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곳 중 한 곳 혹은 양쪽 모두에 입지할 수 있는 한 산업을 생각해보자 즉 임금률과 따라서 생산비가 높지만 시장에 대한 접근성이 좋은 하나의 ‘중심‘ 또는 노동비용이 낮으나 시장에 대한 접근성이 덜 좋은 ‘주변국‘이 그곳이다. 

수송비 감소는 항상 생산을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이전시키는경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틀린 생각이다.

이유는 수송비 감소가 두 가지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가장 생산비가 저렴한 곳으로 생산을 이전시키기 용이하게 하지만, 또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도록 생산을 한 지역에 집중하기 쉽게도 한다. 생산이 집중될 때 [보다 높은 임금으로 인하여] 비용은 더 들지만, 접근성이 개선되는 지역에 생산을 집중시키는 것이 [낮은 수송비로 인하여] 이익이 될 수 있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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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풀링과 지역화

이러한 첨단기술 이야기들에서 강조해야 하는 것은, 그 집적과정에서 비첨단 기술요소들의 중요성이다. 실리콘밸리와 루트128 주변 모두에서 핵심적 이점은 일정한 기예를 갖춘 사람들 풀의 존재이다. 예를 들어 보스톤지역에서 소프트웨어 분야의 성장 기업들은 다양한 세부 학문 분야에서 난해한 지식을 갖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해도 무방하다.
동시에 보스톤 지역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예를 확보하는 데 투자하거나 혹은 이러한 기예를 갖춘 사람들이 살기에 양호한 지역이었다. 많이들 그런 것처럼 만약 창업기업이 망하면, 다른 지역으로 갈 필요 없이 다른 직장을 - P150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바로 노동자 풀링 이야기이다. 기예가 신발 제조나 술담기가 아니라 첨단기술을 포함한다는 사실은 부차적일 것이다.
하나의 일화가 있다. 나중에 Made in America 라는 베스트셀러를 출간한 MIT 생산성위원회에 참여했을 때, 나는 매우 비첨단으로 보이는 부문들이 첨단 기술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여 공학자들에게 매우 인기가 없게 되었다. 예를 들면 밀라노의 패션산업을 고려해보자. 고도로특화된 노동력(디자이너, 패션모델, 봉제사 등), 특화된 공급자(직물, 염색, 장식 등) 그리고 정보에 대한 초기 접근성(무엇이 인기가 있고 무엇이 인기가 없는지)에 의존하는 기업들의 클러스터이다. 나는 밀라노와 루트128 이 경제적으로 유사한 창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공학자들은 내가 바보라고 생각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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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비와 입지

크루그먼은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임금률과 생산비가 높지만 시장에 대한 접근성이 좋은 중심국과, 임금률은 낮으나 시장에 대한 접근성이 덜 좋은 주변국이 있는 상황에서 양 국가 중 일국 또는 양국 모두에 입지할 수 있는 한 산업이 있다고 가정한다. 이 상황에서 수송비(넓은 의미에서무역장벽)가 하락하면 두 가지 효과가 나타난다.

하나는 생산비가 저렴한 곳으로 생산을 이전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쉽게 생산을 한 지역(중심)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중심으로 집중하면 높은 임금으로 인하여 비용은 더 들지만 집중을 통하여 규모의 경계를 강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낮은 수송비로 인하여 주변부에 대한 접근성이 개선되어 비용이 절감됨으로써 이득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크루그먼은 이 모형을 벨기에가 중심이고 스페인이 주변인 가설적 사례에 적용한다. 생산비는 스페인에서 생산하는 것이 유리하지만, 규모의 경제 때문에 양국에서 생산하는 것보다는 일국에서 생산하는 것이 더 싸며, 양국에서 생산하는 것이 수송비용을 최소화하지만 수요가 많은 중심에서 생산하는 것이 수송비가 덜 든다. 이때 수송비가 각각 ‘높고‘, ‘중간‘이고 그리고 ‘낮은‘ 세 가지 경우에 생산비와 수송비의 합계를 최소화하는 곳에서 결정되는 생산 입지의 변화를 추적한다. - P58


수송비가 높은 경우에는 양국에서 생산이 이루어지지만, 낮은 경우에는 스페인에서 생산이 이루어지게 된다. 반면 수송비가 중간인 경우에는생산 입지는 오히려 벨기에로 이동하게 된다. 왜냐하면 생산비와 수송비의 합이 생산을 집중시킬 정도로 충분히 낮은 상황에서 여전히 시장에 대한 접근이 입지의 결정인자로서 양국의 생산비 차이를 초과할 만큼 크기때문이다. 따라서 주변국인 스페인의 입장에서 수송비의 하락에 따른 생산 추이를 보면, 수송비가 높을 경우에는 스페인에서 자체 생산하다가, 중간 수준에서는 오히려 생산이 벨기에로 넘어 갔다가 낮아져서야 다시 생산이 증가하는 U자형을 취하게 된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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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3월 혁명 이후 프랑크푸르트의 파울교회에서 1849년 3월 27일 개최된 독일제헌국민회의에서 오랜 토론 끝에 ‘독일 (제)국 헌법‘이 채택되고 다음날 공표된다. 국민회의가 개최된 곳의 이름을 따서 ‘파울교회헌법‘ 또는 ‘프랑크푸르트 제국 헌법‘이라 불린다.

파울교회헌법은 입헌군주제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 목적으로 황제 선출단은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독일 황제로 추대했다. 빌헬름 4세는 왕권신수설을 근거로 이를 거절한다. 이로 인해 파울교회헌법은 좌초된다.

1871년 4월 16일 이른바 비스마르크 헌법이 새 독일 제국의 헌법으로 효력을 갖게 된다. 이 헌법은 1866년의 북독일 연방 헌법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영향을 미친 이 헌법은 기본권에 대한 조항이 없었고 국가 기관에 대한 권한 규정을 제한하고 있었다. 또한 이 헌법은 국가 형태로 군주제를 규정하고 있었다.

이 비스마르크 헌법은 1919년 파울교회헌법을 지향하며 기본권 조항을 포함한 바이마르 헌법으로 대체되었다.

바이마르 헌법은 후고 프로스가 조문을 작성했는데, 그를 통해 로베르트 레드스롭스(Robert Redslobs)의 의회주의 이론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헌법 제정을 논의한 도시의 이름을 따 바이마르 헌법이라 불린다. 그러나 실제로 헌법이 국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 의해 서명된 곳(법적 효력을 가지게 된 곳)은 슈바르츠부르크였다.

1919년 1월 19일 제헌 국민회의 의원 선출을 위한 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에는 여성에게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졌으며 의석은 비례대표제로 배분되었다. 독일 사민당이 최대 의석을 확보했으며 중앙당, 독일 민주당과 연합해 소위 바이마르 연정을 구성했다.

1919년 2월 6일 국민회의는 첫 회의를 바이마르에서 개최하였다. 당시 베를린에서는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의원들의 안전과 독립성을 위해 회의를 다른 곳에서 열 수밖에 없었다. 바이마르가 선택된 것은 바이마르는 인본주의적 이상주의 전통의 상징성 때문이도 하지만 애초에 계획되었던 에르푸르트가 군사적으로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초안 작성은 당시 내무부 차관, 후에 장관을 지낸 후고 프로이스가 했다. 그 후에 국민 자문위원으로 막스 베버가 검토하는 일을 맡았으나 내용 수정은 가해지지 않았다.

연방 상원처럼 1871년 〈제국 헌법〉의 많은 요소들이 없어지거나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를 둘러싸고 왕정옹호파와 공화파간의 많은 논쟁이 있었다. 1919년 7월 31일 국민회의는 새 헌법을 262대 75(불참 84)로 통과시켰다. 1919년 8월 11일 국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슈바르츠부르크에서 헌법에 서명하고 공표하였다. 8월 11일은 독일에서 민주주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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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must go back to the early 1800s and a fundamental problem: state governments were eager to spur rapid economic growth through infrastructure projects but could not raise local taxes.

“Instead of raising taxes, state governments issued charters to private companies in exchange for ownership interest. Charters were essentially monopoly or exclusive rights to run certain businesses, among which banking was especially profitable. The value of charters rested on exclusivity, but the more exclusive the charters, the greater “the possibility of creating (and charging for) private rents by limiting charters against the benefits of wider public access to corporate forms and lines of business.””

— How China Escaped the Poverty Trap (Cornell Studies in Political Economy) by Yuen Yuen Ang
https://a.co/diICLD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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