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기싸움의 역할
왕실 근위병 교체 문제를 두고 전 대신이 교체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고종이 이렇게 선언했다. 윤5월 3일(양력 6월 25일)이다.
“작년 6월(양력 8월) 이후 칙령과 재가 사항은 어느 것도 내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철회한다.”15
자기 마음대로 근위병조차 못 갈아치우는 데 나온 분통이었지만, 이날로 실질적인 개혁은 끝났다.
일본 외교 기록에 따르면 기 싸움에서 패배한 대신들은 ‘공포 속에 사표를 냈다.’ 고종은 이날로 ‘군국기무처’가 진행해왔던 근대화 작업을 전면 무효화했고 민씨들이 조정으로 복귀했다. 고종 측근 조직인 궁내부는 순수한 민당閔黨, 즉 러시아당과 미국당으로 단결하여 그 세력은 내각을 압도했다.16 - < 매국노 고종, 박종인 >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