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세계 - 세계화는 어떻게 전세계의 민족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는가?
에이미 추아 지음, 윤미연 옮김 / 부광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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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 추아의 책은 모범적인 케이스 스터디를 보는 것 같다. 이 <불타는 세계>라는 책 역시 그 다음 저서인 <제국의 미래>와 유사하게 전세계에 걸쳐 각 나라들의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결론을 유도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수출할 때 준비 되지 않은 국가에서 어떤 불상사를 초래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중국인이나 러시아의 유대인, 시에라리온의 레바논인들과 같은 소수집단이 경제권을 쥐는 것과 동시에 경제적 혜택을 받지 못한 다수집단에게 민주적 권한이 주어질 때 세 가지 방식으로 반동(backlash)이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그 저자의 주장하는 바에는 공감이 많이 간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반미의 한 관점으로, 전세계에 대해 미국의 모습이 경제력을 쥔 소수집단으로 비추어 지는 데 있다고 본다.

 

<제국의 미래>와 마찬가지로 이 책의 장점은 접근 방법이 귀납적이다. 하지만 그 접근 방법이 이 책의 단점으로 부각될 수도 있다. 저자와 같은 귀납적인 접근의 한계는 저자의 테제를 증명하기 위해 든 케이스가 과연 충분한가라는 것이다. 미국과 세계 사이에 놓여있는 저 깊은 강의 이유가 단순히 경제적인 논리로만 환원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또 한 가지, 이 책의 근간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식의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반동을 제어하기 위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 점에 대해 그리 명확한 결론이 없다. <제국의 미래>에서도 느꼈던 점인데, 에이미 추아 교수의 글은 뒷심이 조금 부족하다.

 

어쨌든 에이미 추아교수의 책은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그 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일깨워 준다. 특히 인도네시아에서 돌아와 바로 본 책이라 그랬겠지만 내게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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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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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박사의 글은 몇 년 전엔가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를 읽으면서 처음 대한 적이 있다.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를 자신의 관점에서 재해석해서 쓴 글이었는데 들뢰즈나 가타리의 철학과 연계해서 열하일기를 쓴 연암선생을 조선 후기의 노마드로 규정하며 재기발랄하게 써내려간 글이 참신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물리학이나 수학에 나오는 전문적인 내용을 단순히 메타포로만 사용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그 현학적인 탈근대 내지는 탈현대 철학을 좋아하기 힘든 내 입장에서는 고미숙 박사의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에 읽은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에서도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이라는 책에서처럼 저자는 이야기를 재기발랄하게, 하지만 강한 자기 주장을 섞어 인간에게 왜 공부가 중요한지 잘 설명하고 있다.  매 장을 넘어가면서 들뢰즈의 철학 냄새가 좀 풍긴다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그 전에 쓴 책과 비교하여 느낌이 많이 달랐다.  자기 주장이 강하게 실려있는 책이지만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특히, 이 땅에 펼쳐져 있는 그 야만적인 교육 현실을 날카롭게 바라보는 그 시선, 제도권 교육의 한계가 무엇인지 이반 일리치의 글을 빌어 비판하는 부분, 대안학교조차도 그 제도권 학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 한다는 지적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 그 자본주의 체계를 더욱 더 공고하게 해주는 현재의 교육 시스템에 대하여 강펀치를 날린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저자의 의도가 조금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나타나는데 그 글의 느낌으로도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호모 쿵푸스 (Homo Kungfus)라는 말이 마치 라틴어처럼 들리긴 하지만 뒤에 붙어 있는 말은 중국 무술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한 공부를 뜻한다.  이 쿵푸스라는 말의 어감에 맞게 저자는 1부, 2부, 3부를 각각 1초식, 2초식, 3초식으로 부르며 저자의 생각을 전개해 나간다.  제 1 초식에서는 현 교육 제도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 비판의 내용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제2초식에서는 호모 쿵푸스와 호모 부커스 (Bookus)를 동일화시킨다.  2 초식에서의 저자의 주장은 공부를 제대로 하라는 말인데, 그 제대로 하라는 말은 결국 고전에 집중하라는 말과 상통한다.  2초식에서 저자는 공부에 있어서 스승의 중요성과 '앎의 코뮌', 즉 학문적 공동체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제도권 밖에 있는 학자 답게 2초식에서도 제도권 안에 머물며 인문학의 위기를 노래하는 학자들에 대해서도 잽을 날린다,  '인문학의 위기를 부르는 그대들이 먼저 능동적으로 공부하라'고.  이 2초식에서는 공부 진행 과정을 암송, 구술 -> 독서 -> 글쓰기로 정리하고 있다.  3초식에서는 인디언 권법 쯤 되려나?  저자의 고전 예찬은 3초식에서도 계속된다.  독서를 통하여 우주적 존재가 되고 이런 독서를 통하여 몸과 마음을 문명의 거처로 만들 수 있다.  3초식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Amor fati.  저자는 독서와 배움의 힘을 종교적인 차원으로 확장해 간다.  3초식에서 인디언이 자연에 동화되어 살 듯, 공부에 동화되어 살면 변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저자는 주장한다.    

오늘날 교육이 자본주의 체계를 더욱 더 강화하는 쪽으로 변질되어 있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리고 그 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가 단 기간 안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 것이다.  1초식에서 언급한 문제들은 특히 오늘날 이 땅에서 벌어지는 교육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제도권 밖에서의 앎의 코뮌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이 제도권 안의 교육 문제를 변화시키는 것 또한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  변혁은 한 사람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제도권 안의 교육을 한 데 뭉퉁거려 비판할 수 있지만 그 속에서 투쟁하는 사람들 또한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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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3-30 17:03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현대인의 소외
프리츠 파펜하임 지음 / 문예출판사 / 197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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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일 태생의 미국 사회학자, 프릿츠 파펜하임이 쓴 <현대인의 소외>라는 책은 꽤 오래 전에 읽었는데 번역 탓인지, 아니면 그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고 읽은 뒤 어느 구석에 쳐 박아 두었다고 최근 다시 꺼내서 꼼꼼하게 읽었다.  역시 이해하는 데 힘들었던 주 이유는 번역 탓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오덕 선생이나 남영신 선생 같은 분들의 충고를 귀 담아 들으면서 번역을 했으면 한다.  전문 번역가가 아니라 교수들이 번역한 경우, 난독 가능성이 더 높은 걸 보면 특히나 더 그렇다.  물론 교수들이 번역한 경우, 그 전문성을 놓치지 않고 번역서에 잘 담아 놓겠지만 말이다.  

이 프릿츠 파펜하임이 쓴 <현대인의 소외 (The alienation of modern man)>은 현대 사회에서 한 인간이 소외되고 그 소외를 느끼는 원인을 마르크스와 독일 사회학자 퇴니스의 관점에서 자세히 분석해 놓은 책이다.  이 책은 현대 사회에서 소외의 원인을 먼저 분석한 뒤, 그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를 다루고 있다 .  비록 이 책이 1958년에 쓰여졌고 그 분석틀로 19세기 중반에 쓰여진 마르크스의 초기 저서 <경제학 철학 초고>와 퇴니스가 1881년에  <사회학의 근본적 개념: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이 20세기말, 동구권이 몰락하고 난 지금의 "현대사회"에 적용될 것인가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내용은 현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여전히 통찰력있는 관점을 제공해 준다.  특히 저자가 이 책을 쓴 뒤 예일대에서 발표한 <미국사회에서의 소외 (1964)>라는 글과 함께 읽으면 저자의 관점을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특히, <미국사회에서의 소외>라는 글에서는 저자의 생각을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소외에 대한 해답으로 사회주의라고 주장하는 것도 책과는 달리 더욱 더 적극적이다.  

서론에서 파펜하임은 고야의 <카프리초스>의 하나인 <이빨사냥>이라는 동판화에 나오는 한 여인과, 사진 콘테스트에서 입상한 한 사진 작가가 찍은 교통 사고 현장에서 죽기 일보 직전에 있는 고통에 찬 희생자의 사진을 예로 들며 소외에 대해 설명한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이익 추구를 극대화하는 인간과 진정한 한 인간 사이의 간극이다.  그 사진을 찍은 사진 작가는 한 인간으로서 사진을 찍기보다는 먼저 그 사람을 구했어야 하지만 그 사진작가에 더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이 좋은 사진을 찍기에 최고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개인이 자기자신으로부터의 소외가 되는 것을 경험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서론에서 저자는 현대인의 소외를 다루는 데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초고>와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를 바탕으로 두고 이론적인 분석을 해 갈 것이라고 말한다.  

1장에서는 소외의 자각을 다루는데 그 소외가 무엇인가 정의하기 위하여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 (Georg Simmel)과 훗설의 현상학, 샤르트르와 하이데거 같은 실존철학자들의 이론을 바탕으로 설명한다.    
2,3장에서 파펜하임은 현대인의 소외가 기술 과학이나 정치와 같은 현대인의 외부 조건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뒤,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이 담긴 4장에서 현대인의 소외는 사회 구조, 즉 철저하게 게젤샤프트의 성격을 띤 자본주의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상품의 사용가치 또는 고유가치 (intrinsic value)에는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고 오직 교환가치에만 두는 자본주의 체계에서 모든 관계는 내게 이익이 되는가에만 놓이게 된다.  이 경우, 우정과 같은 단어는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소외 극복으로 그 소외된 사회에서 교회나 클럽 같은 게마인샤프트에 소속되는 것은 사회구조 속에서 근본적인 치유책은 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에서는 강력한 어투를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1964년에 쓴 글에서는 현대인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든다.  이 책이 쓰여진 시점의 미국사회와 오늘날 이땅의 현실과 비교해보면 자본주의 때문에 생겨나는 그 피폐한 부분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저자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사회주의가 이 소외를 극복하는 데 만병통치약이 될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이 땅의 교육 문제, 무한경쟁으로 몰리는 사회의 모습, 곧 시행될 한미 FTA 속에서 한 인간이 더 이상 한 인격체가 아니라 사용가치가 없어지면 버려질 (expendable) 하나의 부속품 취급을 받는다는 점에서 이 땅에서도 인간 소외의 그림자는 어둡게 드리워져 있다.  사회주의로 전환은 불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서로에 대한 연민과 유대,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연대감을 높여 한 인간이 느끼는 소외를 조금이라도 극복하려면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만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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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와 여우 -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하여
이사야 벌린 지음, 강주헌 옮김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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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벌린 (Isaiah Berlin)은 자유주의 정치철학자이자 역사학자로 이름이 잘 알려져 있는 사상가이다.  이사야 벌린이 쓴 자유론이라는 책을 오래 전에 사서 읽으려다가 책 두께에 눌려 미뤄둔 적이 있다.  하지만 이사야 벌린의 사상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바가 많은지라 이사야 벌린이 쓴 책을 한권씩 읽어나갈 생각이다.  이사야 벌린이 쓴 책 중, 가장 얇아 보이는 책이 바로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책이다.  책 제목이 동화책 같아서 그 내용도 만만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책 제목은 원래 그리스의 시인, 아르킬로쿠스 (Archilochus)가 한 말,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는 말에서 왔다.  이 책에서 벌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러시아의 대 작가, 톨스토이를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책이다. 

 

일단 이 책을 좀 제대로 이해하려면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에 대한 지식이 좀 있어야 한다.  결국 이 <전쟁과 평화>라는 두꺼운 책 (이 책은 러시아 원전 만 가지고 있다)을 사서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새로운 분야를 배울 때 늘 그렇지만 새로운 연구을 해 놓은 논문을 읽기 시작할 때 참고문헌을 찾아서 찾아서 가다 보면 어느새 수십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과거의 연구를 뒤적이고 있는 나 자신을 본다.  독서라는 것도 그렇다.  이사야 벌린이 쓴 이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책을 읽다 보면 톨스토이가 쓴 책들을 조금은 비판적 관점에서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고 결국에는 톨스토이에게 영향을 준 루소, 스땅달, 메스트르 같은 그 이전 작가들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눈길을 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사야 벌린은 철학자, 작가를 고슴도치형과 여우형, 이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극명한 예가 아마 단테와 세익스피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일 것이다.  고슴도치형은 사상가에 들고 여우형은 다재다능한 천재적인 작가에 든다.  이 두 가지 유형 중, 어느 것이 더 낫느냐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각자 나름대로 장점이 있고 감상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이 이분법적인 카테고리화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분석한다.  이사야 벌린은 러시아의 톨스토이를 여우형의 작가였지만 스스로를 고슴도치형이라고 생각한 게 작가의 비극이었다고 말한다.  역사를 미시적으로 살피는 데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있었지만 지나치게 미시적이었기 때문에 전체를 살피는 데 실패한 비극적인 작가로 톨스토이를 평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 벌린이 한 이 분석은 톨스토이를 비판하는 것에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여우형으로서 톨스토이가 지닌 천재성에 대해서도 균형 있게 언급하고 있다.

 

이사야 벌린은 여러 증거를 들어 톨스토이가 역사학이나 사회학 같은 학문을 대단히 경멸하였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역사나 사회학을 과학의 한 분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였다.  이 부분은 19세기 당시 역사학이나 사회학에 관한 연구가 19세기 과학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아 결정론적인 사고 체계 하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 대해 톨스토이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5장에서 톨스토이에게 영향을 준 프랑스 정치가이자 작가인 조제프 마리 드 메스트르와 톨스토이를 대위법적으로 비교하고 있다.  이 메스트르라는 작가는 오늘날 꼴통보수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와 정치적으로 철학적으로 완전히 반대되는 길을 걷는 사람에게서도 배울 점은 있다.  톨스토이는 사고 체계가 메스트르와 유사했지만 그가 추구하는 해답은 완전히 달랐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역시 그 역사철학에 있었다. 

 

이사야 벌린은 톨스토이를 역사를 지나치게 미소단위로 보는 바람에 스스로 불행해진 천재로 결론 짓고 있다.  이 결론은 이사야 벌린이 20세기 자유주의에 가장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는 철학자라는 점을 놓고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결론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느낄 수 없을지 모르지만 톨스토이는 정치적 자유주의에 반하는 사상을 지녔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분간 이 자유주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요즘 읽고 있는 상탈 무페의 <민주주의로의 귀환>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상타 무페의 주장대로 합리주의와 자유주의에는 해답이 없다는 점도 한번 살펴 보고자 한다.  여러 생각을 하다 보면 생각이 좀 정리되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반대한다는 사상 속에서도 배울 점은 늘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사족: 중간중간 번역이랑 편집이 좀 어설픈 부분이 있는데 재판에서 좀 수정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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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츠만의 원자 - 물리학에 혁명을 일으킨 위대한 논쟁
데이비드 린들리 지음, 이덕환 옮김 / 승산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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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이나 수학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가끔씩 시대보다 조금 앞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한 것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해주지 못하고 좌절 속에 스러져간 인물들이 있다. 몇 명 들자면 수학자 갈로와나 아벨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갈로와나 아벨의 경우, 당대 최고의 수학자 꼬시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데이비드 란들리가 지은 볼츠만의 원자라는 책은 볼츠만의 생애와 더불어 볼츠만이 원자론에 기초해서 통계적인 개념을 어떻게 열물리학과 기체 운동학에 도입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불츠만 당시의 물리학자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고등학교 화학 시간이나 물리 시간에 원자라는 개념을 배울 때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람이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이다. 이 책에서는 원자론의 기원으로 데모크리토스, 그의 스승 레우키포스, 로마 시대의 작가 루크레티우스를 든다. 원자라는 단어는 원래 그리스어, Atom에서 왔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원자보다 더 작은 세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이 원자라는 개념이 어떻게 물리학에서 또한 화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매김 할 수 있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19세기말,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고 지키려고 애쓰다 탈진해 끝내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로 인생을 끝마친 물리학자, 볼츠만을 살벼보아야 할 것이다. 데이비드 란들리가 쓴 볼츠만의 원자는 해박하게 문헌 을 조사해서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뜨거운 논쟁들로 달구어졌던 물리학의 세계를 조명한다. 특히, 기체운동학을 설명하는 데 볼츠만이 남긴 업적과 그 업적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쟁들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 사람이 남긴 업적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업적을 남긴 사람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이 많은 도움을 준다는 것을 저자는 잘 알고 있다. 또한 당시 시대 상황이 그 사람을 어떻게 끌고 갔는지 이 책에서 잘 보여준다. 오스트리아의 빈 (비엔나), 거기서 사는 사람들(Wiener)의 특징인 우유부단함과 낭만성...... 그 시대의 빈에서 교육을 받은 볼츠만도 그런 사실에서 제외될 수 없었다. 볼츠만의 번뜩이는 천재성, 그러나 그 아이 같은 순진함. 10살 연하의 연인과 결혼. 자기가 이루어 낸 업적을 인정 받기 위해 애처러울 정도로 애쓰는 모습, 훗날 벌어지는 철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에른스트 마흐와 볼츠만 사이의 논쟁. 이 논쟁 때문에 볼츠만은 물리학보다는 철학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 증거로 나이 들어 빈 대학교의 교수로 다시 돌아왔을 때 볼츠만은 철학과 교수로 왔다.
결국 볼츠만은 62세의 나이에 이탈리아 아드리안 바다에 있는 트리에스테 근처 두이노라는 휴양지에서 가족들과 휴가 갔다가 호텔방에서 스스로 목을 매고 만다. 비록 마흐와 그를 따르는 에너지론자들의 비판에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그래도 그는 그의 업적에 맞게 대접 받으며 살았지만 그 비판을 용납하기 힘들어 했다. 그리고 신경쇠약과 우울증 때문에 중년 이후 내내 힘들어 했다. 그렇게 자살로 1906년에 자신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적의 해라 일컫는 1905년, 아인스타인의 논문으로 볼츠만이 옳았다는 것을 거의 완벽하게 인정 받기에 이른다.
이 책에서 레일리경(Lord Rayleigh)의 말을 빌어 "...어쩌면 자신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젊은 과학자는 위대한 업적을 향해 출발하기 전에, 쉽게 그 가치를 판별할 수 있는 연구를 한 다음 과학계가 그 자신에 대해 호의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도움이 되 것"이라고 말한다. 비극 같지만 오늘날에도 이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또한 철학과 물리학 사이의 관계가 모호해질 때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이 얼마나 그릇되어 갈 수 있는가 고민하여야 한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아름다운 사상이라 해도 자연을 기술하지 못하면 그 사상은 물리학에서 제외되어야 하는 못 쓰는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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