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 대 옐친
- 사회주의를 재정의하려던 고르바초프
- 고통스런 전향을 겪은 옐친


스타일과 성격보다 훨씬 큰 차이는 가장 결정적인 질문, 즉 “공산주의는 끝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태도였다.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재정의해서 그 의미를 많이 퇴색시키려는 의지는 있었어도 공산주의 이념을 완전히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러시아가 11월 9일에 선택했다고 알려진, 돌이킬 수 없는 “사회주의 선택”에 대해 말했다. 고르바초프에게 레닌은 난공불락의 권위로 남았다. 반면 옐친은 고통스럽고도 공개적인 전향 과정을 겪었다. 공산당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에 자극을 받아서 가장 기본적인 정치적 신념을 재검토하고 더 이상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옐친의 지적 발전에서 한 가지 전환점은 미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1989년 9월, 더 구체적으로는 텍사스 휴스턴의 슈퍼마켓을 방문했을 때였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식품과 가정용품이 깔끔하게 쌓여있는 선반이 끝도 없이 이어진 광경에 놀라기도 했고 낙담하기도 했다. 미국을 처음 방문한 다른 소련인 방문객과 마찬가지로, 그런 모습은 옐친에게 자유의 여신상이나 링컨기념관과 같은 관광명소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그런 광경이 이례적이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더 그랬다. 대부분 소련인이 상상할 수 없는 풍부한 소비재 상품을 일반 시민이 몇 시간씩 줄을 설 필요 없이 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부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칙칙한 공산주의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상대적으로 특권층인 엘리트에 속하더라도 서방의 슈퍼마켓 방문은 온몸이 마비되는 충격을 받게 된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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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특수 공고 출신들이 상급 기능공으로서 양성되었다면, 1990년대 공고 학생들은 보통 기능공으로서 양성되었다는 점이 또한 크게 다르다. 오히려 1990년대에는 상급 기능공 양성 기관이 직업 훈련원으로 바뀌었다는 데 큰 특징이 있다.

1993년 신경제 5개년 계획 인력 계획에서는 일반 기능공 양성을 민간 훈련원에 맡기고, 공공 훈련원은 기능 대학이나 직업 전문 학교로 개편하는 직업 훈련 정책을 세웠다. 즉, 공공 훈련원은 국가적인 전략업종과 기업들이 실시하기 어려운 특수 직종 및 고급 기능공 훈련에 중점을 두도록 전략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시설이 우수한 공공 훈련원은 기능 대학으로 개편하여 고급 기능공을 양성하도록 했고, 나머지 공공훈련원은 직업 전문 학교로 개칭하여 특수 대상자 양성 훈련, 향상·전직 훈련 위주로 운영하도록 계획하였다. 신정부가 계획한 이러한 공공 직업 훈련원의 역할 변화는 기능 인력 양성에서 중심의 변화를 예고한 것이었다.

즉, 1970대는 우수 기능공 양성이 특수 공고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신정부에서는 공공 직업 훈련원으로 그 역할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공고는 2.1 체제를 실시하면서 학교교육을 줄이는 정책으로 가면서, 공공 직업 훈련원을 대학으로 승격시킨 계획은 우수 기능 인력 양성에서 공고와 직업 훈련원의 역할을 과거와 뒤바꾼것이었다.

그러므로 1990년대 공고 졸업자들은 산업 현장에서 단순 기능직에종사하는 수준으로 하락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신경제 5개년계획의 직업교육정책을 통하여 1990년대 공고 학생들은 1970년대와 같이 경제 발전에 필요한 핵심 기능 인력으로서 양성된 것이 아니라, 중소 제조럽체의 단순 기능직 인력난을 해소...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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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93년간 부족 현황에서 1-4규모 기업에서는 숙련 기능자의 부족 인원이 가장 많았던 반면에 5규모 이상의 기업에서는 미숙련 기능자의 부족 인원이 많았다. 즉 499인 이하 기업은 숙련 기능자가 가장많이 부족하였고, 500인 이상의 대기업은 미숙련 기능자가 부족한 대조적인 현상을 보였다.
그런데 미숙련 기능자의 부족과 숙련 기능자의 부족은 서로 상당한차이가 있다. 미숙련 기능자는 직업 훈련원이나 공업계 고교의 졸업자들이 해당되므로, 이들 인력이 부족했다는 것은 양성 인원의 절대수가부족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들이 생산 기능직으로의 입직을 기피해서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숙련 기능자의 경우는 양상이 다르다.
이들 인력이 부족한 것은 이들이 타 직종으로 전직했거나 회사를 옮겨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 P297

1990년대 공고 확대 정책이나 「2.1 체제」 실시는 이러한 기능 인력부족 현황을 토대로 분석함으로써 그 성격과 타당성을 점검할 수 있다.
노동부의 정의에 따르면 숙련 기능자는 6개월 이상의 기능 습득을 요하는 기능 직종에서 3년 이상의 경력이 있는 자이고, 미숙련 기능자는현재 교육 중에 있는 자이므로, 공고 학생이나 갓 졸업생은 미숙련 기능자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1990년대 인력 정책에서 공고 확대는 미숙련 기능자의 공급을 늘리는 것이었다. 현장 실습을 1년으로 한 「2.1 체제」 역시 미숙련 기능자의 공급 확대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위의 인력 부족 현황에서는 숙련 기능자의 부족 인원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므로 공고 확대를 통한 미숙련 기능자 양성은 노동 시장의 어려움에 맞게효율적으로 계획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숙련 기능자를 공급하려면공고 재학 기간과 현장 경력을 고려할 때 적어도 6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1990년부터 공고, 일반계 고교 직업교육과정, 직업 훈련원 등의수용 능력을 늘리는 정책이 1992년의 조사에서 정책 효과가 거의 없었다는 응답이 많았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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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바야 팝카, 소련 서기장의 특별파일


서기장으로서 고르바초프는 정권의 가장 끔찍한 비밀을 관리했다.

비밀은 줄로 묶어 밀랍으로 봉인한 큼직한 봉투 안에 보관되었다. 이런 봉투가 2000여 개 있었는데, 서기장 집무실 복도 아래쪽에 한때 스탈린이 차지한 크렘린 아파트의 벽장에 전체 봉투를 잘 정리해 두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오소바야 팝카”, 즉 특별 파일이었다. 오소바야 팝카에는 아주 은밀한 서류가 담겨있어서 한 장만 보관하고 회람했다. 서류를 열람한 사람은 서명을 남겨야 했다. 오소바야 팝카에 담긴 봉투 다수는 서기장만 열람하거나 서기장의 위임을 받은 사람만 열람할 수 있었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1번 봉투 속 한 개 항목에는 수치스러운 진실이 담겨 있었다. 폴란드 장교 학살이 스탈린의 직접 명령에 따라 이행되었다는 것이다. 타자로 작성해서 베리아가 스탈린에게 보고한 해당 문건은 “다양한 반혁명 조직”에 소속되었다고 의심되는 폴란드 장교와 폴란드인에게 최고형, 즉 총살형을 건의하는 내용이었다. 스탈린이 문건 상단에 서명했고 다른 정치국원의 서명도 첨부됐다. KGB 의장이 흐루쇼프에게 보고한 또 다른 육필 문건에는 카틴숲 외에 두 곳에서 학살한 폴란드인의 정확한 수치가 적혀 있었는데, 2만 1853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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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선거에 의한 첫 인민대표회의

150년 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첫 번째 진정한 의회인 인민대표회의를 승인하자, 이 예언 중의 많은 부분이 실현되었다. 퀴스틴의 말을 빌리면 “토론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토론의 시대”는 인구 2억 8000만의 나라를 사실상 마비시킨 말의 홍수 형태로 나타났다.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발트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이 13일간 그때껏 본 적이 없는 형태의 언론 자유 축제에 참여했다. 칼리닌그라드에서 캄차카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의 광부, 공장장, 정부 관료가 크렘린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를 보느라 산업 생산량이 급감했다. 토론은 TV로 생중계되어서 정부의 검열 문제가 없었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인민대표회의 제1차 회의를 주도한 개성이 강한 인물 중에도 특히 두 사람이 두드러졌다. 한 사람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이고, 또 한 사람은 안드레이 사하로프였다. 두 사람은 격렬한 토론에서 양극단에 서 있었다.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기보다 개성이 충돌한 것이다. 두 사람은 가슴 깊은 곳에 조국에 대한 비전을 공유했다. 러시아 차르들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고 부르며 세상을 다 바꿔야 한다는 강박을 수 세기 동안 품었지만, 두 사람은 소련이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 세계 주류 문명의 일원이 되길 원했다. 문제는 그런 원대한 목표를 어떻게 이루는가였다.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의 모든 개혁가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것도 같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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