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진작부터 자기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누이동생의 그것보다 훨씬 더 절실한 것이었다. - <변신>, 프란츠카프카 지음, 붉은여우 옮김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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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4세, 성 바츨라프 그리고 두브체크

그런데 19세기 후반 보헤미안의 뜻이 달라졌다. 유럽 사회의 주류로 지위를 굳힌 부르주아 계급의 틀에 박힌 도덕 규범이나 행동 양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 가치관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활동하는 지식인과 예술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주로 시인·소설가·화가·음악인이었다. - <유럽도시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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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는 룩셈부르크 왕가이고 모계는 보헤미아 왕가였던 카렐 4세는 1346년 보헤미아왕으로는 처음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었다.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고 라틴어와 체코어·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를 구사했으며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전쟁에 참가했던 그는 프라하를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았고 신시가지를 조성했다. 뿐만 아니라 중부 유럽 최초의 대학을 설립해 관료와 법률가를 양성하고 학문 연구와 예술 활동을 장려했다. 프라하성과 성 비타 성당 건축도 그가 주도했다. 자녀들의 정략혼인을 통해 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키웠고 스위스 티롤 지방과 이탈리아 북부로 영토를 확장했으며 세 아들과 조카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다. 체코 사람들은 보헤미아의 황금기를 연 군주였던 그를 국가의 창설자로 여긴다. 대학과 교량과 광장 등 그의 이름을 붙인 곳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 <유럽도시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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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4세가 실제적 국가 창설자라면 성 바츨라프는 정신적 국가 창설자이다. 생일이 확실치 않아서 사망한 날을 정신적인 국경일로 삼았다. 통치자로서 거론할 만한 업적도 없고 재위 기간도 짧았지만 도덕적 정치적 비난을 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게다가 보헤미아의 자존을 지키려고 외세에 대항하다가 사악한 동생의 손에 목숨을 빼앗겼다. 긴 세월 외세와 종교권력의 억압과 핍박을 받으며 자존과 독립을 갈구했던 보헤미아 민중이 역사에서 그를 불러냈다. 영웅은 탄생하는 게 아니다. 민중이 찾아내고 만든다. - <유럽도시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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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봄’은 1956년 가을에 일어났던 헝가리 반소 민주주의혁명과 거의 같은 사건이었다. 1968년 봄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의 투쟁과 민중의 지지에 힘입어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 서기장이 된 슬로바키아 태생의 반나치 전사 출신 두브체크(Alexander Dubček, 1921-1992)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구호를 내세워 중앙집권적 관료주의적 경제체제를 자유화하고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화 개혁을 추진했다. 소련 정부는 이러한 흐름이 동유럽 전체로 퍼져나가는 사태를 막으려고 1968년 8월 21일 군사개입을 감행했다. - <유럽도시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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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와 후스

후스를 모른다고 해서 프라하 여행에 지장이 생기진 않지만 알면 프라하의 공간과 체코 사람들의 정서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고등학생 시절 세계사 교과서에서 얀 후스(Jan Hus, 1372-1415)라는 ‘종교개혁가’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 그렇지만 후스가 그저 종교개혁가로서 프라하의 광장에 서 있는 건 아니다. 후스의 동상은 보헤미아 민족주의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담고 있다. - <유럽도시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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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프라하 시내의 베틀레헴 예배당에서 설교했는데 여러 면에서 남달랐다. 무엇보다도, 종교 의전에서 라틴어를 쓰라는 로마 교황청의 지침을 무시하고 체코 말로 설교했다. 신자들이 알아들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설교 내용도 교황청을 화나게 했다. 그는 믿음의 근거를 교회가 아니라 성서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와 사제들의 범죄행위와 부정부패를 가차 없이 비판했다.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비난한 것이 특히 큰 문제를 일으켰다. 교황청은 후스를 눈엣가시로 여겼지만, 교황청과 세속권력의 착취와 억압에 신음하던 보헤미아 민중은 그를 정신적인 지도자로 받아들였다. 보헤미아에 ‘후스전쟁’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 <유럽도시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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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가 남긴 종교개혁 운동의 불씨는 결국 들불이 되어 유럽 중세 봉건 질서의 해체를 재촉했다. 후스가 떠난 지 백 년도 더 지난 1517년,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는 후스와 똑같은 논리로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공개 비판했다 - <유럽도시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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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의 반란은 군주들 사이의 영토쟁탈전으로 비화해 독일·덴마크·스웨덴·프랑스를 차례로 끌어들였다. 전쟁의 성격을 규정하기 어려운 탓에 그저 ‘30년전쟁’이라고 하는 그 국제전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끝이 났고 유럽의 봉건체제는 막을 내렸다.
베스트팔렌조약은 종교 선택의 자유를 인정했다. 루터파와 칼뱅파를 비롯한 개신교가 국제적 공인을 받았고 신성로마제국에 속했던 국가들이 저마다 영토주권과 외교권을 확보했다. 독일의 패권이 무너져 프랑스가 알자스 지방을 차지했고, 스웨덴은 발트해 연안 지역을 획득했으며,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독립했다. 유럽에 국민국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보헤미아 민족주의에 불을 질렀던 얀 후스의 사상은 공화국의 시대가 된 지금도 보헤미아 민중의 가슴에 흐르고 있다 - <유럽도시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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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세 유럽의 대세였던 고딕 양식 성당들은 그렇지 않다. 높고 날카로운 첨탑과 장중한 스테인드글라스로 ‘경외심’ 또는 ‘공포감’을 강요한다. 고딕 양식은 가톨릭교회가 세속권력과 결탁하거나 스스로 세속권력을 능가하는 권력이었던 시대의 지배적 건축양식이다. 그들이 그런 집을 지은 것은 민중이 그곳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복종하기를 원해서였을 것이 -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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