‘오버그라운드’로써 표출된다고 하는 쪽이 타당한 논리적 순서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식적인 캠페인’이 없다고 하는 것은 투쟁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민중의 ‘존재’ 혹은 그 내용으로써의 ‘생활이자 그 자체 문화이며 투쟁인 것’은 외부의 예상을 깨면서 외부의 의도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혹은 외부의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방식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식으로 정의해도 바로 정의하는 지점에서 어긋나 버리고, 우리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권능을 드러낸다.
[523]정착할 수 없는 민중들은 ‘이동하는 자’이다. 그들의 문화는 대지를 영유함으로써 토지와 토지를 바탕으로 한 국민국가가 아니라, 그들 ‘개개의’ ‘집합적인’ 신체 속에 새겨져(inscribed) 있으며, 이러한 신체 속에 머물고 있다. 이렇듯, 도시공간의 ‘덧없는’ 물질성은 동시에 ‘신체적인 힘의 강도’(intensity)가 되기도 한다. 이른바, ‘흑인문화’의 힘은 이동하는 집합신체의 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흑인 민족주의’는 이에 대해 이름을 붙임으로써 스스로를 역능[힘]화시켰고, 자신들의 처지와 조건을 뒤엎으려는 운동이었다. (...) 지금은 우리들 모두가 ‘생을 형성하기’ 위해 보다 많은 ‘신체적인 문화’를 추구하게 되었고, 정동을 기반으로 한 보다 ‘신체적인 투쟁형태’를 개발하기 시작[524]하고 있다.
[524]‘민중’의 첫 번째 표현형식은 ‘정동노동’이다. 다만, 이러한 노동은 그/그녀들의 피억압의 상징임과 동시에 ‘권능의 상징’이기도 하다. ‘민중의 신체’는 ‘도시적 표상의 세계’에서 점차 보이지 않는 것이 되고 있지만, 물질적으로 우뚝 솟아 있는 뉴욕을 대지로부터 현실적으로 껴안고 있다. 뉴욕에서 인종적인 소수는 인종적 다수(특히, 서양 백인 상류계급)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거꾸로 후자는 전자를 거의 모르고 있다. 다수는 소수를 약간의 정형화된 틀로 파악하려는 것만으로 충분히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해 버리곤 한다. 즉, 후자는 스스로가 전자를 거의 알지 못하는 것조차 의식하고 있지 않다. 후자는 전자를 지배하고 있지만, 전자는 후자를 지성과 정동의 전략에서 능가하고 있다. ‘정동의 전략에서 능가한다’는 것이야말로 도시공간에서 투쟁하는 민중의 권능이자 가능성 그 자체이다.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에서 들뢰즈, 가따리의 『천 개의 고원』[525]으로 이어지는 ‘민중론’에서 ‘군중’(masse/mass)과 ‘떼’(meute/pack)를 분류한 다음, 떼에 대해서는 특권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군중’은 ‘몰화’(molar)에, ‘떼’는 ‘분자화’(molecular)로 대응하며, 이러한 ‘정치적 개념’의 문맥 속에서 ‘거시정치’와 ‘미시정치’에 조응하게 된다. 그들에게 이 두 가지의 계열은 어디까지나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분자화’와 ‘미시정치’가 선행하는 것이다. 이들의 차이는 이름 그대로 크기의 문제만이 아니다. 오히려 어느 일정한 프레임과 그 속을 흐르고 있는 ‘양자류’(quantum flow)의 동시적 존재=관계구조의 문제가 있다. 이는 또한 대상의 ‘상태’에 대한 ‘물리량’의 특성이기도 하다. 여기서 특권적으로 서술된 ‘떼’, ‘분자화’, ‘양자류’란 가따리의 용어로 말하자면 ‘기계적인’ 과정이다. ‘기계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정치사상을 통해 부여받은 동일성을 보다 훨씬 더 유동적이며 가변적인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정치적 통일체-국민, 국가, 인민, 경제-가 지닌 불변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 대신, 그곳에서 탈주한 것을 탐구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소수자적 성질’이 또 하나의 ‘민중의 얼굴’이며 표현성인 것이다.
(...)[526]이 때문에 지배계급은 계속해서 ‘보수혁명’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결국 ‘민중’이란 무수히 많은 호칭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유동체인 것이다. (...) 궁극적으로 이들은 모든 ‘전위주의의 종말의 지표’인 것이다. 최종적으로 민중이란 ‘초월성이 없는 내재성’, 즉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치마타에 대하여
[526]일본의 『코지엔』이라는 사전에 따르면, ‘치마타’(巷)란 본래 ‘길이 걸쳐 있는 곳’이란 뜻이며, ‘이별의 길’이나 ‘교차로’를 의미한다. 돌로 단단하게 만들어진 서양의 광장과는 달리, 일본어적인 어감으로 보면, 치마타란 사람이 [527]집합하는 장소라면 어디라도 그 자리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교류와 교통의 공간’을 지칭한다. 따라서 각종 의식이나 축제의 공간, 퍼포먼스의 공간, 시장, 정치적 주장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리스적인 광장이 지닌 이상형은 ‘건전한 시민사회’와 ‘공공 공간’이 어디까지나 ‘올바른 도시의 물질적 구성’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상형은 오늘날 자본주의적 개발에 따라 더 이상 현실성을 지니지 못한다. 따라서 ‘광장’보다는 오히려 일본어의 ‘치마타’라는 개념이 실재적이라고 생각된다.
(...) 그러나 물질적인 구성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사실 뉴욕에도 도시의 실질적인 기초로써 ‘치마타’가 존재해 왔었다.
치마타는 도시형성에서 ‘분자적’인 운동이다. 비록 물질적이지만 보다 유연하며 유동적인 운동이다. 이 운동은 고정된 장소 및 구축물이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나 나타나며 어떤 형태로든 구축물을 변모시켜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운동이다. 결국, 이 운동은 도시민중 내지 떼가 생활하고, 문화를 생산하며, 투쟁하는 ‘장소로써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도시형성이라는 운동이 구축적인 측면에서만 이해되기 쉽지만, 오히려 이 운동은 ‘양자류’로써, 혹은 ‘탈주의 선’으로써 볼 수 있게 해 준다.
(...) [528]여기서 ‘투쟁’이란 ‘개발계획의 시간’과 ‘민중의 일상행활 시간’ 사이에서 발생한다. 이를 ‘건축적 시간’과 ‘치마타적 시간’의 투쟁으로 환언할 수 있다. ‘도시개발의 시간’은 도시에 존재하는 극대(거시적)의 시간이다. 이는 지역 공간을 변용시키는 ‘미래의 발전’ 방향을 통제하고 있다. 이것은 민중이 몇 세대에 걸쳐 쌓아왔던 ‘생활의 시공간’을 일거에 붕괴시킨다. 이에 비해 민중이 치마타에 새기는 시간 혹은 ‘치마타의 시간’은 극소(미시적)의 시간이다. 이는 일상적인 노동과 생활의 반복적 시간이며, 치마타를 형성해 온 민중의 신체가 지닌 ‘덧없는 일과성’의 시간이다. 민중들의 극소 시간은 개발이라는 극대 시간에 비해 현저하게 약하고 종속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망상(妄想)으로써 거대개발이 실현된다고 한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치마타의 극소 시간’이 집적된 덕택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자야말로 대도시를 형성하는 힘의 본체이다. 틀림없이 그러하다!
망상으로써 개발이 실현되는 것, 즉 ‘치마타’가 파괴된 후에 민중은 다시금 ‘새로운 치마타’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바꿔 말하면, 그들의 ‘거주’(dwelling)에 의해 ‘다시 쓰기’(re-inscription)를 또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 이는 ‘들뢰즈적 건축’ 혹은 ‘잠재적인 건축’이다.
예술에 대하여
[539]‘예술-제도’ 속에는 대개 무엇인가가 있다고 해도 그다지 놀랍지 않을 것 같은 예감, 그리고 무엇을 보아도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뉴욕과 세계 속에 만연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재미없어 졌다.’ 예술에 희소가치를 찾아 보려고 하는 사람들로서는 비극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보다 중요한 사회적 변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문자 그대로 누구라고 예술가가 될 수 있다.
(...) 개별 작품의 우열과는 다른 차원에서 ‘작품’의 단독성은 물체 지상주의를 뛰어 넘어 ‘공통적인 것을 개발하는 노동’, ‘그 자체가 기쁨인 노동’, 즉 ‘공산주의의 이상’을 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 위한 희망과 이것의 추세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몇 명의 유명 예술가들이 아니라 무수의 이름없는 예술가들이다. 예술은 ‘세계 변혁운동’으로 접근해 가고 있다.
투쟁에 대해
[543]민중의 새로운 운동 방향의 첫 번째 특성은 ‘비가시성’에 있다. 이것은 민중의 ‘생활, 문화, 투쟁’이 본성적인 측면에서 ‘언더그라운드’, 즉 비가시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544]두 번째 특성은 ‘회귀성’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 크게 진행되고 있는 뉴욕(특히, 맨하튼)에서는 민중의 거주지역이 대폭적으로 축소되고 있다. 그/그녀들은 낮에는 맨하튼에서 일하지만 야간에는 지하철을 타고 사라진다. 도시적 표상에서 그/그녀들은 점차 비가시화되며, 그들의 존재는 점차 ‘덧없는 것’이 되어 간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장소를 둘러싼 투쟁’은 항상 ‘주거지역=근거지’를 둘러싼 투쟁으로부터 회귀하는 투쟁이 되어 왔다. 바로 일시적 자율공간(Temporary Autonomous Zone, T.A.Z)이 그것이다.
(...) 세 번째 특성은 ‘전지구성’(globality)이다. (...) [545]이동하는 자들의 운동은 이러한 문화를 신체에 새기는 ‘신체적 운동’이다. 이 운동은 동시에 ‘전지구적인 공통공간’(Global common space)을 개발하는 운동으로 향하고 있다.
뉴욕의 투쟁 현장에서는 맑스주의 중심의 아카데미즘과는 대조적으로 아나키즘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 ‘직접민주주의’이든 ‘예시적 정치’든, 아니면 상기의 투쟁 원리이든 특정의 ‘위대한 이론가’의 이름이 붙여 있던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이들의 투쟁은 인류사에서 비롯된 공통투쟁으로부터 출현한 사고법이었다. 이러한 원리가 각각의 투쟁에서 획득했던 승리는 수 없이 많은 액티비스트나 예술가들이 노력한 결정체였다. 여기서 영웅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는 특정 ‘계급’이나 ‘민족’이 아니라, ‘잡다한 단독성’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뉴욕 1980~2006
[549]뉴욕의 본질이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철저한 ‘반권위주의’라[550]고 할 수 있다. 뉴욕은 어떤 대사상가의 저작에 의해서도, 대건축가의 빌딩에 의해서도, 대예술가의 작품에 의해서도 표상되거나 대행되지 않는다. 이는 ‘잡다한 민중’이 생산하는 ‘치마타’에서의 ‘생활=문화=투쟁’의 집적이다. (...) 즉 뉴욕이란 무수히 많은 무명인들이 급진적인 투쟁을 벌이면서 형성된 도시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미(美)’는 지금의 거리에서 보다는 1980년의 할렘과 브롱크스의 ‘치마타’에 보다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것만이 사실이다.
옮긴이 후기 551
인명 찾아보기 553
용어 찾아보기 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