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조선의 3대 구라'라 추켜세우지만 누구는 "경솔한 입 때문"이라며 흉을 본다. 입 열었다 하면 조선 8도를 휘감는다 하고, 펜 들었다 하면 수백 년 역사들이 어제오늘처럼 숨 가쁘게 쏟아진다 한다. 수권의 저서와 수백만 부에 달하는 판매 부수로 누구에게나 그의 목소리 미쳤으니 더는 원이 없을 것 같은데, 또 새로운 '썰'을 푼단다. 그러나 사실 그의 전공은 '듣는 것'이란다.
유홍준 명지대학교 교수(미술사학과). 그에겐 아직 못 들은 얘기가 남았다. 1권의 남도부터 5권의 금강(金剛)까지, 들리지 않았거나 들을 수 없었던 곳과 때의 목소리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지면에 새겨 온 그다. 이름 모를 합천의 어느 촌부에게서, 그야말로 죽은 듯한 릉(陵)이니 분(墳)에서조차 그는 펄펄 뛰는 이야기들을 낚는다. 그러니 그의 긴 '썰'은 어쩌면 눈이 아닌 귀가 예민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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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유홍준 지음, 창비 펴냄). ⓒ창비 |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울과 경기도, 충청북도와 제주도 답사기는 쓰지 못했다며 아쉬워하던 그가 10년 만에 드라마의 '시즌 2'에 해당하는 여로를 시작했다. 1990년대 초중반 서점가를 강타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3권에 다른 출판사에서 냈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를 4, 5권으로 이어서 세월에 변한 내용을 깎고 덧붙여 개정판으로 다듬었다. 여기에 완전히 새로운 6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도 함께 펴냈다.
이번에는 서울 경복궁과 충남 부여·논산·보령 답사에 각각 네 꼭지를 할애했다. 이 구성에서 '답사기'를 떠나 있던 10년간 유홍준 교수의 삶이 보인다. 서울 사람이었던 그가 제2의 고향으로 삼고 '5도 2촌(5都2村)' 생활을 하는 부여 외산면 반교리와 그 주변의 이야기, 그의 문화재청장 재직 시절의 깨달음이 담겼기 때문이다. 그는 공직에 몸담는 동안 경복궁 경회루를 일반인에 개방했고, 낡은 광화문 현판을 떼자고 했고, 광화문광장 만들기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왜 국제 대회 만찬을 고궁에서 여느냐",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를 모독했다" 등 수없이 매서운 말을 들었다. 존재감 없는 문화재청장 자리가 전무후무하게 연일 지면에 화면에 오르내렸다. 사고도 유난히 많았다. 2008년 2월 숭례문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그도 4년간의 공직 생활을 접어야 했다. 못 다한 이야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경복궁을 얘기하는 6권의 초반부는 '나의 공무원 체험기'로도 읽힌다.
재직 시절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의 말대로 "'답사기'에 대해서만은, 못 썼다고 한 사람 한 명도 없었다." 거기에 실제 문화재 관리 현장에서 뛰었던 경험이 덧붙여졌으니, 기대를 키우는 이들이 있는 한편 걱정하거나 냉소하는 이들도 상당하다. 그는 과연 서문에 쓴 대로 "초심으로 돌아갔"을까. 또 다시 독자들을 설레게 할 수 있을까.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출근할 때마다 경복궁을 찬찬히 거닐고 싶은 충동을, 봄 냄새 가기 전에 선암사 답사 떠나고 싶은 마음을 몇 번이나 억눌렀다고만 말해 두자.
부슬비가 내리는 10일 오후, 유홍준 교수와 그의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 수졸당(守拙堂) 마당에서 만났다. 점잖은 말씨임에도 걸쭉한 기운이 담겨 마치 우리 소리를 듣는 듯했다. 그는 섬처럼 떨어진 광화문 광장도, 감동을 주지 않는 광화문 현판 글씨도 아쉽지만 모두 "이번에 내가 썼으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18년 전 그의 글이 국민의 미감과 주말 풍경을 바꿨다면, 2011년의 글은 '정책'에도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다음은 그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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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홍준 명지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
"문화재를 좇다가 촌부들에게 배웠다"
프레시안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이 10년 만에 나왔다. 감회가 어떤가?
유홍준 : 오래 끌던 숙제를 낸 것 같다. 사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같은 시리즈는 학자 입장에서 봤을 때는 손해가 되는 책이다. 한국 사회에서 책이 잘 팔리면 저자는 공부 끝난 사람으로 취급되거든. 학자로 취급되는 게 아니라 베스트셀러 작가로 취급되는 것이다. 그래도 그동안 답사기를 그만 쓰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다시 쓸 만했을 때 문화재청장 제의를 받았다. 물러나면서 다시 손대려고 했더니, 이번엔 학생들이 내 강의(한국 미술사)를 책으로 내주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유홍준의 한국 미술사 강의 1>(눌와 펴냄) 작업을 했다. 물론 나도 환갑 지나고 정년을 바라보는 마당에 더 미루기도 뭐했고. 그런 중에 창비에서 자기들도 그렇고 독자들도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하면서 보챘다. 그래서 '시즌 2'를 쓴다는 마음으로 <월간 중앙>에 연재를 시작했고, 한 권 분량이 나와 묶은 것이다.
프레시안 : 책 나오는 과정이 매우 힘들었다고 들었다.
유홍준 : 창비 사람들, 말이 많았을 거다. 어휴, 내가 무지하게 원고를 고치거든. 자다가 생각나면 벌떡 일어나 또 고치고…. 몇 번 다 엎기도 했다. 출판사로서는 월간지 연재를 그대로 가져다가 교정만 보면 될 줄 알았겠지만 내가 연재로 쓴 것도 다 뒤집었거든. (웃음) 완벽주의자는 아니지만 독자들을 끝까지 붙잡아 두어야 하기 때문에 불안해서. 심지어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국보 순례' 시리즈도 겨우 5.2매인데, 연구실 조교 말로는 한 회 쓸 때 5번 이상을 고친다고 한다. 인쇄해서 읽고 다시 고치고, 징그럽다 싶을 때 최종 메일을 보낸다.
편집자 입장에선 지독하게 까다롭다고 욕할 수도 있지만 글에 끝까지 책임지려는 자세는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필자가 밉기야 하겠나. 사진에도 엄청 신경 쓴다. 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곤 다 내가 찍은 사진이다. 사진가 강운구 선배에게 왜 똑같은 영암사터 사진인데 남의 사진을 쓰면 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강운구 선배 대답이 그랬다. "당연하지. 다른 사람이 찍은 건 내가 본 게 아니거든. 카메라는 기계라기 보다 일종의 붓과 같은 것이지."
프레시안 : 과거에 "1권과는 다른 2권, 2권과는 다른 3권, 남한 답사기와는 다른 북한 답사기(4, 5권)를 쓰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는데, 이번 6권은 어떤 점이 다르고 새롭나?
유홍준 : 마음을 비웠다. 초심으로 돌아갔다고나 할까. 억지로 잘 쓰려고 하는 생각 전혀 없이 썼다. 가령 선암사에 대해 쓸 때 예전 같으면 다른 사람이 선암사에 대해 어떻게 썼는지 조사하고 그들과는 다른 글을 쓰려고 했을 텐데, 지금은 다른 사람이 했든 안 했든 '내 얘기'만 쓰려고 주력했다.
독자들에게 유익한 정보라고 판단되는 것을 주저 없이 쏟았다. 그래서 주인공인 유물들보다 그와 연관되는 부차적인 얘기들이 많이 부각된다. 경복궁 양의문에서 우리나라 굴뚝, 온돌 문화 얘기로 이어진다든지 태원전과 빈전을 소개하면서 엄격한 장례 문화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풀어놓기도 하고. 합천 영암사터에서 해인사로 향할 때마다 들려주는 한 촌부의 이야기….
프레시안 : 그점이 6권에서 눈에 띄는 부분 중 하나다. 부제인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가 말해준다. 도처에 무수한 상수(上手)들의 노력이 있었고, 그것의 가치를 밝혀낸 이들도 상수들이었다는 얘기다. 특히 이름 없는 필부들의 존재감이 글 곳곳에 녹아 있다.
유홍준 : 1권에서 쓴 것처럼 여태까지 답사를 다니면서 특별한 연줄로 남들이 못 들어가는 데 들어가 본 적 없다. 여느 여행자와 똑같은 입장에서 다닌다. 안 들여보내줘서 화딱지 나서 욕한 적은 있어도. (웃음) 본래 필부들의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이문구의 <유자소전>에 나오는 '유재필 씨' 같은, 이름은 없지만 멋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그 어떤 영웅전보다 가슴에 진하게 다가온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비록 교육 혜택을 못 받았더라도 자기 삶을 아름답게 가꿀 줄 아는 사람들이 어디나 많다. 그런 얘긴 빠짐없이 썼다. 그러나 사실 내가 써야 할 게 아니다. 르포나 소설 속에 있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문학, 우리 언론에는 정작 주장은 많은데 사람 얘기가 빠진 경우가 많아서 항상 아쉽다.
프레시안 : 자연과의 어우러짐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가령 자금성과 구별되는 경복궁의 가장 큰 특징이자 미덕은 위치 설정, 즉 자연과의 어울림이라고 말했다. 또 가는 곳마다 꽃과 나무 얘기가 '흐드러지게' 많다.
유홍준 : 일단 나이가 들어서일 거다. (웃음) 사실 원래 자연에 관심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나는 답사할 때 건물 얘기보다 나무 얘기를 더 많이 한다. 문화재청장 할 때도 천연기념물 분과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내가 나무에 대해 잘 안다고.
우리 건축 문화 복원하는데 있어 건물 못지않게 나무가 중요하다는 걸 의식하고 살았다. 청장 하는 동안 임업으로서가 아니라 '조경'으로서 어떻게 나무를 우리 왕릉과 궁궐에 들여올지를 많이 고민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건물은 복원이 됐는데 정원은 복원이 안 되고 있다. 정원엔 병아리꽃, 황매, 백당나무, 불두화 같은 관목들이 많아야 하는데, 이 나무들이 정원수로 어떻게 활용되는지 전례가 없고 남아있는 사진도 없었다. 나중에 전공을 바꿔서 그걸 해보고 싶다. 시골에 수목원을 사서 우리 정원에 어울리는 토종 관목들, 작은 나무들을 심어 보급하고 싶다.
프레시안 : 문화재를 보존하려면 오히려 더 열어두어야 한다는 메시지도 눈에 띈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몰려오면 부작용도 생기지 않을까.
유홍준 : 문화재는 열어두어야 한다. 권위주의 시대 강압 통치를 오래 경험해서 그런지 우리는 '출입 금지', '사진 촬영 금지'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세계 어딜 봐도 이유 없이 개방하지 않는 예는 없다. 모든 종갓집 사람들의 고민이 뭐냐면, 사람이 살지 않아서 건물이 무너진다는 거다. 아무리 잘 지은 한옥도 사람이 3년만 살지 않으면 폐가가 된다. 사람이 들어가 있어야 건물도 생기가 돌지. 나무도 그렇다. 경복궁 자경전에 있는 나무들이 예전엔 회색빛이었는데 지금은 초콜릿 빛이다.
다음은 민도(民度, 문화 수준)의 문제다. 문화재청장 하는 동안 경회루를 44년 만에 개방하면서 '출입 금지'를 흔들었다. 지금 경회루처럼 1일 4회, 100명씩 출입을 제한하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당시에 고궁에서 국제 대회 환영 만찬을 여는 걸 허락했다고 비난이 많았는데, 사실 그건 고궁의 최대 메리트다.
또 그렇게 써 줘야 건물도 더 보존이 잘 된다. 손님 맞으려고 마루 한 번 더 쓸고 닦을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고궁에서 만찬을 하겠다고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문화재는 열어 두되, 어디까지 개방하느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으로 판단하면 된다.
"유홍준이 남대문을 태워먹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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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손문상) |
프레시안 : 문화재청장으로 있는 4년 동안 가장 잘 했다고 생각하는 일은 뭔가.
유홍준 : 문화재 관리에 큐레이터십을 심었다. 원래 문화재청이라고 하는 데가 고리타분하고 폐쇄적인 공무원 집단이었다. 인지도도 낮거니와 직원들도 상당히 침체되어서 수동적으로 문화재를 관리했다. 누가 찾아와 천연기념물, 보물, 국보 등재를 신청하면 가치 있으면 해 주고…. 문화재청이 먼저 찾아가서 조사하고 발굴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어떤 청자는 보물 등재된 것보다 더 멋있는데 아무 것도 안 붙어 있고… 이거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찾아다녔다. 백자달항아리니 고지도니 초상화, 글씨 다 나오라고 해서 전부 (국보, 보물) 지정했다. 또 전국에 있는 돌담길 열 곳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했지, 복원 가능한 관아 조사해서 6곳을 국가 사적으로 지정했지…. 이렇게 적극적으로 하니 문화재청 사람들도 좋아했고, 아직도 그 문화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또 있다. 궁궐, 왕릉에 노년층 대상으로 관람 안내 지도위원 뽑은 것. 그게 은퇴한 사람들 일자리 창출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모범적인 사례다. 이건 보건복지부 노인정책국 같은 곳의 일자리 창출 콘셉트와 약간 달랐다. (궁·능에서) 제일 멋있고 좋은 자리가 관람 안내 지도위원이다. 중요한 건 노인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직업을 주는 거다. 주 이틀 일하게 하고 30만 원 주는 것보다 주5일 일하게 하고 90만 원 주는 게 낫다. 용돈 받으러 나간다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 직업이라는 의식을 갖게 해야지.
프레시안 : 재직 당시, 여론으로부터 공격당하는 일도 많았다. 힘들었던 부분은 없는가.
유홍준 : 광화문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를 뗀 것 때문에 보수층으로부터 매를 맞았는데, 그건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고. 사실 내가 하자는 대로 했으면 현판도 안 갈라졌지. (웃음) 그리고 북악산 개방한 것. 정말 힘든 일이었다. 사실 나보다 대통령(노무현 전 대통령)이 더 하고 싶어 했던 일인데 누가 나서서 하지 않던 일이었다.
대선 후보도 신문 3면을 써서 공격하는 일은 없다고 하는데…. (웃음) 나를 그토록 공격한 건 하나는 내가 노 전 대통령과 친하다는 것 때문이고, 또 하나는 당시 언론과 정부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이다. 날 왜 그리 못살게 구냐고 (언론 쪽에) 물어봤다. 그랬더니 "기사의 상품적 가치가 높아서" 그랬다고 하더라.
그런데 내가 맞을수록 오히려 노무현 정부는 한시름 덜었다는 얘기도 있다. 청와대 쪽 사람이 그러던데 '언론 폭탄 정량제' 이런 게 있단다. 언론이 정부를 '조지는' 탄환의 수가 정해져 있는데, 문화재청을 때리면 다른 데는 못 때린다고. 외교통상부나 통일부 같은 데가 맞으면 정부 전체가 흔들리는데 문화재청은 때려봤자 문화재청이고 내가 워낙 맷집도 좋으니까. (웃음)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전에 있었던 숭례문 화재 사건의 경우는 내가 도의적으로는 사표를 쓰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홍준이 숭례문을 태워먹었다는 논리라면 천안함은 김태영 전 국방장관이 침몰시킨 것 아닌가. (웃음) 세월 지나면 사람들도 다 알 거다. 그래서 그런 얘기가 가끔 나와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사람들이 제대로 풀지 않고 넘어간 의문이 있는데, 어떻게 소방차 60대가 달려왔는데도 불을 끄지 못했을까? 대한민국 최고 장비가 다 현장에 있었는데….
내 생각은 이렇다. 2006년에 똑같은 사건이 수원 팔달산 서장대 누각에서 일어났다. 그때도 방화 사건이었다. 소방관들이 와서 누각을 부숴 20분 만에 진화했다. 그런데 그 소방관이 '과잉 진화'로 1년 넘게 조사를 받았다. 숭례문 탈 때도 소방관이 가만히 있으면 아무 죄가 없는데, 부수고 불 끄면 조사를 받는다. 그 문제가 제일 크지 않았을까.
숭례문 화재 당시에 내가 외국 출장 중이었다. 현장에 있었다면 무조건 기왓장 끌어내리고 속의 불을 끄라고 지시했을 텐데 그런 지시를 내릴 사람이 없었던 거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 책임자는 문화재청장이 아니라 중구청장이다.
프레시안 : 경복궁 복원 작업을 하면서 광화문광장을 만들자고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기도 했다. 안(案)이 서울시로 넘어가는 등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만들어졌는데, 문화재청안과 달리 섬처럼 된 광장이 됐다. 원래 안에선 광장이 세종문화회관 쪽에 붙어 있었다. 현재 모습이 아쉽지는 않나.
유홍준 : 나중에 그렇게 (세종문화회관 쪽에 붙게) 고치면 된다. 내가 답사기에 그렇게 썼으니까, 정권 몇 번 바뀌면 그렇게 되겠지. (웃음) 데모 공포증 때문에 광장이 광장답지 못하게 됐다. 어느 정부든 광장을 무서워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광장은 사람이 모이라고 있는 건데, 반대로 사람이 모일까 무서워서, 모임을 차단할 수 있는 콘셉트를 염두에 두니까 이렇게 됐다.
아쉬운 건 비단 광화문광장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건축 전체의 문젠데, 건축가의 작품이 되지 못한다는 거다. 우리나라 대형 건축 프로젝트는 턴키(turn key·공사 일괄 수주 계약 방식) 방식으로 진행되어서 대기업 아니면 참여를 못한다. 건축가들이 참여한다고 해도 그들의 이름은 부각이 안 된다.
상암 월드컵 경기장을 예로 들어보자. 방패연 모양으로 아주 잘 지었다. 누가 봐도 멋있다. 그런데 그건 '삼성엔지니어링'이 만들었다. 그런데 설계한 사람은 건축가 유춘수(이공건축)다. 삼성에서 컨소시엄을 구성해 유춘수를 스카우트해서 지은 거다. 참여해도 그게 드러나지 않으니까, 우리 건축가들이 세계 100대 건축가에 이름을 못 올린다.
결국 행정 편의적인 턴키 방식이 우리 건축 문화에 장애 요인이 된 셈이다. 광화문광장도 누가 되었든 최고 가는 건축가의 작품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뭐 광장이 생겼으니까, 앞으로 좋게 고쳐나가면 된다.
프레시안 : 광화문 현판 글씨를 놓고도 말이 많았다. 여러 안이 있었는데 결국 흥선대원군 복원 당시 현판의 유리원판 사진을 디지털로 복원한 글씨를 현재의 현판으로 했다. 지금도 새로 쓰자는 얘기가 나오는데….
유홍준 : 내 얘기대로다. 현재 현판은 문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감동을 주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어느 땐가는 바뀔 거다. 여론도 그러하니까. 사실 논의 당시에 내가 마련했던 여섯 개 안 중에 어떤 걸 선택하더라도 진지하게 논의했으면 좋은 답이 나왔을 거다. 그런데 공무원들의 목표는 감동을 주는 뭔가를 만드는 게 아니었던 거다. 결국 그 시대의 문화 능력이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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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손문상) |
"김지하, 김수영, 신동엽…가느다란 '맥'이 있었다"
프레시안 : 광화문 현판 글씨를 바꾼다 해도 문화유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보면 똑같이 감동을 못 느끼지 않을까. 특히 젊은 세대 가운데는 의복이나 서양 문화에 대한 미감은 있어도 우리 문화유산, 옛 것에 대해선 갸웃거리는 이들이 많다. 고민이 되지는 않는가.
유홍준 : 기본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제 나라 것들을 별로 안 좋아한다. 젊은 세대의 미감? 큰 신경 안 쓴다. 젊은 놈이 날 때부터 옛 것에 푹 빠져있는 것도 보통 놈은 아니지 않나. (웃음)
우리 아름다움에 무감각해졌다고 해도 그네들을 탓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우리 교과서 내용이 적잖이 과대 포장되거나 강요된 게 있어서 반발도 있었을 거다. 우리 문화는 예로부터 찬란하다든지 위대하다든지 하는 과장이 있잖나. 바깥의 것들도 보고 우리보다 뛰어난 것도 가르쳐 주고 해야 뭐가 좋은지 이해할 텐데….
내겐 '우리' 문화유산의 우수성을 강요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많은 이들이 내 책에 공감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서양 미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색안경을 벗고 봤을 때 오히려 거기서 독특한 별도의 미학이 나오지 않겠는가.
박물관 디스플레이도 연대기적으로 우리 역사가 유구하고 어쩌고 자랑하듯 하는 것보다, 미적 기준을 적용해 한국 문화의 독특한 면모들을 소개하는 방법으로 하면 좋을 거다. 이쪽엔 아기자기한 금속 공예를 놓고 저쪽엔 청자 공예품을 놓는 식으로, 우리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봐도 아름다워서 감동이 생기는 분위기를 만들어 줄 때가 됐다.
프레시안 : 유홍준 본인은 어떻게 우리 미술, 우리 문화유산에 심취하게 됐나.
유홍준 : '깐수' 정수일이 언젠가 나를 비롯해 서중석, 안병욱, 홍세화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나왔는지 참 희한하다는 얘기를 했다. 우리가 1960년대 후반에 대학 다니던 세대인데, 그땐 모든 게 완전히 서양 문화에 압도된 상태였거든. 거기서 시대 분위기와는 다른 민족주의적인 것을 찾는 사람들이 나온 게 신기하다며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거다.
지금 돌이켜 보면 웃기는 생각이지만, 처음에는 서양 미술사의 방법론을 우리 미술사에 적용해보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서양 미술사엔 참 많은 스토리와 감동이 있는데 왜 우리는 연대기적 분석, 물질 분석만 하는가 싶어서.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해서 나올 건 아니더라고. 그러면서 한국미술을 밝히는 또 다른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특별히 애국적 관점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사실 4·19 이후에 김수영, 신동엽, 조동일, 김지하, 염무웅, 백낙청 같은 분들에 의해 이어지는 아주 가느다란, 민족주의적인 줄기가 있었다. 그 줄기가 꽤 중요한 영향을 준 것 같다. 특히 우리 세대에겐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이라는 계간지의 등장이 의미가 컸다. 거기서 받은 감화는 학교 다닌 것보다 더 컸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건 민족적인 걸 떠나서 진실을 보고 싶은 마음에 가까웠을 지도 모른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같은 (우리 이야기를 하는) 책이 왜 우리 국문학자나 민속학자, 인류학자들로부터 나오지 않는지 이상하다. 그들이라면 더 재밌고 풍부하게 쓸 수 있을 만한 장르인데. 내 답사기에 우리 문학 얘기가 간혹 나오는데 처음에는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가령 북한 답사기에 기자묘(箕子墓)에서 김동인의 <배따라기>를 생각하며 그의 문학을 예찬하는 내용을 썼는데, 과대평가했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국문학자라면 이런 것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기행문을 낼 수 있을 텐데…, 언젠가는 나오지 않을까.
프레시안 : 그렇다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어디서 영향을 받았는가?
유홍준 : 앞서 나온 것 중에 비슷한 게 없었다. 재밌는 게, 내가 답사기를 쓰기 전에 육당 최남선의 <심춘순례>(1926년)를 읽어본 적이 없다는 거다. 그걸 봤으면 남도 답사기가 못 나왔을지도 모르는데, 다행히도 안 봤다. (웃음) 나중에 사람들이 하도 얘기를 하기에 찾아서 읽어봤는데, 내 글과는 전혀 다르더라.
더러는 시바 료타로의 <가도를 가다>(전 41권)를 보고 답사기를 썼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궁금해서 탐라 편과 한나라 편을 찾아 읽기도 했다. 그런데 그 책도 내가 쓴 답사기하고는 전혀 다르더라. 원서로 봤는데, 나중에 출판사한테 꼭 번역하라고 얘기해서 국내에도 소개됐다.
프레시안 : 문화유산 하면 민족주의적인 시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면이 있는데 요즘엔 문화, 학문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민족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열린 민족주의 시대다. 그런 인식의 변화 속에서 우리 문화유산들이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유홍준 : 우리 문화의 정체성은 우리가 우리 것을 얘기하는 것으론 나타나지 않고, 동아시아 전체 속에서 그 위치를 찾을 때 글로벌한 가치와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지분율을 갖고 있는 문화적 주주 국가다"라는 문장을 쓴 적이 있다. 그 말대로다. 그런 개념 속에서 이야기해야한다. 단순한 애국심이라든지 국토애만으로 우리의 미는 보이지 않는다. 책 속에서 내가 자금성을 얘기하거나, (1995년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였던) 미국인 캐서린 같은 이의 눈을 빌려 선암서 이야기를 한 예들이 그런 '아이덴티티 찾아주기'의 주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프레시안 : 우리 문화재가 외부로부터 시선을 빌린 대표적인 예가, 일제 강점기 때 광화문 철거 반대를 외쳤다는 일본인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가 아닐까. 이번 6권에서 그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강하게 드러냈다.
유홍준 : 어느 나라에서든 문화재의 가치는 꼭 그 나라 사람이 밝혀낸 것만은 아니다. 외부의 시선이 보태짐으로 하여서 그 의미가 더 커진다. 여전히 야나기 무네요시를 비판하고 극복하려고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우리에게 준 어마어마한 공을 인정하고 비판하는 게 아니라 비판만 남아 있다. 그를 식민지 지배의 연장선상에서, 제국의 신민이라고 비판한다면 누구도 인생을 살 수가 없다.
그는 한국 문화 속에서 예술성을 발견했고 광화문을 허는 계획에 온몸으로 분노했다. 야나기 전집 24권 가운데 2권이 한국 문화에 해당한다. 그의 다른 인생은 몰라도, 그 부분만 놓고 보면 우리는 그에게 정말 고마워해야 한다. 그가 한국 예술을 비애의 미라고 규정했던 건 식민지의 궁상맞음을 얘기한 것이 아니다. 그가 지향하던 민예 사상의 핵심을 우리 미술에서 발견했던 것이고, 그래서 일본 민예관에 한국 미술을 현시한 것이다.
"朴통, '전문가 우대'만 했어도 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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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문화재 정책에 대해 얘기해 보자. 역대 대통령들의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나 관련 정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유홍준 : 박정희 대통령이 관심도 제일 많았고 관련 예산도 많이 책정했다. 그런데 그분이 전문가를 존중했으면 참 성군이었을 텐데, 그렇지가 못했다. 전문가들한테 역할을 위임하고, 자신은 행정적인 지원만 했으면 결과가 대단했을 거다.
불국사 복원하고 황남대총 발굴하고…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아산 현충사, 칠백의총, 신사임당 기념관에다가 천편일률적으로 콘크리트 한옥에다 미색 수성페인트를 칠해 놨다. 똑같이 해놔서 하나도 남길 게 없다.
김영삼 대통령 때는 경복궁 복원 20년 계획을 세워서 현재 광화문 복원까지 오게 한 업적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냥 나한테 다 맡겼으니 내 마음대로 했지. (웃음) 문화재 관련해서 나처럼 대통령한테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사람은 없을 거다. 예산도 2500억 원이던 게 4200억 원이 되었으니까. 내가 잘했고 못했고를 떠나서, 대통령이 문화재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 그 방법이 가장 좋다. 전문가를 쓰고, 예산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면 된다.
프레시안 : 이명박 정부는 어떤가?
유홍준 :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사업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별로 남을 게 없을 것 같다. (웃음)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사례가 몇 가지 있는데 김대중 정부 때 추진한 경북 유교 문화권 관광 개발 사업, 노태우 정부 때 김종필이 주장했던 백제 역사 재현 단지 같은 거다. 유교 문화권 개발 사업으로 영주에 선비촌 만들고 한 게, 경상도 사람들한테 '보여주기 위해' 추진한 건데 정말 잘못된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건 관계자들 몇 십 명이 오랫동안 연구해서 결정해야 할 일인데 선거 공약으로 순식간에 결정되고 조 단위 예산이 들어가니까 천하의 흉물이 되어버렸다. 선거가 망친 것이다.
프레시안 : 국가가 보호해야 할 문화재의 범주가 확장될 필요는 없을까. 가령 혹자들은 철거되었거나 철거 위기에 내몰린 옥인아파트, 동대문 운동장 같은 근대 이후의 한국 현실을 보여주는 건물들도 잠재적 문화유산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것들을 문화재로 인식하고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유홍준 : 국가에서 지정하는 문화재란 공식적으로 역사가 100년 이상 된 것이어야 하고, 근대 문화재도 적어도 50년이 넘어야 등록할 수 있다. 그런데 문화재라는 게, 처음부터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잘 보존한다고 문화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지나고 거기에 문화재적 가치가 있을 때 비로소 보호받는 문화재가 된다. 동시대에 '문화재냐 아니냐'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먼 훗날 그것이 시대를 증언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됐을 때 보존에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후대를 위해 남겨두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가령 이 집, 수졸당(守拙堂) 인근에 사람들이 하도 안 와서 파격적인 면세 지원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지어진 집 가운데 2층짜리 펜트하우스 '불란서 집'이라는 것들이 있다. 그들 중 단 한 블록만이라도 살아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지금 시세론 그 집들을 그대로 두는 거랑 아파트를 새로 짓는 거랑 차익이 몇 십 억이니까 개인이 그렇게 보존하지는 못한다.
또 과거에 '바다이야기' 사건 터졌을 때 그 기계를 10대 정도 남겨두려고 하기도 했다. 국회에서 예산 심의할 때 옆에 경찰청장이 있기에 "압수한 거 10대만 문화재청에 기증해 주쇼. 50년 후에 이 엄청난 사건을 누가 알겠어. 그냥 들으면 '바다이야기'가 횟집인지 알지 않겠어? 이건 민속박물관에서 사둬야 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웃음) 민속박물관장한테 말했더니 "그런 거 다 사 놓으려면 대형 할인점 창고가 필요하다"고 하더라. 실제로 그렇다. 모든 증언들을 남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복궁, 대충 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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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시즌2'가 시작되었으니 7권도 머지않아 나올 것으로 안다. 책날개에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이라는 제목이 나와 있다.
유홍준 : 제주도와 다도해의 여러 섬들을 답사한 내용이 될 것이다. 사실 제주도만으로 한 권 분량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러면 답사기 '제대'가 멀어지니까. (웃음) 네 번째 글까지 나왔는데 아직 제주 시내도 못 벗어났다. 한 권에 열 네댓 꼭지가 들어가는데, 제주도 기행이 열 번이 되면 네 번을 억지로라도 늘려야지. 써봐야 알 것 같다.
프레시안 : 1990년대 초반 답사기 1, 2권이 나오고 베스트셀러가 되자 전국적으로 답사 열풍이 불었다. 당시 한국이 '마이카 시대'로 진입해 이와 맞물려 답사 열풍이 불었다는 분석도 있었는데, 이번 1~6권 전질 출간의 반향은 어떤 식으로 나타났으면 하나.
유홍준 : 하나는 경복궁을 비롯해 서울의 고궁을 좀 더 구석구석 진지하게 봤으면 좋겠다. 서울 사람들이라면 내일 당장도 쉽게 가볼 수 있는 곳인데 겉핥기로만 보지 말고 조목조목 뜯어서 보면 좋지 않겠나. 또 하나는 마지막 네 꼭지에 실린 부여·논산·보령 답사기를 통해 향촌에 대한 시각이 약간은 달라졌으면 한다. 산, 들, 마을에 동정심 내지는 동참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프레시안 : 부여·논산·보령 답사기 부분은 문화유산 답사기기도 하지만 유홍준의 '5도2촌' 생활 일지이기도 하다. 부여 '반교리 마을청년회원'으로서의 삶은 어떤가.
유홍준 : 아주 행복하지. 5도2촌이든 귀농이든 처음엔 흉내 내기 힘들겠지만 결국 다들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행복하지 않을 거니까. 서울에서 아파트 한 평만 팔아도 시골 가서 넓은 집 짓고 살 수 있다. 내가 일찍부터 서울에선 헬스나 가지 뭐 할 일이 있느냐는 얘기를 하고 다녔더니 "그럼 네가 가서 한 번 살아봐라"라는 말이 돌아오더라. 내가 못할까봐? (웃음)
정부에 있는 사람이건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건 간에, 못 내려가겠다고 하는 사람들 얘기가 늘 그거다. "우리는 시골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려면 그곳에 문화·의료 시설 등 인프라가 있어야 한다". 아이고, 대한민국 어디에도 차로 한 시간 안에 대형 병원 못 가는 데가 없다. 그리고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공연도 안 보는 사람들이 부여문화원에서 하는 공연에는 가겠나. '인프라 없다' 운운이 결국 안 가겠다는 핑계다. 1년에 한 번 공연하기도 힘든 곳에 요란한 문화 시설을 짓는다는 게 말이 되나. 외국의 사례를 여기에 적용하려니 그런 헛소리들이 나온다.
한국은 땅덩이도 좁아서 멀리 가봤자 차로 3~5시간이면 된다.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해도 그런 의지만 있으면 누구든 내려갈 수 있으리라고 본다. 또 원주민하고 도래인하고 마찰이 심하다고 걱정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럼 시골 사람들이 도시 사람들이랑 다른 걸 모르고 가나. 이해하고 들어가야지. 서울서 직장 생활하던 것처럼 똑같이 대화가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부딪치는 게 싫어서 외따로 사는 사람도 있다더라. 나는 외로워서 그렇게 못한다. 반교리 우리 집(휴휴당·休休堂)엔 울타리가 없다.
다만 아무나 못 가는 게, 한국의 독특한 자식 교육 문제 때문에 애들이 대학 가는 것까진 해결한 사람들만이 해방될 수 있다. 그러다 일흔 넘어서는 내가 살면 몇 년이나 더 산다고, 겁난다고 안 가게 된다. 그나저나 책 나온 다음 반교리 우리 집이 어떻게 될 것 같나?
프레시안 : 사람들이 많이 찾아가지 않을까? 시골집 얘기를 책에 공개하는 것에 대해 갈등하지 않았나.
유홍준 : 우리 마누라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 (웃음)
프레시안 :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마을 사저에서 그랬듯 주말마다 방문객들 앞에서 인사해야하는 것 아닌가. (웃음) 아직 멀었지만 답사기 '제대'한 다음의 계획을 듣고 싶다. 언젠가 '나의 공무원들 답사기'도 써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유홍준 : 그냥 부여에서 농사 지으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다. 나무 길러서 여기저기 보급하고. 하여간 '원고 빚' 없이 살아보는 게 소원이다. (웃음) 욕심? 이젠 없을 것 같다. 다만 <한국 미술사 강의>와 <화인열전> 남은 부분 털어내고, '국보 순례'는 일주일에 한 번 쓰는 거니까 필력이 닿는 한 <조선일보>든 <프레시안>이든 어디든 연재할 거다.
요즘엔 '국보 순례'에서 미국에 있는 문화재들을 하나씩 소개하는데 사람들이 재밌어 하더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도 중국 편이나 일본 편은 써보고 싶다. 중국은 북중 국경선 압록강 유역이나 연암 박지원이 갔던 길들은 우리와 연관해 얘깃거리가 많고, 일본 교토, 나라, 아스카 유산들은 뭐 우리 문화유산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일본 안내원들한테 듣는 얘기 말고, '나는 이렇게 느꼈다'고 얘기하고 싶은 게 분명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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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손문상) |
유홍준이 사랑하는 책은…
프레시안 books는 인터뷰에서 만난 저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의 인생을 바꾼 책은 무엇이냐고. 그들은 어느 때보다 눈을 빛내면서 대답한다. '유홍준이 사랑하는 책'은 그가 쓴 책만큼 그의 족적과 향수와 희망을 잘 보여준다.
"무조건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반성완 옮김, 창비 펴냄)와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백승길 옮김, 예경 펴냄)다. 그 두 권이 내 인생을 바꿨다. 문학에서는, 유치하다고 할지 몰라도 <삼국지>다. 요시카와 에이지, 김광주, 황석영, 고우영 등 소설, 만화 가리지 않고 다 봤다. 아, 이문열 건 안 봤구나. (웃음)
그리고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이기웅 옮김, 까치 펴냄),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전10권, 사계절출판사 펴냄),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맹은빈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요즘은 <고요한 돈강> 같은 소설은 많이 안 읽지? 참 좋은데….
시집을 고르라면 김지하의 <황토>(솔 펴냄)다. 그게 제일 멋있었다. 진짜 시다. 사람의 심금을 들었다 놨다 하니까. 그리고 김소월의 <진달래 꽃>. 우리말을 그렇게 잘 쓴 사람이 소월 말고 없었다. 산문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등 전통 위에 모더니즘의 기운을 받았던 당시의 것들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