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기싸움의 역할

왕실 근위병 교체 문제를 두고 전 대신이 교체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고종이 이렇게 선언했다. 윤5월 3일(양력 6월 25일)이다.

“작년 6월(양력 8월) 이후 칙령과 재가 사항은 어느 것도 내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철회한다.”15

자기 마음대로 근위병조차 못 갈아치우는 데 나온 분통이었지만, 이날로 실질적인 개혁은 끝났다.
일본 외교 기록에 따르면 기 싸움에서 패배한 대신들은 ‘공포 속에 사표를 냈다.’ 고종은 이날로 ‘군국기무처’가 진행해왔던 근대화 작업을 전면 무효화했고 민씨들이 조정으로 복귀했다. 고종 측근 조직인 궁내부는 순수한 민당閔黨, 즉 러시아당과 미국당으로 단결하여 그 세력은 내각을 압도했다.16 - < 매국노 고종, 박종인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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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금도로 유배됐던 조병갑은 1년 2개월 뒤인 1895년 7월 3일 다른 탐관오리 259명과 함께 석방됐다. 실록에 기록된 석방된 자들 가운데에는 민영준閔泳駿, 민영주閔泳柱, 민형식閔炯植, 민병석閔丙奭, 민응식閔應植, 민영순閔泳純도 포함돼 있었다.102

민영준은 앞서 말한 바와 같고, 민영주는 민형식과 함께 민씨 세 도둑으로 지명된 사람들이다.103 민병석과 민응식은 1885년 이후 고종이 설치한 ‘내무부’ 독판을 역임한 부패 실세였다.104 민병석은 평안감사 시절 저질 재료로 당오전을 찍어내 백성을 괴롭히는가 하면 30만 냥을 고종에게 바쳐 외조카를 과거급제시킨 오리汚吏였다.105 민응식은 임오군란 때 충주 장호원에 있는 자기 집으로 민비를 피신시켜 출세한 고종 척족이었으니, 부패한 전원과 부패한 구체제가 전부 부활한 것이다.

풀려난 조병갑은 1898년 양력 1월 2일 대한제국 법부 민사국장에 임명됐다. 1898년 7월 18일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고등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때 재판부 판사가 고부에서 쫓겨난 조병갑이었다.106 분노한 김병시 말처럼, 이게 나라며 이게 나라 지도자인가. - <매국노 고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9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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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서 19세기 전반까지 조선왕조 재정은 중앙재정과 지방재정이 각각 쌀 100만 석으로 도합 200만 석 규모였다. 여기에 각종 부가세까지 도합 400만 석으로 동세기 국내 총생산의 5% 정도였다고 추정된다.39

고종이 왕위에 오른지 40주년이 되는 1904년 대한제국 예산은 1,421만 원이었다. 이를 추산하면 대한제국기 실질적인 정부 재정 규모는 18~19세기 전반에 비해 거의 2분의 1 이하로 축소돼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은 천하의 가난한 정부로 추락해 있었다.40 - < 매국노 고종, 박종인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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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uttyclay > 중국 문화의 키워드 - 과거제도

오래전 글이지만 읽을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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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이 직면한 절충의 문제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신체적 노력과 번식 노력 간의 절충으로, 이것은 ‘자신에게 투자할 것이냐, 아니면 새끼에게 투자할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두 번째는 직접 번식과 간접 번식 사이의 절충으로, ‘자신이 직접 번식할 것이냐, 아니면 친척의 번식을 도울 것이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짝짓기와 양육투자 간의 절충으로, ‘더 많은 짝을 찾아 나설 것이냐, 아니면 현재의 새끼에게 투자할 것이냐’의 문제다. 네 번째 절충은 ‘새끼의 수와 질質 중 어느 쪽에 투자할 것인가’의 문제로 요약된다. - < 센스 앤 넌센스, 케빈랠런드,길리언브라운 지음, 양병찬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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