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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전쟁 ㅣ 낮은산 키큰나무 1
루이 페르고 지음, 클로드 라푸앵트 그림, 정혜용 옮김 / 낮은산 / 2004년 1월
평점 :
<단추 전쟁>은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내 아이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었던 책이다. 책 제목과 표지 그림, 그리고 서두 부분에서 사내아이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아, 청소년 도서이구나 싶었는데, 웬걸! '물렁x'이나 '거시기 터리나 글쩌기고 인는 놈' 같은 욕이 등장하지 뭔가! 음, 그런데 저자는 이미 나처럼 생각할 독자가 있음을 예상하고 있었나 보다. 책을 읽다 말고 혹시 작가의 말이 있나 싶어 뒤적거려 보았는데 루이 페르고는 이미 나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보다. ^^;;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책 제목만 보고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을 위한 작품이겠거니 생각하기 쉽겠지만..."라고 적어 놓았다.
서두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루이 페르고라는 언어의 기교를 즐기는 작가가 아닐까 하는 점이다. 나무잎 하나도 그냥 떨어지지 않고 매가 추락하는 것 마냥 예술적(?)으로 떨어지게 만들고 있으며, 탈곡기의 소리도 '절망적인 흐느낌, 혹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로 묘사하는 등 문장 곳곳에 다양한 수식어를 달고 있다. 거기다 앞서 언급한 아이들이 뱉어내는 용어(?)들은 사내들에게 낯설지 않은 말이겠으나 나로서는 적이 당황스러운 말들이었다. 사내아이들이 편을 갈라 전쟁을 벌이는 모양새가 어른들의 전쟁과 다름이 없다. 초등학교 시절의 동네 머스마들이 놀던 모양새를 상상하며 읽어 보니 그것과는 사뭇 다른, 비장하면서도 살벌한, 그러면서도 웃음을 자아내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롱쥬베른느 마을 아이들과 벨랑 마을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상대 마을의 아이들을 혼내주는 것이 삶의 목적인 것 마냥, 수업을 마치고 나면 모여서 툭하면 싸움을 벌인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상대 마을 아이를 잡게 되면 옷이나 구두 등에 달린 단추와 끈 등을 모조리 빼앗는 응징을 가하는데, 속된 말로 이것은 그 아이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적에게 당할 때로 당한데다가 제대로 여며지지 않는 옷가지와 수치심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의 질책-대부분 폭력이 수반된-이 그 아이를 강타하여 또 한 번의 고통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두 마을 아이들 간의 전쟁의 양상은 뛰어난 체력과 지도 능력을 발휘하는 대장 르브라크 덕분에 롱쥬베른느 마을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르브라크는 공부를 못한다고 선생님과 부모에게 구박받는 소년이지만 다른 방면으로는 뛰어난 자질들을 보여 주는 것이다. 더구나 전쟁의 양상을 보면 단체를 이끌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아는 지도자의 능력은 중요하다. 르브라크가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아이들에게 방법을 알려주는 방법들을 보니 과히 잔머리의 대가라 할 만하다. 그리고 참모 격인 라 크리크의 활약도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뒷받침이 된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할 때면 특히나 더!
아이들은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별별 방법을 다 쓰는데, 단추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때로는 옷을 홀딱 벗고 싸우기까지 한다. ^^* 롱쥬베른느 아이들이 그들만의 공간이 될 요새를 짓는 것을 보면 무엇을 마련하든지 건성으로 하는 법이 없이 각자 맡은 임무를 체계적으로 수행하는데, 빵과 과일, 술 등을 부모 몰래 슬쩍~ 빼내 와서 그들만의 만찬을 즐기는 장면은 이 아이들의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 때 담배 한 자락을 피우며 라 크리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나도 롱쥬베른느 마을 사람과 벨랑 마을 사람들이 적대적으로 변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책은 프랑스의 제 3공화정 시대를 배경으로, 두 마을이 각각 지지하는 공화파와 왕당파간의 적대 감정이 아이들 간의 설전에서 드러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배경을 모르고 읽어도 내용 자체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작가는 아이에게 잘못을 깨닫게 하고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가정에서 행해지는 폭력을 드러내고 있다. 왜 어른들은-물론 나 자신도 포함되겠지만- 자신들이 어렸을 때 겪었던 시기를 기억 저편에 묻어 버리고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르브라크가 던진 "우리도 어른이 되면, 부모들처럼 그렇게 멍청해질까?"라는 마지막 대사가 폐부를 찌른다.
"전쟁.. 그것은 얼마나 허황된 이유로 시작되고, 얼마나 하찮은 이유로 끝나는가!(수상록/몽테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