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여에 대한 폴라니와 벤느의 논의가 놓치고 있는 것은 증여가 내포하는 인정의 차원 - 증여가 인정을 추구하며, 인정을 통해서 비로소 구성된다는 사실 - 이다. 

국가가 세금을 걷어서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와 자선단체가 모금을 하여 같은 일을 할 때, 물질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 두 경우 모두 형편이 넉넉한 사람에게서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로 부가 흘러간다. 그래서 폴라니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재분배에 포함시킨다. 

하지만 행위자들의 입장에서 그 둘은 결코 같지 않다.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은 의무이지만, 모금에 참여하는 것은 자발적인 선택이다.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실업수당이나 생활보조금을 수령하는 것은 권리이지만, 자선단체의 도움을받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고마워한다는 것은 도움받은 사실을 잊지않는다는 뜻이다. 

기부자는 익명으로 기부를 한 경우에도 자신의 행동이ㅡ"이름 모를 사람의 작은 선행으로나마 ,- 기억되기를 원한다. 이점에서 기부는 개인적 관계를 추구하는 선물, 벤느가 엄밀한 의미의 증여라고 생각했던 것과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다. 

순수한 의도에서건 이해관계에 따라서건, 답례를 바라건 바라지 않건, 선물을 할 때 우리는 받는 사람의 마음에 기억을 남기려 한다. 이는 복지국가가 수행하는 재분배와 대조를 이룬다. 국가가 납세자의 돈을 복지수급자의 통장으로 옮길 때, 돈을 낸 사람은 어떤 인정도 기대하지 않으며, 받는 사람은 어떤 기억의 의무도 지지 않는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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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1987년 현대중공업 파업 과정에서(현대중공업은 노동자대투쟁을 주도한 대표적 사업장이다) 터져 나온 여러 요구 가운데 맨 앞에 있었던 것이 다름 아닌 ‘두발 자율화‘와 ‘복장 자율화‘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두발 자율화나 복장 자율화는 체벌 금지와 더불어 학생인권운동의 단골 이슈이다. 노동자들이 이런 이슈를 제기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때까지 사회적으로 미성년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원영미에 의하면 당시 "노동자들은 정문에서 건장한 체구의 경비로부터 사실상 ‘검문‘을 당하고 복장 및 두발 상태를 점검받았다. [・・・・・・] 경비들은 노동자의 두발 상태가 ‘불량한‘ 경우 경고를 하거나 ‘바리캉‘이라는 이발기구로 현장에서 즉석 이발을 강행하기도 하였다. 정문에서 이러한 통제는군대의 규율과 같았고 그런 만큼 노동자들은 정문 통과를 큰 부담으로 생각했으며 특별한 지적을 당할 경우 큰 수모감을 느꼈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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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의 역설
- 전근대사회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모욕하는 자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개새끼야. ‘나는 개새끼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복창해. 이제 개처럼 엎드려서 내 발을 핥아). 하지만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이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모욕의 역설은 전근대적인 신분 질서가 배제와 낙인, 그리고 조건부의 통합에 의해 유지되었음을 암시한다. 모욕이 의례적 질서의 일부를 이루고 있을 때, 즉 의례 코드 자체가 비대칭성을 띨 때(한쪽은 다른 쪽을 모욕할 수 있지만, 그 역은 불가능한 경우) 이는 그 사회에 신분 차별이 존재한다는 표시로 해석될 수 있다. 이때 차별당하는 집단은 이러한 차별을 받아들인다는 조건하에 사회 안에 머무를 자격을 얻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성원권은 조건부로 주어지며, 이는 의례적 불평등성 속에서 일상적으로 확인된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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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투쟁에서 한국 보수까지

패터슨은 노예제도와 명예에 집착하는 문화 - 플라톤을 따라 그가 타이모크라시 timocracy라고 부른 것 -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우월해지려는 욕망, 권위에 대한 복종, 관직에 대한 야망, 군인다움에 대한 숭상, 금전에 대한 집착 등이 플라톤이 생각했던 타이모크라틱한 인간형의 특징이었다. 대규모의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어김없이 타이모크라틱한 문화와 인간형이 발달한다.  - P61

플라톤이 이 단어어를 사용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스파르타였지만,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남부의 문화에서도 이 명칭에 부합하는 특징들이 나타난다. 명예와 자존심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 남자다움에 대한 칭송, 여성의 이상화와 격리, 한마디로 얼마간 시대착오적인 기사도 정신. 노예제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인들이 명예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들과 노예의 차이가 바로 거기 있기 때문이다.

몰락하고 명예를 잃은 인간은 노예와 비슷해진다. 노예의 굴욕을 날마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노예와 비슷해지는 것만큼 큰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정투쟁의 장 외부를 구성하는 노예의 존재는 이 투쟁을 생사를 건 싸움 life-and-death struggle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다. - P62

4) Orlando Patterson, 같은 책, p. 386, note 14. 우월해지려는 욕망, 권위에 대한 복종, 관직에 대한 야망...... 이런 묘사를 읽다보면 나의 머릿속에는 막연하게 어떤 초상화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 초상화는 고대 그리스인이 아니라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경상도 출신이고 강남에 거주하며 한나라당에 투표하는 60대 남자. 한국의 경상도는 미국 남부만큼이나 타이모크라틱한 것 같다. 사나이다움‘에 대한 자부심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경상도는 ‘양반 문화‘가 뿌리 깊은 곳이다. 한국이 노예제 사회였다는 제임스 팔레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양반 노릇을 하려면 종이 있어야하고, 양반 의식이란 ‘아랫것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태도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미국 남부의 타이모크라틱한 정서는 남북전쟁이 끝난 후 KKK단의 결성으로 표출된 바 있다. 경상도가 언제나 한나라당.
지금은 새누리당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다시 어떤 이름으로 바뀔지 모르지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광주학살을 주도했고 또 은폐했던 세력에 몰표를 주는 데에는 ‘지역감정‘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좀더 깊은 정치인류학적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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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 폴리틱스 -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
프란스 드 발 지음, 장대익.황상익 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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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란의 선전 대 은폐

13 침팬지 암컷의 성기 부풀어오름(sexual swelling)과 인간 여성의 은폐된 배란(concealed ovulation) 

암컷의 성기 주위가 빨갛게 부풀어오르는 현상은 침팬지뿐만아니라 다른 영장류에서도 흔히 관찰된다. 배란기에 가장 크고 선명하게 부풀어오르며 암컷의 성호르몬의 통제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침팬지 암컷은 왜 이런 식으로 수컷에게 배란기를 선전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설명이 있다. 그중 하나는 암컷이 이런 신호를 보냄으로써 수컷들의 경쟁을 유도하고 그런 경쟁으로 말미암아 좋은 유전자를 전해줄 수컷이 자연스럽게 걸러진다는 설명이다. 반면 다른 하나는 이런 현상이 수컷들이 저지르는 영아 살해를 줄여주기 때문에 진화했다는 설명이다. 가령, 모든 수컷들이 한 암컷의 부푼 성기를 보고 그 기간에 어떻게든 교미를 했다고 치자. 나중에 그 암컷에게서 새끼가 태어나면 그놈이 어떤 수컷의 자식인지가 불분명해진다. 따라서 수컷들은 함부로 그 새끼를 살해하지못할 것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유독 인간 여성만이 영장류 동물 중에 배란기를 선전하지 않는다. 이를 흔히 ‘은폐된 배란‘이라고 부르는데 많은 학자들은 이런 현상과 인간의 짝결속의 기원을 연관지으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인간만이 배란을 은폐하는 쪽으로진화했을까? 가장 유력한 설명에 따르면 배란 은폐는 부권에 대한 신뢰를 높여주었기 때문에 진화했다. 예컨대, 배란 은폐는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는 남성을지속적으로 자신 곁에 묶어둠으로써 그 남성이 다른 여성을 찾아다니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경쟁 남성들에게도 배란 시기를 가르쳐주지 않음으로써 그 남성이 자신의 부권을 확신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다른 영장류 동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숙한 상태의 아기를 낳아 기르는 인간에게는 짝 결속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여성의 배란 은폐는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여겨진다. 영장류의 성을 종합적으로 비교 · 정리해놓은 책으로는《Primate Sexuality: Comparative Studies of the Prosimians, Monkeys, Apes,
and Humans (Dixson, A, F., 1999)>가 있다. 역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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