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화가 모두 화려한 것만은 아니었으며 모든 것이 정치적 계산에 기인한 것도 아니었다. 메이지 지식인 몇몇은 일본을 보다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바꾸고자 서양사상을 흡수했다. 후쿠자와 유키치 역시 자만하는 경향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삶은 최고의 메이지 문화를 대표하였다. 스스로가 말하기를 그의 역할은 오로지 "서구 학문을 소개하는기능을 하는 대리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으로 도쿄에 학교를 세웠으며 이 학교는 게이오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서양의 관습과 도덕관을소개하는 그의 책은 엄청난 베스트셀러였고, 그의 여러 출판물은 ‘후쿠자와 문고‘로 알려졌다. - P56

일본 지식인들은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하였다. 독일의 지식인층처럼 일본의 인텔리겐치아도 뒤로 물러나 학문이나 조경을 음미하며 지냈다.
후쿠자와는 기대했던 자유가 종말을 고하는 것에 낙담하였으나, 공개적인 저항은 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 상황을 진지하게 관찰하여 자서전을썼으나 그것을 개인 소장 문고에 묻어 두었다. 한 친구가 그것을 발표하라고 그를 재촉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마흔 살이 넘었고 당신도 그렇다. 우리가 다른사람들을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다음 세대의 일본 지식인에게서도 그대로 반복된 듯하다. 1870년대에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이러한 중요한 관심들이 사라지게되었고, 1945년이 될 때까지 그것의 회생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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