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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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라 알라딘에서 책을 자뜩 주문 해 놓고 집에 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해리 포터 7편 3,4권이랑 촘스키의 글 모음 <사상의 향연>과 우석훈, 박권일의 <88만원 세대>를 샀다.  이 <88만원 세대>라는 책 제목이 여러 신문문들에서 인용되길래 어떤 내용인가, 무척 궁금한 터였다. 

저녁 먹고 나서 소파에 앉아 쉬지 않고 읽었더니 눈이 다 뻑뻑해졌다.  하지만 쉬지 않고 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세상을 살피는 일에 참 무지했다는 사실을 느낀 탓이고 또 다른 이유는 이 책의 제목에서 보여 주듯이 이 땅의 경제 현실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분석해 놓아 책에서 손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분석 방법이나 관점에 있어 동의하지 못 한다는 이견도 많겠지만 이 책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이 시대의 현실과 문제점이 그냥 스쳐지나가듯 받아 드리기엔 정말 마음을 무겁게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문에 써놓은 글이란 대개 지면상의 제약과 그 신문들이 지향하고 있는 성격 상, 책의 내용을 잘못 인용하기 십상인 듯 하다.  이 <88만원 세대>라는 책 제목도 그렇다.  대개 신문에서 이 책 제목을 인용할 땐 현재 청년 실업자들의 수가 많다는 것을 대표하는 정도에서 머문다.  하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경제학 관련 서적이라야 슈마허가 쓴 <작은 것이 아름답다> 정도만 아는 터라 이 책이 담고 있는 전문적인 내용을 일일이 살펴보기엔 무리가 있지만 몇 가지 가슴에 와 닿은 내용이 있다.  

경제학과 물리학에서 그 둘 사이의 가잠 닮은 점은 평형 (equilibrium)의 중요성인 것 같다.  그 평형점은 대개 안정성 또는 불안전성과 관계가 있다.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바탕을 이루고 있는 변분 원리의 기본이 되는 내용 또한 이 평형과 관련이 있다.  자연을 기술하는 고전적인 모든 방정식은 작용소를 최소화한다 라고 불리는 이 해밀톤 원리는 자연, 또는 우주가 가장 경제적으로 작동한다는 말과 같다.  지구가 지금과 같이 태양의 둘레를 도는 이유는 그게 가장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가장 경제적이라는 말은 자연이 가장 정직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자연은 절대로 그 룰을 어기지 않으니까 말이다.  반면에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 사회는 이기주의와 탐욕과 잘못된 결정, 즉 평형점에서 대단히 먼 결정들 때문에 screw up 되기 십상이다. 

이 <88만원 세대>라는 책에서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그 평형점에서 얼마나 먼가를 보여준다.  이 책은 현재 10대와 20대들이 겪고 있는 그 노동 착취의 현장, 그 불균형에 관한 책이다.  그리고 그 불균형이 안고 있는 그 폭발력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특히, 한 세대가 그 다음 세대를 어떻게 착취하고 있는가에 대한 현장 보고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대한민국의 경제적 모순점 중 가장 큰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독과점의 횡포가 어떻게 후속 세대의 경제적 자립을 훼손시킬 수 있는지 보여준다.  

한번씩 신문들에서 중소기업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취재하고 기사화하기도 하지만 그 근본 문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놓여있는 그 착취 구조일 것이다.  그 착취 구조는 단지 두 회사의 관계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세대와 세대간 대결이라는 더 큰 시대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한다.  20대가 자영업을 시작하기에 지금, 특히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얼마나 더 힘들어져 졌는가 하는 것을 말한다.  노무현 정권을 대표하는 단어, 그 혁신 (Innovation)이라는 단어가 실제 문제에 적용될 때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표현으로 재해석된다.  이 선택과 집중이 듣기에는 경쟁력을 강화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 그 선택과 집중의 결정자는 정부이기 때문에 그 혁신이라는 단어에 맞춰지기 위해서 독재시대 때 보다 더한 획일화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분석은 올바른 분석이다.  비슷한 부작용이 대학을 향한 구조조정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현 20대와 구분되는 앞선 세대를 유신 세대와 386세대로 나눈다.  그 나누는 것에 대해서도 경제학적으로 논의하기는 하지만 이 책의 큰 흐름과는 별 상관이 없기 때문에 비록 정치적인 분류에 들겠지만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까지를 유신세대, 30대 말에서 40대 후반까지를 386세대로 분류한다.  이 두 세대를 다른 선진국의 68세대들과 비교한다.  그 비교는 나름대로 공부가 된다.  세상 일이라는 게 그렇게 날카롭게 카테고리화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잠시 접어둔다 해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특히, 68혁명을 극심하게 겪었던 독일과 프랑스의 예는 그 68운동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일본의 단카이 세대.  그리고 한국의 유신 세대와 386세대.  그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세대가 이 386세대로 보인다.  프랑스의 68혁명을 주도했던 젊은이들 중에는 중고생도 다수 있었다.  그리고 그 68혁명의 중심 사상에는 모택동이나 마르크스의 책이 아니라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라는 어려운 철학책이 있었다.  그 운동의 결과가 프랑스 대학들의 국립화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반면에 한국의 386세대의 가장 큰 쟁점은 독재 타도와 북한과의 관계 개선, 더 나아가 민족끼리의 통일이었다.  노동자 문제도 중요한 화두가 되긴 했지만 정작 그 문제의 본질은 더 큰 시대 담론에 묻혀 버렸다고 볼 수 있다.  

그 거대 담론에서 내려와 한 개인의 삶으로 돌아와 보면 더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이 경제적으로 자립해서 가정을 꾸리고 사회의 한 단위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386 세대는 그 혁명의 단물은 다 빨아 먹었으면서 정작 그 후속 세대를 핍박하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 책의 분석결과이기도 하다.  저자도 조금 우려하는 바이지만 이 부분은 조금 성급한 일반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386 세대의 사악함이 아니라 20대가 놓여있는 그 불안한 위치이다.  이 책의 1부에서는 기존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2부에서는 그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파고든다.  현제 이 땅을 횡행하고 있는 승자 독식 구조, 개미지옥의 현실, 10대 20대 알바들의 비참한 현실, 그 현실의 내면에 깔려 있는 그 독과점화의 문제들, 프랜차이징의 문제점들......  2부에서 그 문제점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만 그 해답대로 문제가 풀릴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리 희망적이지 못 하다.  하지만 두 가지 근본 해결 방안에는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창조적 파괴와 협력 게임.  이 두 해답은 급격하게 평형점을 찾아갈 것이냐, 아님, 서서히 그 평형점에 접근할 것인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문제는 현재의 경제 형태로는 위기가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 노무현 정권이 바탕을 두고 있는 사상은 마르크스를 어설프게 이해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이 노동과 자본에 대한 분명한 분석과 자본주의에 폐악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한 학문이기는 하지만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그 유물론 사상, 그 뒤에 있는 진화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좌파라고 부르짖는 것과는 달리 신자유주의와 경쟁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경쟁은 있어야 하지만 경쟁이라는 것에 필여적으로 함께 따라야 하는 것이 공정함이다.  이것이 존 롤즈가 정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공정함이라고 이야기했던 것과 통한다.  지금 20대가 그 공정함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신세대와 386세대는 반성하여야 한다.  가장 진보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이 386세대들이 자식들의 교육에 목을 메는 이유는 이 땅이 얼마나 학벌과 승자독식의 구조에 찌들려 있는지 알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10대를 인질 삼아 20대를 희생시킬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삼성의 비자금 문제.  검찰에서 삼성을 수사하려 들 때마다 늘 터져 나오는 말이 우리나라의 경제 문제이다.  삼성이 우리나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니까 그 걱정을 무시하기엔 염려되는 면도 있지만 사회 정의 - 전두환 정권이 썼던 말이라 어감은 안 좋지만 -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삼성의 행태 때문에 앞으로 우리가 잃는 게 훨씬 더 클 수 있다는 것이다.  <88만원 세대>에서도 잠깐 나오는 말이지만 세계적인 기업이 아이들에게 모유를 무료로 제공해 주길 원했던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이 사살당한 그 뒤에는 네슬레라는 회사가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한다.  이 네슬레라는 회사, 독일 히틀러 정권에 빌붙었던 회사라는 사실은 독일에 있을 때부터 들어 알고 있다.  삼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로 가는 길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투명함이다.  비자금이라는 단어, 영어로는 slush fund라고 부른다.  누구에게 뇌물로 주기 위해 조성된 돈이라는 뜻이다.  뇌물로 준다는 이유는 경쟁에 있어서 공정함을 버리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삼성은 그 주주들에게나 그 상품을 사는 소비자들에게 이미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성이라는 한 회사가 많은 영역에서 독과점화하는 것은 이 땅의 경제를 위해서도 안 좋은 일이다.  미국이 가장 자본주의화된 나라라지만 그래도 그 나라에는 그 독과점 방지법이라는 게 서슬퍼렇게 살아있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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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리학을 가지고 놀았다 - 노벨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만의 삶과 과학 리처드 파인만 시리즈 1
존 그리빈.메리 그리빈 지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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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Physikos) 역사의 기점을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찾아야 할지 아니면 갈릴레오나 뉴톤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지만 물리학이 가장 발전한 시대는 아마 20세기일 것이다. 신화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던 아리스토텔레스 조차 자연을 보는 눈은 여전히 신화에 머물러 있었고 그 뛰어났다던 프톨레마이우스는 자연을 보는 데 종교를 극복하지 못했다. 프톨레마이우스가 쓴 알마게스트(Almagest)는 그 당시 과학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천체에 관한 내용을 잘 설명한 책이지만 현상을 기술하는 데 그쳤다. 그 현상 너머 깊이 담겨있는 원리를 파악하진 못했다. 알마게스트가 비록 코페르니쿠스의 책, 천체 궤도의 혁명(Da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을 현상을 설명하는 데 능가했지만 결국 코페르니쿠스가 옳았다. 물리학은 단순히 자연의 현상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 속에 담겨 있는 원리-물리학자들이 제일 원리(first principle)이라고 부르는 원리-를 파헤쳐 이해하는 것이다.

20세기에 살았던 물리학자 중 당대에 이름을 날렸던 물리학자들이 그랬다. 아인스타인, 하이젠베르크, 디락, 란다우, 페르미, 파울리, 슈뢰딩거, 보른, 파인만, 토모나가, 슈윙거. 이 들 중에서 미시적인 세게를 제대로 이해하는 길을 여는 데 주도적인 역활을 한 물리학자들이 바로 파인만, 토모나가, 슈윙거다. 이 세 물리학자는 양자전기역학을 개발한 공로로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세 사람 모두 독립적으로 연구했던 사람이다. 토모나가는 전후의 이본의 상황 속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연구하였던 사람이고 슈윙거는 20세 전에 이미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끝냈다고 한다. 파인만은 모든 면에서 달랐다. 그가 천재이기도 했지만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도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면을 지니고 있었다.

존 그리빈과 메리 그리빈이 쓴 <나는 물리학을 가지고 놀았다>는 책은 파인만의 삶과 과학을 그린 책이다.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쓴 책이 아니라 파인만을 무척 존경하고 있던 영국의 물리학자 존 그리빈 본인이 여러 책과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시중에 파인만에 관한 책이 이미 여러 권 나와 있기 때문에 그 책들을 이미 섭렵한 사람이면 조금 단조롭게 느낄 수도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대중을 상대로 파인만이 이루어 놓은 물리에 관한 설명도 곁들여 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뜬 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책과 비교해서 좀 더 명료하게 느껴지는 책이기도 하다.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파인만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가 늘 주창한 과학에 있어서의 정직성과 독창성, 이 둘은 파인만이 물리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시 여겼던 점이다. 파인만이 대학원생일 때 그 당시 기라성 같은 물리학자 베테나 보어에게도 거리낌 없이 대들었던 것은 그가 얼마나 권위를 하찮은 것으로 여겼던가 알 수 있다. 그 사실은 나중에 프린스턴대학교에서 파인만에게 수여하고자 했던 명예박사 학위를 거절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가 받은 노벨상조차도 행여 물리학을 연구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받지 않으려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개의 천재 물리학자와는 달리 그는 60세까지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하나 같이 노벨상급의 연구였다. 이론입자물리학에서부터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나노과학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분야를 연 개척자였다. 그의 삶 속에도 이러한 개척자 정신은 고스란이 녹아 있다.

과학을 하지 않는 사람도 그에 관한 책, 몇 권은 읽어보길 권한다.
특히 그가 얘기해준 내용을 파인만의 어린 친구 랠프 레이턴이 정리한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요!>는 꼭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고 <나는 물리학을 가지고 놀았다> 또한 그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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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즐거움 (양장)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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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공부가 손에 잡히질 않아 몇 주 전에 사두었던 책,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1931년에 일본에서 태어나 쿄토 이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한 뒤 하버드에서 자리스키 밑에서 수학으로 박사를 받은 뒤 1963년에 수학 연보(Annals of Mathematics)에 출판한 <표수 0인 체상의 대수적 다양체 특이점의 해소>라는 논문으로 1970년에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필드 메달을 받는다.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쓴 학문의 즐거움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는 오래 전에 인하대 양재현 교수가 준 대학 논문집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스스로 평범하다고 말하는 어느 수학자가 피나는 노력으로 수학의 대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내용도 아주 쉽게 읽을 수 있고 부분 부분 공부하는 사람에게 자극을 주는 내용이다. 자신이 수학자로 성공하게 된 외적, 내적 요인에 대해 잘 정리해서 이야기해주는 책이다.

7년 전 처음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믿었던 건 대개 사람의 능력이라는 게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연습이 대가를 만든다는 독일 격언처럼 누구든 열심히 하면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선생이 아무리 도와 주려고 해도 학생이 게으르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 학생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능력이라는 것도 머리가 좋고 나쁨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얼마나 성실하고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를 수행해 나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쓴 이 책에서 자신은 지극히 평범하였다지만 그 지치줄 모르는 근성이야말로 능력인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아무리 충고하고 가르치고 때로는 혼을 내어도 스스로 깨닫지 않는 한, 그 게으름을 깨고 나올 수 없다는 것을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내가 공부를 하겠다"라는 굳은 결심, "공부가 내게 주는 유익이 무한정 많다"라는 생각, "공부야말로 나의 CPU를 극대화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깨달음은 스스로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공부를 할 때 지치지 않고 밀어부칠 수 있는 근성은 바로 그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단순히 상이나 직장이나 그런 게 아니라 공부 그 자체가 내게 주는 유익이 크다는 것을 알 때 그 부단한 노력이 가능하다.
 

"문제와 함께 자라" 이 책에서 말하는 가장 멋진 말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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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평전
데니스 브라이언 지음, 승영조 옮김 / 북폴리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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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브라이언이 쓴 아인슈타인 평전은 아인슈타인의 삶과 학문을 연대별로 나눠 자세히 기술한 책이다. 저자가 아인슈타인에 대해 문헌 조사와 주위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성실하게 한 내용을 바탕으로 써 나갔기 때문인지 책을 읽으면서 꽤 객관적으로 기술하려고 애썼다는 표가 난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전기나 평전을 쓰려고 했던 사람들은 오토 네이선과 헬렌 두카스 라는 두 명의 충성스러운 케르베로스 때문에 자료를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오토 네이선은 아인슈타인의 유언집행자였고 헬렌 두카스는 아인슈타인이 죽는 날까지 곁에서 보좌했던 개인 비서였다. 두 사람은 아인슈타인의 개인적인 편지와 아인슈타인에 대한 기록 등을 보호하려고 무척 노력하였다고 한다. 오토 네이선의 경우, 아인슈타인의 기록을 보호하려고 재판까지 불사하였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논문집조차 아인슈타인 사후 32년 후인 1987년이 되어서야 출판되었다고 하니 그 사람의 정성을 알만 하다. 참고로 오토 네이선은 1987년에 사망하였다. 그 때문에 아인슈타인에 관한 많은 내용들이 비밀로 감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 서문에도 나와 있듯이 <슈뢰딩거의 삶>이라는 전기를 쓴 월터 무어가 인용한 몽테뉴의 “우리 인생은 어리석음과 신중함 사이를 오간다. 존경할 만 하고 규범적인 생애만 기록하려는 작가는 반쪽 진실을 덮어 버리는 셈이다”라는 말처럼 한 사람의 평전은 그 사람의 삶을 있었던 그대로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 데니스 브라이언의 이 책은 그 점에서 그 전에 나왔던 위인전 수준의 책이나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깎아 내리려고 의도적으로 쓴 책들과는 구분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기록에 의존해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저자의 상상력인지 (실제로 상상하려 들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잘 구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돋보인다.
이 아인슈타인 평전은 1장부터 11장까지는 탄생부터 1905년 Annalen der Physik에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 <움직이는 물체의 전자기학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실을 때까지인 1879년부터 26세까지를 기술하였고 12장부터 24장까지는 유명해지고 나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인 1906년에서 1932년까지의 아인슈타인의 학문적인 업적과 삶을 다루었다. 24장부터 42장까지는 미국에 망명한 후 죽을 때까지 그의 삶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보듯이 이 평전에서는 아인슈타인의 후기의 삶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독일의 제삼제국을 거치면서 독일 내에 있던 아인슈타인에 관한 자료보다는 미국 내에 있는 자료를 접하기가 더 수월했을 테니까 말이다. 아인슈타인의 업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는 반면에 그가 사회의 약자 편에 서서 어떤 일을 하였는가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부분이 이 책의 약점으로 작용할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이 책이 주는 감동은 바로 그러한 아인슈타인의 모습 때문에 온다. 그의 학문에 있어서나 세계를 바라보는 눈에서나 많은 점이 일치한다. 그는 학문에서도 일관성을 지니려 노력하였지만 세계를 보는 눈에서도 늘 자신의 철학에 근거하여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이 점을 비록 당시에는 실패로 끝났지만 말년에 통일장 이론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고자 하는 이론)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던 점에서도 자신과 토론하는 대상이 유명한 물리학자이든 평범한 대학원생이든 늘 같은 자세로 토론에 임했던 그의 모습에서도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가 명예나 부에 대해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은 옷차림에 지나칠 정도로 신경 쓰지 않았던 점만 빼면 오히려 동양의 선비상을 보여주는 듯 하다.
물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데 아인슈타인은 평생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정작 양자역학의 문을 여는 데 가장 크게 공언한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아인슈타인을 고전 물리에 속한 아집 센 물리학자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자연을 바라보는 그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있었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신은 노회하지만 심술궂지 않다 (Raffiniert ist der Herr Gott, aber boschaft ist Er nicht: 이 말은 아인슈타인이 노년을 보낸 프린스턴 고등과학연구소에 쓰여 있다고 한다)“에서 보듯이 아인슈타인에게는 자기만의 독특한 우주관이 있었다. 그가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단순히 그가 결정론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양자역학이 지니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아마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감명 깊었던 부분은 그의 학문과 그의 세계관의 일치다. 그가 약자 편에 섰던 것은 그가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세계관에 따라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그 조화와 통일에 대한 세계관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 개의치 않고 늘 약자 편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본인은 정작 FBI가 자신을 오랫동안 조사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지만 매카시 선풍이 몰아쳤을 당시 간첩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로젠버그 부부를 위해 그토록 열성적으로 노력하였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1910년대 전 인류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지적 산물이라는 일반상대성이론을 세상에 내어놓을 때 아인슈타인은 장장 5주에 걸쳐 철야를 하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의 건강이 많이 상하기도 했지만 거기서 학자로서의 열정을 찾아볼 수 있다. 학문과 삶에 있어서의 조화 그리고 통일성, 학문하는 자세에 있어서의 열정,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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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 몇 달 전에 잡았다가 바빠서 팽겨쳐둔 책인데 6월 들어 다시 읽기 시작했다. 정독하기로 작정하고 처음부터 차근히 읽어 나가며 노트에 정리하고 있다. 첫 장을 자세히 읽었는데 역사란 "과거와 현재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 그냥 사실과 역사적 사실의 차이. 학문이라는 게 늘 그렇듯 단어의 정의가 중요하다.
수학에서 항상 정의에서 출발해서 작은 정리(Lemma)를 세우고 다시 정리(Theorem)를 유도하고 다시 그 정리에서 proposition을 유도하듯 타 학문도 수학만큼 정식화 되어있진 않아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정리가 정의가 되고 혹은 그 역이 되듯 관점의 차이는 있기 마련이다. 자질구레한 것에 지나치게 매달려서도 안 되는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는 역사철학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역사의 개념을 먼저 이해하여야지만 역사학을 올바로 연구할 수 있다는 말인데 그건 여느 학문도 마찬가지이다. 물리학에서 닮고 싶은 천재들의 삶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열정적으로 학문에 임한 사람들이다. 와인버그. 생존하고 있는 물리학자들 중에서 이 분의 학문하는 스타일을 참 배우고 싶다. 와인버그는 논문을 깔끔하게 쓰기도 하지만 이 분이 쓴 교과서를 보면 한 분야를 연구할 때 역사적으로 그 발전해 온 과정과 동기를 먼저 샅샅이 연구한다. 역사란 비단 역사학자에게만 중요한 게 아니라 기타 학문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중요하다. 그래야지만 안목을 갖고 연구할 수 있으니까. 결국 학문이란 과거에 이루어 놓은 업적을 현재의 눈으로 살피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기도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가끔 breakthrough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과거에 이루어놓은 업적과 문제점 때문에 bias되어서 paradigm의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 늦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과거를 살필 필요가 있는 법이다.

2.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여태 읽고 있다. 읽을만한 책이다. 그러나 읽다가 목에 가시가 걸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칼 포퍼가 쓴 <열린 사회와 그 적들>과 <역사주의의 빈곤>이라는 책을 비판하고 있다. 인문학에서 비판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자연과학과 짐짓 다르게 보인다. 근원적으로 같을지 모르지만 표피 층위에서 보면 확실히 다르다. 보는 관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다. 결국 인문학에서 불변하는 가치들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언가 주장하려면 의도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쳐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카의 포퍼 비판은 논리적으로 합당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포퍼 자신이 과학철학을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금 좁은 틀 안에서 사회를 분석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포퍼가 쓴 책에서도 건질 것들이 있다. 포퍼는 역사주의라는 틀 안에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를 가두어 두었지만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의 사상 속에 들어있는 독소 조항을 살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물론 역사가 카는 이 역사주의라는 말을 혐오하는 듯 하다.
어쩌면 긴 시간을 두고 플라톤과 헤겔, 마르크스를 섭렵하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 전공이 아니라 부담은 되지만 사람 살아가는 것을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그런 지루한 과정을 밟아 나가는 것이 불가피하게 느껴진다. 아, 이 불가피하다는 말. 카가 비판했던 말이다. 역사에서의 불가피성, 결정론적 사고 말이다. 역사에서의 결정론, 그게 세계 정신이든 보이지 않는 손이든 신의 섭리든 그런 결정론이라는 것이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배제되어야 하는지 모른다. 그 반대로 우연의 역할 또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연이라는 것,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또 다른 우연에 의해 상쇄된다고 하던데....... 그 부분을 읽으며 내 머릿 속에 든 생각은 random variable을 적분할 때 fluctuation이 크지 않다면 결국 가장 dominant한 놈은 classical path가 된다는 게 떠올랐다.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 어쩌면 엄청난 큰 fluctuation 혹은 역사상 벌어지는 일들의 상호작용이 엄청나게 비선형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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