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노사쿠조는) 일본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고 믿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즐겨 인용했다. 일본이 진정한 강대국으로 경쟁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입헌정부와 그가 말하는 ‘인간 중심의 민주주의‘
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기독교인과 달리, 그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전적으로 찬성하였다. 그의 관점에서, 러시아는 봉건영주였고, 일본은 조선과 만주의 당연한 주인이었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나라를 위해 전쟁에 나가 기꺼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요구하려면, 자신들이 통치받는 방식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후대에 미화하거나 혐오하여 기억하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알려진 것의 기초를 형성하는 사상이다. - P87

바이마르 공화국은 히틀러가 붕괴시켰다. 히틀러의 폭풍 군대의 잔인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 취약성을 지닌 바이마르 제도를 옹호할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극히 소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서로 싸우기에 바빠서 나치의 위협을 제대로감지할 수가 없었다. 일본에서도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옹호하는 세력이역부족이었다.

1916년에 자유주의 사상가 요시노 사쿠조는 대다수 일본 지식인들이보통선거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거권을 혐오했다. 바이마르 제도에 환멸을 느낀 많은 독일 지식인들처럼, 일본 지식인들은 민주주의 정치를 천박하고 수준이 낮으며, 이기적이고 부패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급진적 반자유주의로 다른 한편으로는 병리적인 내향적 성찰로 이어졌다. 이 두 가지가 초래한결과는 서로 달랐다.

20세기 초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일본 철학자는 니시다 기타로다. 불교 사상뿐만 아니라 독일관념론에도 깊이 몰두하였던 그는 새롭고유일무이한 일본식 사유 방식을 체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본성의 정수를 찾으려는 이러한 시도는 독일 이상주의의 일본판이었다. - P90

문부성에서 1937년에 발간한 "고쿠타이의 본의(국체의 근본)"라는 제목의 악명 높은 출판물은 일본인들에게 그들의 ‘소아‘를 ‘포기하고, 그들 존재의 근원을 "천황에게서 찾으라고" 말하였다. 일본인들은 순수한 정신을 가졌다는 면에서 다른 모든 민족보다 우월하고 "본성이 서양 국가의 시민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독소적인 내용인 이 문서는 천황이라는 객체에 용해된 일본인이라는 주체에 대해서 니시다적 관점에서 천박하게 정리한 문서였다. - P91

기타에게 혁명적 폭력은 정치적이라기보다 종교적이며,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자유주의가 표출된 행동이었다. 그는 극우단체들의 회원들과 접촉했고 천황을 종교적 총통으로서 인식하는 국가 사회주의를 주장하는정치 팸플릿을 저술했다. 그는 부패한 소수 지배자와 관료, 은행가, 산업가들에 의해서 국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포획당해왔다고 주장했다. 소수지배자들은 모호한 문구의 메이지 헌법으로 천황의 정치 권력을 제한함으로써 일본 국민들을 속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의 천황‘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하는 쿠데타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개인은 천황과 국가에 자기를 동일시함으로써 자유롭게 된다고 했다. 국가는 유기적 조직체이며 ‘대아포괄적 자아‘라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개인 주체인 ‘소아 흡수한다는 것이다. 제국의 저편에는자아가 신이 되는 열반이 있다고 했다. - P93

기타 잇키는 자신의 아버지가 신봉했던 자유주의에서 멀리 떨어져 나왔다. 살아야 하는 신성한 이유, 더 중요한 것으로서 죽어야 하는 신성한명분을 제시하고 있었다. 기타의 사상은 특히 군대의 청년 장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한 시골 출신이었으며, 기타 잇키처럼국가가 부패하게 되고 질이 저하된 것은 도시의 자본주의 협잡꾼들 때문이라고 비난하였다. 이 청년장교들은 과격한 이상주의에 불타 1936년2월, 천황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하고, 고쿠타이(국제) 배신자들과 부패 관료들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가 진압되고 기타는 배후자로 체포되었다. 만일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그는 아마 정무장관쯤 되었을 것이다. 그는 다른 16명과 함께 처형되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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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가 구상한 새로운 질서의 주요한 축 중 하나인 천황숭배는 신토의 신의 탄생에 기원하는 일본 문화의 바탕으로서, 일본 정신에 내재한, 고대로부터의 의무로 나타난다. 이것은 빌헬름 시대의 독일의 고딕적고안만큼이나 각색된 사실이다. 낭만주의적인 중세 독일의 성처럼 과거에서 요소를 빌려온 것이며, 메이지 시대에 진화된 천황숭배는 야마가타의 징집제 군대만큼이나 근대적인 산물이다. 그 이전에는 일본에서 결코최고의 신으로 천황을 숭배하지 않았다. 에도시대 말기까지 천황은 교토에 거주하며, 문화를 육성해왔고, 일본 관습과 정신의 영적 보호자였다.
당시 신토는 국가 종교나 국가적 우상이 아니었고, 일본 탄생의 신들, 다산, 자연의 축복, 절기의 축제, 애니미즘적 의례의 집합이었다.
고치대 - P65

군대의 최고통수권자이자 신으로서 추앙받는 황제라는 생각은 일본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가 종족의 아버지라는 생각 - 국가적
‘종족‘이라는 바로 그 생각은 19세기 중반 미토학의 국수적 교리와섞인 근대 독일풍의 인종국가론과 유사하다. 문명개화에 대한 야마가타의 권위주의적인 대응을 단순히 근대화 또는 서구화를 막기 위한 것으로만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역시 아이디어를 서양에서 빌려왔다. 그런데 그 아이디어들이 우연히도 매우 비자유주의적인 것들이었다. 그가구상한 교육을 통해 만들어진 일본의 모습은 후쿠자와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일본의 군대식 훈련은 막사에서만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이루어졌으며, 회의하는 개인주의자들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약화되도록 잘 훈련된 순응주의자들을 양성하였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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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과두지배 집단은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길을 선택했다. 이런 선택은 과두지배층이 원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정치적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개념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그들도 헌법과 정치적 대표의 제도가 현대 국가가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조건임은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슬람 국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유사한 문제를 풀기 위해 당시 일본은 고심해야 했다. 근대화를 진행하면서 동시에고대의 전통을 유지하기 원했다. 이것은 독일의 이념과 일본의 신화를 접목하여 달성되었다. 독재자들은 군사 훈련, 신화적 군주제, 혈통과 고향에 근거한 국가관의 선전을 공유했다. - P62

새로운 국가의 질서를 세우는 데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은 비스마르크적 매너를 갖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나 이노우에 가오루 같은 사교 댄서가 아니라, 이토의 오랜 동료로서 무장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그는국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두 가지로서 군대와 교육을 중시했다. 그에게있어 교육은 충성심, 기율, 복종을 가르치고, ‘이기적인‘ 개인주의를 갖지않도록 양성하는 것이었다. - P62

1873년부터 건장한 일본인 남성은 3년간 군대에서, 그리고 4년간 예비역으로 복무해야 했다. 그들 대부분에게그것은 서구화의 첫 경험이었다. 그들은 서구식 제복을 입고, 서구식 막사에서 살았으며, 서구식 군대의 기술을 배웠다. 대다수가 읽고 쓰는 법도 배웠다. 그들이 읽는 내용의 대부분은 민족주의 선전물이었다. 후쿠자와의 학교나 자유토론회 외에는 군대가 메이지 시대의 일본 젊은이들이근대를 경험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 P64

천황의 군대는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그들은 천황의 정책에 의심을품지 않았고, 심지어 그에 대한 개인적 의견도 말하지 않았다. 야마가타의 목적은 군대에서 정치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천황의 의지를군대보다 더 높은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폭동을 예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과정의 결함은 50년 후에 명백히 드러났다. 반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군인의 유일한 의무가 신성한 군주에 대해서만 있었으므로,
천황의 의지를 묵살하는 민간 정치가에 반대하는 반역은 합법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1936년에 열렬한 파시즘 신봉자인 젊은 장교들이 황권에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내각 관료들을 살해한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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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1930년 1970년

1853년에서 1868년....기간을 ‘바쿠후마쓰‘ 또는 ‘바쿠후 말기‘라고 한다. 바쿠후마쓰는 경박하고다소 외설적인 ‘세기말‘을 함축하고 있는 단어로서, 부패한 가부키 연극과 훨씬 뒤에 수많은 검투 영화에서 표현되는 음침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다. 바쿠후 말기는 반란과 진압, 도쿠가와 충성주의자들에 대항하는 남서쪽의 봉건 영주들의 폭력적인 계략, 살인 음모들이 횡행하던시대였다. 그리고 대중적인 광란 상태와 천년왕국이 득세하는 시대였다. 폭도들이 에도를 비롯한 대도시에 모여 신토의 상징들을 갖고 신사를찾아다니며 반라로 거리에서 춤추고 공공연히 성행위를 하고 부잣집을습격하였다. 그러면서 거의 종교적 흥분 상태에 빠져 "괜찮아 괜찮아. 우리가 하는 것은 뭐든 괜찮아!"하고 소리치며 다녔다. 1930년대와 1970년대 초처럼 1869년에도 젊은 극단주의자들이 많이 양산되었다. 나라를 구한다는 방편으로 극단적 폭력을 사용했다. 이것은 안정된 시대에 억눌린통제가 분출된 결과였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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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화가 모두 화려한 것만은 아니었으며 모든 것이 정치적 계산에 기인한 것도 아니었다. 메이지 지식인 몇몇은 일본을 보다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바꾸고자 서양사상을 흡수했다. 후쿠자와 유키치 역시 자만하는 경향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삶은 최고의 메이지 문화를 대표하였다. 스스로가 말하기를 그의 역할은 오로지 "서구 학문을 소개하는기능을 하는 대리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으로 도쿄에 학교를 세웠으며 이 학교는 게이오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서양의 관습과 도덕관을소개하는 그의 책은 엄청난 베스트셀러였고, 그의 여러 출판물은 ‘후쿠자와 문고‘로 알려졌다. - P56

일본 지식인들은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하였다. 독일의 지식인층처럼 일본의 인텔리겐치아도 뒤로 물러나 학문이나 조경을 음미하며 지냈다.
후쿠자와는 기대했던 자유가 종말을 고하는 것에 낙담하였으나, 공개적인 저항은 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 상황을 진지하게 관찰하여 자서전을썼으나 그것을 개인 소장 문고에 묻어 두었다. 한 친구가 그것을 발표하라고 그를 재촉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마흔 살이 넘었고 당신도 그렇다. 우리가 다른사람들을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다음 세대의 일본 지식인에게서도 그대로 반복된 듯하다. 1870년대에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이러한 중요한 관심들이 사라지게되었고, 1945년이 될 때까지 그것의 회생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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