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 직종별 노동조합의 역할


˝영국의 노동자는 숙련을 그들만의 노하우로 묶어 두는 데는 성공했으나 산업발전에 맞춰 진화해 나가는 데에는 실패했다˝(283)

잠시 영국 산업도시의 사례를 살펴보자. 1960~1980년대 영국에서는 한국의 1987년처럼 노사간 갈등이 첨예했다. 파업과 노사간 갈등이 극에 달해 ‘산업 전쟁‘의 주역으로 불렸던 지역이 바로 북부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리버풀, 요크, 셰필드, 더럼 둥지와 조선소가 많았던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였다. 탄광촌 노동자의 자녀 빌리가 국립 발레단 무용수로 거듭나는 스토리의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배경 더럼처럼, 그때의 영국풍경은 많은 영화의 소재가 됐다.
당시 파업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일을 파괴한다는 의미의 문자 그대로의 파업이 많았다. 노동자는 기계를 세우고 공구를 내려놓고 연좌하여 공장과 작업장 입구를 폐쇄했다. 그들이 작업의 많은 것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동자는 한편으로는 숙련을 장악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하는 프로세스를 장악했다. 경영진과 엔지니어의 기술력만으로 공장을 꾸릴 수는 없다. 게다가 당시 영국은 대체로 직종별 노동조합이라 노동조합을 우회해서 작업자를 모을 수도 없었다. 54일본이 조선 산업을 제패하던 시기가 바로 영국이 기나긴 파업에노출되던 시기와 겹친다. 당시 일본에는 있고 영국에는 없는 게 있었고,
이런 차이가 산업의 흥망성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는 엔지니어가그린 생산설계 도면이 있었고 영국에는 생산설계 도면이 없었다. 영국 조선소는 상세설계 도면을 엔지니어가 제작해 현장에 나눠주면 숙•련 노동자가 작업 방식에 대해 자주 관리 관점에서 토론하고 결정했다. - P184

그에 비해 일본 나가사키에 위치한 미쓰비시 조선소에서는 표준화된생산설계 도면과 작업지시서를 반장이 나눠주면 그에 맞춰 노동자가정해진 구역의 용접을 하고자재를 표준 경로대로 지게차로 날랐다.
앞서 브래버먼의 이야기처럼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위해 중요한것은 작업 절차의 표준화다. 표준화되어 있지 않으면 노동자는 모든작업을 자기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수행하고, 노동자들끼리 일하는 ‘비#FM 프로토콜‘이 생긴다. 관리자와 경영진은 제품의 높은 품질과 낮은 비용, 빠른납기를 바라지만 그 모든 것이 노동자 손에 맡겨진다. 관리자와 경영진이 직접 배를 짓거나 자동차를 만들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의 노동자는 자재의 활용과 재활용, 품질관리, 조업 속도 모두스스로 정하며 노동자자주 관리를 실천했다. 영국은 노동자의 입김이아주 셌다. 그들은 새로 들어오는 예비 신입사원인 견습공(도제)을 어떻게 교육할지, 몇 명을 뽑을지도 결정하려 들었다. 견습공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임금 수준을 떨어뜨릴 것 같으면 아예 채용을 주저하기도 했다." 심지어 노동조합도 기업별 노조가 아니라, 직종별 노조였기 때문에 임금 협상이나 노동조건에 대한단체협상도 모든 직종과 회사가각각 수행해야 했다. 예컨대 오늘은 배관공 노동조합과 협상하고, 내일은 리벳공 조합과 협상하고, 그다음은 전장 설치공 조합과 협상하는식이다. 전장 설치공 조합과의 협상 결과를 빌미로 다시 배관공 노동조합과 협상을 해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러니 의사결정이나사간 협상이 빨리 이뤄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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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산업의 대서사시
- 위험의 외주화, 해고의 외주화, 숙련의 탈각



사내 하청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내 하청 관리 노하우가 필요하다. 조선산업 전문가인 박종식 박사(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1987년 이전까지 조선산업의 관리자는 노동자의 작업 방식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일량과 물량을 던져 주면 노련한 사내 하청의 소사장이나 조장 반장이 알아서 숙련공과 견습공을 조직해 선박 건조를 진행했다. 마치 1960년대 이전 영국과 비슷했다.

현대중공업은 1972년 조선소를 설립할 때부터 일본의 생산설계기법을 도입하고, 유럽의 선체설계를 파악하기 위해 오덴세 조선소 출신을 조선 소장으로 임명하는 등 기술에 많은 투자를 했다. 하지만 생산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는 데는 이른바 ‘축적의 시간‘이 필요했다. - P178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생산 관리자와 엔지니어가 생산 과정에 대한 지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일량과 작업 물량을 산정하기 위한 품셈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정확하게 지시를 줄 수 있을 만큼 공정 파악을 마쳤다고 한다. 생산 관리자는 차근차근 사내 하청 물량을 늘리면서 그들을 관리할 수 있는 수준까지 관리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LNG 선박 수주가 ‘대박‘이 났던 2000년대 초반, 이제 사내 하청을 통한 생산의 최적화가 완료된 시점이 됐다. 이는 다른 한편에서 보면 위험 관리도 일정수준에 올랐다는 말과 같다. 많은 산업 재해, 특히 조선소의 중대 재해는 아직 숙련되지 않은 노동자에게 일어나곤 한다. 물샐틈 없이 관리가 돼야 안전하고 생산성도 올라간다. - P179

2000년대 후반이 되어 해양 플랜트 수주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서도 밝혔지만 조선 3사는 2014년부터 2018년까지 해양 플랜트 수주로 인해 엄청난 수업료를 치러야 했다. 최초에 견적설계 단계에서 일량과 물량에 대한 산정을 잘못했던 것이다. 애초 작업자 10명이 3일에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일이 100명이 일주일 동안 해도 모자라는 일인 경우가 허다했다. 또 해외에서 입고되는 자재에 대한 검증이 기본설계 단계에서 충분히 되지 않아 자재나 장비에서 결품이 나고 다시 주문을 해서 배로 지구 반바퀴를 돌아오는 데 몇 달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공정이 지연되고 많은 사람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공정 흐름이 순탄하다면 10명이 했을 일을 100명이 하는데, 공정마다 그런 일이 발생하니 각 플랜트건조공사에 들어가는 인원은 몇 배, 몇십 배로 늘어났다. 일의 순서는 꼬였고, 안 그래도 배관과 케이블 그리고 많은 인원이 엉켜 있는 작업 구역이 점점 더 위험해졌다. 선박 건조 단계에서 축적했다는 생산 관리의 노하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조선소는 공정 지연과 유가 하락으로 인해 발주처가 선박 인도를 거부하는 일까지 겹쳐 이중으로 엄청난 재무적 손실을 겪었다. - P180

2000년대를 지났을 때 모든 조선소의 주력 공정은 다 하청 노동자들 몫이 됐다. 1990년대부터 정규직 채용을 일정 부분 줄이고 사내 하청 노동자를 활용하기 시작해 누적된 결과다. 2010년대가 됐을 때 왕년의 ‘골리앗 노동자‘와 기계공고 출신 생산직 노동자의 나이가 모두 50대를 훌쩍 넘었다. 용접, 도장, 사상, 취부, 포설, 결선 등 조선소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산재가 나지 않더라도 노동자 다수가 근골격계질환을 앓기 마련이다. 용접 자격증의 등급이 올라가는 것은 편안하지 않은 자세나 수한 재료를 사용할 때인데, 그 말은 숙련된 용접공 노동자일수록 근골격계 질환을 겪기 쉽다는 말이다. 신체가 노화되면 위험하거나 불편한 작업을 하기 어려워지거나 하기 싫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면서 나이 든 생산직 노동자의 적지 않은 수가 생산지원직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구를 들고 용접을 하던 노동자가 공구를 나눠주는 역할로 업무가 바뀐 것이다. 고용이 보장돼 있는 조합원의 빈자리를 사내 하청 노동자가 채우기 시작했고, 당연히 사내하청 노동자의 비중이 그만큼 더 올라갔다.  - P180

위험한 순서대로 공정을 사내 하청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특수도장이, 나중에는 외업의 많은 부분을 사내 하청에 넘겼다. 조선소의 가장 핵심적인 손끝 숙련이 용접인데, 용접을 너무나 쉽게 사내 하청 노동자에게 넘겨 버렸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높은 곳에서의 작업(고소작업)도 넘어가고, 점차 ‘위험의 외주화‘라는 말에 걸맞게 위험작업이 사내 하청에 전가됐다. 지속적인 하청 비율의 확대는 오히려 1987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10년의 기간이 예외였다. 회사는 언제든 하청을 쓰려고 한게 아닌가하고 한탄해야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2000년대까지만 해도 직업훈련소를 나와 사내 하청 업체에 취업해 위험한 작업을 맡고 기술력을 축적하다 보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실제로 직업훈련소에서 기술을 익혀 취업한 10~20퍼센트 정도의 노동자가 직영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그러나 2010년대 해양플랜트로 인한 어려움이 왔을 때, 많은 사내하청 업체가 해양 플랜트 물량이 줄어듦과 동시에 도산했고, 사내 하청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었다. 단순한 해고가 아니고 폐업이었고, 유가 상승으로 해양물량이 줄어드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위장 폐업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 P181

조선소를 찾았던 사람들은 다시 일자리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위험의 외주화‘는 애초 고용 조절의 목적이라는 사내 하청의 본분에 따라 ‘해고의 외주화‘로 전환됐다. 현대중공업은 정규직 조합원에게도 희망퇴직을 진행했지만 해고된 것은 결국 사내 하청 노동자였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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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의 외주화 협약
- 2000년 현대 노사 협약

문제는 이러한 고용 불안에 대한 정규직 노동자의 공포가 다른 한편에서는 ‘외부자‘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적극 전환됐다는 것이다. 현대자동차 노사는 2000년 고용 보장 협약을 체결하면서 16.9퍼센트를 넘지 않는 수준에서 사내 하청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으로 정했다. 

협약의 핵심은 물량이 늘어날 때 정규직을 신규 채용할 수 없을 경우 그 인원만큼 사내 하청을 뽑는 건 노동조합이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측이 생산직 정규직 인원을 채용할 계획이 별로 없으므로, 위의 협약은 사내 하청을 지속적으로 운영하겠다는 노사합의나 마찬가지였다. 노동조합의 사내 하청 허용은 생산 물량이 줄어들었을때 조합원을 해고하는 대신 사내 하청 노동자를 해고해도 된다는 동의였다. 

그리고 현대자동차는 애초 협약에서 정한 비율인 16.9퍼센트를 넘기며 2004년에는 33퍼센트, 2010년에도 25퍼센트 수준으로 하청노동자를 활용했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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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수시채용 전환의 지리적 효과
- 연구 대상

5년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 인사 담당자는 수시 채용이 직원의 정착률을 높였으므로 한편으로는 성공적이라고 말한다. 거제의 한화오션 같은 경우에도 생산관리나 설계직의 많은 엔지니어가 동남권의 조선해양공학과나 전기전자나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경우가 많다. 실제로 그들의 이탈은 많지 않다. 거제도의 두 조선소가 부산·울산·경남지역에서 가장 괜찮은 직장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2015~2016년 조선산업 구조조정이 한창인 상황에서도 이들은 퇴사보다는 그대로 회사에 머물기를 택했다. 현대자동차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생산 부문 담당자는 다른 한편으로 우려를 표했다. 인문사회계열이나 상경계열과는 달리 UNIST가 아닌 울산대나 동남권 대학을 나온 이공계 출신 엔지니어의 경우 기본기‘에서 차이가 난다고 전한다. 예컨대 역학(물리학)과 수학역량이 그 기본기다. 어느정도 정형화된 일을 빠르게, 싹싹하게, 열심히, 노련하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은 지역의 인재가 더 우수할 수 있다. 하지만 어려운 과제를 궁리하고 해결해야하는 일에서는 현업의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울산의 제조 업체는 고용 안정성이 있는 지역 대학 출신 엔지니어와 잠재력이 크고 기본기가 좋은 수도권 출신 엔지니어를 놓고 매번 갈팡질팡하고 있다. - P121

1960~1970년대를 이끌었던 엔지니어의 모습은 기계공고 출신의 ‘작업장 엔지니어 workplace engineer‘였다. 엔지니어의 자질 중 잠재력보다 성실성이 더 중요했던 시기다. 주로 공고나 좀 더 공부했다면 전문대에서 설계나 가공(공작) 등을 배운 후 기술직으로 회사에 입사해 도면을 그리고 자재 관련 기술을 선배 어깨너머로 배우고 숙련을 익혔던 이들이 바로 작업장 엔지니어다. 

이들은 1980~1990년대에 애매한 직군에 있다가 적지 않은 수가 사무직이나 사무기술직으로 전환하게 된다. 

작업장 엔지니어가 일을 하고 또 일을 배우는 방식은 현장에서 현물을 보고 현상을 파악하는 ‘삼현주의‘(현장, 현물, 현상)였다. 엔지니어들은 손과 몸으로 일했다. 또 선배의 작업과 앞선 나라의 현장을 보며 눈썰미로 많은 노하우를 터득했다. 앞서 언급했던 해외의 경쟁사 제품을 가져와서 분해한 후 재조립하면서 그것을 도면에 기록하는 역설계가 전형적이었다. 이것이 현장에서의 암묵지를 통한 엔지니어들의 숙련 축적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은 조선 산업에서는 꽤 오래 유지됐고, 자동차 산업에서도 많은 부분 필수적이었다.  - P122

그런데 이제는 엔지니어링의 잠재력과 기본기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 선배에게 노하우를 전수받는 도제 방식만 가지고 울산 3대산업의 엔지니어 역할을 해낼 수 없다. 이제 조선소에서는 줄자와 모눈종이로 설계를 하는 게 아니다. 모든 제품설계를 CAD(Computer Aided Design) 프로그램으로 수행하고, 생산관리의 많은 것은 센서를 거쳐 생산실행시스템인 MES(Manufacturing Execution System)와 전사자원계획시스템인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 )등을 통해 데이터 기반으로 진행된다. 더나아가 4차 산업혁명이 강조되는 지금 IoT 나 디지털 트윈 등 스마트팩토리로 통칭되는 데이터 기반 공정 운영과 자동화, 로봇의 활용, 현장의 3D/4D 구현은 훨씬 더 심화되는 상황이다.  - P123

많은 일이 기초적인 공학 지식과 자연과학 지식에 기대게 됐다는 것이다. 공과대학 출신 대졸사원을 뽑았던 것도 과학적 관리와 최적화, 공학적 사고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공학 지식, 자연과학 지식, 공학적 사고의 수준이 인문사회 계열과는 결이 다르게 대학에 따라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것이다. - P124

각지역 공과대학은 입학생 수준에 맞는 수업을 할 수밖에 없다. 또 성적 처리도 취업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학점‘(학점인플레)을 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면 적절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 만큼의 기초 지식을 대학에서 쌓지 않은 채 현업에 진출하는 경우도 생긴다. 

물론 그러한 차이를 걸러내지 못할 정도로 울산 3대산업 대기업의 채용시스템이 허술하지는 않다. 

적절한 역량을 갖추어야 채용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기업 관점에서 ‘탁월한‘ 혹은 ‘우수한‘ 인재만 채용해 왔다는 믿음에 균열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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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산업단지에서 생산기지로
- 연구역량의 빈곤화


울산에는 제조업의 위상을 고려할 때 산업체와 정부출연연구소의 연구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공간 분업 과정을 통해 3대 산업의 대기업 연구소가 2000년대 초반부터 대거 수도권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대기업 원청뿐 아니라 부품이나 소재 회사조차 원청과의 실시간 협업을 위해 수도권으로 향했다.

 2004년 사업이 승인되어 2005년 문을 연 울산 테크노파크는 기업의 연구를 지원하고 산학연 연계를 돕는 기관이지만, 자체로 연구를 수행할 역량은 거의 없다. 2015년 준공되어 운영 중인 울산테크노파크, 그린카 기술센터 정도가 제한적인 연구개발이 가능한 상황이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화학연구원이 울산에 연구본부를 내려보냈지만 아직 시너지를 말하기에는 미미한 상태다. 최근 전기차 전장 장비의 발전에 따른 정밀화학 분야 수요가 있지만 아직은 구상단계다. - P118

지역혁신을 언급할 때 ‘산‘업계와 ‘학‘계와 정부나 지자체 ‘연‘구소가 이른바 트리플힐릭스Triple Helix (대학, 기업, 지자체의 삼중 나선) 협업을 하면서 혁신을 이끌어 낸다고 하는데, 울산에는 산업계와 정부 지자체의 연구소 역량이 미비하다. 따라서 새로운 창업과 기존 산업의 중흥 혹은 혁신이 벌어지기 어렵다. 

정책 지원을 통해 당장 효과를 낼 수 있는 분야를 떠올리자면 자동차와 관련된 기계연구원이나 석유화학 및소재 분야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재료연구원 등의 입주를 생각할 수있다. 조선 산업과 연관된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가 입주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기계연구원과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는 박정희 정권시절 대덕단지에 입주했다. 그나마 재료연구원이 창원에 있는 게 도움이 되는 정도다.

기업의 연구소가 떠나고 설계센터가 떠나고 공장도 떠나게 됐다.

다시 활기를 불어넣어 줄 지역혁신체제도 산업체 연구소의 이전과 정부 연구소의 미비 속에서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대학의 교원과 학생은 모두 이직과 취업을 통해 울산을 떠나려 한다. 대학에 대한 질문은 결국 지역의 근원적 모순을 묻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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