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과두지배 집단은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길을 선택했다. 이런 선택은 과두지배층이 원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정치적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개념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그들도 헌법과 정치적 대표의 제도가 현대 국가가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조건임은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슬람 국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유사한 문제를 풀기 위해 당시 일본은 고심해야 했다. 근대화를 진행하면서 동시에고대의 전통을 유지하기 원했다. 이것은 독일의 이념과 일본의 신화를 접목하여 달성되었다. 독재자들은 군사 훈련, 신화적 군주제, 혈통과 고향에 근거한 국가관의 선전을 공유했다. - P62
새로운 국가의 질서를 세우는 데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은 비스마르크적 매너를 갖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나 이노우에 가오루 같은 사교 댄서가 아니라, 이토의 오랜 동료로서 무장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그는국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두 가지로서 군대와 교육을 중시했다. 그에게있어 교육은 충성심, 기율, 복종을 가르치고, ‘이기적인‘ 개인주의를 갖지않도록 양성하는 것이었다. - P62
1873년부터 건장한 일본인 남성은 3년간 군대에서, 그리고 4년간 예비역으로 복무해야 했다. 그들 대부분에게그것은 서구화의 첫 경험이었다. 그들은 서구식 제복을 입고, 서구식 막사에서 살았으며, 서구식 군대의 기술을 배웠다. 대다수가 읽고 쓰는 법도 배웠다. 그들이 읽는 내용의 대부분은 민족주의 선전물이었다. 후쿠자와의 학교나 자유토론회 외에는 군대가 메이지 시대의 일본 젊은이들이근대를 경험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 P64
천황의 군대는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그들은 천황의 정책에 의심을품지 않았고, 심지어 그에 대한 개인적 의견도 말하지 않았다. 야마가타의 목적은 군대에서 정치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천황의 의지를군대보다 더 높은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폭동을 예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과정의 결함은 50년 후에 명백히 드러났다. 반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군인의 유일한 의무가 신성한 군주에 대해서만 있었으므로, 천황의 의지를 묵살하는 민간 정치가에 반대하는 반역은 합법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1936년에 열렬한 파시즘 신봉자인 젊은 장교들이 황권에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내각 관료들을 살해한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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