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주의와 민족주의

특히, 유대인에게 성지로의 집단적 귀환은 시온에서 최후의 집단적 구원을 징조하는 세상의 종말을 의미할 뿐이다. 시온이 있는 예루살렘은 종교적 성지일 뿐이다. 유대인의 조국 땅이거나, 나라를 재건할곳은 아니었다. 기독교도, 무슬림, 불교도가 성지를 갈망하고 순례하기는 하지만 그곳을 조국이거나 돌아가서 종교 왕국을 세울 곳으로 상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해서 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오니즘의 출현은 근대 이후 반유대주의와 민족주의 조류를 배경으로 한다.
시오니즘을 국제적인 정치 운동으로 이끈 헤르츨 이전에 시오니즘은중부 및 동부 유럽에서 18세기 이후 출현했다. 유대인을 물리적으로박해하고 동화를 거부한 포그롬(조직적인 탄압과 학살) 등 근대의 반유대주의가 고조되는 사회에서 유대인들은 도피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반유대주의는 민족주의 조류와 짝을 이뤄 출현했다. 그리고민족주의 흐름을 맞이한 유대인의 대응 또한 제 정체성을 민족화하는것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쇠락하는 가운데그 영역 안에서 섞여 살던 종족과 종교 집단들이 민족주의를 추구하자, 유대인 역시 유대교를 기반으로 자신들을 ‘민족‘으로 재정의한 것이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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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유대인 격리지 확대로 유대인 차별이 절정에 오르던18세기 말 서구에서는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 프랑스를 필두로 ‘모든 인민이 법 앞에서 평등할 것"이라는 이념에 따라 유대인 해방 물결이 번졌다.
서구에서 유대인 해방령은 유대인에게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첫째는 말 그대로 유대인 해방을 통한 법적·제도적인 차별과 금기의 폐지였다. 유대인을 국민국가 내에서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함으로써, 법적으로는 기존의 차별과 금기를 폐지했다. 둘째, 차별과 금기를 폐지하는 대신에 그동안 유대인에게 부과하지 않던 의무가 생겼다. 유대인 자치가 없어지고, 군역 등의 의무가 부과됐다. 국민국가 내에서 동등한 시민으로서 인정한다는 것은 독립적인 유대인 공동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유대인 해방령은 현실에서는 차별적인 효과를 낳았다. 유대인 상류층은 이 해방령을 전기로 제도적인 굴레를 완전히 제거하고, 세속화속에서 주류 사회로 동화해갔다. 하지만, 대다수 하층 유대인에게는 관습적인 차별은 그대로 존재하고 유대인에 대한 기존 보호막만을 제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서방에서는 어쨌든 유대인에게 동등한 시민구을 부여하고, 그 공동체를 해체했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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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제후들

제후들이 성직자의 재산을 회수할 수 있게 되고 종교적인 사안에 간섭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자, 종교개혁은 빠른 속도로 새로운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튜턴 기사단의 전임 단장, 헤센의 영주 필리프, 독일의 변방 요새인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총독, 슐레스비히 공작과 브라운슈바이히 공작, 만스펠트의 백작 등이 개종을 하고 자신들의 영지에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특히 북부 독일의 도시들에 영향을 주었고, 슈파이어에서 재소집된 의회가 황제의 명령으로 종교개혁을 중지할 것과 보름스 칙령을 실행할 것을 요구하자 제국의 도시 가운데 3분의 2가 로마와 결별을 선언했다. 14개 도시와 여섯 제후가 이 결정에 과감하게 반기를 든 것이다. 그리고 이때(1529)부터 이들에게는 ‘프로테스탄트(항거하는 자)’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했다 - <종교개혁 : 루터와 칼뱅,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올리비에크리스탱 지음, 채계병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c5S1PMkNvfERzMo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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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독일인이 아닌 사람들(즉, 로마)이 루터를 재판하는 것을 거부하며 루터를 철저히 자신의 보호하에 두었다. 한편 빈민과 농민들은 루터의 메시지에 나타난 사회적인 내용에 대하여, 즉 성직자들의 특권 비판과 공적인 구제제도의 개혁에 대해 열렬히 환영을 표시했다. - <종교개혁 : 루터와 칼뱅,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올리비에크리스탱 지음, 채계병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MEKkDJPjKR7eiUu46

신실한 신앙에 대한 기대감, 민족주의, 반교권주의, 로마 교회에 대한 반감, 성직자들의 축재에 대한 증오감 등 이미 독일 사회의 곳곳에 퍼져 있던 감정들이, 루터의 메시지가 약간 왜곡되기는 했지만 호응을 얻도록 만들어주었다. - <종교개혁 : 루터와 칼뱅,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올리비에크리스탱 지음, 채계병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Wi3vuYgo58FJ3Btz7


그림 중앙에는 요한 프리드리히가 배치됨으로써 종교개혁에 참여한 작센 지방의 중요성을 암시하고 있다. - <종교개혁 : 루터와 칼뱅,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올리비에크리스탱 지음, 채계병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Piaxxz1AWfqY4kj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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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드라시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자기네가 당했던 부당한 억압의 역사는 분명하게 드러내면서도 이중제국 시절 크로아티아를 비롯한 발칸 민족들의 독립투쟁을 오스트리아와 손잡고 짓밟은 일이나 영토를 회복하려는 욕심에 나치 독일과 손잡았던 사실은 입에 올리지 않는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과거사를 일관성 있는 태도로 소화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nN72xv3e4TcayLmYA

다민족국가였던 오스트리아에서는 헝가리인, 이탈리아인, 폴란드인이 잇따라 봉기해 독립을 요구했다. 특히 헝가리 왕국에서는 코슈트 러요시가 독립선언과 함께 공화정을 선포하였고 헝가리 독립군은 오스트리아군과 황제에 충성하는 크로아티아 왕국[2] 총독 요시프 옐라치치의 군대를 무찌르고 헝가리 전역을 장악했다(나무위키)

언드라시(Andrássy Gyula, 1823-1890)는 오늘날 슬로바키아공화국에 속하는 곳에서 태어났다.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백작의 아들이었던 그는 소년 시절부터 민족주의 정치 운동에 참여했고 세체니 이슈트반의 눈에 들어 스물세 살에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848년 귀족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크로아티아 영토전쟁에 종군했으며 헝가리혁명 정부의 명에 따라 이스탄불로 파견되어 오스만제국 정부의 협력을 끌어내려고 했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bYMa5sSsjP2hv5766

런던과 파리에서 십 년 망명 생활을 하면서 유럽의 정세와 사회 변화를 연구하고 외교를 공부한 끝에 언드라시는 정치적 급진주의와 결별하고 1858년 헝가리로 돌아왔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uGtyAaBUywYABoKr6

합스부르크제국을 헝가리왕국과 오스트리아왕국으로 분할하되 두 왕국의 왕을 요제프 황제가 겸직하고 헝가리의 내치는 총리를 따로 지명해 맡기는 방안이었다. 1867년 대타협이 성립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출범했고 언드라시는 헝가리왕국의 총리직과 제국의 외무장관 자리를 받았다.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Q5yV4QVkhfjUSGK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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