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의 구조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0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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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특이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 다음 남유대왕국이 아시리아를 대체한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당한 후이다(기원전 586년). 이때도 많은 이들이 신을 버렸다. 나라가 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바빌론에 끌려갔던 사람들 사이에서 미증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국가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신이 폐기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새로운 신 관념이 태어났다.  - P212

그것은 국가의 패배를 신의 패배가 아니라 인간이 신을 무시한 것에 대한 신의 징벌로서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호수성의 부정이었다. 종교의 탈주술화는 이때 생겨났다. 이것을 초래한 것은 에스겔과 같은 예언자나 지식인이었다.
- P213

유대교는 민족의 종교가 아니라 개개인이 형성하는 교단으로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에세네파와 같은 교단에서 현저하다. 말할 것도 없이 예수의 교단도 유대교 가운데에서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바빌론 포로의 단계에서 생겨난 것도 그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즉 국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야훼를 믿는 집단으로서 새롭게 조직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유대민족이 되었다. 즉 유대교는 유대민족이 선택한 종교가 아니라, 역으로 유대교가 유대민족을 창출한 것이다.15)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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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구조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0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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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대 이소노미아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는 다수자인 빈곤자가 소수의 부유계급을 억누르고 재분배에 의해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소노미아란 아렌트가 말하는 것처럼 자유가 평등인 원리이다. 이것은 사회가 자유유동적인 상태에서 가능하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폴리스 안에 불평등이나 전제가 있다면,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된다. 이소노미아는 근본적으로 유동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소노미아는 씨족사회의 구속을 부정함과 동시에 거기에 존재한 유동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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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주종법이 폐지되어) 이제부터 심문은 치안판사의 사택이 아니라 공개 법정에서 행해지게 되었고, 치안판사 혼자 재판할 수 없게 되었다. 노동자는 자신을 위하여 증언할 수 있었다. 금고형 선고 권한은 바뀌지 않았으나 그것은 인명 내지 재산에 대한 중대한 상해를 입힐 경우에 한정되었다. 일반 사건의 경우에는 벌금 내지 손해배상이 선고되었다. 1867년의 법률은, 계약위반의 경우 여전히 가끔 형사 범죄 처벌법규가 적용되고 재판 이전에 체포될 개연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결코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이라도 얻어낸 것은 큰 성공이었다.
- P276

잉글랜드에서는 1848년의 법률에 의하여 영장에 의한 체포 대신에 소환을 받아 출두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이 법률은 스코틀랜드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여전히 영장에 의한 체포가 유일한 방법이었다. 고용주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노동자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있었으나, 노동자는 고용주에게 불리하거나 자신을 변호하는 증언을 할 수없었다. 노동자에 관한 사건의 형벌은 오직 금고형이 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종從에 의한 계약위반은 형사 범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노동자와의 계약을 위반한 고용주에 대해서는 상당액의 벌금이 선고되거나 기껏해야 손해배상 명령이 내려졌다.
- P274

1867년 고등법원재판소는 보일러제작공조합이 브래드포드지부의 서기를 상대로 낸 소송의 판결에서 노동조합은 우애협회법의 적용을 받을수 없을뿐더러 노동조합이 범죄성을 띠진 않았다 하더라도 산업발전을 제한하는 조직이므로 위법성이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은 누구든지 단순히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거기에 가입하는 것은 보통법에 의해 고발되지 않지만, 노동조합은 보통법상 위법성이 있기 때문에, 1824~25년의 법률에도 불구하고 법정이 노동조합 또는 기금에 대하여 승인 또는 보호를 금지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 판결의 직접적인 결과로 노동조합은 20년 이상에 걸쳐서 사실상 누려왔던 기금에 대한 법적 보호를 빼앗기게 되었으며, 사실상 노동조합운동 전체가 비합법화되어 다음에는 어디에 탄압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 P280

1867년의 주종법은 1875년 고용주와 노동자법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명칭의 변경은 중대한 내용 변경을 의미했다. 계약위반 혐의에 의한금고형은 약간의 중요한 공무公務, 생명 또는 재산에 대한 위협 등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폐지되었다. 다른 계약과 마찬가지로 고용계약도 고용주와 노동자가 법적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맺는 순수한 민사상의 계약으로 변했다.
1871년의 개정 형법은 완전히 폐지되었으며, 음모죄 및 재산보호법이라는 새로운 법률로 대체되었다. 이 법률에 의해 평화적인 농성이 다시 인정되었으며, 개인의 경우에 범죄성이 없는 행위는 단결하여 벌인 경우에도 처벌될 수 없다고 규정했다. ‘박해‘ ‘방해‘ ‘강압에 관한 위협적인 단어는 사라졌으며 박해나 폭행은 일반법에 의해 취급되었다.
바꿔 말하면, 노동조합은 헌장을 보장받은 것이다. 이 헌장은 1901년 태프 베일 판결에 이르기까지 조합에 대하여 적절한 법적 지위와 노동쟁의에 대한 특권을 보장했다. 1876년의 노동조합(수정)법은 1871년의 법률에 대하여 사소한 시행규칙상의 수정을 가했을 뿐이며(정의定議 조항이 후에 1909년의 오스본 판결에서 부당하게 이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으로 70년대의 노동법은 완성되었던 것이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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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련공을 위한 협동조합주의


숙련노동자들은 바로 이 시대에 산업혁명기의 지독한 더러움에서 벗어났다. 고용주가 명주 바지를 입고 마호가니로 만든 테이블을 사용했다면, 숙련 직인들은 보통 사람들을 대접하기에는 너무 신성하다고 생각되는 작은 응접실을 만들어서 고용주를 모방했다. 고용주가 자본을 투자했다면, 숙련 직인들은 ‘협동조합‘이나 ‘소액은행‘에 불과 몇 파운드를 예금하고 ‘우애협회‘나 ‘노동조합‘의 기금 조성에 관여했다. - P198

초기에 숙련노동자들은 함께 착취당하던 전 노동계급의 선두에 서서 개선을 위한 투쟁에 참여했었으나 빅토리아시대의 숙련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조그만 이익을 찾기에 급급했다. 그들의 자선은 가정에서 시작되었으나 기층노동자들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그들의 노동조합, 우애협회 그리고 성공한 협동조합운동조차도 극빈 노동자층의 접근을 거절했다. 노동조합비는 상당한 고액이었으며 우애협회는 비숙련노동자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절약‘의 실천을 요구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외상으로 구매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협동조합은 현금을 요구했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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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후된 선거구 제도의 지속


수백년에 걸쳐 전혀 개혁되지 않았던 이 어처구니없는 제도가 모두 뇌물과 부패에 물들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도시 선거구 소유자는 선거구를 재산의 일부로 간주할 정도였기 때문에 보통의 유권자도 자기의 투표권을 재산으로 간주했다. 투표도 의석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매매되었다. 선거는 매우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거액의 원조를 받지 않는 한 부자가 아니면 후보자가 될 수 없었다. 다수의 선거권을 가진 선거구에서도 투표권을 파는 경우가 많았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실제로 선거는 의견의 경쟁이 아닌 매수의 경쟁에 불과했다. 급진주의자와 의회개혁론자도 반동파와 마찬가지로 매수에 의해 의회에 참여할 권리를 사야만 했다.
- P9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는 강력히 옹호되었다. 그 이유는 합리적이라서가 아니라 이 제도가 국가의 골격을 이루는 계급의 손에 권력을 쥐여주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주에게 우월성을 보장해주었고 의석을 구입할 여유가 있는 부유한 상인과 금융가, 또는 인도에서 귀국한 갑부, 서인도제도에서 돌아온 대농원 경영자들에게는 문호를 개방했다. 

18세기 후반에 투표는 공통된 인민의 권리라는 관념이 보편화될 때까지 선거기구의 비대표적 성격에는 놀랄 만한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제도는 계속 유지되었고 ‘자격 있는 사람들‘에게 정치권력을 안겨주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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