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 무역항과 수입세 장악

 1635년부터 2세기 이상 동안 일본은 유럽 상인들이 한 곳에서만 무역하는 것을 허용했고, 중국 상인들도 다른 한 곳에서만 무역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외국 사상의 확산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수입세 징수를 용이하게 하기도 했다. 중국은 1685년 모든 수입품에 20퍼센트의 관세를 부과했으며, 1757년에는 모든 대외무역은 광저우남부 항구에 있는 세관을 통과하도록 요구했다. 상인이 그러한 부과금을 지불했든 회피하기 위해 추가비용을 들였든, 수입업자의 청구서에는 통행료와 관세가 추가됐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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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관세들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지역 통치자와 종교 관계자는 화물이 강을 건너거나 마을에 들어올 때마다 통행료를 걷었다. 독일이 아직 공작령, 자치주, 공국, 독립 도시국가 등의 집합체였던 1500년대 후반에 한 스위스 무역상은 바젤과 쾰른 사이에서 31번의 통행료를 내야 했다고 보고했으며, 1765년 그의 후손들은 바이에른에서만 거의 500곳에서 부과된 세금에 직면했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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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2월 3일, 그는 베이징 북한대사관에서 전명수 대사로부터 ‘3급 국기훈장’과 함께 화첩, 레코드판 등을 부상으로 받았다. 그는 아내와 함께 사진관으로 가서 훈장을 가슴에 달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남한에서는 1968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1991년 애국장)을 받았으니 그는 분단 시대 남북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 된 셈이다.
결국 그의 귀국은 2002년 유해 봉환 형태로 이뤄졌다. 참으로 멀고도 기구한 귀국 길이었다. 그는 1985년 사거하여 창사 웨루산 기슭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가 2002년 3월 19일 대전현충원으로 봉환, 고국의 품에서 영면하게 되었다. - <84. 류자명>, 박걸순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2brrnQARQEG3jsvS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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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등학교 학생의 진료의사결정 기간은 이들이 접하는 정보의 양에 비해 상대적으다. 특히 연구선도학교 운영을 통해 2019년부터 운영되기 시작한 고교학점제는 고등학교 학생의 진료의사결정 시기를 더욱 앞당겼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문·이과 계열을 선택했던 과거의 교육과정과 달리, 고교학점제하의 학생들은 1학년2학기 이전에 학생 개인이 희망하는 과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의 입시제도 또한 고등학생이 수행해야 할 다양한 비교과활동을 미리 계획하고 결정하게 함으로써 이들의 진료의사결정 시기를 앞당겼다고 볼 수 있다. 직업계고등학교 학생의 경우에도고등학교 저학년 시기에 전공을 선택하게 되며 전공역량 강화를 위한 자격중, 교육 등의의사결정을 수행하게 된다. 즉,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학생들은 진로와 관련한 다양하고구체적인 정보를 접하게 되지만 진로의사결정까지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는 않은 실정임을 알 수 있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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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금
류자명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안에 있던 화광병원華光病院을 거점으로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도 교유했다. 이 병원은 쓰촨 출신의 덩멍셴鄧夢仙이 개업한 곳으로,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교유하며 아나키즘을 수용한 인물이었다. 이 병원을 왕래하는 동안 덩멍셴은 물론, 바진巴金·마오이보毛一波·루졘보盧劍波 등과도 친교를 맺게 되었다. 바진의 본명은 리야오탕李堯棠이며, 쓰촨성 청두成都 출신으로 중국 현대의 대문호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항일투쟁을 소재로 한 여러 편의 소설을 썼는데, 그 가운데 류자명을 주제로 한 것도 몇 편 있다. 「난징에서 상하이로 돌아오며從南京回上海」(1932), 「머리카락 이야기髮的故事」(1936), 「민부도상民富渡上」(1938), 「불에 관하여關於火」(1980) 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1930년대 초반부터 아나키즘을 매개로 시작된 류자명과 바진의 교유는 50여 년간 지속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호형호제했는데, 바진은 자신의 전집을 류자명에게 선사하며 ‘자명형子明兄’이라고 써서 줄 정도였다. 그가 류자명에게 『회억록』을 쓰도록 권유하고 중국어 초고를 교열해준 것은 둘 사이의 친교를 알려주는 유명한 일화다. - <84. 류자명>, 박걸순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vEtuVGdPFJJbe4qt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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