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단계 불평등 감소 변곡점 : 2008, 2015년




한국경제에서 불평등이 감소하는 시점은 마침 보수성향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다. 2008년 변곡점은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기간과 겹친다. 2008~2010년 기간 동안 한국경제 불평등이 감소하는이유는 이명박 정부가 반(反)신자유주의적 진보 정책을 펼쳐서가 아니다.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선진국발 경제위기‘였기에 한국 수출량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한국 수출량이 급감해서 한국에서 수출· 제조업 · 대기업에다니는 소득상층 10% 노동자들의 연말 상여금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항상 불평등이 커진다는 발상 역시 사실이 아니다. 불평등이 커지는 경제위기가 있고, 오히려 불평등이 줄어드는 경제위기가 있다. 2008~2009년 경제위기는 ‘불평등이 줄어드는‘ 경제위기였다. - P161

한국경제 불평등의 세 번째 변곡점은 2015년 변곡점이다. 이때는 박근혜 대통령의 재임 기간과 겹친다. 2015년 최정점으로 한국경제 불평등은 2019년까지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2014년 중국의 신창타이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중국경제가 중간재를 국산화하고 무역의존도를 낮추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신창타이로 인해 한국경제는 3가지 변화를 동시에 겪게 된다. 수출 증가율의 급감, 제조업 위기, 불평등 축소다. 한국의 수출이 작살나거나 제조업이 위기에 빠지면 한국경제 불평등은 줄어들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최소한 임금 불평등, 임금 지니계수에 한해서, 한국경제 불평등은 중국발 불평등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 불평등은 ‘수출 대박과 연동된 불평등‘이기 때문이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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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권과 귀족정

2만 명이 페이스북에서 한 범죄자를 사형에 처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중요한가? 미국 헌법의 정신에 따르면, 이는 중요하지 않으며 또 중요한 일로 여겨져서도 안 된다. 2만 명이 아니라 20만 명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은 형법 조문을 착실하게 공부한 적이 없고, 판례를 찾아본 적도 없으며, 사건 경위에 대한 일차적인 이해는 더더욱 없는 사람이다. 그들의 판단은 감정적이며 전해 들은 말에서 비롯된다. 하나의 의견에 몰려드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안에는 순전히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법은 더더욱 이에 영향을 받아선 안 된다. 조문을 공부하고 판례를 살피고 사건의 경위를 직접 이해하려면 전문적인 훈련과 경험의 누적이 필요하다. 이러한 훈련과 경험이 뒷받침되는 사람만이 사법 판단에 종사할 권리를 가진다. 그렇기에 사법은 사법 전문가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 - < 미국 헌법을 읽다, 양자오 지음, 박다짐 옮김 > 중에서

그렇다면 2만 명, 20만 명의 의견은 모두 열외인가? 만약 그토록 많은 사람이 이 일에 마음을 모으고 있다면,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사법을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지고한 권리인 인민 주권을 행사해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다. 입법권은 인민에게 속한다. 그러나 일단 법률이 성립되면, 법률을 맡아 관리하는 일은 사법 전문가에게 넘어간다. 이것이 삼권의 분업이다. - < 미국 헌법을 읽다, 양자오 지음, 박다짐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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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주의자 논고』는 또 다른 의의를 가진다. 최초로 민주의 현실 운용을 토론한 저작이라는 점이다. 몽테스키외와 루소의 작품,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전쟁 시기에 전파된 책에는 민주적인 사고와 제도 구상에 대한 수많은 탐구가 담겨 있다. 하지만 『연방주의자 논고』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념이나 상상이 아닌 구체적인 실천을 위한 민주를 다룬 글이 없었다 - < 미국 헌법을 읽다, 양자오 지음, 박다짐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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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유대교의 비슷한 듯 다른 유대인 추방신화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기독교가 4세기에 로마 제국의 국교가되자, 유대교와 유대인은 이단과 불신자로 낙인찍혔다. 제국 곳곳에있던 유대교 신자들은 신이 내린 처벌로서의 유배라는 개념을 채택해, 자기 처지를 달래야 했다. 유대교는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추방됐다는 기독교 억압자들의 담론을 받아들였지만, 유대교가 그런 담론에 기반해 내린 결론은 기독교도의 결론과는 달랐다. 기독교도들이 유대인에 대한 신의 처벌을 거부이고 버림이라고 생각한 반면, 유대인들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는 자들을 징계 (잠언 3:12)하는 자신들의 특별한 선택된‘ 지위에 대한 확인으로 여겼다. 그래서, 유대인이 추방된곳의 민족들은 부정한 우상숭배자이다. 하느님이 무한한 자비로 그의자식인 유대인들을 구원하고 죄를 벗겨줄 때까지 우상숭배자의 아침과 마수는 모든 희생을 치러서라도 거부해야 한다. 유대인이 겪는 추방 등 고난은 결국 구원이라는 보상으로 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잠언 3:11~12)라고 추방을 신이 내리는 징계로 받아들였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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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엘리트의 유일신앙

현재, 대다수 성서학자는 진정한 유일신앙은 유다 왕국이 패망해많은 지식인과 지배층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바빌론 유수 시기인 기원전 6세기 후반 이후에 생겨났다고 합의하고 있다. 그전까지는 이스라엘이나 유다 왕국 내에서는 야훼 신앙은 단일신교, 즉 다른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하나의 신만을 숭배하는 형태로 종교개혁가 사이에서 존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요시야 왕 이후 남유다 왕국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하고, 유다의 엘리트들은 바빌론에 끌려갔다. 이들이 거대 제국의 수도에서 소수집단 공동체를 이루고 제 나름대로 정체성을 유지했을 것임을 현대 미국의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 등의 이민 공동체를 보면 유추할 수 있다. 이미 요시야 왕 때의 종교개혁에 고취된 이 엘리트들의 손에서 민족적 비극의 경험에 더해진 선진문명의 충격이 성서라는 결과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P78

이들은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패권 제국으로 등장한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제(카루스 2세)에 의해 50여년 만에 가나안으로돌아가도록 허락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이 바빌론에 남고, 일부만 가나안으로 향했다. 번화한 세계의 중심에서 반세기를 살면서 생활 근거지를 찾은 이들에게는 조상들이 발원했다는 벽촌의 가나안으로 돌아갈현실적 이유도, 의무도 없었다. 중세 이후까지 바빌론에 존재한 최대유대인 공동체가 이를 말해준다. - P78

페르시아의 통치에서 ‘예후드‘ 지역으로 편제된 가나안으로 돌아온 이들은 황제의 대리인으로 사실상 총독 역할을 하면서, 자신들의종교와 이데올로기를 전파했다. 바빌론 유수 이후 성서에서 이스라엘의 예언자로 등장하는 에스라 느헤미야 등은 사실상 페르시아 황제의총독이라 할 수 있다. 사제이기도 한 이들의 통치는 신정 통치의 성격을 가졌다. 이는 성서에서 다윗 왕국 성립 이전 판관들의 통치를 담은사사기로 엿볼 수 있다.
성서는 남유다 왕국의 다윗 왕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만, 그 역대왕들의 타락도 질타하고 저주한다. 성서가 요시야 왕 때 만들어졌다면,
왕가에 대한 이런 불경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당시 예후드를 통치했던 사제들의 관점과 지위에서만 과거 역대 왕을 비판하는 게 가능했을테다. 그리하여 왕국들의 멸망과 바빌론 유수는 신과의 약속을 저버린이스라엘에 대한 벌이고, 바빌론 유수에서 해방도 야훼의 약속이 실현되는 과정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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