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접근과 사회적 불안이라는 내우외환의 시대에 직면하여, ‘세이시사이’는 역사적 실체로서 천황을 중심에 놓고, 일본이란 나라의 본체, 즉 국체(國體)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그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 ‘신론(新論)’이다.

‘세이시사이’는, 막부와 번의 정치적 상황을 강하게 비판하며, 시대적 위기 상황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국체를 명확히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자신들의 번을 중심으로 사고해온 무사들의 인식을, 일본이라는 국가적·민족적 범위로 전환시켰다. - < 일본 근대 사무라이 사상가들,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탁양현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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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2년의 판적봉환으로, 구 번의 영주가 자발적으로 판(토지), 적(인민)을 천황에게 반납하여, 다시 지번사(知藩事)로 임명되어, 번의 영지와 영주의 분리를 도모할 수 있어, 중요 지역이나 옛 막부부 직할지였던 부, 현과 함께 부번현체제(府藩県体制)가 된다.

그러나 중앙집권화를 진행시켜, 개혁을 전국적으로 망라하려는 데에 있어, 번의 존재는 방해가 되었고, 번 측에서도 재정의 핍박이 계속 되어, 자발적으로 폐번을 신청하는 번이 잇따랐다. 1871년 8월 29일, 사쓰마, 조슈 번 출신의 지도자에 의해 폐번치현이 실시되어, 도도부현제도 설치(당초에는 3부 302현, 직후 정리되어 3부 72현), 중앙정부로부터 지사를 파견하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 < 일본 근대 사무라이 사상가들,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탁양현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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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사대부화
- 메이지 유신의 배경


일본은 18세기 말부터 급속히 유학이 확산되었다. 19세기는 아마도 일본 역사상 가장 유학(중심은 주자학)이 번성한 때일 것이다. 그런데 이 유학은 병영국가 도쿠가와 체제와는 잘 맞지 않는 사상이다. 도쿠가와 체제에서 유학은 ‘위험 사상‘이 될 수 있었다.

유학 이전에 유학적 영향(Confucian Influence)에 따른 체제 동요가 이미 시작되었다. 즉 일본적 사회 유학적 영향(동아시아 국가 모델의 수용 시도) → 서양의 충격 근대화‘라는 궤도를 걸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을 타도하고 천황을 옹립하는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은 메이지 정부의 수립을 유학적 정치사상에 따라 봉건제(制)에서 군현제(制)로 전환된 것으로 이해했다. 학교가 그 이전에 볼 수 없었을 정도로 많이 설립되었고, 사무라이(군인)들이 학교를 다니는 기현상이 보편화되었다. 무술 실력도 여전히 중요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유학 소양은 사무라이들의 위신과 출세에 중요해졌다. - P10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물게 200년이 넘는 장기 평화가 지속된 도쿠가와 사회에서 일반 사무라이들은 군인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고, 방대한 관료제의 말단 실무자, 즉 리(吏)로 변해 갔다. 그들은 조선의 양반들과는 달리 정치에 참여할 의사도 그럴 기회도 별로 없었다. 이런 그들에게 유학이 급속히 침투하면서 그들은 ‘사(士)‘가 되어 갔다.(사무라이의 사화(士化)) 그리고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무라이로서의 정체성이 약화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메이지 정부가 폐도령(令)을 내릴 때까지 칼을 내려놓지 않았다. 칼 찬 사대부! 문무(文武)의 결합 속에서 그들의 행동력은 커져 갔다.

19세기에 사무라이들이 벌인 전대미문의 전국적인 정치 운동(전투가 아니다!)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때 이들은 마치 명대(明代)의 중국 사대부나 조선조의 양반들처럼 ‘학(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그에 기반을 두고 당파를 만들어 당쟁을 일삼았으며, 정치적 주장을 담은 상서를 쏟아 냈다. 필자는 이를 ‘사대부적 정치 문화‘라고 명명했다. 4장과 5장에서는 이 사대부적 정치 문화‘의 확산과 사무라이의 ‘사화(士化)‘에 초점을 맞춰 그것이 도쿠가와 체제를 동요시키고 정치 변혁을 촉발한 요소로 작용한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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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과 축제 그리고 민족적 정신

취미 부족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사실은 명절이 없어져감이다. 물론 거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명절이란 본래 대개 종교적 의미를 가지는 것인데 지금은 그 옛날의 그 유치했던 종교가 없어지니 그 행사도 자연히 없어지는 것이다. 또 근래 신구 문화의 바뀜으로 옛것이 모두 깨지니 그것도 원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 보면 본래의 종교적 의미가 없어져도 차차 예술화되어 남게도 되고 신구 풍속이 갈려도 새 형식으로 계속하게 된다. 원래 민족은 신화 없어서는 못 살고 명절 없으면 안 된다.

명절은 일종의 정신적 소성(蘇盛)이다. 묵은 시름, 묵은 찌끼, 묵은 빚, 묵은 때를 확 떨어버리고, 한번 남녀노소·빈부귀천·재둔선악(才鈍善惡)의 모든 구별, 모든 차별을 다 없애고 맨사람으로 돌아가 ‘한’이 되어, 펼 대로 펴고, 놀 대로 놀고, 즐길 대로 즐기고, 흥분할 대로 기껏 흥분해보자는 것이다. 사람은 이것이 없이는 못 산다. 그래서 5월 수리요, 8월 가위요, 크리스마스 저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이 차차 없어지는 편이다. 여기도 물론 가난이 큰 원인이기는 하나,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 깊은 원인이 있다. 따져 말하기는 어려우나 민족적 생명의 썰물 때인가? 옛 기록에 나타난 것으로 보면 우리 민족이 결코 바탕이 비관적이거나 몰취미가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생활이 밑금에까지 내려갔기 때문이다. - <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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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의 실재와 뜻의 희망

본래 성경은 현실세계를 설명하자는 과학이 아니고 뜻의 세계를 말하자는 것이다. 다만 설명의 자료로 이 현실계를 빌렸을 뿐이다. 마치 시인이 자기 속의 느낌을 나타내기 위하여 풍월을 그 자료로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꽃이 웃는다. 새가 운다” 하는 것은 그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말한 것이다. 웃고 운 것은 시인 자신이지 꽃이나 새가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상계로 하면, 무한히 변천해갈 것이지, 종말이란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뜻으로 할 때에는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시간이 있다는 말이다. - <뜻으로 본 한국역사>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66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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