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는 맹자와 달랐을뿐더러 학설과 이론의 근본적인 차이로 인해 맹자와 조화를 이루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맹자의 사상에서 예와 법은 각기 다른 층위에 속하는 범주입니다. 예는 인성의 근본 이치에서 비롯되지만 법은 부득이하게 마련되고 선택되는 보조 수단입니다. 이와 상대적으로 순자의 사상에서 예와 법은 그런 근본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예는 법과 마찬가지로 인위적으로 고안된 외적 질서로서 사람의 내적 본성과는 무관합니다. 예는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것이며, 법은 강제되고 벌을 피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예와 법은 본질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정도에 따라 구분됩니다. - < 순자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만약 사람이 “교육을 받으면” 예를 익히고 준수해 자격에 맞는 공민公民이 됩니다. 하지만 “교육을 받지 않아도” 법의 강제적인 규제를 받으면 역시 정해진 행위의 틀을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예는 법과 연속적인 것으로, 가장 엄격한 예는 법의 영역으로 들어갔고 가장 느슨한 법도 예의 범위와 중첩되었습니다. 양자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았지요.
배움의 과정에서 규칙을 내면화해 더는 규칙의 조항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바로 예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내면화하지 못했을 때 준수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하고, 또 준수하지 못했을 때 징벌에 관한 유무형의 압박을 주는 것이 바로 법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에게는 예의 행위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법에 따른 행위일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배움의 성과에 따라 달라서 양자 사이에는 역시 명확한 경계선이 없습니다.
예와 법은 모두 외적인 것입니다. 단지 예의 외적 작용은 상대적으로 깊고 사람의 내면까지 도달하며, 법의 외적 작용은 상대적으로 얕고 공포와 위협의 성격을 띱니다. - < 순자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