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리쾨르-해석의 영혼》
칼 심스 지음, 김창환 옮김, 앨피2009,
옮긴이의 글_해석을 기다리는 텍스트, 폴 리쾨르
왜 리쾨르인가?
협력과 믿음의 사상가
[21]어떤 소재를 다루든지 간에 리쾨르는 항상 종교적 믿음의 가치와 사회정의를 방어한다. (...) 그는 결코 유행을 따르는 경박한 사람이 아니다. 침착하고 끈기 있는 문체로 씌어진 리쾨르의 작품들은 학문적 담론을 통해 그가 사회에 바라는 바, 곧 협력을 추구한다. (...)[22]그는 자신의 사유가 다른 사상가들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 소리 높여 주장하기보다 조용히 유사성을 끌어내는 유형이다.
리쾨르의 이력
이 책은
[29]리쾨르는 자신의 사상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사상가라고 부를 수 있다. 194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월의 무게만큼 사유를 계속 축적해 온 그의 작품에는 그 이면에 어떤 연속성이 존재한다. 그의 사상 하나 하나는 이전 사상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발전이다.
[R-Commentary] 이 ‘연속성’은 리쾨르가 말년의 인터뷰뷰에서도 말했다시피 ‘주체성의 복원’이다. 과연 이에 대해 들뢰즈는 뭐라 할 것인가? “그건 해서 뭐하게?” 또는 ...
01_선과 악
인간 삶의 변증법
[33]초기 사유에서 삶은 ‘변증법적’인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다. 나는 선택하고 내가 나아갈 바를 정한다.(이것이 의지적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나의 통제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지닌 채로 세계 내적 존재의 필연성에 종속된다. (...)나는 내 존재의 필연성과 더불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그 성격이 나의 의지를 거스르는 무의식적인 정신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이러한 존재가 ‘비의지적인 것’이다.)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의지와 정념
[35]의지에는 ‘결정’, ‘움직임’, ‘동의’라는 세 가지 ‘양태’ 혹은 방식이 있다. 내가 ‘결정할 때’ 내 의지의 목적은 ‘내가 구성한 ...... 내 능력에 맞게 내가 수행한 기획’이다(Ricoeur 1966: 7) 내가 ‘내 몸을 움직일 때’ 행동이 실행된다. 내가 ‘동의할 때’ 나는 필연성에 승복한다. 즉 사물은 본성대로 존재하고 나 또한 생물학적 몸을 지니고 산다는 필연성에 묵묵히 순응한다.
리쾨르에 의하면 의지의 세 차원은 의지의 반대, 즉 비의지적인 것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첫째, 내가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은 결정의 특정한 목적이 기획뿐 아니라 그 결정을 정당화하는 동기와의 근원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Ricoeur 1966: 7) (...) 결정을 내릴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이유들은 비의지적인 것의 형식이다. 이 이유들은 리쾨르는 ‘동기부여’라고 부른다. 둘째, ‘내 몸을 움직일 때’ [36]나는 내 몸이 의지에 지배당하는 만큼이나 [호흡과 같은] 비의지적인 움직임에도 지배당한다는 것을 반드시 인지하게 된다. (...) 셋째, 내가 ‘동의할 때’ 나는 나보다도 내가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나 자신을 양도한다. 이는 필연성의 형식이다.
[40]리쾨르는 내가 몸을 지니는 것은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비라고 주장한다. (...) 문제는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비’는 우리가 답을 몰라도 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해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코기토는 나 자신을 정립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나는 무엇[41]보다도 코기토를 가능케 만드는 조건, 즉 몸을 지녀야 한다는 조건에 참여해야만 한다. (...)
내가 몸을 지닌 세계 내적 존재라는 필연성이 없이는 자유의지도 가질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자유의지는 필연성에 의해 조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역설이다. (...)
[R-Commentary] 자유는 그래서 ‘몸’을 놓고 의지와 사유가 벌이는 하나의 ‘내기’일 것이다. 만약 몸이 변용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자유의 승리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몸의 승리가 된다. 둘 모두 패배하지 않는 주체의 내기인 것이다. 낙관론 또는 의지의 낙관론.
[42]인간의 자유는 욕구, 감정, 습관, 필연성 등의 부정적 개념들로 제한되는데, 이때 부정적 개념들은 자신을 거절할 수 있는 의지의 가능성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결정한다. 리쾨르는 그것들을 ‘한계 개념’이라고 불렀다.
오류를 면치 못하는 인간:실수, 불균형, 연약성
상상력
성격
[46]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관점을 선택하더라도 나는 동일한 성격을 가질 것이다. (...) 근본적인 변화라 하더라도 그 변화를 위해서는 어떤 결정이 필요한데, 그 결정은 ...... 당연히 내 성격에서 도출될 것이다.
필수불가결한 것인 성격은 내 유한성의 일부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격이 내 자아의 모든 것은 아니다. 나는 성격 외에 인간성을 지니고 있다. 이때 인간성은 무한하다. 왜냐하면 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덕과 악덕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인간성이 [47]성격의 역(逆)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성격은 ...... 특정한 각도에서 본 인간성이다.’(Ricoeur 1965a: 93)
감정
[49]철학적으로, 지향과 감정을 분리하려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사유의 영역에서 ‘현상학적 환원’이 하는 일이다. 하지만 감정의 영역에서는 동일한 책략이 통하지 않는다. 감정의 대상을 내적 대상과 분리시켜 보라, 그러면 그 대상은 감정의 분리와 함께 사라져 버리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다.
[50]우리는 어떤 것도 중립적으로 지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직관적으로 선호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을 더 좋아한다. 이때 직관으로서의 ‘좋음’과 ‘나쁨’은 도덕적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우리가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단순히 좋은 것을 좋다고 ‘느끼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느낀다. (...) [51]충분함, 즉 좋음과 나쁨에 관한 도덕적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감정과 인식을 종합하는 것이다.
[R-Commentary] 그렇다고 해서 충분할 것인가? 알고서 좋아하는 것, 좋아하고 아는 것. 어느 것이 더 충분한가? 다른 식으로 물어 보자. 알기 위해 믿는 것(credo ut intelligam), 믿기 위해 아는 것(fides quaerens intellectum) 어느 것인가?
갈등과 창조성
[51]리쾨르는 ‘갈등은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능’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 갈등은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아와 타자의, 성격과 인격의, 그의 사유와 감정의 갈등이다.
리쾨르는 각각의 대립 쌍 중 후자를 선호한다. 다시 말해 타인, 인격, 동료라는 감정은 인류 공동체로 진입하는 경로이며, 주관적 자아가 모든 인류가 가지고 있는 특징에 참여하는 지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리쾨르는 인간의 내적 갈등 자체가 필연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창조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악의 상징성
인간은 [오류의 필연성, 실수, 깨지기 쉬움으로 인한] 악에 대한 수용 능력을 공언함으로써 (...) 타락한 존재로 넘어간다.
고백의 현상학
[53]악은 적어도 악을 고백할 가능성이 의식에 떠오르기 전까지는 악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보면 고백의 가능성은 이미 악한 행위 속에 담겨 있다.
흠
[53]리쾨르는 고백, 곧 실수와 관련된 우리의 행위가 세 가지 원천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흠, 죄, 허물이 그것이다. 흠은 죄보다 더 근본적이다. [이때 흠은 더러움, 부정함이 아니라 불순함과 오염에 대한 윤리적인 두려움이다]
죄
[54]흠의 상징이 ‘고대적인’ 것이라면, 죄의 상징은 사회가 신의 개념을 가진 다음에야 발생한다. 흠의 상대역이 정의라면, 죄의 상대역은 구속이다.
허물
[55]허물과 죄 혹은 흠의 차이는, 허물이 주관적이라면 흠과 죄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객관적이라는 점이다. 흠은 외부의 몸의 개입으로 발생한다. 죄는 여러 문화가 공유하고 있는, 실수에 대한 공식적인 상징화이다. 한편 허물은 실수를 내면화한다. (...)
허물은 우리 자신의 악행에 따라붙는, 처벌받을 것이라는 ‘우리의’ 예측이다. (...)
허물은 정말로 흠이나 죄와 달리 그 방법에서 고백적이다. 흠은 내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다. 죄는 내가 비난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허물은 내가 나 자신을 비난한다. (...)
허물은 나쁜 선택을 하기 위해 자신을 속박함으로[57]써 부자유하게 된 자유의지를 가리키는 궁극적 표현이다.
[R-Commentary] 자유의지는 자신의 허물을 통해 부자유하게 되는 것이지 신에 의해 부자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죄는 신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 플로티노스적 악의 관념. 칸트까지. 과연 ‘죄’는 존재하는가? 스피노자-들뢰즈는 그렇게 물을 것이다.
신화들
[57]네 가지 유형의 신화란 창조신화, ‘비극적’ 인간관의 신화, 타락한 인간의 신화, 유배당한 영혼의 신화를 말한다.
(...)모든 창조신화는 세계의 탄생을 말하기 전에 신의 탄생을 말한다. (...) 본질적으로 창조신화들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안적 답변이다. (...)
[58]비극적 인간관의 신화는 악한 신 개념에 의존한다. (...)창조신화와는 달리 비극적 관점은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장면 보기를 지향한다. (...)
타락의 신화[는] ‘아담의 신화’ 즉 ‘탁월한 인간학적 신화’이다.(Ricoeur 1967: 232) (...) 아담신화의 특수성은 악의 기원을 인간 안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
[61]유배된 영혼의 신화[는] 자신을 ‘영혼’과 ‘몸’보다는 ‘영혼’과 ‘나머지’로 이해한다는 것이다.(Ricoeur 1967: 279) 이에 관한 탁월한 예가 오르페우스이다. (...)[이 신화는] 몸을 종말론적인 힘으로 만든다.
근대성 속의 신화들
[63]리쾨르는 (...) 아담의 신화를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는다. (...)
[64]‘아담의 신화가 뛰어나다고 해서 다른 신화들은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Ricoeur 1967: 309) 오히려 아담의 신화는 다른 신화들을 전유함으로써 그것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준다.
[R-Commentary] 이 ‘새로운 생명’이란 분명 설명되어야 할 무엇이다. 리쾨르의 신화해석이 그렇게 광범위한 예들을 취급하고 있지 않은 것은 그가 다른 예들을 몰라서라기보다는 그의 신화해석이 겨냥하는 바, 즉 기독교 신화해석의 이 ‘전유’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들이 불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해석의 잔여’는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02_해석학
세계를 텍스트로 삼는 해석학
[71]리쾨르의 해석학은 상징적 의미에 집중하고자 의미론적 의미에 괄호치기를 한다. 즉 그의 구호는 ‘상징은 해석을 불러일으킨다’이다.(Ricoeur 1967:352)
상징 해석
언어와 텍스트
지향적 의미
이해
해석학적 순환
내기
거리 두기
[87]텍스트성(텍스트가 되게 하는 것)은 이중적으로 거리 두기를 한다. 즉 텍스트성은 작품을 생산수단에서 떼어 놓는다. 그리고 청중들에게서도 떼어 놓는다. 텍스트는 저자의 심리적인 ‘의도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저술 시기를 지배하고 있던 사회적 조건들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더 나아가 텍스트는 그것이 말해진 사람들에게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읽을 수 있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읽힐 수 있다. 리쾨르는 이러한 텍스트 해방의 ‘자율성’을 발견했다. 이 같은 속박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텍스트는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 세계에 거주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
독자는 작품과 결합함으로써 자기 이해를 획득하는데, 이는 저자의 의도에서 작품을 떼어 놓을 수 있는 글쓰기의 거리 두기 효과를 통해 가능하다. (...)
[88]바르트와의 유사성 (...) 리쾨르는 인간 역사의 한 시점에서 글쓰기는 ‘단순히 전대(前代)의 구전 담론을 고정시키는 것’이기를 그치고, 대신에 ‘인간 사유는 직접적으로, 구어의 매개 단계 없이 바로 글쓰기가 되었다’고 말한다.(Ricoeur 1976: 29)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씌어진 담론’ 또는 새긴 글자를 갖게 되면서부터 ‘저자’의 의도와 텍스트의 의미는 서로 부합하기를 그친다.(Ricoeur 1976: 29) 이로서 텍스트는 해석자 혹은 독자의 관점을 통해 ‘의미론적 자율성’을 획득한다.
[R-Commentary] 문자에 대한 긍정. 플라톤에 대한 비판. 이것은 곧 리쾨르가 히브리 전통에 속한 해석학자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당연하다. 노장과 불교에서는 오히려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사상을 실천철학에까지 밀어붙인다. 그것이 선(禪)이다.
03_정신분석
상징 해석이라는 연결 고리
정신분석 대 해석학
[96]해석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 프로이트에 의하면 꿈 언어는 왜곡된 언어이다. 무의식이 (꿈)재료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기[97]실 이 억압은 꿈 재료가 의식에 들키지 않도록 감추는 것이다. 반면 신화를 다루는 대목에서 보았다시피, 리쾨르가 보기에 담론은 우리를 속이려 하지 않는다. (...)
[R-Commentary] 이 chapter는 상당히 미심쩍다. 주로 정신분석과 리쾨르 해석학의 대조점을 찾고 있는데, 이는 리쾨르 해석학의 근본 취지(종합과 화해)와도 맞지 않으며, 또한 그가 프로이트에 대해 한 작업(《해석에 대하여》, 《해석의 갈등》)의 결과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R-Commentary] ‘상징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만약 이 ‘상징’이 오류의 상징이라면 어떻겠는가? 우리는 과연 리쾨르처럼 담론의 진리를 무한정 신뢰해야 하는가? 아니, 혹시 심스는 해석학의 ‘해석’이라는 것에서 어떤 ‘의심’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보기에 리쾨르는 충분히 ‘담론을 의심’하고 있다. 그것은 ‘믿기 위해 안다[인식한다]’라는 것에도 충분히 함축되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리쾨르와 프로이트 사이에 있는 해석의 강은 루비콘 강처럼 아득한 것은 아닐 것이다.
[98]두 번째 차이는, 전자[프로이트]가 무신론을 향한다면 후자[리쾨르]는 기독교 신앙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정신분석에 의하면 양심은 초자아의 기능[이며] (...) 단순히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것의 이름이 되고 사회의 명령에 순응하기 위해 이기적인 정신이 따라야 하는 유일한 모티프가 된다. (...) 선악을 측정할 수 있는 외적이고 절대적인 도덕적 기준은 없다. 대신 ‘선’과 ‘악’은 상대적으로 ‘허용될만한 행동’과 ‘허용될 수 없는 행동’으로 축소된다.
(...) 이 모든 것은 리쾨르의 사유와 상반된다. (...) 리쾨르에게 악은, 설령 그것이 사람의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 사람에게 작용하는 외적인 힘이 아니라 하더라도, 실재이며 영원히 그러하다. (...) [99]리쾨르가 인간의 선을 향한 자연적 기질을 견지하는 한편, 프로이트는 인간은 자연적으로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프로이트 자신이 ‘자연’이라고 부른 것) 기질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리쾨르에게 악은 우리가 가장 연약한 순간,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념이 이끄는 대로 내버려 두는 순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는 어떤 것인 반면, 프로이트의 사유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정념이 이끄는 대로 개방적으로 내맡길 때 세계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R-Commentary] 초자아의 기능은 정념을 통제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사회구성체’가 형성, 유지될 수 있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주장이다. 이 부분은 심스가 실수하고 있는 듯 보인다.
(...) 세 번째 차원은 (...) [해석학의 시초인] 현상학은 의식철학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리쾨르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을 없애 버렸다. 다시 말해서 리쾨르는 정신을 몸과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다루지 않고, 정신은 몸에 대한 성찰 없이 자신을 사유할 수 없다는 현상학적(그리고 기독교적 실존주의자의) 관점을 공유한다. 이 주장에서 현상학자는 존재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정신의 일부인 무의식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R-Commentary] 내가 보기에는 리쾨르의 ‘몸’과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리쾨르는 분명 《의지의 철학 1》에서 몸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는 ‘비의지적인 것’의 범주에 무의식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100]정신분석적 관점은 현상학의 데카르트적 확실성에 관한 탐구와 일치하지 않는다. (...)
[R-Commentary] 리쾨르가 현상학에만 머물지 않았던 것은 데카르트적 확실성이 의식의 직접성이라는 맹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직접성을 우회하여 주체를 충전하기 위해 해석학적 순환(반성철학)이 필요했다. 따라서 리쾨르의 작업을 현상학으로 뒤늦게 환원해서는 곤란하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이드가 있는 곳에 에고가 있을 것이다’라는 공식으로 대체한다(1973: 112). (...) 주체, 즉 ‘나’라고 말하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 자신과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은 해석학이다
[101]정신분석학과 해석학의 첫 번째 유사성은 둘 다 어느 정도 성스러움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 [프로이트에게는] 인간이 어떻게 종교를 경험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한편 해석학은 철학적으로는 현상학에서 나온 것이지만, 읽기 경험으로 보면 성경 해석의 전통인 ‘성경해석학’에서 나온 것이다. (...) 정신분석은 세속적인 고백과 유사하다는 말을 종종 듣고 있으며, 해석학도, 최소한 리쾨르가 실천한 해석학은 인간 조건 안에서의 실수 분석과 관련된다.
[R-Commentary] 이렇게 되면, 리쾨르의 것만이 아니라 그 어떤 해석학도 프로이트의 분석과 유사하게 된다. 단지 ‘관심’만으로 리쾨르와의 유사성을 파악한다 ... 글쎄 이건 꽤나 실수투성이처럼 보인다.
[102]정신분석은 환자들에게 무의식의 감추어진 의미가 드러나면서 파악된 진리에 입각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해 준다. 해석학은 텍스트의 감추어진 의도 속에서 세계 속에서 윤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교훈을 발견한다.
정신분석 이론과 현상학적 태도
반대 방향의 에포케
오이디푸스
종교
04_은유
리쾨르의 ‘살아 있는 은유’
은유, 미메시스, 행동
[124]미메시스는 (...) 어떤 것을 재현하고자 신중을 기한 창조이다. (...) 즉 은유와 직유의 관계는 미메시스와 모방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 미메시스는 행동의 모방이다. 달리 말하면, 미메시스는 플롯muthos을 수반한다.
은유는 비유다
[129]비유론은 전통적으로 ‘의미론적 탈문lacuna’ 개념에 의존한다. 탈문은 의미의 틈이다. 의미론적 탈문은 작가가 채우기 원하는 문장 속의 틈이다. 그 틈은 다른 담론 영역에서 빌려 온 변칙적인, 혹은 상궤를 벗어난 단어로 채워진다. 빌려 온 낯선 용어는 문장 속에 부재하는 용어를 대신하게 되는데, 이는 작가의 선호 문제이기도 하고 작가의 어휘에 틈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의 선호는 작가 고유의 수사를 낳고 어휘의 틈은 비유의 남용을 낳는다.
[R-Commentary] 이 ‘틈’은 의미론적 ‘잔여’와 같다. 이 틈을 메우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잔여가 작동할 것이며, 그것은 영원히 반복된다. 해석학적 순환의 심층에는 이 ‘차이나는 것들의 반복’이 있는 것이 아닐까? 과연 들뢰즈와 리쾨르가 처음 조우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 ‘은유’가 아닐까?
[132]퐁타니에의 결론과 달리, 리쾨르는 은유가 명제를 가리키며 개별단어의 층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퐁타니에는 자기 이론의 귀결을 보지 못했다. 예를 들면, 그의 맹목은 알레고리를 확장된 은유로 보지 못하게 방해했다. 반면 리쾨르에게 알레고리는 명제의 층위에서 명시적으로 작동하는 은유이다. 실제로, 일단 은유가 단어에서 자유로워지면 그 다음에는 모든 기술description이 은유적[133]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133][익숙해진 은유와 달리] 새로운 은유는 언어 속에서 자유를 실행한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 속에서의 자유는 리쾨르가 보기에 인간 창의성의 표지이다.
은유와 의미론
I. A. 리처즈: 리처즈의 이론은 노골적인 컨텍스트적 이론이다. 다시 말해 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가 사용된 문맥에 의거하여 단어가 나타나는 매 순간마다 독자 혹은 청자가 ‘추측해야 하는’ 것이다. 사전의 정의는 그저 한 단어가 차지하고 있는 영역을 투박하게 안내하는 것에 불과[135]하다.
[R-Commentary] 추측하는 것, 이념이 작동하는 것.
막스 블랙:
먼로 비어즐리:
로만 야콥슨:
은유와 해석학
[142]은유는 청자나 독자들에게 해석을 강요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다. 해석 작업(다시 해석학이다.)은 은유적 과정의 고유한 부분이다. 하나의 과정인 은유는 단어의 연결을 단어가 위치하고 있는 전체 문장의 문맥 속에 연관시킬 뿐 아니라, 그 문장이 위치한 담론의 문화적 맥락과도 연관시킨다. 이것이 바로 은유가 살아 있다는 말(곧, 해석하는 존재가 된다.)이 뜻하는 바이며,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은유적 차원이 언어 가운데 가장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R-Commentary] 또 하나. 은유는 ‘강요’한다. 즉 은유는 어떤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사유를 불러 일으키는 그 ‘기호’ 들뢰즈-스피노자의 ‘기호’가 아닐까?
[144]그러면 시적 은유란 무엇인가? 시적 언어는 물론 그것이 시 안에서 번번히 발견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시의 언어일 필요는 없다. 리쾨르는 은유가 자기 발견적 허구를 생산하는 언어, 달리 말하면 우리가 뭔가를 파악하도록 혹은 발견하도록 이끄는 허구라고 말한다. 언어의 시적 기능은 우회로를 통해 실재에 대한 재서술을 추구한다. 실재를 기술하는 경로를 간접적으로 만듦으로써 은유는 재서술의 수단이 된다. 언어가 은유를 통해 직접적인 기술이라는 제 기능을 스스로 벗어 버릴 때(Ricoeur 1977: 247), 언어는 발견의 기능에서 해방되어 신화적 차원을 획득한다.
[R-Commentary] 이 신화는 아폴론의 것인가? 디오뉘소스의 것인가? 아니면 미노타우로스의 것인가?
은유와 철학
05_이야기
은유와 이야기의 생산적인 창안
이야기와 해석학
건강한 순환
시간
[156][아리스토텔레스-칸트로 이어지는 시간에 관한 이론과는 다른] 시간에 관한 두 번째 이론은 (...)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으로 개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근대의 현상학에 대해 몰랐지만, 그의 이론은 시간에 관한 ‘현상학적’ 이론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20세기의 후설과 하이데거가 그의 이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만일 시간이 ‘현재들’의 연속이라면, 언제나 내가 지금을 말할 때 그 지금은 이미 지나간 것이 된다. (...) 시간 개념은, 더 엄밀히 말해서 현재 시간 개념은 항상 현재 시간, ‘지금’에 뒤쳐져 있다. 이 역설은 현재를 가리키는 ‘지금’이라는 단어가 실제로는 현재를 가리킬 수 없다는 데 있다. (...) [157]수학적 용어로 말해서 현재의 지금-점noe-point은 연장이 결여되어 있다. 즉, 무한히 작은 점이다. (...)
[158]아우구스티누스의 역설에 대한 해결책은 ‘세 겹의 현재’라는 개념이다. 과거와 미래는 한편으로 기억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 기대를 통해 마음속에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려면 정신은 반드시 이완되어야, 확장되어야 한다. (...) 현재의 연장의 결여는 정신의 이완을 통해 극복된다는 것이다. 사실 사유는 정신의 이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신이 사유인 한 그것은 하이데거가 ‘현전’이라고 부른,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매개된 현재의 지속적인 펼쳐짐으로서의 사유이다. 정신이 이런 방식으로 연장되는 한, 지속적인 현재는 그 안에 과거와 미래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유가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는 시간과 영원성의 대조를 가능케 한다. 영원성은 ‘매우 긴 시간’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시간의 바깥이다. (...) [159]신은 시간을 창조했고, (...) 신은 영원하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 시간은 정신의 움직임으로 생긴다고 선언했다. (...)
신의 정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하다. 만약 사람의 정신이 ‘움직이지 않게 고정된다면’ 영원성이 어떤 것인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신과 달리) 창조된 존재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아니고선 정신을 정적인 상태로 유지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영원성이 어떤 것처럼 보이는지 간신히 상상할 수는 있다. 우리는 마음의 지향성intentio을 가질 수 있다.
아우[160]구스티누스의 시간 이론은 리쾨르가 이야기에 의존하는 시간을 기술할 때 받아들인 모델이다. 리쾨르의 공식은 팽창 속의 마음의 지향성, 즉 고요를 향하는 정신의 지향과 그 움직임을 시간 속에서 구성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 자체를 지각하게 만드는 정신의 팽창이 만들어 내는 변증법이다.
마음의 지향성의 ‘지향’은 리쾨르에게 현상학적 지향, 혹은 현상학적 지향성이다. 의미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 정신의 동기부여하는 힘이다. 만약 의미가(문장 속에서의 단어의 펼쳐짐 그리고 담론 안에서의 문장의 펼쳐짐. 고립된 채 의미를 갖는 단어는 없다.)에 기인한 것이라면, 의미는 시간 속에서 생산되고 이해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세 겹의 현재’라고 이해한 인간적 시간이며, 영혼을 가지도록 북돋워 주는 인간적 의미이다. 이야기는 플롯에 의존함으로써 인간적 의미 중에서 가장 풍요로운 담론의 형식이 된다. 이야기의 의미를 발견하라. 그러면 인간 영혼의 영원한 진리를 발견할 것이다.
[R-Commentary] 의미가 과연 ‘본질의 펼쳐짐’인가? 본질이 의미를 통해 오는 것이라면, 시간은 이야기를 ‘해석’하는 그 정신의 지향성으로 인해 오히려 굴절되거나 비껴가지 않겠는가? 여기!! 현상학의 지향적 시간성 대 들뢰즈의 수동적 시간성.
미메시스1, 미메시스2, 미메시스3
줄거리 구성
역사
[169]역사는 의사플롯인 것이다. (...) 요컨대 역사의 사건은 의사사건인 것이다. 그것들 사이에서 의사플롯, 의사인물, 의사사건은 리쾨르가 다른 어떠한 형식의 담론과도 대비되는 ‘역사의 지향성’이라고 부른 것, 즉 역사가 되기 위해 역사 이면에 있는 ‘의미-의도’라고 부른 것을 이룬다.
[R-Commentary] 그렇다면 진정한 사건, ‘실재로서의 사건’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은 리쾨르에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리쾨르에게는 역사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의 실재성 여부는 당장 인간의 삶 또는 종교적 비의와는 관계 없어 보이는 것 같다.
허구
[171]허구 이야기는 언술statement(말해진 것)과 언술행위utterance(말할 때의 방식)의 구분을 강요하며 동사 시제 사용함으로써 구분한다. 담론은 ‘나는 상점에 갈 생각이다I am just going to the shops’처럼 전형적으로 현재시제를 변형(예를 들면 진행형과 함께 사용) 하거나 (미래시제가 있는 언어들에 대해서는) 미래 시제를 변형해서 사용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야기narrative는 ‘그 남자는 독양을 마신 후 죽었다The man drank the hemlock and then he died’처럼 전형적으로 과거시제, 특히 ‘아오리스트aorist’(한정 단순 과거)와 ‘단순 과거 시제preterite’를 사용한다. 여기서 동사 시제는 시간을 과거, 현[172]재, 미래로 구별하는 것과 필연적으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175]허구 이야기의 이러한 특성은 작가의 시점과 (작가가 만들어 낸) 화자 그리고 작중 인물 사이에 즉각적인 거리를 만들어 내고, 통상적인 의미에서는 작가의 견해 혹은 이데올로기인 작가의 시점을 쉽사리 드러나게 한다. 작가는 화자의 입을 통해 작중인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함으로써 혹은 그 반대로 평가함으로써, 아니면 독자가 승인한 작[176]중인물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냉담한 화자를 통해서 어느 쪽이라도 자신의 시점을 드러낼 수 있다.
[R-Commentary] 픽션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작가는 작품의 공간(이를 ‘topos phantasmata’라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전일적인 위치에 있게 되며, 반대로 작품에 부재하게 된다. 과연 블랑쇼와 바르트 이래 ‘작가의 죽음’이 진정 허무주의를 내장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작가는 본래 부재하면서 허구의 공간 안에 유령처럼 떠돈다.
역사와 허구를 함께
[179]명백한 차이는 허구적 과거의 비실재성과 대조적인 역사적 과거의 실재성이다. (...)
‘역사적 실재’는 순진하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 역사적 과거는 (...) 한때 실재했다. 하지만 그 실재성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 리쾨르에 따르면 역사적 과거의 실재성은 증언, 기록, 목격담 등 리쾨르가 ‘흔적’이라고 부른 것들 속에, 그리고 개인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흔적이란 현재에 남아 있는 자취를 통한 과거의 지속이다. 하지만 이는 과거 자체의 지속이 아니라 과거 사람들의 지속이다. 전형적으로, 과거의 흔적은 사람들의 업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엄밀히 말해서, 역사는 이러한 흔적들을 재작업해서 우리의 현재 속에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다.
[180]리쾨르에게 이 심연[역사와 허구]을 이어 주는 것은 읽는 행위인데, 이것은 전략적 지점에서 역사와 허구의 결정적인 유사성을 드러낸다. 우선, 저자의 층위에 연결고리가 있다. 역사의 저자는 그가 다루는 사실들로써 제한된다. 저자는 그럴듯하게 사실들을 배열하는 한도 내에서만 (역사를) 구성한다. 그는 사실을 창안하지 않는다. 반면 허구 작가는 창안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리쾨르는 이것이 단지 ‘~로부터의 자유’일 뿐 아니라 ‘~을 위한 자유’라고 지적한다. 리쾨르는 ‘예술적 창조의 법칙’은 역사적 사실의 규칙이 역사가에게 그런 것처럼 예[181]술가에게도 엄격하다고 주장한다. 창조의 법칙은 예술가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세계관을 가능한 한 완벽하게 되돌려 주는 것이며, 역사가와 그 독자가 죽은 자들에게 진 빚에 정확하게 상응한다.
[181]텍스트는 독자가 불신을 잠정적으로 중지할 것을 알고 있다. 리쾨르가 주장하는 것은, 텍스트를 수용하는 것과 텍스트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 사이의 협상 구조는 역사와 과거의 실재성의 관계가 ‘의미하는’ 구조와 같다는 것이다.
[182]리쾨르는 그저 역사와 허구는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역사와 허구가 ‘상호 직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R-Commentary] 문제는 이 ‘상호직조’의 과정에서 역사와 허구가 조우할 때, 어떤 융합, 분열이 일어나는가이다. 미궁에 빠진 역사적 실재 쪽으로 가는 문턱과 독자와 작자 모두를 ‘허구의 실재적 효과’(Deleuze) 쪽으로 몰고 가는 문턱이 존재한다. 과연 이런 문턱들의 구별이 가능할 것인가? 들뢰즈라면 그렇게 물을 것이다.
06_윤리학
덕의 윤리학
이야기 정체성:IDEM과 IPSE
성격과 약속 지키기
스토리 대 삶
삶의 스토리
‘나 여기 있어!’
[199]이야기 정체성으로서의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삶 속에 자기-항구성을 정착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이해된 자기-항구성은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나는 타자들에게 한 나의 말, 나의 약속이 변함없음을 통해 나의 자기-항구성을 입증한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타인들의 삶의 이야기 가닥과 내 삶의 이야기 가닥의 서로 얽힘이 윤리적 타당성을 갖게 된다.
[200]idem에서 ipse로의 이동이 ‘나는 무엇인가?’에서 ‘나는 누구인가?’로의 이동이라는 것을 기억한다. (...) [이 둘의] 간격은 이야기 정체성을 이룬다. ‘나 여기 있어!’라고 선언하는 것과 관련된 도덕적 항구성은 도덕적 정체성을 이룬다. 이야기 정체성과 도덕적 정체성 사이에서 리쾨르가 ‘생산적인 긴장’이라고 부른 것이 생긴다. 즉 이야기 정체성이 자아를 의문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도덕적 정체성의 근원이 된다. 반면 도덕적 정체성은 자신감에 가득 찬 단언처럼 보인다. 이야기 정체성의 질문은 계속해서 도덕적 정체성의 단언을 견제한다. ‘나 여기 있어’는 허풍쟁이의 자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임의로 다룰 수 있는 권한을 준 한 개인이 표현한 겸손함이다. ‘나 여기 있어!’는 배려의 표현이다.
[R-Commentary] 국가폭력은 이러한 ‘겸손’과 ‘배려’에 흔히 죽음으로 답한다. 특히 타자가 약자로서 노출되어 있을 때, 국가폭력은 국가폭력 혐의자들의 개인 이익을 위해 희생양을 찾는다. 2009년 1월 20일 용산 남일당 건물은 그러한 반동적 작용이 무고한 타자들을 화염 속에서 던져 넣은 날을 애도하는 기념비적 토포스다. 그리고 그 화염은 경찰폭력에서 사법폭력으로 변용되어 지금도 죽은 후손들의 몸을 태우고 있는 중이다. 유력한 범인인 김석기는 지금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07_정치와 정의
‘정치의 모순’
[210]‘5개년 계획’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주의 국가는 ‘사물을 지배하는 것’과 ‘사람을 통치하는 것’을 혼동한다. (...) 국가가 노동자의 생산물에서 획득한 부를 분배함으로써 노동자의 ‘의욕을 고취하지’ 않고 위협, 폭력을 통한 협박, 강제 이주 같은 방식으로 ‘동기부여’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주의와 비슷했다. (...) 사회주의 국가는 세대주의적 관점에서 미래를 보았다. (...) 이러한 관점으로 인해 국가가 현재 세대를 함부로 다루게 되고 (...)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소외’를 재도입했다. (...) 사회주의 국가는 ‘자유주의’ 국가보다 더 이데올로기적이다. (...) 다른 말로 하면 사회주의 국가는 사람들의 외적 환경 뿐 아니라 내면세계까지 통제하려 한다.
[R-Commentary] 이 모든 리쾨르의 비판은 사실상 ‘고전적’이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유효하다. 과연 현재 구좌파 사회주의자들이 이 물음에 대꾸할 근거가 ‘스탈린주의’나 ‘국가자본주의’라는 것 외에 무엇이 있을까? 판은 새로 짜여져야 한다. 어떻게? 내가 보기에 그 철학적 기초는 리쾨르-들뢰즈-스피노자-맑스에 있다.
사회주의국가 없는 사회주의
[211]국가를 소멸시키는 것에 대한 대안은 국가를 통제하는 것이다. 국가는 ‘자유주의’ 국가에서만 통제될 수 있지, 소비에트 시절에 볼 수 있었던 ‘현존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통제될 수 없다는 것이 리쾨르의 논점이다. 리쾨르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여겼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발언은) 상당히 파격적인 지적 이동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정치 안에 사회주의 경제를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리쾨르의 주장이다. 그의 사회주의는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이다.
[R-Commentary] 굳이 정확성을 기하자면 리쾨르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라고 하겠다. 이 방면에서 그의 사상적 궤적을 탐구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과격파에서 온건파로의 이 변화양상. 이 변화 와중에 68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사실 리쾨르를 반마르크스주의자라고 기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가 생각하기에] 사회주의 국가의 흠 혹은 악은 그 안에 여론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 자유주의 국가는 ‘다원적인’ 국가이며, 사회주의는 타자, 즉 상반된 견해를 가진 자를 허용하는 정치적 구조 안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R-Commentary] 자유주의적 다원주의가 표면적으로 보면 의견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구조인 것처럼 여겨진다. 리쾨르는 이 함정 안에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이 측면에서는 맑스가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법은 부르주아 국가 기구의 통치 이념이며, 그것은 평등하지 않고, 따라서 다원성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법은 정치의 연장이며, 더 신랄하게 말한다면 ‘전쟁’(계급투쟁)의 연장인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법이 국가의 도구인 것과는 반대로] 자유주의국가에서 법은 (...) 국가보다 상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민은 국가가 불합리하게 힘을 행사하려고 할 때 이에 맞서 법에 호소할 수 있다. (...) [212]국가는 야만적 자유와 안전의 교환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법을 통해 시민적 존재로 가는 길을 제공한다.
정의 대 복수
공리주의에 맞서
황금률과 새 계명
[218]사랑과 정의는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 사랑 없는 정의는 진정한 정의가 아니라 가장 약한 자의 희생을 허용하는 것이다. 반대로, 정의는 그것을 통해 사랑이 표현되는 매체이다. 나는 정의로운 사회제도를 통해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사랑은 에로스(관능적 사랑)에 대립하는 아가페(형제의 사랑)적 의미의 사랑이다. (...) 왜냐하면 형제의 사랑은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할 때에도 다른 사람에게 주는 넘침의 윤리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관능적 사랑은 욕망에 기초한 것이다. (...) 욕망은 동등한 양자 간의 호혜적 관계를 요구한다. 이에 반해 우정은 행위자가 수동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R-Commentary] 욕망과 윤리를 갈라놓는 순간 그 욕망은 윤리를 훼손하면서 우정의 당사자들에게 거래를 강요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욕망을 거세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기쁨의 윤리를 위해 기꺼이 봉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관능적 사랑은 윤리의 다른 가능성이며 윤리가 상호성이라는 약한 만남을 넘쳐흐르도록 만드는 진정한 동인이다. 내 생각에 (기쁨의) 욕망이 없는 우정은 2인칭의 우정에 머물 뿐이다. 그것이 3인칭으로 또한 공통체적으로 확대, 전염되기 위해서는 욕망이 반드시 필요하다.
선물과 용서
[219]피해를 입은 측에서 가해자가 자기들이 당한 만큼의 대가를 치르지 않을 것임으로, 다시 말해 처벌이 그들이 당한 범죄에 상응하지는 않을 것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 복수가 될 것이다. (...)
그렇다면 모든 정의는 적어도 범죄의 [220]희생자에게 일정정도의 용서를 요구한다. 용서는 이처럼 사랑과 비슷하다. 혹은 사랑 자체의 한 국면이거나 사랑이 표현이다. ‘왜냐하면 용서는 선물 경제, 즉 용서를 명확히 표명하고 정의를 지배하는 등가성의 논리에 맞서야 하는 넘침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R-Commentary] 용서는 우월성의 표현인가? 거리의 표현인가? 우월성의 표현일 때, 그것은 ‘감옥’과 ‘처벌’이 될 것이고, 거리의 표현일 때 그것은 ‘추방’과 ‘유배’가 될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를 탈출(exodus)의 경우에 적용해 보자. 다중의 쪽에서 탈출은 자발적인 유배며, 스스로를 추방하는 것이다. 이는 용서를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용서하고 용서 받는 것이다. 다중의 탈출은 그래서 부르주아의 사법적 판결로 인한 처벌을 넘쳐 흐르면서 사법적 지향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거리의 윤리’ 이것이 다중의 윤리다!
사면
[222]범죄자에 대한 사면은 범죄자들에게 남아 있는 범죄에 대한 책임감을 제거한다. 이 같은 책임감의 제거는 범죄자들이 그들의 희생자들을 비인간화했던 것만큼이나 범죄자들을 비인간화한다. 왜냐하면 자기 행동에 책임지는 행위자가 자유로운 인간 존재의 정의(定義)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범죄자와 희생자 간의 법적 거리를 설정하는 제3자인 판사 역시 희생자에 대한 책임이 있다. 만일 정의를 받아들임으로써 희생자가 복수를 포기해야만 한다면, 적어도 희생자는 정의를 얻어야 한다. 범죄가 사면을 통해 잊혀진다면 희생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것은 복수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다.
[R-Commentary] 부르주아 사법은 희생자의 포기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그렇게 함으로써 사면을 보지 못하도록 한다), 사면의 부정의에 대한 논의는 은폐하거나, 무시한다.
‘정치의 모순’ 극복하기
국가 모델
리쾨르 이후
영미 비평계에서 촉발된 ‘은유 논쟁’
데리다, 은유 그리고 언어
하이데거, 언어, 해체
성경을 문학작품으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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