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 시인이 쓴 시집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에 실린 시
■ 나무
잎새는 뿌리의 어둠을 벗어나려 하고
뿌리는 잎새의 태양을 벗어나려 한다.
나무는 나무를 벗어나려 함으로
비로소 한 그루
아름드리 나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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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빈자리
미루나무 앙상한 가지 끝
방울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갑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그 자리
방울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갑니다.
문득 방울새 앉았던 빈자리가
우주의 전부를 밝힐 듯
눈부시게 환합니다.
실은, 지극한 떨림으로 누군가를 기다려온
미루나무 가지의 마음과
단 한 번 내려앉을 그 지극함의 자리를 찾아
전 생애의 숲을 날아온 방울새의 마음이
한데 포개쳐
저물지 않는 한낮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도 미세한 떨림을 가진
미루나무 가지 하나 있어
어느 흐린 날, 그대 홀연히 앉았다 날아갔습니다.
그대 앉았던 빈 자리
이제 기다림도 슬픔도 없습니다.
다만 명상처럼 환하고 환할 뿐입니다.
먼 훗날 내 몸 사라진 뒤에도
그 빈 자리, 그대 앉았던 환한 기억으로
저 홀로 세상의 한 장을 이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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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
오늘도 베짱이는 허기진 노래를 불러요.
개미를 한입에 먹어치우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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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육체의 피뢰침이 운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들판의 느티나무, 뇌우 속에서
낮은 소리로 혼자 울고 있다.
그 느티나무 아래 서 있는 나
비를 긋기 위해서가 아니다.
온 머리채를 흔들며
낙뢰를 부르는 느티나무
나는 지금 벼락을 맞고 싶은 것이다.
온 머리채를 흔들며
낙뢰를 부르는 느티나무
수십만 볼트의 전류가 언제
내 몸을 뚫고 갔는지 모른다.
시의 유배지여, 기억하는가.
난 벼락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찰나의 낙뢰 속에서
내 몸과 대기와 대지의 주인이 되는
나여,그 섬광의 희열 밖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비바람이 불고, 느티나무 아래
내 육체의 피뢰침이 운다.
내 전생애가 운다. 벼락이여 오라.
한 순간 그대가 보여주는 섬광의 길을 따라
나 또 한번 내몸과 대기와 대지의 주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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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네 이름을 간절히 부른 적이 있다
간교한 여우도
피를 빠는 흡혈박쥐도
치명적인 독을 가진 뱀도
자기의 애틋함을 전하려 애쓰는
누군가가 있다.
그들이 누군가에게 애틋함을 갖는 순간
간교함은 더욱 간교해지고
피는 더욱 진한 피냄새를 풍기며
독은 더욱 독한 독기를 품는다.
나도 네 이름을 간절히 부른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결국
내가 내게 깊이 취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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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의 선물
어느날, 하얀 깃털과 붉은 부리를 가진 새가
나의 창가를 방문했다.
그 새는 며칠을 창가에 드리워진 전깃줄에 앉아
내 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저어 쫒아도 날아가지 않았다.
깊은 밤, 내 외로움이 그 작은 새의 깊은 눈과 마주쳤을 때
난 그에게 예쁜 새장을 하나 마련해주리라 생각했다.
이 세상의 거친 바람소리보다 완벽한 자기만의 방,
그 충만한 적요를 사랑하는 자의 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새장 문을 활짝 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사뿐히 날아와 새장 안으로 들어왔다.
가끔 문을 열어두어도 그는 날아가지 않았다.
며칠 후 나는 새 파는 집에 들러
그를 위해 꼬리가 앙증맞은 암놈 한 마리를 샀다.
그러나 웬일일까 둘은 만난 그날부터
서로를 쪼아대며 쉼없이 다투는 것이었다.
짝이 맘에 들지 않는 게 아닐까요.
새집 주인은 새로운 새를 권했다.
이번엔 모든 게 잘돼가는 것 같았다.
둘은 서로를 고요하게 응시하며 사이좋게 먹이를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평온한 나날들이 흘러갔다.
어느 햇볕 좋은 날, 난 여느 때처럼 청소를 위해
새장 문을 열었다.
순간 그 붉은 부리의 새는
갑자기 조롱을 빠져나와 푸르르 창밖으로 날아가버리는 것이었다.
새는 전깃줄에 앉아 깊은 눈으로 한동안 나를 바라보다
훌쩍 빌딩 숲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그것이 내가 본 붉은 부리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남아 있는 암컷 새를 다시 새 파는 집에 돌려주었다.
지금도 난 가끔 창가의 전깃줄에 앉아있던
그의 첫 모습을 떠올린다.
나는 진정 새 파는 집에 그의 사랑이 있다고 믿었던 걸까.
날 바라보던 그 붉은 부리새의 마지막 두 눈처럼
생은 때론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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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의 소리
개들은 처음 짖던 대로 짖고
새들은 처음 울던 대로 운다
우리는 처음 사랑의 말을 나누었으나
오늘은 굳은 입술로 침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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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
각본가, 교수, 시인
유하는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영화 감독이다. 본명은 김영준이다. 2004년부터 동국대학교 영상정보통신대학원 영화영상제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88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단에 등단했으며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으로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다.
○ 시집 대표작
「천일마화」,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2004), <좀비처럼 걸어봐> (2003), <몰락 취미를 꿈꾸다> (2002)- 단편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2001),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1993), <시인 구보씨의 하루> (1990)-단편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