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밤

 

    1


    불 끈 영혼들이여, 절망은 기차처럼 지나간다. 창문마다


    손바닥 같은 불빛을 달고. 창문 전체가 불빛인 절망의 날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문은 열려 있다. 그 문


    을 네가 만든 것이 아니듯이, 네 스스로 그 문을 닫을 수는


    없다.


    2


    땅거미가 질 무렵 하나, 둘 켜지는 불빛은 이제 네가 졌음


    을, 결정적으로 패배하였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종일 네가


    이기려 했기 때문이다. 네가 짓밟고 있는 세상을......기어


    코 이기려 하는 한, 애초에 너는 지게 마련이다.


                   <이성복>       



내가 만들지 않은 문이어도.. 스스로 닫겠다 마음먹을 수 있다..

결정적으로 패배하는 일보다 더 두려운 일 앞에서는

행복을 선택하듯 불행을 선택할 수도 있다..

모든 싸움에는 ‘순정’이 끼어들면 낭패다.

때로 어떤 선택은 순정 때문에 골때려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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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새소리



병이란 그리워할 줄

모르는 것

사람들은 그리워서

병이 나는 줄 알지 그러나

병은 참말로 어떻게

그리워할지를 모르는 것


오늘 아침 새소리

미닫이 문틈에 끼인 실밥 같고,

그대를 생각하는 내 이마는

여자들 풀섶에서 오줌 누고 떠난 자리 같다


<이성복>

 

 

그래.. 그런 것 같다..

그런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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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er 2005-03-29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엇, 그리워서 병이나기도 하는데... ^^

rainy 2005-03-30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워서 병.. 마음껏 그리워 못해서 병..
병이 그칠 날이 없는 나날들.. 후훗..
 

 

가장 좋지 않은 경우다.

아이를 재우면서 함께 잠이 들었다가 두어 시간 후에 깨고 마는 것.

속수무책으로 다시 잠들 수도 일어나 앉을 수도 없는..

잠자리에 누운 채로 한 시간쯤은 다시 잠들려 애써보지만

그럴 때 다시 잠든 기억은 없다..

한 시간쯤 누워서 눈도 감아보고 어젯밤의 공상과 연결된 이야기도 만들어보고

멀쩡히 잘 자고 있는 아이의 발도 만져보고 머리도 쓸어주며 말도 걸어본다.

나 때문에 아이를 몇 번 뒤척이게 한 후 

마치 아주 급하고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던 사람처럼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는 걸레를 빤다.

향이 좋은 바디샴푸를 골라 아주 열심히 걸레를 빤다.

헹구고 또 헹구고 또 헹궈낸다.

빨아놓은 걸레 세장을 옆에 나란히 두고 켠 새벽 3시의 텔레비전에선

온통 지저분한 사랑과, 지저분한 배신과, 지저분한 슬픔의 이야기 투성이다.

텔레비전 속의 그여자 때문에, 그남자 때문에 조금 운다.

빨아놓은 걸레 옆에 휴지 더미가 쌓인다.

잠깐 잘 때 꾼 꿈에선 창밖 어둠이 무서워 간이 졸아붙었었는데

지금은 꿈에서만큼 무섭지는 않다..

곧 날이 더워지면 창문을 열어야 할 텐데

어쩌면 이사를 해야 할 만큼 심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몹시 난감해진다..

견딜 만 하다.. 견딜 만 하다고..

견딜 만한 가운데 가끔 견딜 수 없는 것은 무엇이더냐고 나에게 묻는다.

운전을 했으면 좋겠다고, 나만의 차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남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의 볼륨으로 음악을 켜고

남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의 소리를 내고 울 수 있음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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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이름 하나라도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 때 너무 멀어서 못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 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이기철>

 

희망과 꽃밭만 가꾸는 것 인줄 알았다..

망각이나.. 폐허도 가꿔야 하는 것임을..이제는 알겠다..

희망이나 꽃밭은 저절로도 아름답지만

망각이나 폐허는 방치하면.. 돌보지 않으면

생의 팔 다리가 잘려나가는 것임을..


잊혀지면 안식이 되는 이름..

하지만 잊지 않겠다..

한순간.. 생의 가장 추운 순간에

그 이름이 마음 끝에 닿아.. 등불이 되는 순간을

포기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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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꼭 누군가가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만이 실종일까

누군가의 앞에서 예고없이 헤어짐을 요구하고

지금까지 알아왔던, 적어도 안다고 믿었던 것에서

비껴가는 것..

그것은 실종이 아닐까

그것도 일종의 실종이 아닐까

어제까지 내가 알고 있던 니가 아니게 되어 버린 것

내 마음에서 비껴가 버린 것 

감정의 배선이 얽혀버린 듯 너를 예측 할 수 없고

너를 향해 내렸던 확신이 하나도 맞지 않게 되어 버리는 어느 순간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먼 곳으로 훌쩍 떠나버리는 것에 다름 아니란 생각..

내 앞에서 영원히 미결 상태로 실종되어 버린 너, 너들은

나와 만난 적은 있었느냐고.. 묻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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