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금도로 유배됐던 조병갑은 1년 2개월 뒤인 1895년 7월 3일 다른 탐관오리 259명과 함께 석방됐다. 실록에 기록된 석방된 자들 가운데에는 민영준閔泳駿, 민영주閔泳柱, 민형식閔炯植, 민병석閔丙奭, 민응식閔應植, 민영순閔泳純도 포함돼 있었다.102

민영준은 앞서 말한 바와 같고, 민영주는 민형식과 함께 민씨 세 도둑으로 지명된 사람들이다.103 민병석과 민응식은 1885년 이후 고종이 설치한 ‘내무부’ 독판을 역임한 부패 실세였다.104 민병석은 평안감사 시절 저질 재료로 당오전을 찍어내 백성을 괴롭히는가 하면 30만 냥을 고종에게 바쳐 외조카를 과거급제시킨 오리汚吏였다.105 민응식은 임오군란 때 충주 장호원에 있는 자기 집으로 민비를 피신시켜 출세한 고종 척족이었으니, 부패한 전원과 부패한 구체제가 전부 부활한 것이다.

풀려난 조병갑은 1898년 양력 1월 2일 대한제국 법부 민사국장에 임명됐다. 1898년 7월 18일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고등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때 재판부 판사가 고부에서 쫓겨난 조병갑이었다.106 분노한 김병시 말처럼, 이게 나라며 이게 나라 지도자인가. - <매국노 고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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