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대단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서 채택된 베르사유강화조약의 제156조부터 제158조를 보면 "산둥의 권익은 일본의 것이 된다"라고 규정돼있습니다. 일본의 요구가 전부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외교가 실패했고 다른 연합국이 일본을 따돌렸다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객관적으로 당시의 일본은 권익을 챙겼습니다. - P265

하지만 때로는 정치·경제 문제보다 의식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가 더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일본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느낀 위기감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앞에서 언급했던 3·1운동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여러분은 세계사 시간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어보지 않았나요?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탄생한 국제연맹에 의회의 반대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파리강화회의 기간 중 윌슨 대통령은 미국에 돌아와 먼로주의 사고방식으로 가득한 의회를 향해 "이제부터 탄생하게 될 국제연맹은 의회가 경계할 만한 것이 아니다. 국제연맹은 결코 선전·강화의 권한 등 미국의 주권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미의회의 권한을 저해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국제연맹의 필요성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의회는 미국이 유럽 제국주의 국가 간의 싸움에 이용당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윌슨의 설득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국제연맹과 보조를 맞추는 윌슨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미국 의회는 윌슨을 비판하기 위해 여론에 호소했습니다. 여기서 돌연 일본과 3·1운동이 등장합니다. 의회는 상당히 선동적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윌슨 대통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독일이 베르사유강화조약을 받아들이도록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 베르사유강화조약이라는 것은 중국을 희생시켜서 산둥반도에 대한 일본의 요구를 전부 받아들인 부당한 조약이다. - P266

일본은 산둥을 식민지로 지배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 지배라는것은 한국의 3·1운동에서 나타났듯이 상당히 가혹한 것이다. 이처럼가혹한 식민 지배를 중국 본토에까지 시도하려는 일본과 윌슨은 타협했다. 일본을 베르사유강화조약의 조인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대략 이런 주장이었습니다.

미국 의회의 이러한 비판을 듣고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가혹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단지 윌슨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해 남의 나라인 일본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상의 문제에 대해 미국 주재의 일본 해군 무관이 작성한보고서가 오늘날에도 남아 있습니다. 어쨌든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은 감정의 상처가 돼, 깊고 무겁게 남았습니다. 1930년대 이후 그 상처는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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