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군부에 대한 일본 민중의 지지. 이어진 전쟁에 대한 지지.


드디어 중일전쟁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만주사변은 1931년에 발발했고, 중일전쟁은 1937년에 시작됐습니다. 이 6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 큰 흐름을 살펴봅시다. 먼저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사회가 군부를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입헌제를 채택한 국가에서는 군대의 정치 개입을 금합니다. 특히 물리적인 힘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부당한 것, 옳지 않은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원래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집단(군대)이 많은 사람이 요구하지만 좀처럼 실현되지 않는 정책, 그러니까 정치권에서는 좀처럼 제시되지 않는 정책(농민 구제 및 노동정책)을 실현하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그런 일이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 사이에 6년 동안 벌어졌습니다. - P338

예를 들어 소작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소작법 같은 법률은 모든 농민의 바람이었지만 제국의회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1929년에 시작된 세계대공황이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농촌을 덮쳤습니다. 하지만 정우회도, 민정당도 농민의 부채에는 냉담했습니다.  - P339

농촌은 장병의 가장 중요한 공급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징집유예‘제도가 있어서 국공립 중등학교와 고등학교, 대학 등에 다니는 사람은 징병검사를 받아도 실제로는 군대에 가지 않는 구조였습니다. 또한 대기업, 중화학공업 공장에서 일하는 숙련 노동자도 군대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징병대상자는 주로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계층, 특히 도시가 아닌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농촌의 위기는 국가의 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군부에서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 P340

통제파가 1934년 1월에 작성한 계획서 <정치적 비상사태 발발에 대처하는 대책 요강>에도 농민 구제책이 마련돼 있었습니다. 참고로 정우회의 선거 슬로건에는 농민 구제, 국민보건, 노동정책 항목이 없었습니다. 반면 육군의 정책은 굉장했습니다. 예를 들면 농민 구제 항목에는 의무 교육비의 국고 부담, 비료판매 국영화, 농산물 가격유지, 경작권 보호 등이 있었습니다. 노동 문제에 관해서는 노동조합법 제정, 적정한 노동쟁의 조정기구 설치 등이 있었습니다. 물론 일본이 전쟁을 시작한다면 이러한 육군의 ‘아름다운 슬로건‘은 그림의 떡이되고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은 매우 힘들어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사람은 정치, 사회의 변혁을 위해 육군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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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 11조 - 상하이 사변 15조 - 열하성 침공 16조

조금 세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931년 9월 일본 육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1932년 1월에는 해군이 상하이변을 일으켜 중국군과 전투를 개시했습니다. 중국은 만주사변 당시에는 국제연맹 규약 제11조에 따라 일본을 제소했습니다. 그런데 상하이사변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국제연맹 규약 제15조 위반으로 일본을 제소했습니다. 제11조보다 강도 높은 것이 제15조에 따른 제소입니다. - P333

국제연맹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고 중국의 영토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이 아무리 만주국 내에서 군대를 움직인다 해도, 국제연맹으로서는 그것이 중국에 대한 침략이겠네요.
그렇습니다. 1933년 2월, 국제연맹은 중재안을 제시하며 일본에 마지막 타협을 촉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군이 어엿한 중국 영토인 러허 지역을 침공한다면, 이는 국제연맹 규약 제16조 제15조에 의한 약속을 무시하고 전쟁에 호소한 연맹국은 마땅히 다른 모든 연맹국에 대한 전쟁을 한 것으로 간주한다에 해당합니다. 국제연맹이 분쟁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새로운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국제연맹 소속 국가 모두의 적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국제연맹규약 제 16 조가 정하는 통상 금융상의 경제 제재를 받게 되고 국제연맹에서도 제명 됩니다.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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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의 일본 정치에의 영향

"청일전쟁에서 이겼는데 러시아·독일·프랑스가 불만을 표출하자 일본은 중국에 랴오둥반도를 돌려주어야 했다. 이것은 일본이 전쟁에는 강해도 외교가 약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태도가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국민이 피를 흘려 얻은 것을 제멋대로 돌려주었다. 정부의 그런 결정은 국민에게 선거권이 충분히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 "대일본제국헌법에 따르면, 선전과 강화의 권리는 내각 또는 국무대신의 보필을 받는 천황이 행사한다. 그래서 의회에서는 외교에 관한 논의를 별로 하지 않고, 외교에 관한 정부의 결정을 법률과 예산으로 막지도 못한다. 그러나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수단은 의회밖에 없기 때문에 국민에게 널리 선거권을 갖도록 해서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게 해야 한다"라고도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삼국간섭에 대한 강한 불만 속에서 보통선거운동이 시작됐습니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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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과 삼국간섭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청으로부터 요동반도 대만 펑후 제도 등을 할양 받기로 했다. 그런데 이때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일본에 요동반도 역류에 제동을 걸었다. 결국 삼국의 반대를 못이긴 일본엔 배상금을 추가로 받기로 하고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했다. 삼국 간섭은 청일전쟁의 승리의 열광했던 일본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분노를 촉발했다. 이후 일본은 러시아를 겨냥해 군비확장을 진행했고 이 같은 일본의 움직임은 훗날 러일전쟁으로 이어진다.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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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대단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서 채택된 베르사유강화조약의 제156조부터 제158조를 보면 "산둥의 권익은 일본의 것이 된다"라고 규정돼있습니다. 일본의 요구가 전부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외교가 실패했고 다른 연합국이 일본을 따돌렸다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객관적으로 당시의 일본은 권익을 챙겼습니다. - P265

하지만 때로는 정치·경제 문제보다 의식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가 더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일본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느낀 위기감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앞에서 언급했던 3·1운동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여러분은 세계사 시간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어보지 않았나요?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탄생한 국제연맹에 의회의 반대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파리강화회의 기간 중 윌슨 대통령은 미국에 돌아와 먼로주의 사고방식으로 가득한 의회를 향해 "이제부터 탄생하게 될 국제연맹은 의회가 경계할 만한 것이 아니다. 국제연맹은 결코 선전·강화의 권한 등 미국의 주권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미의회의 권한을 저해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국제연맹의 필요성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의회는 미국이 유럽 제국주의 국가 간의 싸움에 이용당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윌슨의 설득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국제연맹과 보조를 맞추는 윌슨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미국 의회는 윌슨을 비판하기 위해 여론에 호소했습니다. 여기서 돌연 일본과 3·1운동이 등장합니다. 의회는 상당히 선동적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윌슨 대통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독일이 베르사유강화조약을 받아들이도록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 베르사유강화조약이라는 것은 중국을 희생시켜서 산둥반도에 대한 일본의 요구를 전부 받아들인 부당한 조약이다. - P266

일본은 산둥을 식민지로 지배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 지배라는것은 한국의 3·1운동에서 나타났듯이 상당히 가혹한 것이다. 이처럼가혹한 식민 지배를 중국 본토에까지 시도하려는 일본과 윌슨은 타협했다. 일본을 베르사유강화조약의 조인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대략 이런 주장이었습니다.

미국 의회의 이러한 비판을 듣고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가혹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단지 윌슨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해 남의 나라인 일본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상의 문제에 대해 미국 주재의 일본 해군 무관이 작성한보고서가 오늘날에도 남아 있습니다. 어쨌든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은 감정의 상처가 돼, 깊고 무겁게 남았습니다. 1930년대 이후 그 상처는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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