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하의 소녀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
티에리 르냉 지음, 조현실 옮김 / 비룡소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얼어붙은 운하를 내려다 보고 있는 소녀의 모습으로 마음이 얼어붙어 버린 아이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이 책은 비윤리적인 성적 욕망을 지닌 한 남자에 의해 성에 눈을 뜨게 된 한 여자 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한 여학생이 동네 슈퍼마켓 아저씨에게 십 여년을 넘게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까지 한 이야기를 TV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어려서는 아무것도 몰라서 당했고 커서는 알면서도 당했을, 그 아이가 겪어 온 혼란과 고통을 어느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처음에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들어 갔을 때 그 여자아이는 사탕이나 과자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이 좋았을 것이고, 어쩌면 자신의 몸에 닿는 어른의 손길에서 가벼운 쾌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슈퍼마켓 아저씨가 제공하는 물질에 넘어 가고, 어쩌면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 성적인 쾌감을 즐겼을지도 모르며, 알만한 나이가 되어서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오랜 기간동안 부적절한 관계를 지속해 온 그 여자아이를 탓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사라의 담임 선생님의 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사라가 겪고 있는 일을 짐작하신 담임 선생님이 사라가 벌거벗은 체 미술 선생님의 손길을 받아 내고 있던 화실로 찾아 왔을 때 그녀는 그 동안 혼란스러웠던 자신의 심경을 말한다. 믿고 따르는 미술 선생님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손길이 자신에게 닿는 것이 좋았다고.. 유아가 4살 정도만 되어도 성적인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사라가 그런 느낌과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미술 선생님과 자신의 은밀한 관계가 잘못된 것임을 느끼고 있었고, 더구나 육체적인 접촉으로 쾌감을 얻는 자신이야말로 벌을 받아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라는 담임 선생님에게 자신이 감옥에 가야 한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앞의 예와 마찬가지로 사라가 미술 선생님의 목소리를 좋아하고, 그의 손길에 쾌감을 느낀 것을 탓해서는 안될 것이다. 담임 선생님이 절규하듯 외치는 말처럼 사라는 결코 그 남자에게 몸을 준 것이 아니며, 미술 선생님은 사라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이용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얼어붙은 운하와 사라의 이상한 행동을 지켜보면서 미술 선생님 역시 20년 전에 성폭행을 당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고 괴로워 한다. 아이들에게 성 추행이나 성폭행을 하는 가해자가 안면이 있는 사람이나 혈연관계가 있는 친척들일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사라의 담임 선생님 역시 여덟 살이란 어린 나이에 치유되지 못할 상처를 안겨 준 사람이 바로 삼촌이었다. 그 삼촌이 찍은 사진 속에 갇힌 소녀, 그리고 미술 선생님의 그림 속에 갇혀버린 사라..

사라와 선생님의 여성으로서의 성장은 어린 아이를 성적인 대상으로 삼은 그들에 의해 흐르지 않는 운하처럼 어린시절에 멈추고 얼어버렸던 것일까? 기실 담임 선생님이 사라에게 한, 결코 몸을 준 것이 아니라는 말이야말로 성폭행을 당하고 오랜 세월을 고통 속에 살아 온 자신에게 하고픈 말이었을 것이다. 간간히 과거의 모습이 묻어나고, 그 고통을 딛고 일어서려고 몸부림치는 심정을 담고 있는 일기를 보면서 오히려 그녀가 더 안쓰러워지기까지 했다.

한가지 주목할 것은 인형을 가지고 놀 나이가 지난 사라가 그토록 집착한 인형의 모습이다. 벌거벗겨져 있고, 배에 라이터로 지진 흉터가 있으면 머리카락이 흉하게 잘려져 있는 인형의 모습이야 말로 바로 감추어져 있던 사라의 진정한 모습이었으리라 . 미술 선생님과의 은밀한 관계가 나쁜 것임을 자각하면서도 그의 행동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기에 자신과 동일시 하는 인형에게 배를 태우는 형벌을 내렸고, 여성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긴 머리카락을 남자아이처럼 짧게 잘라버렸던 것이다.

사라의 인형을 외면하고 버리려 하는 엄마의 행동을 보면서 사라는 엄마가 결코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엄마가 외면하며 버린, 흉터자국의 엉망이 된 벌거벗은 인형이야 말로 사라 자신의 모습이었으니까.. 이미 단단히 얼어버린 사라의 마음은 수사관이 다녀간 후 자신을 향해 팔을 벌린 엄마를 외면하게 만든다. 미술선생님에게 가기 싫어하는 사라를 윽박지르기만 하는 엄마의 태도에 화가 났었는데, 어쩌면 그 모습이 앞으로의 나의 모습은 아닐까 하는 염려도 생겼다. 아니, 이 책을 보았으니 그런 엄마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 운하는 녹아서 흐르는데 황폐해진 사라의 영혼은 누가 치유해 줄지 걱정이 되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컸기에 사랑할 줄 모르는 엄마에게서는 그런 것을 기대하기 힘들 테니까.. 그녀 스스로 상처를 딛고 일어서길 바랄 뿐이다.

얄팍한 책의 두께에 비해 너무나 마음을 어둡고 무겁게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며칠 내내 가슴에 걸려 있던 책이다. 사라나 선생님이 겪은 일을 결코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있으며 온전히 독자의 짐작과 상상력에 떠맡기고 있는데, 그러한 작가의 의도가 오히려 책을 읽는 독자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 같다. 나 역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쩌다 그런 일이 생겼을까, 평생을 짊어지고 살 아픈 기억을 어떻게 해야 하나… ‘수많은 생각으로 행간을 메우느라 얇기만 이 책 한 권을 다 읽어 나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내가 두 딸아이의 엄마이기에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가 더욱 가슴을 어둡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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