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선택과 구별되는 성선택

- ‘이성의 바람직한 속성에 대한 의견일치‘라니.... 이게 어떻게 동성간 생존경쟁을 위한 바람직한 속성과 괴리되는지가 의문이다.


˝성 선택이 작용하는 두 번째 수단은 이성 간 선택(성간 선택) 또는 차별적 배우자 선택이다. 한쪽 성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이성의 바람직한 속성에 대해 의견 일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면, 그러한 속성을 지닌 반대 성의 개체들은 배우자로 선택받는 데 유리할 것이다˝ - < 진화심리학, 데이비드버스 지음, 이충호 옮김 > 중에서

만약 예를 들어 암컷이 혼인 선물을 주는 수컷과 짝짓기를 하길 선호한다면, 혼인 선물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는 속성을 지닌 수컷의 빈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질 것이다. 다윈은 이러한 이성 간 선택 과정을 암컷 선택이라고 불렀는데,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동물계 전체에서 많은 종의 경우 어떤 상대와 짝짓기를 할지 차별하거나 선택하는 쪽은 암컷이었기 때문이다.

성 선택론은 다윈을 고민에 빠뜨렸던 모순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예를 들어 공작의 꽁지깃은 이성 간 선택 과정 때문에 진화했다. 암컷 공작은 가장 화려하고 찬란한 깃털을 가진 수컷과 짝짓기를 하길 선호한다. 그리고 암컷에 대한 성적 접근 기회를 놓고 수컷들끼리 신체적 싸움을 벌이는 종에서는 수컷이 암컷보다 몸집이 훨씬 큰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동성 간 경쟁 과정의 결과이다. - < 진화심리학, 데이비드버스 지음, 이충호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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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물학에서 진화심리학으로

1975년 하버드 대학의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사회행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자는 취지로 새로운 학문 분야인 사회생물학을 창시했다. 하지만 남성우월주의와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학문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이 분야의 학자들은 공개적으로 스스로 사회생물학자라고 일컫기를 꺼려했다. 진화심리학은 바로 이 무렵에 탄생했고 실제로 많은 사회생물학자들은 기꺼이 진화심리학으로 전향했다.

그러나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현대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은 일부일처제를 따른다. 하지만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와 한 인터뷰에서 “마음으로는 수없이 많은 간통을 저질렀다”고 고백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처럼 우리의 심리와 드러나는 행동 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사회생물학이 행동의 진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진화심리학은 그런 행동을 유발하는 심리 기제의 진화까지도 분석하는 학문이다.
- < 진화심리학, 데이비드버스 지음, 이충호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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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 인간 가설의 부정

인류 역사가 이른바 ‘피로 얼룩진 역사‘라는 생각은 오늘날 오류로 판명 났다. 애초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화석에 대한 다트의 해석이 틀렸던 것이다. 화석이 부서진 것은 표범의 공격을 받았거나 무너진 동굴 잔해에 의한 것이었다. 게다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기본적으로 육식을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였다. - P262

수렵과 동료에 대한 공격을 결부시키는 생각도 별로 신빙성이 없다. 포유류를 대상으로 동종개체에 대한 살해 비율을 조사한 연구가 있다. 여기서 인류가 보인 결과값이 급격하게 올라간 시점은 농경이 시작된 이후의 일이다. 생각해보면 수렵으로 생활하는 동료를 살해하면 얻는 것이 별로없다. 그러나 농경을 시작하면 식량이나 재산이 많은 동료가 나타난다. 그런 동료를 살해하면 얻는 것이 클 것이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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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와 순자의 차이를 통해 맹자 사상의 요지를 복원해 보면 우리는 인간 내면의 자주적인 각성 능력을 강조한 맹자의 견해가 중국 전통에서 진정으로 주류였던 적이 없음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 < 순자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정주가 육왕을 비판한 것은 유가와 불교의 차이를 보여 준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맹자를 이해하지 않고 또 맹자의 이론을 수용하지 않았던 태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정치적인 면에서 보면 맹자는 더욱 주변적이었습니다. 역대 어느 황제든 진정으로 맹자의 학설을 믿고 맹자의 정치 이론을 실천한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비록 말과 글로는 ‘공맹’을 들먹이곤 했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흔히 순자의 주장과 가르침이었음을 명확히 알게 됩니다 - < 순자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명백히 순자에게서 비롯된 사상과 학설이 왜 훗날 순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게 되었을까요? 그 중요한 역사적 이유는 바로 순자가 예와 법의 절대적인 구분을 제거하는 동시에 유가와 법가 사이의 가장 분명한 차이도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공자와 맹자의 사상이 법가와 혼동되는 것은 절대 금물이었습니다. 순자의 성악론은 실질적으로 예를 법의 방향으로 크게 한 발자국 나아가게 한 것으로, 당시 나날이 성행하던 법가 쪽으로 크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가 자신의 입장을 세운 것이기도 했습니다. - < 순자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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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는 맹자와 달랐을뿐더러 학설과 이론의 근본적인 차이로 인해 맹자와 조화를 이루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맹자의 사상에서 예와 법은 각기 다른 층위에 속하는 범주입니다. 예는 인성의 근본 이치에서 비롯되지만 법은 부득이하게 마련되고 선택되는 보조 수단입니다. 이와 상대적으로 순자의 사상에서 예와 법은 그런 근본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예는 법과 마찬가지로 인위적으로 고안된 외적 질서로서 사람의 내적 본성과는 무관합니다. 예는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것이며, 법은 강제되고 벌을 피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예와 법은 본질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정도에 따라 구분됩니다. - < 순자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만약 사람이 “교육을 받으면” 예를 익히고 준수해 자격에 맞는 공민公民이 됩니다. 하지만 “교육을 받지 않아도” 법의 강제적인 규제를 받으면 역시 정해진 행위의 틀을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예는 법과 연속적인 것으로, 가장 엄격한 예는 법의 영역으로 들어갔고 가장 느슨한 법도 예의 범위와 중첩되었습니다. 양자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았지요.

배움의 과정에서 규칙을 내면화해 더는 규칙의 조항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바로 예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내면화하지 못했을 때 준수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하고, 또 준수하지 못했을 때 징벌에 관한 유무형의 압박을 주는 것이 바로 법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에게는 예의 행위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법에 따른 행위일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배움의 성과에 따라 달라서 양자 사이에는 역시 명확한 경계선이 없습니다.

예와 법은 모두 외적인 것입니다. 단지 예의 외적 작용은 상대적으로 깊고 사람의 내면까지 도달하며, 법의 외적 작용은 상대적으로 얕고 공포와 위협의 성격을 띱니다. - < 순자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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