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내가 쓴 것이라면!

책을 읽으며 배가 아팠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한다. 사촌이면 아주 가까운 친척이다. 그런데 왜 배가 아플까? 난 도통 그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서동욱의 <철학 연습 : 서동욱의 철학 에세이>(반비 펴냄)를 읽으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듯했다. 배가 아픈 까닭은 단순하다. 이 책이 내가 쓴 책이라면 하는 부러운 마음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부러움을 느꼈던 까닭은 몇 가지가 있다. 나 또한 철학을 공부했고, 철학에 관한 글을 쓰며 사는 사람이지만, 전공이 동양 철학이라는 것은 일종의 핸디캡이다. 같은 철학임에도 불구하고 동양 철학을 한다는 것이 핸디캡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실 의외의 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서양 철학을 공부한 동료 선후배들이 동양 철학이야말로 우리의 전통이 살아있으니 훨씬 친숙하고 가깝지 않겠느냐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의 우리의 삶과 지금의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가 다르고, 한글이 아닌 한문으로 글을 썼기에 언어조차 다르다. 게다가 지금 내가 입는 옷을 입고서 100년 전 서울 거리에 나타난다면 도대체 누가 나를 조선 사람으로 보아주겠는가? 난 이미 서양인이고 근대인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껏 남의 글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느껴본 적은 별로 없었다.

<철학 연습>은 매우 시적이다. 서동욱이 철학자들의 글쓰기를 선보이겠다고 자신하듯, 그의 글은 아주 매끄럽고 잔잔하다. 게다가 사이사이에 인용하는, 다른 책이라면 읽을 때 막히거나 어색하게 만드는 그런 철학자들의 인용문이 그의 글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책에서 그가 다루고 있는 철학자들의 말과 저자의 글은, 시인이자 철학자 서동욱 한 사람의 목소리로 울린다. 그렇게 해서 그의 현대 철학 연습 여행은 내 삶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그래서 부러웠다. 이 책이 내가 쓴 것이라면! 하고.

'현대'란 늘 새롭게 되는 노력의 표현


▲ <철학 연습>(서동욱 지음, 반비 펴냄). ⓒ반비
그러나 <철학 연습>을 읽으며, 난 이것이 왜 우리 시대의 사유가 되어야 하는지 시비를 걸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의 책에 과거 조선의 철학자는 한 사람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가면서 그의 글쓰기와 사유가 지금 우리의 삶에 더 밀착되어있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설득 당했다고 해야 더 정확한 말일 게다.

내가 논문을 쓸 때, 내 글에서 '근대' 혹은 '현대'는 '서구'의 근대이고 현대였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이자 시대건만 난 늘 '서구'라는 수식어를 넣곤 했다. 왜냐하면 그게 다는 아니라고 생각했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서구의 거만한 철학에 대한 항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의 글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서동욱은 현대란 "늘 새롭게 되려는 노력의 표현"(9쪽)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현대란 역사적 연대기 상의 고정된 어느 한 시기가 아니란다. 또 "이 책은 철학의 최근 노력, 바로 우리 시대의 삶과 사회와 역사와 함께 하는 현대 철학의 고심에 관한 이야기"(8쪽)이라고 소개한다. 스피노자에서 데리다까지 13명의 철학자를 다루고 있으면서 이것이 당당히 우리 시대의 사유라고 선언한다. 나는 그를 통해 서구의 사유가 '지금 여기'의 사유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서동욱의 글은 그가 다루고 있는 13명의 철학자, 스피노자, 키르케고르, 니체, 프로이트에서 하이데거, 레비나스, 데리다, 들뢰즈를 마치 내 물음처럼 소개하고, 또 존재와 무, 진리 심지어 관상과 돈 이야기까지 누구나 고민해 보았음직한 주제들을 가려 생각을 긁어주는 철학의 사색 노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서동욱 자신의 말이자 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인용하는 사르트르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우리 삶을 향해 말을 건네지만 실은 우리 현대적 삶에 권총 쏘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 생각을 일으키라고!

그에 따르면, "철학은 별세계의 사유가 아니다. 다만 운동을 쉬는 근육이 쉽게 잠들 듯 생각 역시 쉽게 잠에 빠지는데, 철학은 이 생각을 잠을 깨우려고" 할 뿐이다. "한 마디로 철학은 천진한 학문으로서, 그저 삶을 온전히 살도록 만드는" 귀찮은 친구, 그러나 삶을 배신하지 않는 친구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현실에 개입하는" 것이다. 이 책이 말하는 '철학 연습'은 그러한 현실 개입을 위해 경험을 쌓는 것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물음'이다

하지만 어디에서 우리는 그런 '철학 연습'을 시작할 것인가? 또 그런 연습이 바로 우리 시대이고 현대라면, 어디서 출발할 것인가? 이 책의 전체를 꿰는 가장 중요한 매듭은 현상학과 구조주의이다. 그리고 아마도 들뢰즈적 사유의 노정이 아닐 듯싶다. 다루어지는 철학자들에 대한 의미와 위치에 대한 부여가 많은 경우 들뢰즈의 평가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두 가지 매듭을 중심으로 개개의 철학자들을 따로 소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철학자들은 분명한 개개의 주제의식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바로 물음이다.

그런데 한 철학자가 평생을 생각하고 다듬은 사유의 알갱이를 짧은 지면을 통해 압축해 놓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또 그러한 소개 속에서 그 철학자가 가장 힘을 들여 씨름한 물음을 독자들이 파악하게 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서동욱은, 근대적 사유를 개척한 스피노자에 대해 "어떻게 예속에 맞서 자유를 찾을 것인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수용소를 경험한 레비나스에 대해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인가, 신의 흔적인가", 또 그의 사유의 가장 커다란 배경인 들뢰즈에 대해 "어떻게 삶을 긍정할 것인가"와 같은 물음을 던지며, 우리로 하여금 함께 그 물음에 대해 생각하도록 요구한다.

우리는 공부란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말을 했는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자는 인(仁)을 말했고, 플라톤은 이데아를 말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이야기를 건넨다. 하지만 "공자가 왜 인을 말했지?" 하고 묻는 순간 우리는 벙어리가 되기 일쑤다. 그건 모르는 것이거나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개별 철학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가장 중요한 물음으로 그의 철학을 압축하며, 심지어 그의 삶조차 녹여낸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쇠얀 키르케고르를 시작하면서 저자는 첫머리를 이렇게 꺼낸다.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날, 군중들은 살아생전 그토록 강력하게 덴마크국교회를 비판한 자의 시신을 교회가 거두어들이는 처사에 불만을 품고 거의 폭도가 되다시피 했다" (39쪽)

신 앞에 선 단독자의 철학을 제창한 그의 최후가 왜 그렇게 되었던 것일까? 이 궁금증은 책을 읽어나가며 자연스럽게 풀린다. 임종을 앞둔 얼마 전 목사인 친구와 교의 문답을 하면서 종교예식을 거부했던 키르케고르! 저자는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를 뒤집어 쓴 키르케고르의 글 <기러기>를 소개하며 이렇게 설명한다.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가 오리들 틈에서 돋보이는 백조가 되는 반면, 키르케고르의 <기러기>에선 날 수 있는 기러기가 날지 못하는 거위들을 날게 해 주려고 돕다가 결국은 공상적 바보라는 비난을 듣는다. 이런 비난 앞에 기러기는 의기소침해져 날지 못하는 거위처럼 돼버린다. 당대의 국교회는 거위이고 키르케고르는 기러기라고 해야 할까? '거위는 절대 기러기가 될 수 없으나 기러기는 곧잘 거위가 돼버린다. 경계하라!' 당대의 교회에 맞선 키르케고르의 책들은 바로 거위가 되지 않으려는 저 경계의 표현이었다." (41쪽)

철학자는 관상도 보나?

13명의 철학자를 개별적으로 사색한 후 저자는 10가지 주제로 본격적인 '철학 연습'을 진행한다. 서양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 가운데 하나인 '존재와 무'에서 '차별 차이 환대', '사랑과 정치' 등 철학적이면서 우리네 삶과 아주 밀착된 주제들이다. 이 또한 저자는 하나의 물음으로 압축하여 연습한다. 예컨대 현대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의 가장 중요한 용어 가운데 하나인 '시뮬라크르'에 대해 저자는 "우리는 진짜 인생과 가짜 인생을 구분할 수 있는가"와 같은 식이다.

그 가운데 아홉째 '관상과 행위'는 "철학자는 관상도 보나" 하는 아주 재미있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아마도 개인적 경험이 반영된 듯, 첫 구절은 이렇다. "철학과 학생은 소개팅을 나가 곤욕을 치른다. 눈을 깜박이며 여학생이 묻는다. '어머 철학과야? 그럼 관상 좀 봐봐. 손금은 어때? 내 머리통은 똘똘하게 생겼어?'"(301쪽) 철학은 아직 조선 시대에 머문 부분이 있다. 이런 질문을 나 또한 수없이 듣곤 했으니까.

서동욱은 하지만 이러한 관심이 한국 사회 특유의 미신이라고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칸트를 인용해, "관상학은 사람의 외면으로부터 그의 내면을, 그것이 성향이든 심술이든, 판정하는 기술이다"(304쪽)라고 소개하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관상학, 골상학 등 비슷한 전통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그것은 우리의 봉건적이고 미신적인 잔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란 점을 은근히 보여주며, 이렇게 묻는다.

"정말 누군가 당신의 외관을 보고 당신의 내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305쪽)

서동욱은 헤겔 또한 이러한 골상학적 취향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던 처방을 넌지시 알려준다, 즉 헤겔은 관상학자에게 따귀를 때리고 골상학자에겐 뼈가 드러나도록 머리를 부수라고 처방한 바 있다는 것이다. 끔찍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처방은 전혀 해결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자신의 칼을 꺼내든다. 관상을 보고, 점을 치고 우리의 운명을 엿보려는 것은 바로 우리의 '공포' 때문이라고.

그러고 나서 서동욱은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의 알렉산더 이야기를 빌어 이렇게 말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수사에서 결과를 알 수 없는 전투를 앞두고 공포에 빠진 알렉산더는 점쟁이를 내세워 자신의 운명을 알고자 하였다. 그러나 다리우스에게 승리하여 공포가 사라진 후엔 점쟁이를 찾지 않았다. 행위가 운명을 만들어가야 할 시점에, 공포가 발목을 붙잡고서 미리 정해진 운명이 있지 않는지 찾아 볼 것을 권하는 것이다." (309쪽)

서동욱의 이 말은 어쩌면 책 전체의 주제의식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생각이 잠들 때 관습, 소문, 편견이 머릿속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철학이다. 공포가 우리를 점집으로, 관상가에로 향하게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운명을 오로지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그의 행위 속에서만 확인될 수 있다"고!

이 책은 세 가지 미덕이 있다. 첫째는 문장이 아름답다는 점, 둘째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인용이 자연스럽게 저자의 사유와 글쓰기 속에 녹아 있어 이해가 쉽다는 점, 셋째는 그의 말처럼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더불어 책에 삽입된 사진도 가끔 얼굴을 들이밀 때마다 큰 재미를 준다.

아쉬운 것은 이 좋은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 일상의 경험까지 많이 들어와 있었더라면 하는 점이다. 우리의 일상적 체험과 경험이 저자 스스로의 사유와 말로 녹아든 <철학 연습>이 우리 삶의 연습 2권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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