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요 10조 중 8조

왕건은 전라도 나주 지역의 호족 오다련의 딸 장화왕후에게서 낳은 혜종을 후계자로 삼았다. -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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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요 10조」가 후세의 위작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거란의 침략 때 불타 없어졌던 「훈요 10조」가 다시 등장하게 된 과정도 의혹을 부채질하고 있다. 원본이 불타버렸다던 「훈요 10조」는 우연히 경주 출신 최항의 집에서 발견되어 현종에게 바쳐졌다. 현종은 신라계를 외가로 하고, 지지기반 역시 신라 계열의 신하들이었던 왕이다 -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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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화백회의와 로마 원로원의 공통점


신라에서는 왕이 간절히 바랐던 불교가 왜 이렇게도 힘들게 공인됐을까? ...... 그 이유는 우선 신라가 왕권국가로서의 틀을 갖추지 못하고 귀족들의 권력이 막강했던 데 있다. 12개 소국의 연합국가였던 신라는 귀족회의인 화백회의에서 주요 국사를 결정하고, 골품제라는 신분제를 두어 지배층의 지분을 나눠줘야 할 정도로 귀족의 권한이 막강했다. ........
귀족들의 하층민 지배 근거는 바로 자신들이 하늘신의 자손이라는 ‘무속적’ 성격에 있었던 것이다. -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G9k3WfaXEB1t5A7TA



신라는 남녀차별이 거의 없을 만큼 여성의 지위가 어느 시대보다 높았다. 여자도 상속권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경제권도 쥐고 있었다.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절에 시주를 한 기록도 나온다. 또한 혼인을 하더라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남편의 지위와는 별도로 계속해서 보장되었다. 신라는 고대 모계사회의 전통이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오랫동안 남아 있었는데, 이는 두 나라보다 늦게 유교문화를 수용한 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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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의 성씨는 고, 신라는 박,석,김. 그럼 백제는?


- 부여씨.
- 부여 왕의 성씨는 해. 해부루,해모수의 해는 성씨.
- 온조와 비류의 성씨는 왜 고씨가 아닐까?

백제의 시조인 온조는 북부여에서 난을 피해 졸본부여로 온 주몽의 아들이다. 졸본부여왕은 아들이 없어 주몽을 둘째사위로 삼고 왕위를 물려주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가 비류고 둘째가 온조다. 그런데 주몽은 북부여에 두고 온 부인이 낳은 아들이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이에 자신들의 안위가 걱정된 온조와 비류는 열 명의 신하와 백성들을 데리고 한강 유역으로 떠났다. 온조는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하자는 신하의 말에 따라 정착해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다...... 백성들은 온조에게 다시 합류했다. 그 후 백성이 즐겨 따르므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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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의 인간관, 빈서판

˝이러한 주장들은 현재 마음, 뇌, 유전자 진화와 관련된 과학적 발견에 의해 반박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성과 감정의 유전적 뿌리에 대해 전례 없이 깊고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줄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이해를 일깨우는 모닝콜 역할을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 본성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겨냥한 새로운 과학적 도전은 다음과 같은 과제를 남긴다. 만약 우리가 평화와 평등 또는 과학과 진리에 대한 헌신과 같은 소중한 가치들을 지키려 한다면, 우리는 그 가치들을 인간의 심리학적 특성에 대한 엉성하고 박약한 주장들로부터 되도록 멀리 떼어 놓아야 한다.˝





모든 악은 사회적 산물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은 무고한 사람들을 순식간에 살해할 수도 있는 위험한 정신병자들의 석방을 정당화하였다. 그리고 인간이 대규모 사회 정화 운동에 의해 개조될 수 있다는 확신은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잔학 행위들을 낳았다. - P14

인간 본성에 대한 정직한 논의가 지금보다 절실한 때는 없었다. 20세기 전 기간에 걸쳐 수많은 지식인들은 가령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세분할 수 없고, 어떤 비열한 동기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선택의 부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라는 식의 사실적 근거가 희박한 주장에 입각해 존엄성의 원리를 세우려 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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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의 말로 오해하고 있었다


로크와 밀의 연상심리학은 그 후로 오늘날까지 유용한 심리학 이론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것은 특히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심리학을 지배했던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학습 모델이 되었다. 행동주의의 창시자 존B. 왓슨 (1878~1958년)은 빈 서판을 주장한 20세기 최고의 선언을 발표했다

"나에게 열두 명의 건강한 아기를 주고 내가 직접 하나 하나 꾸민 세계에서 그 아기들을 키우게 한다면, 장담하건대 나는 어떤 아기라도 그 재능, 기호, 경향, 능력, 소질, 조상들의 경력과는 무관하게 내가 선택한 유형의 사람 의사, 변호사, 예술가, 상인, 심지어 거지나 도둑으로 길러 낼 수 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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