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채위기의 정치경제학

높은 부채비율에 의존한 차입의존 경제는 높은 투자, 높은 고용, 높은 경제성장률과 연결된다. 이 지점은 장점이다. 하지만 결정적 약점이 있었다. 국가부도(외환위기) 가능성이 매우 큰 시스템이었다.고부채, 고투자, 고고용, 고성장, 고부도 가능성은 서로 연동된 것이었다. 

한국경제는 실제로 1972년, 1980년, 1997년 3번에 걸쳐 외환위기 사태가 발생했다. 1972년 외환위기는 8·3 사채동결이라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한국 정부가 해결했다. 1980년 외환위기는 미국정부와 일본 정부가 ‘한국이 공산화될까봐 걱정했기에 차관 지원과 채무재조정을 해줬다. 1997년 외환위기는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과 일본 모두 차관 지원과 채무 재조정을 해줘야 할 이유도, 한국이 공산화될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어졌다.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 이후, IMF가 가혹한 구제금융 조건을 제시한 이유다.

1980년 한국경제는 외환위기가 발생하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그해 한국은 엄청난 규모의 대외부채와 단기부채비율 그리고 허약한 외환보유고에도 불구하고 끝내 외환위기가 발생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미국과 일본이 개입해서 한국 정부를 도와줬기 때문이다. 1980년 전두환은 군사 쿠데타와 광주 학살을 통해 집권한 이후에 일본 정부에게 차관을 요구했다. 그랬더니 실제로1981년에 일본은 한국 정부에게 대규모 차관을 지원해줬다. 미국은한국 부채에 대해 채무재조정을 해줬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일본정부에게 차관 제공을 요구한 명분은 안보였다. 한국이 ‘공산주의국가와 대치 상태‘에 있기에, 일본은 한국 덕분에 안보 비용을 절약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요청한 명분은 일본에 실제로 설득력을 발휘했고, 일본은 대규모 차관을 한국 정부에 제공한다.
당시 한국과 관련해, 미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가장 걱정하던것은 한국이 ‘공산화되는 것이었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이 치열하게체제 경쟁을 하고 있었다. 미·소 냉전 체제였다. 당시 미국, 일본, IMF는 ‘한국이 망하지 않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했다. 이들 나라들은 한국 정부만큼이나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기를 갈망했다. 미·소냉전 체제 내내 한국이 망하지 않는 것은 한국 국민의 관심사이기도했지만, 미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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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위기 때는 상황이 달라졌다. 1991년 소련이 망해버렸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적 체제 경쟁이 끝났다. 소련은 망했고 미국이 승리했다. 한국이 공산화될 가능성은 사라졌다. 소련이 망하게 되자 미국과 일본은 1980년에 그랬던 것처럼 ‘한국이 망하지 않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필요도 사라졌다.

우리는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 미국과 IMF가 유독 한국에게 가혹한 구제금융 조건을 제시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상황은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미·소 냉전기에 미국은 유독 한국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친 것으로 봐야 한다. 한국이 공산화되는 것을막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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