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과학 연구에 아주 만족하고 있다. 머지않아 세상도 나를 인정해 줄 것이다."

그레고르 멘델(1822~1884년)이 만년(晩年)에 한 이야기다(<유전학의 탄생과 멘델>(에드워드 에델슨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그의 말대로 세상은 그의 연구를 인정하고 그를 '유전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렇게 되기까지 35년이나 걸렸다. 그것도 독일어로 작성된 '식물의 잡종에 관한 실험'이라는 논문을 영어로 옮긴 번역자가 멘델의 글에서 명료하지 않은 대목들을 손질하여 개선한 다음의 일이다.

"저런, 이 사람이 벌써 오래전에 다 밝혀놓은 사실이잖아!"

진화론자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멘델의 업적을 재평가했다. 멘델의 논문이 알려진 다음에야 다윈의 진화론에 멘델의 유전학을 접목시킨 통합적인 진화 이론이 나왔다. 만약 멘델이 조금만 더 대중과의 의사소통에 적극적이었다면 통합 이론은 수십 년은 일찍 정립되었을 것이고 자연과학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앞서나갔을 것이다. 멘델은 연구는 훌륭하지만 대중과 의사소통을 못하는 과학자들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멘델이 별나게 의사소통 능력이 없었던 인물은 아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 역시 또 다른 멘델일 뿐이다. 그들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세워놓은 가설에 대한 테스트와 실험을 하는 것이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에는 또 다른 부분이 있다. 이것은 첫째 부분처럼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바로 대중과의 의사소통이다. 과학은 항상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멘델의 이름이 알려지기까지 35년이 걸린 까닭은 멘델에게 연구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홍보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넌 대가리로 연기를 하니, 이 XX야! 잘난 척만 하는 너 같은 인간들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내 수업에서 꺼져! 안 그러면 경찰을 부를 거야! 농담 아니야, 이 머저리 같은 놈아!"

남캘리포니아 대학교 영화과의 여교수는 갓 입학한 학생에게 이렇게 윽박질렀다. 그 상대는 랜디 올슨(1955~). 그는 잘 나가던 생물학자였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뉴햄프셔 대학교에서 해양생물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서른여덟 살에 영화과에 입학했다.

랜디 올슨은 재미있게 강의하는 인기 있는 교수라고 자부했지만 연기를 배우면서 자신이 대중과 소통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분히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성향이 강한 인간들과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서서히 배워나갔다. 그 과정을 기록한 <말문 트인 과학자>(윤용아 옮김, 정은문고 펴냄)는 과학자가 대중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를 말해주는 책이다.

"대중과 교감하는 데 있어, 머리, 가슴, 복부 그리고 성기, 이렇게 네 개의 기관들만 생각하라! 머리로 들어간 정보는 진정성이 더해져 가슴으로, 유머가 더해져 복부로, 그리고 이상적으로는 섹스어필과 함께 아랫도리까지 내려가야 한다."


▲ <말문 트인 과학자>(랜디 올슨 지음, 윤용아 옮김, 정은문고 펴냄). ⓒ정은문고
연기를 가르치던 그 여교수는 이렇게 얘기했다. 아랫도리엔 지식인부터 카우보이와 금발 미녀들까지 모두가 포함되어 있지만 위로 한 단계씩 올라갈수록 대중의 숫자는 점차 줄어든다. 그래도 유머가 있으면 꽤 많은 대중을 확보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머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역시 그들을 잃게 된다. 그래도 가슴으로는 여전히 배우들과 종교인들은 확보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까지 가게 되면 과연 누가 남아 있을까? 학자들뿐이다. 이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역학이다.

2003년 강남의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진화론자와 창조론자의 강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진화론자로는 지방 국립대학의 지질학과의 중견 교수가 나섰고, 창조론자로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젊은 의학자가 나섰다. 각자 강연 후 청중들의 공격적인 질문에 답함으로써 상호토론을 하는 재미있는 형식의 강연회였다.

지질학자는 OHP에 손으로 (자그마치 두 가지 색깔로) 끼적인 필름을 올려놓고 정확한 전문 용어로 설명했다. 의학자는 배경 음악이 깔린 동영상과 당시로서는 놀랄 정도로 깔끔한 파워포인트 파일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영어로 멋을 부리기는 했지만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단순히 이런 도구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질학자는 철저히 머리에만 의존하였지만, 의학자는 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가슴의 주장을 펼쳤다. 과학적인 논리로 보자면 지질학자의 완승이었지만 강연장의 분위기는 의학자가 완전히 주도했다. 머리보다 가슴에 호소하였기 때문에 더 많은 청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창조 과학 따위를 과학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창조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수백만 명이 넘는다. 과학자들은 창조 과학자들의 논리를 단숨에 격파할 수 있다고 호언한다. 사실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랜디 올슨은 그런 일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는 만만하게 공격할 만한 급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랬다면, 이미 누군가가 오래전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대중과의 의사소통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바로 자극과 충족이다. 처음엔 대중을 자극하여 흥미를 유발시켜야 하며, 그 다음엔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

랜디 올슨은 과학적 정보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 정보들을 알아듣기 쉬운 메시지로 변환할 것을 요구한다. 과학자들 스스로 대화 스타일을 다시 생각하고 더욱 많은 대중들과 의사소통할 방법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토리, 즉 이야기다. 과학자는 자연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와 그 결과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정보들을 이야기로 꾸며야 한다.

랜디 올슨은 하버드 재학 시절 스티븐 제이 굴드의 조교로 활동했다. (운도 좋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일반 대중이 순수 과학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순수 과학은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기에는 버겁다. 그런 이유로 좀 더 인간적이고 훈훈한 요소들을 과학에 접목시켜야 한다. 그래서 과학에 스토리가 필요하다. 스토리는 사람들의 가슴과 복부, 심지어 아랫도리까지 자극한 뒤 머리를 사용하고 싶은 동기를 부여한다. 그 순간이 바로 과학자들이 파고들어야 하는 적기(適期)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처음 몇 문단에 과학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야구, 미키마우스, 건축, 오페라, 미술 같은 요소를 배치하여 독자들을 자극시키고 궁금증을 유발한다. 독자들이 "흥미롭네. 그런데 그게 진화론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지?" 하고 의심을 품을 때 비로소 과학 이야기로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킨다.

<말문 트인 과학자>에는 소통에 실패한 과학자와 성공한 과학자의 다양한 예가 제시되어 있다. 이 예들은 흥미진진하다. 미국 국립과학원이 가입을 거부한 칼 세이건이 왜 가장 훌륭한 과학자의 상징이 되었는지, 정치인 앨 고어가 환경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로 어떻게 5000만 달러를 벌었는지 알려준다.

"그런 과학자는 되지 마세요(Don't be such a scientist)!"

랜디 올슨의 아내가 그에게 한 말인데 <말문 트인 과학자>의 원제다. 머리만 사용할 뿐 재미있는 이야기를 꾸며낼 줄 모르고 데이터 자체가 재미있는 것인 줄 착각하고서 연구 이야기만 반복하는 그런 과학자는 되지 말라는 뜻이다.

과학자들의 지식은 한계를 뛰어넘고 질병을 고치며 인류를 존속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단 그들의 무슨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랜디 올슨은 이렇게 말한다.

"인류의 미래는 과학자들의 지식이 아니라 그들의 의사소통 능력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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