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형사재판 대 마녀사냥
- 기소자가 유죄를 증명할 것인가? 아니면 피의자가 무죄를 증명할 것인가?




누군가 나를 사기꾼 살인범이라고 지목했다고 가정하자. 지목한 사람이 개연성있는 근거를 먼저 내놔야 나 역시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를 대지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여성운동 단체들이 이를 갈아온
‘중세 마녀사냥‘의 논리가 아닌가?

근대 형사재판은 의심만으로 마녀를 단정하고 화형에 처하는 식의 ‘마녀사냥‘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됐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죄 없음을 입증하라"는 것은 한마디로 시계추를 거꾸로 돌리는 역발상이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피해자에게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 금지, 피해자다움 요구 금지라는 ‘3중 갑옷‘을 덮어씌우고 밝히려는 진실이 과연 진실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을까?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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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는 일본이 옛날에는 우리보다 못했고 가난했는데 근대에 들어와서 서양 문물을 빨리 받아들이는 통에 우리를 앞서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임진왜란 이후에 수립된 도쿠가와 막부 치하에서 일본은 급속히 발전했다. 이때 이미 무시할 수 없는 강국이 되었고 부자나라가 되었다. 문화적으로도 세련된 수준에 이르러 다도, 가부키, 기모노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전통문화는 대개 이때 형성되었다.
18세기 전반 조선에서 영조가 통치하던 무렵, 일본 인구는 3000만 명이 넘는다. 우리 인구가 그에 이르는 것은 해방 무렵이다. 당시 조선 인구는 많이 잡으면 1500만 명이지만 대략 10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것은 지금 한일 인구 비율과 일치한다. 남북한 인구를 합치면 7500만 명. 일본은 1억 3000만 명 정도로 예나 지금이나 약 두 배 정도, 혹은 그 이상이다. 일본은 왜국倭國이 아니라 큰 나라다. 특히 수도였던 에도, 지금의 도쿄 인구는 100만 명이었다. 우리 서울은 약 20만 명 정도다. 당시 전 세계에서 인구 100만 도시는 청나라의 베이징 등 몇 개밖에 되지 않았다. 오사카, 교토도 모두 인구가 30만 명이 넘는 대도시였다. -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3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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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을 거부하면 전쟁은 당연했고 전쟁을 하면 필패였다. 사무라이 정권인 막부는 청 조정처럼 서양 오랑캐 따위는 이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직 무력으로 권력을 유지해온 막부이기에 전쟁에서 지면 끝장이었다.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지고도 건재했지만, 막부는 다르다. 장군將軍의 원래 이름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아닌가. 말 그대로 오랑캐를 정벌하라고 있는 자리다. 전쟁에서 지면 그대로 무너지는 것이다. 이게 막부가 서양과의 전쟁을 끝내 회피한 이유다. 실제로 막부가 무너진 것은 조슈번長州藩과의 전쟁에서 패한 게 결정타였다. 무력이 정통성의 원천이다. -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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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19세기에 들어가면 하급 사무라이들의 경제적 궁핍이 아주 심해진다. 많은 사무라이들이 세상에 대한 불만을 토해냈다. 그런데 일본에는 과거제도가 없다. 조선의 양반들은 가난해도 과거에만 붙으면 일거에 신세가 핀다. 그런데 사무라이는 문장 배우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그 사회엔 당연히 과거제가 없다. 그럼 사무라이는 무엇으로 출세할 수 있나? 전쟁이다. 평생 닦은 무술 실력으로 전투에서 큰 공훈을 세우면 일거에 집안도 일으켜세우고 거액의 봉록도 받을 수 있다. 전쟁이야말로 사무라이들의 존재이유다.
그런데 도쿠가와 시대는 사무라이 국가이면서도 1615년 오사카 전투 이후 250년간 이렇다 할 전쟁이 없었다.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문 장기 평화 시대였다. 차고 다니는 칼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니 사무라이들이 출세할 일도 없고, 그저 주군이 맡긴 자잘한 사무나 보며 쥐꼬리만 한 녹봉을 받아 근근이 생활해나가는 것이 그들의 인생이었다. 세상이 소란해지고 전쟁을 해야 자기들이 위세를 부릴 수 있을 터였다. 아무리 상업이 발달해도 경제를 모르는 사무라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고 상인들의 배만 불릴 뿐이었다. 불만에 찬 사무라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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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도 농업생산력이 높은 나라였다. 특히 밭작물 생산력은 세계적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런 힘으로 100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농업생산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상품과 화폐경제는 위축되어 있었다. 어떤 학자는 이를 두고 국가재분배 경제라고도 한다. 이게 조선사의 흥미로운 점이다. 왜 조선은 이웃인 청이나 일본과는 달리 상업이 발전하지 않았는가, 혹은 그토록 성공적으로 상업 발전을 통제할 수 있었는가. 그러면서도 어떻게 나름대로 고도의 사회수준과 문명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유럽 이외 지역에서도 근대의 ‘맹아’가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싶으면 청과 도쿠가와 일본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조선은 근대인인 우리들에게는 훨씬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다. 그런 만큼 근대를 상대화하고 근대를 넘어서려는 상상에 강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연구대상이다. 예를 들어 조선의 위정자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빈부격차였다. 한 사회에 엄청난 부가 쌓이고 상품,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면 그 혜택을 골고루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빈부격차가 발생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하향평준화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억제하려고 했다. -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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