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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ㅣ 0100 갤러리 15
바르트 무이아르트 지음, 볼프 에를브루흐 그림, 임정은 옮김 / 마루벌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천지 창조를 주제로 한 그림책을 몇 권 접해 보았는데 이 그림책은 조금 색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아무도 없었다... 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었으며, 오직 '하느님과 나뿐(그들이 앉은 의자도~)'이었다는 형식으로 화자인 나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 역시 위대하면서도 근엄한 모습이 아니라 장난기 넘치는 모습으로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들고 "좋아~', "그래, 그래."하고 말씀하시곤 한다.
하느님이 무엇을 창조할 때마다 '나'는 그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대하기보다는 희한한 우연일거라 여기며,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었을 때는 하느님과 나는 아주 작다고 여겼는데, 하느님이 낮과 밤을 만드신 순간, 하느님이 자기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뿌루퉁한 모습으로 인정하기 힘든 사실을 부정하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듯이 결국 어떤 일이든 생기는 거라고 말을 한다. '나'는 그림 상으로는 어른 분위기를 풍기는데 하느님에게 이것저것 따져 물어보고, 심통을 부리는 모습이 마치 어린 아이를 보는 것 간다.
생명이 시작되자 '하느님은 기쁨이며 모든 것'인데 '나는 형편없이 생긴 데다 아무 짝에 쓸모없'다며 점점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깨달아간다. 개인적으로 관련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나는 낮추고 신을 경배하는 것이 신을 믿는 종교인의 마음가짐이 아닌가 싶다. 하느님의 손끝에서 생겨난 동물들을 보며 '나'는 진심으로 좋다고 말하지만 하느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모든 것에 엄격하나 '나'에게는 그렇지 않는 하나님은 자신이 실패작이라고 외치는 나를 가리키고 이어 다른 곳을 가리킨다. 그러자 '엄지손가락을 몇 번이라도 세울 만큼 대단한 일'이 생긴다.
유아가 소화해 내기에는 글의 분량이 제법 되는 작품이지만 글을 읽다 문득문득 미소가 떠오르게 하는 그림책이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의 그림 작가인 볼프 에를브루흐가 그림을 그렸는데 아무 것도 없던 세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므로 그림 전반에 걸쳐 여백이 많은 비중--콜라주 기법을 쓴 부분도 있음-을 차지하고 있다.
- 200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