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의 배경. 이홍장의 근대화와 달라진 외교정책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 중국적 근대화의 길을 걸었고 그 성과로 
일본, 러시아, 프랑스의 도발에 단호히 대처했다. 
이홍장의 양무운동을 그동안 내가 과소평가했음을 
알게 되었다. 


1880년대에 이홍장은 중국군의 근대적 개혁을 추진합니다. 또1881년에는 신장평정에 힘썼습니다. 중국의 서부 신장에지역의이리伊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권이지만 청의 지배 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야쿠브 베그가 새로운 국가를 세웠습니다. 그러자 청 정부는 신속하게 군대를 보내 이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질서 회복을 도모하는한편, 러시아와는 영토 일부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이리조약‘을 맺었습니다. 이홍장의 무력 대응이 효과를 거둔 셈입니다. - P98

임오군란에.....적극 관여했습니다. 그 결과 조선에서는 친청파가 힘을 얻게 됐습니다. 애당초 대원군을 연행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청이 강하다는 증거였습니다.
1884년 12월 김옥균 등의 개혁파는 청의 후원을 받는 민씨 정권을타도하기 위해 일본공사관의 도움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일본공사관 측은 청이 프랑스와의 전쟁, 즉 청프전쟁에 정신을 빼앗긴틈을 타 거사를 추진한 것입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에 의해 진압됐고, 조선 정부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결정적으로 약해졌습니다. - P100

게다가 청은 안남과의 관계에서도 대응책을 바꾸었습니다. 조선의갑신정변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청프전쟁이 바로 그것입니다. 프랑스는 영국이 중국의 창장강長江(양쯔강 유역, 화중 지방을 세력권으로 하는 것에 대응해, 그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했습니다. 중국의 화난지방과 안남으로 말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1884년 프랑스가 베트남의 항구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청은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이것이 청프전쟁입니다. 청은 초기의 함대 결전에서는 대패하지만, 그 후 육상 전투에서는 상당히 선전했습니다. 그결과 강화조약은 비교적 청에 유리하게 맺어졌습니다. 여기서 열강은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청은 무력을 써서라도 화이질서 (조공체제) 아래에 있는 안남을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 P101

러시아·프랑스 · 일본이 각각 청의 화이질서에 도전하는 분쟁을 일으켰는데, 이들을 상대로 청이 제대로 대응한 셈입니다. 이것은 청에그만한 힘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880년대 중반시점에서는 일본식 발전, 중국식 발전 둘 다 가능성이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중국식 발전은 중국 스스로 화이질서를 근대국가에 적응할 수있도록 조금씩 바꾸어가며 힘을 키우는 방식입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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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봉건 체제에 따르면 ‘군자’가 ‘군자’이고 ‘야인’이 ‘야인’임을 결정하는 것은 신분이었습니다. ‘군자’는 귀족의 왕관학을 배웠고 ‘야인’은 그런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는 개인의 선택과는 무관했습니다.

그런데 춘추 시대에 이르자 선택의 기회가 생겼고 각기 다른 선택의 결과도 나타났습니다. ‘야인’에게는 귀족의 예악 교육을 택할 기회가 생겼으며, ‘군자’도 자기가 원하는 시기를 택해 예악을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귀족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이 반드시 일정한 책임을 지는 관행도 약화되었습니다. 일부는 국정과 외교에 참여했지만 일부는 한평생 귀족이라는 허명만 내걸고 빈둥거리며 살았습니다. - < 논어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공자가 여러 나라를 주유한 것은 관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키워 낸 ‘쓸모 있는’ 인재들을 데리고 각국에 들러 군주들에게 추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급변하는 정국에 대응하기 위해 당시 각국에서는 모두 인재를 필요로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자는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이 예의를 두루 익힌 데다 예의 근본정신까지 이해하여, 각국의 구舊귀족보다 훨씬 더 유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놀라운 광경입니다. 한 스승이 제자들을 이끌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제자들을 등용하고 능력을 발휘하게 해 줄 군주를 찾았던 겁니다. 내일은 어떤 곳에 닿을지, 또 어떤 권세가의 후원으로 다음 끼니를 때울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은 밤낮으로 위험천만한 생활을 함께했습니다. 그러다가 도중에 뜻밖의 재난을 맞아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굶어 죽을 뻔한 것이지요.
- < 논어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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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와 ‘야인’이 전통적인 의미로 쓰여 주로 신분의 차이를 가리킵니다. 대부 이상의 인물은 ‘군자’라 불렀고 대부보다 신분이 낮은 인물은 ‘야인’이라 불렸지요. 때로는 ‘야인’ 대신 ‘소인’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야인’은 ‘소인’보다 더 오래된 용어로서 본래 ‘국인’國人과 짝을 이루었습니다. ‘國’(국)이라는 글자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가리키므로 ‘국인’은 곧 성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야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성을 둘러싼 주변 지역에 사는, 신분이 낮은 사람이었습니다. - < 논어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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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축화 가설은 흥미롭지만 가축화의 시기를 농업혁명 이후로 설정한 것은 오류 아닐까? 농업혁명은 계급사회의 시작이라고 하는데 가축화가 동시에 진행되었을까?

수렵채집 부족이었던 인간은 농경을 시작하고 문명을 꽃피우면서풍부한 잉여생산물을 갖게 됐다. 보노보가 에덴동산에 들어간 것과 비슷했다. 사냥꾼의 큰 덩치와 동물을 잡는 근육, 길 찾기에 대한 감각 같은 선택압력은 줄어든 대신 폭력적 충동을 억누르고 친척과 동료와 협력하고 사회적 기술을 향상시키는 선택압력이 증가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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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였을까? 왜 보노보는 침팬지와 다른 진화의 길을 걸었을까?
과학자들의 추측은 이렇다. 약 200만 년 전 서아프리카 콩고강의 지형이 바뀌면서, 보노보와 침팬지의 공통 조상 가운데 일부 집단이 강남쪽에 격리됐다. 양질의 식물이 널려 있었고, 경쟁자인 고릴라도 살지 않았다. 먹이가 풍부한 ‘에덴동산‘ 같은 곳이었다. 생존을 위한 폭력과 쟁투, 종간 경쟁이 필요 없었다. 그래서 집단 내에서 긴장을 해소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기술과 행동이 진화하기 시작했다. - P93

진화인류학자 브라이언 헤어Brian Hare와 리처드 랭업 Richard Wrangham이때 보노보의 ‘자기가축화‘ self domestification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자신을 사육해 평화와 안정을 획득한 동물. - P94

보노보도 가축의 일반적 특성을 가졌다. 보노보는 다른 가축처럼 어른이 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고, 침팬지에 비해 두개골이 작고, 전체적으로 골격이 덜 성장한 것처럼 보인다. 반면 공감능력과 관련된 두뇌 회백질의 영역은 더 크다. 어른이 된 보노보의 행동도 유아기 침팬지의 것들이 많다. 성적인 놀이와 까불기, 장난치기 같은 것들이 사회적행동 양식을 지배했다. 두뇌의 호르몬과 혈중 화학물질이 전형적인 아동기 수준으로 유지돼, 침팬지와 비교했을 때 공격성을 억압하는 세로토닌 수치가 높은 반면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는 낮았다. - P94

보노보가 스스로를 길들였다는 가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최근이 가설은 인간도 ‘자기가축화한 종‘이라는 데까지 나아갔다.  - P100

힘이 세지만 힘을 쉬이 쓰지 않아 존경받는 사람 이러한 권력을 중심으로 사회적 처신을 잘하는 사람이 성공하게 됐다. 이런 잣대는 배우자 선택에도 적용되어, 친화력과 사회성 높은 형질이 강화됐다. 환경 운동가 칼 사피나Carl Safina 는 "자연에서 벗어나 농장에 정착하면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또 하나의 농장동물이 됐다"고 썼다!
문명이란 좀 더 공손해지는 과정이 된다. 그렇게 역사는 흘렀다.
인간이 가축이냐고? 그 말이 부담스럽다면, 인간이 스스로를 길들였다고 해 두자. 인간이 다른 존재를 만날 때, 공격이나 배제보다는 관용과 협력을 택했고 그러한 사회적 기술이 진화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도 가축화 신드롬이 가리키는 몸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보다 두개골과 골격이 작아지고 얼굴은 짧아졌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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